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빠른 전령이자 제우스의 해결사였던 헤르메스
헤라의 눈 감지 않는 괴물 아르고스도 잠재워
아르고스, 현대에는 감시의 상징으로 거듭나
헤르메스의 지팡이는 ‘뱀 두 마리’, 한 마리는 의술의 신
두 마리 뱀 교차한 모습, 미 육군 의무대 실수로 상징 삼아

독일의 화가 아브라함 블루마르트(1564~1651)가 1592년에 그린 ‘헤르메스와 아르고스, 그리고 이오’. 위키피디아

2018년까지 쓰였던 네이버의 로고. 모자에 날개가 달려 있다. 네이버 홈페이지
세 군데 날개 달고 소식 전달하던 전령 헤르메스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명령을 아주 빨리 전달해야 했기에 하늘을 날거나 잽싸게 움직인다. 날개는 두건, 신발 뒤축, 지팡이 위쪽 등 세 군데에 있다. 헤르메스의 두건은 시대에 따라 투구와 모자로 바뀌기도 한다. 헤르메스의 세 군데 날개는 헬리콥터의 구조를 빼닮았다. 헬리콥터의 방향과 균형을 잡기 위해 사용하는 꼬리 날개는 헤르메스의 지팡이 날개, 헬리콥터가 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위쪽 날개는 헤르메스가 쓴 두건의 날개, 헬리콥터가 날기 전 활주로를 달려 추진력을 얻는 바퀴는 바로 헤르메스가 신은 신발의 날개에 해당한다.헤르메스의 날개는 여러 업종에서 로고로 사용할 수 있는 매력적인 소재다. 현대에 로고로 부활한 헤르메스의 날개 세 개만 살펴보자. 첫째는 이제는 단종된 미국 포드 자동차의 고급 자동차 브랜드 ‘머큐리’가 있다. 머큐리는 헤르메스의 영어식 표현이다. 브랜드 이름에 걸맞게 로고는 머큐리의 날개를 세 줄의 꺾인 선으로 표현했다. 날개가 세 줄인 것을 보면 헤르메스가 갖고 있었던 세 군데 날개를 형상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 스포츠화 멀티숍 ‘애슬릿 풋’의 로고에도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발이 그려져 있다. 이 로고는 날개 달린 신발이 아니라 아예 발 뒤쪽에 날개가 돋아 있다. 이 신발을 신으면 나는 듯이 걷거나 달릴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포털사이트 네이버도 2018년까지 헤르메스의 날개를 로고로 사용했다. 네이버의 과거 로고는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모자였다. 네이버는 그만큼 다른 포털사이트보다 더 빠르게 정보를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헤르메스가 전령의 상징으로 들고 다닌 지팡이는 ‘케리케이온’이라고 불렀고, 로마에서는 ‘카두케우스’라고 했다. 케리케이온 날개 밑에는 뱀 두 마리가 머리를 마주한 채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몸통 부분을 서로 교차하며 지팡이를 휘감고 있다. 이 모양에도 사연이 있다. 뱀 두 마리가 그런 모습으로 지팡이를 휘감게 된 이유는 그가 전령의 신뿐 아니라 또한 언변의 신으로서 분쟁과 갈등의 해결사였음을 보여준다.
헤르메스는 어느 날 숲속을 가다가 두 마리 뱀이 싸우는 걸 보고 힘들게 뜯어말린 뒤 예전에 아폴론으로부터 선물 받은 황금 지팡이를 옆에 놓고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녀석들은 그 지팡이를 친친 감더니 이내 굳어버렸다. 지팡이에 뱀이 감겨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혼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는 뱀이 한 마리만 감겨 있다.
헤르메스의 피리 소리에 잠든 아르고스
제우스는 헤르메스의 유려한 언변과 협상 능력을 총애해 지상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늘 그를 급파했다. 헤라의 질투로 인해 암소로 변신해 고통을 당하고 있던 여사제 이오를 구출하기 위해서도 그를 보냈고,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벌로 카우카소스산 절벽에 사슬로 묶여 있던 프로메테우스와 협상을 벌일 때도 그를 보냈으며, 요정 칼립소가 트로이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를 7년 동안이나 붙들고 있을 때도 그를 보내 그녀를 설득했고, 트로이전쟁의 생존자 아이네이아스가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사랑에 빠져 카르타고에 정착하려고 했을 때도 그를 보내 만류했다. 그중 이오의 사연을 알아보자.이오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르고스의 초대 왕 이나코스와 강의 요정 멜리아의 딸이자 아르고스의 수호신 헤라 신전의 여사제였다. 이나코스는 또한 아르고스가 속해 있는 아르골리스 지방의 이나코스강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신들의 왕 제우스는 한때 헤라 신전에 들렀다가 여사제 이오의 미모에 반해 사랑에 빠진 뒤로 자주 그녀와 함께 지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헤라는 제우스가 이오와 함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 현장을 급습했다. 하지만 제우스는 헤라가 도착하기 전 얼른 이오를 암소로 둔갑시킨 다음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어떻게 암소와 사랑을 할 수 있겠냐는 투였다. 헤라는 사태를 짐작하고 제우스에게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 암소를 선물로 달라고 했다. 심심할 때 놀이 친구로 삼겠다는 것이다.
제우스는 헤라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암소를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헤라는 암소를 끌고 가서 우연히 앞서 언급한 아르고스라는 지명과 이름이 같은 자신의 충복 아르고스에게 감시하도록 했다. 아르고스는 머리에 눈이 백 개나 달린 괴물이었다. 그중 하나는 절대로 눈을 감지 않아 감시병으로는 제격이었다. 제우스는 이오가 안타까워 빼내 올 궁리를 하다가 전령의 신 헤르메스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헤르메스는 나그네로 변신한 채 아르고스에게 다가가 피곤을 풀어주겠다며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세계보건기구 로고의 지팡이
헤르메스의 절묘한 피리 소리를 듣자 아르고스의 눈이 그 선율에 마비돼 하나씩 감기기 시작했다. 이어 절대로 감기지 않는다던 마지막 눈마저도 마술에 걸린 듯 스르르 눈꺼풀을 내리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헤르메스는 숨겨놓은 칼을 뽑아 아르고스의 목을 쳐 이오를 구출했다. 우리나라 블랙박스 브랜드 중에 ‘아르고스’가 있다. 블랙박스가 현대판 아르고스가 아니던가. 아르고스는 ‘판옵테스’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판옵테스는 ‘모든 것을 보는 자’라는 뜻이다.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교도소 ‘판옵티콘’도 판옵테스의 이름을 땄다. 판옵티콘은 원통형의 건물로 바깥쪽에는 감옥이 설치돼 있고, 중앙에는 감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감시동이 있다.세계보건기구(WHO) 로고에는 뱀 한 마리가 감겨 있는 막대기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 신화에서 ‘의술의 신’이었던 아스클레피오스가 지닌 지팡이를 그려 넣은 것이다. 그런데 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 뱀이 감겨 있는 것일까.
뱀은 고대 문화권에서 의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을 녀석이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한 까닭이다.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영웅 길가메시가 어렵사리 구한 불로초를 뱀이 훔쳐 먹어버린다. 성서에서도 모세가 만든 청동 뱀 지팡이는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전령신 헤르메스의 지팡이와는 다르다. 헤르메스의 지팡이에는 주지하다시피 뱀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가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마주 보고 감겨 있고, 게다가 독수리 날개까지 달려 있다. 헤르메스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혼동해 ‘미 육군 의무대’처럼 로고를 만들 때 실수로 헤르메스 지팡이를 활용한 경우도 있다.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 로고에도 예전에는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들어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로 바뀌어 있다. ‘대한의사협회’의 영어 이니셜 ‘KMA’로 만든 로고의 ‘M’에도 뱀 한 마리가 감겨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로고도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태양신 아폴론과 라피타이족의 왕 플레기아스의 딸 코로니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폴론은 코로니스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폴론과 교제하는 중에도 틈만 나면 전 애인 이스키스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폴론의 부하였던 까마귀가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다가 우연히 그들이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아폴론에게 날아가 고해바쳤다.
분노한 아폴론은 나쁜 소식을 알려준 까마귀를 불태워 원래는 하얗던 털을 검게 만들어버렸고, 코로니스는 활로 쏘아 죽였다. 이어 화장하기 위해 화장단에 올려놓았던 코로니스의 배가 유난히 불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배를 가른 후 아이를 하나 끄집어냈는데 이 아이가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였다. 아폴론은 이 젖먹이를 당시 영웅 조련사로 명성이 높았던 케이론 부부에게 맡겼다. 케이론은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족으로 의술, 음악, 검술, 창술 등 모르는 게 없는 현자였다.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세계보건기구(WHO) 건물. 오른쪽 건물에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본뜬로고가 있다. 위키피디아
의학 단어가 된 의학의 신 딸들
아스클레피오스는 케이론에게 의술을 배워 명의로 명성을 날렸다. 그의 신기한 의술 덕택으로 죽는 인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혼령들의 출입이 뜸해지자 지하 세계는 황폐해졌다. 지하 세계의 왕 하데스는 신들의 왕 제우스에게 항의했다. 제우스는 번개를 날려 아스클레피오스를 죽이고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았다.아폴론은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듣고 분노했다. 그렇다고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대들 수도 없었다. 분풀이로 제우스의 번개를 만든 외눈박이 키클로페스 삼형제를 활로 쏴 죽였다. 분노한 제우스는 그에게 1년간 신의 지위를 박탈하고 인간의 종노릇을 하라며 인간 세상으로 추방했다. 아폴론은 1년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뒤 제우스에게 간청해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를 의술을 관장하는 신으로 만들어주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에피오네와의 사이에 5녀 3남을 두었다. 다섯 명의 딸 중 히기에이아는 건강의 여신, 파나케이아는 치료의 여신, 아케소는 치료 과정의 여신, 이아소는 회복의 여신이었다. ‘만병통치약’이라는 뜻의 영어 ‘Panacea’는 ‘파나케이아’에서, ‘위생’이라는 뜻의 ‘Hygiene’은 ‘히기에이아’에서 유래한 것이다. 세 아들 중 외과 전문이었던 마카온과 내과 전문이었던 포달레이리오는 트로이전쟁에 그리스 연합군 측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