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난 사람’‘외로운 늑대’등의 별명을 가진 고이즈미 총리가 제1당인 자민당 총재에 재선, ‘장수 총리’의 길을 열었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고,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하고, 건설보다는 파괴에 능한 고이즈미 인기 비결의 허와 실을 살펴본다.
한 달 전에 비해 무려 11% 포인트 상승한 65%(‘마이니치신문’ 9월22~ 23일 조사)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9월 북한을 전격 방문해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역사적 정상회담을 갖고 향후 수교 협상을 적극 벌이기로 한 직후 지지도에 육박하는 것이다.
2001년 4월 총리에 올랐을 때 지지율 85%(마이니치신문)에는 못미치나 당분간 자민당 내는 물론 야당 정치인 가운데서도 그에 필적할 만한 상대는 없을 것으로 보여 ‘장수 총리’를 예고했다.
실체 없는 개혁
그렇다면 그의 승승장구는 ‘변화와 개혁’을 앞세우며 총리에 오른 뒤 거둔 성과에 대한 갈채일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번 총재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 일부 소장파 의원들이 ‘진정한 개혁’ 후보를 독자 추대하려 한 일은 고이즈미의 개혁이 ‘사이비 개혁’이었음을 시사한다.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후보 논의가 무성하던 9월1일 새벽. 중의원 재선의 당 청년국장 다나하시 야스후미(棚橋泰文·40) 의원은 역시 재선으로 친밀한 한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네, TV토론 봤는가?”
“봤네만.”
전날 밤 한 민간 TV방송 프로그램에 고이즈미 총리에 도전할 입후보 예정자 3명이 등장해 토론을 벌인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다나하시 의원은 말을 이었다.
“이대로 두면 큰일일세. 3명의 후보로는 안 돼. 다른 대항마를 내세우지 않으면 고이즈미 재선은 틀림없어. 유권자들은 ‘자민당 체질 불변’이라고 판정할 걸세. 다음 총선이 걱정이야.”
고이즈미 총재를 포함해 3명의 다른 후보는 모두 60대였다. 활기를 잃은 원로정치를 타파하기 위해 중의원 비례선거(전국구 의원) 후보자 연령을 73세로 제한하자는 안이 추진되고 있지만 아직 완전하게 실시되지는 않은 상태다. 자민당이 진정한 개혁을 하려면 고이즈미를 꺾을 참신한 후보가 나서서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다음날 자민당 본부 한 방에 ‘동지’ 7명이 모였다. 목표는 자민당 총재 선거 입후보에 필요한 추천의원 21명을 확보하는 것. 누구를 후보로 할 것인지는 일단 동조 의원 21명이 확보되면 다수결로 정하기로 했다. 그때까지는 언론에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닷새 뒤인 9월7일 밤 10시를 넘긴 시각. 도쿄역 부근 한 호텔에 계파는 다르지만 개혁에 동조하는 젊은 자민당 소속 의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각기 추천의원으로 확보한 사람을 모아보니 19명, 딱 2명이 모자랐다. 해외 출장중인 한 참의원은 팩스를 통해 이들을 지지한다는 뜻을 표명하기도 했다. 357명의 자민당 소속 의원 가운데 2명만 더 동의하면 총재 선거 후보를 추천할 수 있었다.
이들은 두 명의 의원을 확보하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한 명이 동의했다. 마지막 한 명. 하지만 마감 시한인 다음날 오전 11시 후보 등록 개시 때까지 끝내 한 명의 추천을 얻어내지 못했다. 고이즈미 총리측의 방해공작도 있었다. 결국 젊은 의원들의 독자후보옹립이란 ‘쿠데타’는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자민당 총재 재선 및 총리 재선임 후 고이즈미 총리의 향후 집권 기간에 관한 여론조사가 실시됐다. 응답자의 52%가 ‘자민당 총재 임기 3년 동안 계속 집권’ 의견을 보였다. 이렇게 되면 고이즈미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 번째 장수 총리가 된다.
사람들이 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서는 그의 등장으로 ‘정치판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이같은 ‘고이즈미 인기’는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일까.
이번 개각 내용을 들여다보자.
스스로 파벌 타파를 외쳐왔지만 이는 ‘타 파벌 소속 의원이라도 나를 지지해달라’는 뜻이지 ‘자신이 속하는 파벌의 이탈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를 증명하듯 총재 선거 때 그를 지지해준 파벌에 대한 논공행상과 의원들의 장관 자리 독차지가 이번 개각의 특징이었다. 새로 각료에 입각한 9명 전원이 국회의원이다. 자민당의 이같은 구태를 일반의 시야에서 감추기 위해 연출한 것이 ‘젊은 내각’ ‘세대 교체’였다.
새로 내각을 짜면서 고이즈미는 자민당내 관행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바로 ‘입각은 당선 5회 이상’이란 불문율을 깬 것이었다. 그는 이전 내각에서 행정개혁상이었던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伸晃·46)를 요직인 국토교통상으로 옮겨주었다. 4선인 그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71) 도쿄 도지사의 장남이다. 과학기술담당상 겸 오키나와 북방 담당상에는 3선 의원인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를 앉혔다. 장관 평균 연령은 59.4세.
전통을 중시해온 일본 정계에서는 비상식적인 인사였지만 일반 유권자에게 자민당의 변화하는 모습, 정치권 세대 교체 인상을 심어주는 확실한 인사였다. 비록 불발로 끝났지만 젊은 의원들의 ‘쿠데타’ 동향도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거의 동시에 단행한 자민당 주요 당직 인사에서도 그는 간사장에 3선의원인 아베 신조(安倍晋三·49) 관방부장관을 임명했다. 그의 지휘를 받는 간사장 대리에는 70대 의원이 배치됐다.
2001년 내각 발족시 고이즈미 총리는 여성 기용, 민간인 기용이란 방법으로 관심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여성 장관 4명, 민간인 3명을 등용한 것만으로도 으레 원로 의원이 장관 자리를 독차지해온 일본 정계의 전통적인 그림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기에 일본인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이번 개각에서는 여성 장관 3명, 민간인 2명으로 각기 1명이 줄고 그 자리에 의원이 다시 기용됐다. 2년여 전 대대적으로 내걸었던 개혁내각의 색채가 옅어졌지만 이에 주목하는 것은 소수에 지나지 않고 여전히 일본인들은 고이즈미의 ‘극장 정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민당은 바뀌었다. 회사도 마찬가지겠지만 인사는 최종적으로 사장이 하는 것 아니냐.”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8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했다. 당내 파벌로는 소수파에 속했지만 선거에 참여한 일반 유권자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60%에 가까운 지지를 획득했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소속 의원 357표, 지역 당원 300표, 합계 657표 가운데 다수결로 결정한다. 따라서 당내 소수파라도 지역 당원이 표를 몰아주면 당선 가능성이 있다. 당내에서 인기가 없고 소수 파벌의 지지를 받더라도 국민투표적인 요소가 가미된 현행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고이즈미처럼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는 ‘포퓰리스트’
고이즈미 총리가 총재 재선과 동시에 재임 총리로 개각을 단행하면서 자민당 내 관행을 무시한 인사를 하자 당내 일부 비판 세력이 설왕설래했다. 이에 고이즈미 총리는 자신을 ‘사장’에 비유해 인사권 행사는 총리 고유 권한임을 강조했다.
당내에 불만세력이 있기는 해도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이처럼 자신 있는 태도를 보이는 고이즈미 총리. 변화를 갈망하는 유권자의 지지를 업고 총리에 오른 그는 포퓰리스트로 불려왔다. 미국의 조지프 매카시나 로널드 레이건처럼,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대중적인 인기몰이에 성공해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파벌 없는 정치인, 어딘지 기존 정치인과 다른 참신한 행태, 서민적 언어 등 ‘포퓰리스트’로서의 이미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고이즈미=반골, 변화와 개혁, 서민을 아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이가 많다. 물론 일본의 유권자들 가운데 일부는 그가 총리로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웬만큼 그의 실상을 파악했다. 그래서 실체 없는 포퓰리스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총리 1기, 2년3개월여 동안 고이즈미 총리의 실적을 따져보면 그가 주창해온 개혁이 구호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 도사’ 고이즈미는 총리의 일일 동정을 보도하는 일본 언론매체의 관행을 정치도구화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소비세율 인상은 어렵다. 폭넓게 검토하겠다”고만 했다. 연금제도 개혁을 위한 각종 모임만 만들었을 뿐 제도 개선도 없었고 저항이 심한 소비세율 인상은 아예 검토 대상이 되지도 못했다. 그 결과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철저한 행정개혁도 마찬가지. 대표적인 것이 우정 업무 민영화다. 2007년 4월 민영화를 내건 고이즈미 총리는 2002년 9월 3개의 시안을 만들었지만 무려 1년 동안 논의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다. 물론 핑곗거리는 있다. 저항세력 때문에 개혁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산하기관을 독립법인화하는 문제도 형식은 그럴듯하나 기관장은 대부분 ‘낙하산 인사’로 채워졌다.
도로공단 개혁도 흐지부지한 상태로 몇 년을 끌고 있다.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말조차 오락가락한다.
경기회복대책도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주가는 2001년 4월 총리 취임 후 2년 만에 반 토막으로 떨어졌다. 현재 상당히 회복되긴 했으나 어느 경제분석가도 이를 경기대책의 성공에 따른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하락 폭이 큰 데 대한 일시적 반등 현상 정도로만 이해한다. 2001년 마이너스를 기록한 경제성장률이 지난해 플러스로 돌아섰다고 하지만 경기 회복에 대한 일반의 감각과는 정반대다.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9·11 이후 대미 추종외교 노선을 강화한 것 외에는 성과가 거의 없다. 지난해 북일정상회담 이후 수교 교섭이 제대로 진행됐다면 전후 일본 외교사에 획기적인 성과를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 납북자 처리 과정에 미숙함을 드러내 수교 교섭은 완전히 중단됐다. 오히려 북일 정상회담 이전보다 더욱 상황이 나빠진 측면도 있다.
이는 납북자 5명이 일시 귀국한 이후 여론의 눈치를 보며 정책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때문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과와 피랍 일본인 5명의 일시 귀국 때까지만 해도 일이 잘 풀려가는 듯했다. 그러나 이들을 10~15일간 체류한 뒤 북한에 다시 보낸다는 일본 외무성과 북한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들을 북한에 보내면 인질이 될 것이라는 여론이 비등하자 고이즈미 정부가 ‘영구귀국’을 선언하고 북한에 잔류 가족 송환을 요구했기 때문.
성과 없는 외교
이후 북한과의 수교 교섭에서 일본이 가족 송환 선결을 요구하자 북한은 교섭을 중단했다. 일본 외교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를 범한 것이다.
미국에서 발생한 9·11 테러사건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호재였다. 외교상 그나마 ‘실적 아닌 실적’을 쌓도록 해준 것이다. 자위대 소속 이지스함의 인도양 파견이 실현됐고 전쟁 발발에 대비한 유사사태 관련 3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병하는 법안도 순조롭게 국회를 통과했다.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이 다시 활보하는 것일까. 국내 경기 침체시에 대외팽창적인 외교가 국민의 열광적인 성원을 얻는 것은 역사상 흔한 일이다. 고이즈미 총리하 일본 내각이나 정계에 대북 강경론자, 군비강화론자, 개헌론자가 부쩍 힘을 얻고 있는 것도 이런 역사적 경험에 비춰볼 때 일본의 불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고이즈미 총리가 내걸었던 개혁이나 정책의 실태를 들여다보면 사실상 아무 성과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계속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이즈미 총리가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지 사흘 뒤, 총리 인선에 이은 개각을 단행한 지 하루 뒤인 9월23일. 그는 자민당 본부에서 낮부터 밤까지 7시간 동안 카메라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10월에 실시될 총선거에 대비한 TV 광고용 비디오와 포스터용 사진 촬영 때문이었다. 오후 1시에 시작된 촬영은 밤 8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맨 마지막 컷은 아베 신조 관방부장관과 찍었다.
곧 있을 총선거가 최근 어떤 선거에서나 그러하듯 감성의 대결, 이미지 대결이 될 것으로 보고 정책 개발보다 이미지 강화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식자들은 ‘정책 대결’ 운운하며 마치 좋은 정책을 제시한 정당이 냉정한 유권자들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아 당선되는 것처럼 말하나 현실은 정책과 무관하게 돌아간다. 자민당은 이번 선거에서도 ‘헨진(變人)’, 즉 ‘별난 사람’ 이미지를 부각시켜 고이즈미의 상품 가치를 높이려 하고 있다.
일본 TV방송은 총리가 외유를 하지 않는 한 거의 매일 총리의 코멘트를 전한다. 고이즈미 총리의 코멘트는 짧다. 주어는 생략할 때가 많고, 앞뒤가 맞지 않을 때도 많다. 그래도 듣는 사람은 재미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몇 마디 말은 정치인에 대한 기존 관념을 깨는 진솔함으로 받아들여진다. 솔직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고이즈미 총리는 3대째 대물림하는 ‘정치 귀족’이다. 외조부는 체신상을 지냈고 그의 외동딸과 결혼한 부친이 방위청 장관을 지낸 그가 서민의 희로애락에 공감할 리 없다.
“결국 조부와 아버지의 유산 덕택입니다.”
1972년 30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었을 때 고이즈미는 개인적인 자질보다는 조상 덕에 정치가의 길에 들어섰음을 인정했다. 이후 내리 10선을 했다.
서민적 발언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의 말투는 꾸밈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자연스러움을 연출하는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혔다는 것이 정설이다. 젊은 시절 그는 성격이 너무 유약해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의원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이 점을 ‘무기’로 만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냈다. 짧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는 이제 ‘한마디 도사’라는 별명을 얻는 데 성공했다. 외로움이 안겨준 선물이랄까. 외로움은 정치적으로 그에게 성공을 안겨주었지만 독특한 퍼스낼리티는 결혼생활 등을 통해 보면 결코 플러스만은 아닌 것 같다.
결혼을 한 것은 36세 때로 만혼이었다. 14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했으나 4년 만에 합의이혼했다. 두 아들은 자신이 맡아 길렀다.
“결혼하는 에너지를 1이라고 한다면 이혼할 때 드는 에너지는 10 이상이다. 두 번 다시 결혼은 하지 않겠다.”
이혼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그는 현재까지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그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정치가답지 않은 여성관을 피력한 바 있다.
“이 세상에는 ‘말을 해보면 통하는 여성’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여성’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여성’, 세 부류의 여성이 있다. 이 가운데 최고는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여성이다.”
흔히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관계가 중요한 정치인으로서는 왠지 이상하다.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특이한 성격의 사람이다. 이혼 후 독신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무슨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닌 것 같다. 몽상가적 이성관을 가진 그는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여성’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스’ ‘노’가 확실한 사람
고이즈미 의원은 부패한 정치인 상과 거리가 먼, 상대적으로 청결한 이미지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그 이유를 개인의 투철한 도덕감에 의한 자기 통제에서보다 고독을 즐기는 그의 특이한 성격에서 찾는 이도 있다.
저녁이 되면 동료의원들은 식사 약속 장소로 뛰어다니며 기업인이나 지역구 인사들과 접촉하는데 그는 곧잘 혼자 오페라나 일본의 전통 연극인 가부키, 영화 구경을 가곤 했다. 동료의원들하고 좀처럼 저녁 시간에 어울리거나 하지 않았다. 재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겨하지 않았다. 그러니 돈을 만들 시간도 없었다.
영화를 보더라도 미리 특별히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계획하고 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다가 눈에 띄는 극장에 들어가곤 했다. 양복을 사고 싶으면 길을 가다 백화점에 들어가 직접 골랐다. 기성복을 주로 사는데 그것도 정해놓은 한 가지 브랜드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거나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사 입는다. 사자 갈기 같은 헤어스타일도 정치인의 상식에 맞지 않는다.
굳이 동료의원들이 ‘왕따’를 하려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외톨이가 되기를 좋아했다. 별난 사람을 뜻하는 ‘헨진’ 말고도 ‘한 마리 외로운 늑대’ ‘정계의 이단아’라는 별명이 추가됐다. 대중은 그의 행동을 틀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 분방함의 표출로 받아들이고, 그가 외톨이가 된 것은 못된 정치인들이 이지메를 하기 때문이라고 동정을 보내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일반 유권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예스’ ‘노’가 분명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성격, 성장 과정, 불행한 결혼 생활 등을 보면 확실히 그는 사회성이 보통인에 비해 떨어진다. 복잡한 사회현상을 추상적으로 체계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부족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성격이 ‘예스’ ‘노’ 이분법에 집착하게 했다. 이분법으로 판별 안 되는 일이 세상에는 허다한데도.
언론계에서 고이즈미 의원은 ‘오프 더 레코드’가 없는 사람으로 통해왔다. 언제 누구와 인터뷰를 해도 그랬다. 한국과 중국 정부의 반발로 외교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모습을 보면 ‘사회성’ 부족이 절실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그의 사고 구조가 얼마나 단순한지 알 수 있다.
고이즈미 총리가 스스로 밝힌 애독서는 ‘아, 아 벚꽃처럼 스러져간 동기들이여’이다. 해군 비행예비학생 제14기회가 편집한 것으로 태평양전쟁(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공식용어이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란 말보다 더 적합할 것 같아 그대로 사용한다) 때 가미가제(神風) 특공대원들의 유서 등을 모은 책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대학시절 이 책을 읽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특공기에 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런 심경에 비한다면 어떤 일도 참고 견딜 수 있다’고 되뇌곤 했다는 것이다. 가미가제 돌격에 이르기까지 군부의 무모한 전쟁 책동, 거수기로 전락한 의회의 무능, 압살된 정론 언론, 참화에 이끌려들어간 민중, 이런 복합적인 상황에 대한 구조적 판단, 제도적 분석은 없이 그저 감정적이고 단순화된 느낌만 있다.
그런데 이게 먹히고 있는 것이 현재의 일본 사회 분위기다.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의 행태에 실망하거나 불신하는 계층은 아예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 반면에 감정적 소구력을 갖는 그의 정치적 구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층은 그에게 열광적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애독서란 게 흔히 대중 인기를 겨냥해 일부러 선정한 것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국의 총리 애독서로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이나 한국 대통령이 ‘베트남전쟁 참전기’를 애독서로 꼽는다면 어떻겠는가. 그런데 총리가 태연하게 그런 책을 애독서로 꼽고, 그 이유로 어설픈 감상을 이야기해도 ‘아, 그래’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의 일본 대중인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2001년 8월13일 야스쿠니 신사를 당초 매년 8월15일 참배하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앞당겨 참배할 때 발표한 담화문을 읽어보면 그의 사고가 단순한 것을 넘어 유치한 수준이란 생각조차 든다.
파괴에 능하나 건설엔 취약
고이즈미 총리는 “아시아 근린제국에 대해 한때 잘못된 정책으로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행해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고 인정한 뒤 돌연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두 번 다시 우리나라가 전쟁의 길을 걷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나는 그 곤란한 시대에 조국의 미래를 믿고 전선에서 산화한 분들의 영령 앞에, 오늘날 일본의 평화와 번영이 그분들의 희생 위에 쌓아올려진 것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며 매년 한 차례 평화에의 서약을 새롭게 하고 있다.”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하는가 싶은데 느닷없이 침략전쟁의 주역으로 역사의 법정에서 이미 ‘전범’으로 판정이 난 인물까지 합사된 야스쿠니 영령을 애국자로 바꾸고 만다. 자국의 위상과 외교적 문제를 종합한, 전략적 사고에서 비롯된 일국의 총리의 뼈있는 발언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저 우익단체 한 회원의 술주정처럼 들린다.
역사소설을 좋아한다는 그는 의리와 인정을 중시한다. ‘악의 무리를 쳐부수는 선한 사람에게 갈채를’이라는 단순한 사고 구조에서 나온 고이즈미 총리의 대사에 보통 일본인들은 열광한다.
그의 전략적 사고 부재를 증명해주는 것은 정책결정을 늘 백지위임하는 스타일에서도 확인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개혁과 변화를 지지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식의 매우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로 득을 보아왔다. ‘선’과 ‘악’의 단순한 도식 안에 대중을 끌어들여 지지를 획득하는 포퓰리스트 수법에 맛을 들인 것 같다.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외치며 선과 악의 대결을 강조한 대목도 이와 매우 흡사하다.
고이즈미 총리가 구사해온 단순한 구호,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특정집단의 권익을 배제하는 듯하기에 일견 신선하게 들리는 이 구호는 현재와 같은 일본 사회 분위기에서는 상당기간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본 사회 특유의 집단의식이 존재하는 한 그럴 것이다.
일일 드라마 주인공처럼 매일 TV에 잠깐 등장해서는, 짧아서 기억하기 쉬운 대사 한 토막을 던지는 고이즈미 총리의 ‘극장 정치’는 현대인의 짧은 호흡에 잘 어울린다.
고이즈미 총리는 파괴에는 능하나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건설해내는 능력은 갖지 못한 정치인이다. 그의 이같은 한계는 비단 개인 문제가 아니라 성장이 멈춰버린 일본의 경제, 진정한 변혁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일본 정치의 한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