속리산 문장대.
톨게이트를 나와 처음 만나는 물줄기가 회인천이고 들판 너머의 마을이 눌곡리다. 마을에 이르기 전, 길가에 우람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와 그 뒤편의 고풍스러운 기와채를 보곤 나그네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게 되는데, 이곳이 풍림정사다. 140년 전, 성리학의 명맥을 되살리는 일이 곧 국운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여겨 이 마을 출신 유학 박문호가 지은 서당이다. 이이, 송시열을 배향하며 공자의 가르침을 뜻하는 은행나무를 심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박문호의 후손들이 마을의 주류를 이루는 까닭에 옛집도 정갈하게 정비돼 있다. 경전을 읽는 학동들의 낭랑한 목소리조차 오래전에 그친 옛집 뜰에는 매미 소리만 가득하다.
“귀양살이 하러 왔구나”
마을에서 회인 면소재지는 지척이다. 나그네가 보은 땅에 와서 굳이 회인부터 들른 이유는 두 가지다. 보존 상태가 좋다 는 회인 인산객사를 둘러보고 시인 오장환의 생가터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초행임에도 파출소와 주유소를 지나면 잇달아 식당이며 가게들이 나타나는 면소재지의 거리 풍경은 전혀 낯설지 않다. 지나치는 사람들 또한 금세 악수를 나눠도 무방할 듯싶은 친근한 얼굴들이다. 교회가 있는 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꺾어들자 객사의 솟을대문이 나타난다.
오락가락하는 장맛비 때문인가. 정당(正堂)을 마주하고 선 마당에도 인적이 없다. 키 작은 집들이 들어선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크고 널찍한 객사(客舍) 건물은 제법 위압적이기까지 하다. 대개의 객사들이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부속 건물을 두고 앞쪽에 중문과 대문, 행랑을 배치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엔 정당과 대문만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부터 제도적으로 설치됐던 객사는 주로 지방 나들이하는 관리들의 숙소로 이용되었지만 지방 관장의 거처로 사용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곳 객사는 일제 강점기 초등학교 교사로, 또 면사무소로도 사용됐고 광복 후에는 농촌지도소로 이용됐다는 안내글이 있다. 훌쩍 떠난 시간과 함께 옛사람의 족적이 사라지고 덩그렇게 건물만 남은 곳에서 다시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도리밖에 없다.
객사를 나와 면사무소 쪽으로 가다보면 이내 시인 오장환의 생가 터와 그의 문학관을 만난다. 근래 곳곳에 복원 조성된 생가 및 기념문학관들처럼 주변이 깨끗이 정비돼 있고 건물들 또한 규모가 있다. 이 또한 좋은 시대를 만난 문학인들의 복일 테지만 주변과 어우러져 살던 본래의 모습을 잃은 채 홀로 도드라져 있는 모양새는 어색하기도 하다.
1918년 이곳 태생이니 아직 살아 있다 치면 시인은 올해 95세가 되지만, 그는 오래전 6·25전쟁 중에 세상을 떴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넷. 이 산골 작은 마을에서 자란 그가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가 휘문학교를 다녔으니 시쳇말로 개천에서 용 난 셈이다. 휘문에서 정지용에게 배움을 입고 열다섯 어린 나이에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으니 문재도 빼어났던 모양이다.
1930년대에 유행하던 모더니즘 경향을 좇으며 작품 활동을 한 그는 주로 서정적인 시를 썼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는 급격한 사상적 변모를 보였다.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 계급의식을 담은 시를 쓰는가 하면, 좌익 계통의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월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보은 읍소재지를 빠져나와 속리산으로 가다보면 멀지 않은 곳에서 산허리를 두르고 있는 산성이 눈에 잡힌다. 수년 전 복원 작업까지 마친 삼년산성이다. 삼국시대 때만 해도 보은의 지명이 삼년군이었기에 이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에 이런 이름이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튼 신라는 이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유리한 거점을 얻을 수 있었다.
성문 앞에 차를 두고 산책 삼아 성벽을 따라 걸어보는 일이 썩 괜찮다. 산길이 완만하고 주위가 고즈넉해서 더욱 그렇다. 성 쌓기에 얽힌 비극적 전설은 이곳에도 있다. 장사로 태어난 오누이가 서로 힘자랑을 하고 결국 어머니가 아들 편을 들어 누이를 죽게 한다는 이야기다. 오빠보다 먼저 성을 쌓은 누이가 엄마의 해코지로 죽임을 당한다는 이 전설에는 ‘딸아이 버리기’의 뿌리 깊은 습속이 배어 있다.
속리산 만수계곡.
열두 굽이 별세계
산성에서 10여 리를 더 가면 속리산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말티고개를 만난다. 속리산이 여느 산과 달리 별세계인 양 신비롭게 여겨지는 것도 열두 굽이 이 험준한 산길을 거치는 통과의식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 태조는 물로 조선조의 태종, 세조 임금이 이곳으로 행차했다는 얘기가 있으니 ‘왕의 고갯길’인 셈이다.
형제들까지 죽이고 옥좌에 오른 태종 임금은 평생 그 죄의식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진다. 등극 3년째 되던 해, 그는 살해된 두 아우 왕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천도불사를 속리산 법주사에서 거행했다. 그 덕일까. 마음속의 아픔과 두려움도 말끔히 가셨다고 한다. 하여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던 때에 종전까지 부르던 보령(保齡)이란 지명을 ‘보은(報恩)’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가파른 길을 높이 올랐으면 또 그 높이만큼 내려가야 마땅한데 속리산 자락으로 찾아드는 길은 그렇지 않다. 완만히 고도를 늦추는가 싶으면 이내 평지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분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특히 문장대 편 산봉들의 위용이 대단하다. 옛 시대의 비기(秘記)들이 저마다 이곳을 세상의 환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은 이유도 알 만하다.
훤칠한 산이 있으니 그 품에 큰 도량이 없을 수 없다. 법주사의 진입로라고 할 수 있는 오리숲은 철 따라 모습을 달리하면서도 늘 빼어난 자태를 자랑한다. 떡갈나무, 단풍나무, 소나무들이 숲을 이뤄 터널을 꾸민 이 길을 걷다보면 아연 먼지 세상을 떠나온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큼직한 절집은 그 숲길이 끝나는 곳에 앉아 있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절은 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쳤다. 정유재란 때는 승병들의 본거지라 하여 왜군들이 절간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본래의 법주사 가람 배치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화엄신앙축과 용화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축이 팔상전에서 직각으로 교차하게 돼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금동미륵대불이 조성되면서 그 배치가 흩어졌다고 한다. ‘동양 최대’ 운운의 대불이 처음 서던 때부터 나도 그 거대함이 못내 외람스럽고 불안스럽기까지 했는데 그 또한 파격이 전해주는 심리적 동요는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절간 고승들의 ‘뻥치기’
법주사(法住寺) 해우소(解憂所)는 하두 깊어서
일을 다 보고 골마리를 여며 매고
문을 닫고 나온 뒤에사
덤벙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동자승이 말하자
이가 다 빠진 노(老)스님 웃으며 거들기를
네 것은 유도 아니다
내 것으로 말하면
새벽에 내놓은 놈이
하루 종일 내리다가
해가 질 무렵에사 첨벙 하고
떨어진다고 한다
두 노소(老少)의 얘기를 엿듣고 있던 부처도
이들 틈에 끼어든다
네놈들 것은 유도 아니다
내 것으로 말하면
절 짓기 전에 내놓았던 것이
아직도 다 떨어지지 않고 내려만 가는데
날이 궂을 때는 번개소리도 내고
달이 밝을 때는 소쩍새로도 치는 것을
아마 보지 않았느냐?
보았제야?
- 임보 시 ‘속리산시’
절간 고승들의 ‘뻥치기’ 얘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데 그것이 시로 옮겨지니 한결 맛깔스럽기까지 하다. 더욱이 세속과 이별했다는 속리에서 이런 측간 얘기를 듣고보니 삼라만상이 죄 유쾌하고 통렬하다. 초월적 이적(異蹟)을 굳이 능글맞은 뻥치기로 전해주는데 불교 언어의 진정한 묘미가 있다. 거기에 시인이 한 수 거듦으로 해서 문학의 외연(外延)이 어디까지인지 가늠케 해준다.
산을 오를 일은 아니다. 속리의 어여쁨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왔던 길로 되돌아 나와 말티고개를 앞두고 왼편 길로 꺾어든다. 삼가저수지, 만수계곡으로 가는 길이다. 구병산의 산 그림자를 수면에 담은 산중 호수는 맑고 고요하며 둘레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예전 한때는 나 스스로 이곳 물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곤 남들이 이 비경을 알면 어쩌나 걱정을 한 적도 없지 않았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삼가천의 물줄기는 십여 리 골짝을 흘러 저수지에 드는데 무성한 숲으로 가려진 그 골짜기가 만수계곡이다. 더위를 피하려 찾아온 소풍객이 붐비는 여름철 풍경도 좋지만 분분히 낙엽 지는 가을철의 그 소슬한 경치 또한 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삼가저수지에서 터널을 빠져 나오면 서원계곡이다. 저수지에 머물렀다 나온 물이 이 계곡을 흘러내려 이윽고 보은 들판을 적신다. 골짝 중간에 상현서원이 있어서 이런 계곡 이름이 붙었다. 조선 명종 때 건립된 서원은 당초 이 고을 출신 명현 김정의 위패를 봉안했으나 뒷날 의병장 조헌과 우암 송시열도 함께 추향했다. 바위가 많은 이 계곡은 여름철 물놀이터로 인근에 소문이 나 있는데 근래 서원 아래 위편으로 고시원이 들어서면서 공부하기 좋은 장소로 알려졌다.
계곡이 끝나는 자리쯤에 선병국 가옥이 서 있다. 나무들이 우거진 드넓은 터에 궁궐 같은 고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 물이 삼각주를 이룬 곳인데 일설에 의하면 집터가 하회마을처럼 연꽃이 물에 뜬 형국의 연화부수형이어서 자손이 번성하고 장수를 누리는 명당이라고 한다.
위안과 치유의 공간
집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 세 공간으로 구획되며 안담이 그 각각의 공간들을 두르고 바깥 담이 전체를 크게 둘러싼다. 1919~1921년에 지어진 이 집은 전통적 건축기법에서 벗어나 건물의 칸이나 높이 등을 크게 하던 시기의 대표적 건물로 알려졌다. 따라서 잔디가 깔린 마당이며 붉은 벽돌로 축대를 쌓은 모습 등은 전통의 고택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것이 된다.
이 집을 지은 선병국의 부친 선정훈은 전남 고흥에서 크게 부를 쌓은 뒤 굳이 타향인 이곳에 이런 큰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는 구례의 99칸 고택 운조루를 벤치마킹하고 경복궁을 중수했던 당대 최고 목수들을 뽑아 지었다고 하니 당시 그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짐작이 간다.
마을 앞에서 만나는 큰길이 청원상주고속도로가 놓이기 이전까지만 해도 충청도 보은과 경상도 상주 땅을 잇는 유일한 도로였다. 이 길을 따라 상주 방향으로 가다가 만나는 마을 하나가 바로 마로면 관기리인데 이곳에도 참 좋은 시의 목청을 가진 시인이 살고 있다. 무심히 골목을 들어서도 쉽게 시인의 집을 찾는다. 하지만 나는 수수하고도 정감 있는 그 집 앞에서 곧 걸음을 돌린다. 예전의 안면 하나로 시인을 번거롭게 할 마음은 없다. 대신 길 건너 들판에 섬인 양 외따로 숲을 두르고 앉은 고봉정사의 숲 그늘에 앉아 시인의 시 한 편을 되뇌어본다.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병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홀합니다
이름 모를 꽃과 새들 나무와 숲들 병든 세계에 끌려 헤매다 보면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곤 한답니다
가만, 땅에 엎드려 귀 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 송찬호 시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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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고향은 위안과 치유의 공간이 될 수 있을 듯싶다. 단절의 땅에 숨어 사는 탓에 이편의 소소한 것들 모두가 아름답고 황홀하다. 하여 바깥세상에서 실패하고 돌아오는 이들의 그 외로운 발소리도 들을 수 있다. 문득 그 보은 땅에서 내가 나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있는 세상은 ‘당신들의 세상’인가? 어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