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세계패권전략은 실제로 존재하며,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부시 행정부도 그런 의도를 감추지 않는다. 기존 세계질서의 한 축이었던 유럽도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모든 정책이 우리 머리 위에서 결정되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요슈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거나 “제국주의 성향으로 정책을 몰고가는 미국인들의 국수주의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보다 훨씬 더하다”(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는 볼멘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행진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따지고 보면 이같은 변화는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시작됐다. 부시 대통령은 국제질서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기존 세계질서 속의 국제기구, 동맹관계, 국제조약 등 모든 것에 의문부호가 달렸다. 그는 대신 새로운 답을 하나씩 제시해나가고 있다. 결국 그가 던져놓은 메시지는 미국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미 외교정책의 전통적인 근간이었던 국제주의는 순식간에 일방주의로 대체되었고, 지난 50년간 미 외교의 절대축 가운데 하나였던 대서양 동맹관계도 뿌리째 흔들렸다. 어느새 펜타곤(미국 국방부)은 ‘세계의 구세주’를 자처하고 있다.
유럽은 죽을 맛이다. ‘늙은 유럽(Old Europe)’ 소리를 듣고도 성만 낼 뿐 주먹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다. 제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오늘날의 유럽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모델’을 자처하지만, 다른 나라의 눈에 비친 유럽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반면 ‘슈퍼 파워’를 자처하는 미국은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군사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세계를 지배한다”
보스턴대학의 국제관계전공 교수인 앤드루 바세비치는 ‘워싱턴 포스트’ 4월20일자에 기고한 ‘우리는 힘을 가졌다. 자, 어떻게 그 힘을 쓸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사실을 실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미국은 이제 제국의 힘을 갖게 되었다. 세계는 이제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된 것이다.” 바세비치 교수는 미국인들이 ‘제국’이라는 말에 별로 호감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이 제국의 힘을 갖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서, 이제는 새로이 부여된 과제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1년 9월11일 이후 부시 행정부는 대테러 전쟁이라는 구실 아래 제국의 과제를 추진해오면서 다양한 기술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제 9·11의 기억은 사그러들고 있다. 행정부의 (제국 지배) 의도를 직설적으로 말할 때가 온 것이다. 정책 입안자들이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팍스 아메리카나 문서에 서명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치고, 이제는 미국의 정책, 특히 군사정책이 어떻게 변해야 할지를 검토해야 한다.”
바세비치 교수는 새로운 ‘제국의 지배’를 위한 다섯 가지 대비책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지역 우선순위의 재배정이다. 군사력의 효과적인 활용원칙에 따라 해외주둔 미군을 재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점적인 재배치 지역은 단연 유럽과 한반도. 우선 유럽의 경우, 나토를 확대하는 대신 대서양 동맹체제를 파기함으로써 우선순위에서 빼내야 한다. 물론 유럽의 군사력 팽창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한반도에서는,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평양과의 대치상태가 궁극적으로 끝나고 나면 남한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제국시대’의 지휘부 펜타곤
이런 변화는 우선 ‘컴 홈, 아메리카(Come home, America·‘Go home, America’에 빗대어 쓴 표현)’라는 시대의 요구에 따른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절박한 우선순위가 이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미국이 당장 직면하게 될 문제지역은 아프리카에서부터 인도네시아, 필리핀 남부 등에 퍼져 있는 이슬람 권역이다. 유럽이나 한국은 제 힘으로 꾸려나갈 수 있는 지역이므로 미군의 해외주둔 우선순위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방정책의 새로운 방향설정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지금까지 펜타곤 내에서 논의되어온 국방정책 개편안의 핵심은 정보시대의 첨단기술과 새로운 조직원리를 어떻게 21세기 전쟁에 적용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제는 무제한적인 미 군사자원을 새로 확대된 임무에 맞춰 어떻게 적재적소에 활용할 것인지로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