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졸정원은 쑤저우 최대의 정원이다. 민간 정원이라 그리 화려하고 웅장하지 않은 대신 아기자기한
중국엔 예로부터 ‘남선북마(南船北馬)’란 말이 있었다. 강과 호수가 많은 남방에선 배가 주된 교통수단이었고, 메마른 북방에선 말이 그 구실을 했다. 남방에는 무논이 넓어 물고기(魚)와 쌀이 주식 노릇을 했다면 밭과 초지가 대부분인 북방에선 고기(肉)와 만두를 주로 먹었다.
이러한 남북의 물질적, 풍토상 차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지평선을 바라보며 자라서인지 남방인들은 수평적 인식구조를 가진 데 비해 산이 많은 북방의 사람들은 수직적 인식구조를 가졌다. 또한 남방은 모계사회로 발전했고, 북방은 부계 중심 사회를 줄곧 유지해왔다.
옷을 입을 때에도 남방인들은 좌임(左姙·왼쪽으로 채움)했고, 왼쪽을 상석으로 삼았다. 우리도 좌의정을 우의정 위에 뒀으니 남방 문화적 요소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북방인들은 우임하고, 오른쪽을 중시했다. 북방의 원나라가 우임을 하고 오른쪽을 상석으로 삼는 것을 남쪽의 송나라는 미개한 짓이라며 혹평한 기록도 있다.
차이는 이뿐만 아니다. 남방에선 홀수를 선호했다. “도(道)는 일(一)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고, 이는 삼(三)을 낳으며, 삼은 만물을 낳는다”는 노자의 ‘도덕경’은 남방 문화의 소산이고, 태극-사상-팔괘-64괘 등 짝수 구조를 갖는 ‘주역’은 북방 문화의 소산이다. 따라서 남방인들의 생각의 바탕에는 ‘무위(無爲)’가, 북방인들에겐 ‘유위(有爲)’가 깔려 있다. 처세에서도 북방인들은 직선적이지만 남방인들은 곡선적이다.
한마디로 ‘중국’ ‘중국인’이라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도저히 하나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남방과 북방은 풍토는 물론 물질적, 정신적 구조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차이를 길 위에서 느껴보는 것이야말로 중국 여행이 주는 묘미다.
‘上有天堂 下有蘇杭’
상하이를 떠난 버스가 1시간 반(90km)을 달려 멈춘 곳은 곡창 중의 곡창이자 13세기 후반에 이곳을 다녀간 베니스 출신의 마르코 폴로가 ‘동양의 베니스’라 부른 쑤저우(蘇州)였다. 베니스와 같이 도시 구석구석을 흐르는 운하가 주변의 가옥이며 풍경과 잘 어울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연출하기에 그렇게 칭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막 허물고 있는 길가의 가옥들이었다. 한두 집도 아니고 시 전체가 그런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낡은 집을 헐어 길을 넓히고 새 집을 짓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시내를 한바퀴 돌고 난 뒤에 안 일이지만 쑤저우에는 ‘가든’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었다. 가든은 가원(家園), 화원(花園)의 번역어로 고급 아파트를 일컫는 말이다.
가든은 높지 않아 대개 3∼5층이고, 황토색 기와를 얹은 북방과는 달리 검은 기와를 얹고 벽에는 밝은 회색을 칠했으며, 중국 전통 창호를 본뜬 창을 달았다. 한 가지 틀로 뽑아낸 듯한 우리네 아파트와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특히 시 남쪽에 위치한 쑤저우대학 주변에 대규모로 들어선 가든은 정말 그림 같았다.
쑤저우는 뭐니뭐니해도 물의 도시다. 이곳 사람들은 시내를 뚫고 흐르는 물로 얼굴을 씻고 쌀과 야채를 헹구며 그릇을 닦는다. 그 위에 배를 띄우기도 한다. 이토록 물이 많아서일까. 예로부터 중국에선 쑤저우 미인을 최고로 쳤다. 긴 다리, 희고 맑은 얼굴, 쌍꺼풀 진 눈, 약간 오뚝한 콧날, 작은 입과 긴 목을 가진 데다, 글을 잘 짓고 썼으며 소리(唱)까지 잘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운하가 처음 들어선 것은 기원전 6세기인 오(吳)나라 시절. 질 좋은 비단과 면을 생산하는 오나라는 양쯔강 하류의 경제 중심지였는데, 오의 왕 합려가 재상 오자서에게 물의 도시인 이곳에 운하를 파도록 명했다. 지금은 정화되지 않은 생활용수가 운하로 그냥 흘러들어 다소 역한 냄새를 풍기는데도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물에 빨래도 하고 몸도 씻는다. 운하는 쑤저우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