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아 만평 ‘안마봉’은 과거 ‘신동아’와 ‘동아일보’에 실린 만평(동아로 보는 ‘카툰 100년’)에서 영감을 얻어 같은 그림체로 오늘날의 세태를 풍자한 만평입니다.

ⓒ정승혜
지난해 박사 학위 취득자 10명 중 3명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30세 미만 ‘청년 박사’ 절반은 무직자다. 고용 한파로 박사 학위를 받아도 취업에 애를 먹고 있다.
통계청의 ‘2025년 2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 1월 청년층(15~29세) 고용률은 전년 동월 대비 1.7%포인트 하락해 44.3%를 기록했다. 이 연령대의 고용률은 2021년 1월(-2.9%포인트)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청년층 실업률은 7.0%를 기록하며 2023년 3월(7.1%) 이후 23개월 만에 최대치를 보였다. 그나마 삼성그룹 공채에 이어 LG전자, 현대차, 한화 등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순차적으로 신입 사원 채용에 나서고 있어 취업시장에 온기를 더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이러한 청년들의 어려움을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간부 자녀의 면접 점수를 조작하는 등의 방식으로 부정 채용을 하다가 감사원에 적발돼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엄정하고 공정해야 할 선관위가 ‘아빠 찬스’를 남발하며 ‘가족 회사’가 됐다니 국민에게는 분노를 넘어 허탈감을 주고 있다. 그 꼴이 가관이다.
한 명을 뽑는다고 해도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채용시장에 도전하는 청년들은 오늘도 이력서를 들고 이리저리 뛰고 있다. 그들에게 ‘가족 회사’ 선관위의 ‘아빠 찬스’야말로 칼만 안 들었지 청년들에게는 일자리를 뺏는 강도가 아닐까.

1933년
대졸자도 ‘취업지옥’…‘아빠 찬스’로 유학길
취직 전선에 대이상오래전부터 거리에 흐르던 말이요, 공중에 나르던 말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전문(연희전문)을 마쳐도 도리어 보교(보성전문) 출신도 취업의 복을 받지 못한다. 큼직한 종이에다 졸업한 학교이름을 쓰고 바구니 하나를 차고 이력서, 성적표, 상장 등을 가지고 다니게 될 세상이 머지않아 닥칠 것이다.
조선 청년들의 지식 연마가 두려웠을까. 일제강점기 내내 일제는 조선 내 교육기관 설립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상급학교가 턱없이 부족하니 학업을 지속하려는 조선인들은 중·고교 입시뿐 아니라 초등학교 입학부터 입시지옥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뚜드려도 안 열리는 입학난의 지옥문(1928년 3월 12일), ‘고보 수험생…시험지옥 완화책’(1927년 12월 17일) 등 여러 기사를 통해 이 문제를 고발했다.
그나마 ‘아빠 찬스’를 쓸 수 있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학생들은 일본 등으로 ‘유학’을 떠나는 차선을 택할 수 있었다. 1920년 1150명이던 조선 유학생 수는 1931년 5062명으로 늘었고, 1935년에는 7292명에 이른다(박경식 편, ‘재일 조선인 관계자료집’-사회운동의 양상, 삼일서재, 1974). 1930년대 근대 학문과 지식을 배운 유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한일합방 이후 태어난 세대였다. 그들이 가진 민족의식과 계몽의식은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 와중에 닥친 세계 경제대공황은 최고의 대우를 받던 동경제대 일본인 졸업생들에게도 ‘취업지옥’의 문을 열어젖혔다. 조선 팔도에서 한 해 50명 정도 입학할 수 있었던 경성제대 예과에 낙방한 조선인들은 안정적인 철밥통 직장을 얻을 수 있는 고등문관시험(高文)을 목표로 일본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경우도 법학이나 행정학을 전공한 유학생이나 가능했다. 인문학을 전공한 유학생은 귀국해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무전취식하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신동아’ 1933년 6월호는 이러한 사회현상을 만평으로 고발하고 있다.
그로부터 11개월 뒤인 1934년 5월호부터 7월호에 실린 채만식의 단편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에서도 당시 청년지식인들의 높은 실업률은 잘 나타난다. 소설은 완성됐지만 팔리지 않는 기성품(Ready-made)에 빗대 학업을 마쳤어도 취직이 되지 않는 주인공의 신세를 비유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