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시간주 워싱턴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후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는 존 케리 상원위원.
존 F. 케네디처럼 그의 이니셜도 JF K다. 그는 지금 자신을 ‘돌아온(Comeb ack) 케리’라고 부른다. 메콩강 삼각주에서 순찰정 근무를 했던 베트남 참전 용사로서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케리고, 한때 하워드 딘 바람에 침몰할 뻔했다가 예비선거에서 화려하게 되살아난 케리다.
그는 다재다능하다. 사냥을 즐기고 쌍발 세스나 자가용 비행기를 손수 운전하며, 윈드서핑과 아이스하키 실력은 수준급이다. 지금은 손톱이 부러져나가도록 스페인 고전 기타 음악을 배우고 있다. 재기 넘치는 임기응변도 인기를 올리는 데 한몫 거든다. 그의 선거운동을 돕고 있는 한 전직 상원의원이 “공화당은 지금 2억5000만달러나 되는 선거 자금을 가지고 있다. 살벌한 일 아닌가?”라고 걱정하자 케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걸 가져오면 되지 않나.”
존 케리는 매사추세츠의 명문가 출신이다. 그러나 부유하지는 않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중이던 1943년 콜로라도 주 덴버의 군 병원에서 태어났다. 2차 대전에 참전, 미 육군 비행단에서 DC-3기를 몰던 아버지 리처드 케리가 결핵으로 덴버의 군 병원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케리 가족은 고향인 매사추세츠로 돌아왔다.
케리는 예일대에 들어갔다. 동창들은 그를 야망이 큰 청년으로 기억한다. 그는 활동적이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1962년엔 에드워드 케네디의 상원 선거에 자원 봉사자로 참가해 자신의 폴크스바겐 비틀을 타고 다니며 “케네디를 상원으로!”를 외쳤다. 반 급우들이 케리를 JFK라고 놀려댔던 것도 예일 시절의 이야기이다.
케리는 예일의 주류는 아니었다. 예일의 주류는 명문가에 부유한 집안 출신들이다. 그는 여름방학 때마다 식품점에서 일을 했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백과사전을 팔아야 했다. 졸업 후 그는 해군에 들어갔고 위관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메콩강 삼각주에서 순찰정을 탔다.
1969년 2월28일의 참전 일화 하나. 케리가 지휘하는 순찰정이 적의 로켓포 공격을 받았다. 그는 부하들에게 적이 숨어 있는 강가 숲에 순찰정을 대라고 명령했다. 육지에 올라섰을 때 로켓포를 든 적군 한 명이 3m 떨어진 거리에서 케리 부대원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적군은 로켓포를 발사하지 않고 망설이다가 돌아서 도망쳤다. 케리는 그를 뒤쫓아가 사살했다. 이 일로 그는 은성무공훈장을 탔다.
베트남전이 끝났을 때 26세 청년 장교 케리의 목에는 은성무공훈장 등 다섯 개의 메달이 걸렸다. 하지만 전쟁에서 친구를 잃은 그가 조국에 대해 느낀 것은 배신감이었다. 그는 그 전쟁이 ‘잘못된 전쟁’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고,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후 반전 운동가로 변신한다. 1971년 그의 나이 28세가 되던 해 그는 미 베트남참전용사회의 공동 창립자로 일하다가 반전 베트남참전용사회의 대변인을 맡았고, 같은 해 4월에는 상원 외교위원회에 참석해 증언을 한다.
“한 청년더러 실수로 치르는 전쟁에 나가 마지막으로 죽는 사람이 되라고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청문회에 참석했던 상원의원들은 모두 놀라 이 청년을 주목했다. 케리는 영웅이 됐다.
그는 1972년 ‘평화 후보’라는 구호를 내걸고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했다. 그의 첫 선거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뛰어다녔다. 선거운동을 돕던 요원이 그를 유세장에 데려가기 위해 집에 들렀을 때 케리는 샤워를 하다 말고 벌거벗은 채 자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높이 더 높이, 빨리 더 빨리
1982년 그는 다시 매사추세츠 주 부지사에 도전했다. 성공이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84년 41세에 초선 상원의원이 된다. 워싱턴에 입성한 그는 베트남에서 돌아왔을 때의 기질을 또 한번 발휘한다. 초선 상원의원으로서 입법에만 눈길을 돌리기보다는 행정부의 부패 문제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는 4선의 상원의원이 됐다.
2000년 케리는 대통령을 꿈꿨다. 하지만 앨 고어의 러닝메이트 최종 주자로 거명되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대통령후보는 아직은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