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아니, 질문이 틀렸다.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서삼경과 삼국지로 우리가 익히 안다고 믿는 중국, 중국인, 중국문화는 과거의 것일 뿐 21세기 현실의 중국과는 맞지 않다. 변화하는 중국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오늘날의 중국을 규정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이 ‘새로운 중국’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문학, 철학, 미술, 영화 등 현대 중국 문화예술의 장르별 최근 흐름을 따라잡는 연재기획을 준비했다. 오늘날 중국 발전의 뿌리에 놓여 있는 중국 사회의 문화적 성장을 살펴보고 고대에 머물러 있는 우리의 시각적 한계를 바로잡기 위한 시도다. 그 첫 회로 서강대 이욱연 교수가 펜을 잡았다. 먼저 시리즈 전체의 서문 격으로 우리가 중국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를 짚었고, 2부에서는 중국 현대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21세기 중국 문학이 ‘중국적인 것’의 복원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그의 분석은 위기에 처한 한국 문학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아니, 질문이 틀렸다.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서삼경과 삼국지로 우리가 익히 안다고 믿는 중국, 중국인, 중국문화는 과거의 것일 뿐 21세기 현실의 중국과는 맞지 않다. 변화하는 중국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오늘날의 중국을 규정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이 ‘새로운 중국’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문학, 철학, 미술, 영화 등 현대 중국 문화예술의 장르별 최근 흐름을 따라잡는 연재기획을 준비했다. 오늘날 중국 발전의 뿌리에 놓여 있는 중국 사회의 문화적 성장을 살펴보고 고대에 머물러 있는 우리의 시각적 한계를 바로잡기 위한 시도다. 그 첫 회로 서강대 이욱연 교수가 펜을 잡았다. 먼저 시리즈 전체의 서문 격으로 우리가 중국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를 짚었고, 2부에서는 중국 현대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21세기 중국 문학이 ‘중국적인 것’의 복원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그의 분석은 위기에 처한 한국 문학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제1부 : 이제 중국을 보는 ‘스스로의 눈’이 필요하다
첫 번째 질문, 한국인은 중국을 잘 아는가. 쓸데없는 의문으로 들릴 수도 있다. 대다수 한국인은 중국을 잘 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잘 알고 있다. 유사한 전통문화를 가졌고 수천년 동안 교류해온 터라 중국은 한국인이 가장 친근하게 느끼고 가장 잘 아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인이 그렇게 잘 아는 중국, 중국인은 삼국지, 공자와 이백 등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중국, 고대의 중국인일 뿐이다. 현대의 중국, 현대의 중국인, 지금의 중국과 지금의 중국인에 대해선 전혀 그렇지 않다.
생각해보자. 한국과 중국은 반세기 동안 교류하지 않았을뿐더러 적성(敵性)국가로 대치했다. 현대 중국이 우리와 처음 대면한 것은 6·25전쟁에서였다. 그것도 동맹군이 아니라 적군으로 만났다. 그렇게 적으로 반세기 동안 대치하다가 다시 수교한 지 이제 15년이 지났을 뿐이다. 적으로 등을 돌린 채 단절됐던 반세기 우리에게 중국은 고대 중국뿐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에 두 나라는 너무도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한국은 미국의 우산 속에서 독재와 민주화, 반공과 경제발전의 길을 걸으면서 자본주의의 우등생이 됐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등을 통해 전통적인 사고와 의식, 제도를 모조리 뜯어고치려는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이 단절의 기간에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과 중국은 서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상대가 됐다. 두 나라는 전통문화 차원에서는 유사성이 있지만, 현대 이후는 그 유사성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도 더 많이 이질성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유교적 연고의식과 집단주의가 강하게 남아 있다. 학벌과 지역의 연줄의식, 기업의 집단주의 문화가 여전히 강하다. 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중국인은 서구인과 흡사할 정도의 개인주의 의식을 갖고 있다. 연장자와 연소자, 직장 상사와 부하 사이만 해도 지금 중국인들에게는 한국과 같은 절대적인 상하관계가 없다. 지금 중국인은 우리 사회의 일반 원리인 가부장제적 상하 서열관계를 납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감을 갖고 있다.
중국인은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왜 상사의 눈치를 보며 퇴근을 망설여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며, 왜 상사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지도 납득하지 못한다. 흔히 중국인도 우리처럼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 이른바 ‘관시(關係)’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중국인의 ‘관시’ 문화와 한국인의 ‘관시’ 문화는 성질이 다르다. 중국인은 개인 차원에서 ‘관시’를 만들지만 우리는 학교나 출신 같은 집단적 차원에서 ‘관시’를 만든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한국인은 과거 한국과 중국 사이에 존재했던 문화적 유사성만 주목하고 이질성을 간과한다. 논어나 삼국지에는 중국과 중국인의 원형이 담겨 있기에 중국과 중국인을 이해하는 첩경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생각해보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지금 한국과 한국인을 해석하는 일이 얼마나 유용할 것인가. 유용하다고 해도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한중 사이의 동질성이나 문화적 유사성만 생각하고 차이와 다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식틀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는 심각하다. 먼저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 소통을 가로막고 갈등을 낳는 원인이 된다. 많은 한국인, 특히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들과 상사원들이 중국인을 한국인처럼 대해서 갈등을 겪고 중국인과 소통하는 데 애를 먹는다. 막상 접하면서 차이가 많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한다.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에 열린 군중집회. 이 시기 중국은 모든 전통적인 것을 후진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애썼다.
한국인에게 중국을 연구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중국이 워낙 낯선 타자인 까닭에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정부, 학계, 연구소, 민간인들까지 나서서 연구하고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중국어 한마디 못하고 중국에 대해 전혀 공부하지 않은 채 바로 베이징으로 달려가는 한국 기업인들처럼 무모한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중국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오는 피해와 손해는 온전히 한국의 것이다. 한중 수교 15년, 어차피 앞으로 중국과 밀접하게 교류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면, 이제 한국인은 중국과 중국인을 잘 안다는 착각 때문에 생기는 피해와 손해를 줄여야 한다. 중국과 중국인을 잘 알지 못한다는 새삼스러운 인식이 절박한 것이다. 미국, 일본과 더불어 중국과도 밀접하게 교섭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면, 이제 중국 공부를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상상 속의 계서(階序)구조
두 번째 질문, 한국인은 중국을 보는 스스로의 눈이 있는가. 불행히도 한국인은 중국을 보는 스스로의 눈을 아직 제대로 갖고 있지 않다. 점차 확보해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 멀었다. 근대 이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럴 만도 하다. 중국과 직접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길이 단절된 현대 이후, 한국인은 스스로의 눈으로 중국을 보지 못하고 대부분 타자의 눈으로 중국을 보았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과 미국의 눈이다. 일본과 미국을 통해 중국을 인식하거나 일본과 미국의 중국관(觀), 일본과 미국의 대(對)중국 관계를 통해서 중국을 인식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이 중국을 근대화에 실패한 나라, 문명개화의 낙오자로 본 것은 일본의 시각으로 중국을 보았기 때문이다. 문명화의 정도, 요컨대 ‘문명-반(半)문명-미개’의 구도를 놓고 ‘일본-조선-중국’의 순서로 위치한다고 여겼다. 일본을 정점으로 한 동아시아 국가의 계서(階序)구조가 식민지 조선인의 인식 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중국을 더 이상 문명의 중심이 아닌 ‘천하고 어리석으며 더러운 나라’로 여기고 우리가 중국보다 문명의 수준에서 앞서 있다는 인식이 형성된 게 이 무렵이다.
김동인의 소설 ‘감자’나 최서해의 ‘홍염’ 같은 일제 강점기 문학작품에서 중국인은 악질이나 저질, 추악한 인간 등, 한결같이 부정적 이미지로 그려진다. 일제 강점기에 중국인을 무시하는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 갈등이 자주 일어난 이유 중의 하나도 이것이다.
동아시아에 냉전체제가 성립되고 두 나라가 서로 적성국가가 된 후에는 ‘비인간적인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미지가 추가된다. 사회주의라는 죽(竹)의 장막에 갇힌 어둠의 나라, 홍위병 운동과 문화대혁명 등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주의 역사경험을 가진 나라, 인권이 없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보편적인 중국 이미지로 한국인의 뇌리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일-한-중’이던 계서구조는 냉전체제 이후 ‘미-일-한-중’으로 바뀌었을 뿐 그대로 한국인의 인식 속에 새겨진다. 여기서도 중국은 가장 아래, 우리보다 밑에 있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 강하게 남아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아예 강한 신념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수교 이후 쏟아져 나온 한국인의 중국 여행기 속에 천한 이미지, 문명화가 덜 되고 아직도 사회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낙후된 중국의 이미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본질주의적 시각’의 한계
물론 현실의 중국에 그렇게 볼 만한 요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중국 여행기에서 그렇듯 천편일률적으로 낙후된 이미지로 묘사되는 것은 한국인들이 집단적으로 중국에 대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인상 탓이 크다. 중국은 경제뿐 아니라 민주화나 인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보다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많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우월의식과 중국 비하의식은 이렇듯 대부분 제국주의와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고, 그런 만큼 일본과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탈(脫)냉전시대인 지금 중국의 의미는 일본에, 미국에, 한국에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 중국을 보는 한국 스스로의 눈이 필요하다.
다시 다가온 중국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고 피동적으로 묻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능동적으로 물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이 물음을 통해서 친중(親中)과 반중(反中), 모화(慕華)와 척화(斥華)의 양극단을 오가는 중국 인식의 적폐를 청산하고 중국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내야 한다.
▼ 제2부 : ‘본래의 중국 문화’ 그 뿌리를 복원한다
중국 전통문학의 서사 방식을 복원함으로써 문단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은 ‘붉은 수수밭’의 작가 모옌(작은 사진). ‘이야기 문학’의 대표작인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한국에서도 연극으로 만들어질 만큼
현대 중국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고충을 털어놓는다. ‘중국은 이렇다’고 말하면 바로 다음 순간 ‘중국의 그곳은 그렇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않다’는 반박이 날아온다는 것이다. ‘요즘 중국이 이렇다’고 하면 이번에는 ‘몇 년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안 그렇다’는 반박이 날아올 수 있다. 앞의 이야기는 지방마다 다른 까닭에 중국을 하나로 뭉뚱그려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게 모험에 가깝다는 것을 지적한다. 뒷이야기는 중국의 변화가 너무나도 빨라 이렇다고 말하는 순간 벌써 다른 것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중국은 결코 하나의 중국이 아니다. 중국을 하나의 속성으로, 단일한 실체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나라를 이해하는 데 언제나 따라붙는 고질적인 괴로움이다. 반면 중국의 빠른 변화속도를 따라잡아야 하는 곤혹스러움은 개혁개방 이후, 특히 시장경제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1992년 이후에 나타난 일이다. 연 10%대의 초고속 성장을 지속하며 시장경제 정책이 대세로 자리잡은 이후 특히 경제분야에서 이러한 변화는 가장 빠르고 크게 나타났다.
하지만 그와 함께, 그에 못지않게 크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중국의 문화다. 미국의 중국학자 아리프 딜릭은 “지금 중국에서는 제2의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마오쩌둥이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문화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발동했다면, 지금 중국에서는 그와 정반대 성격을 지닌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의 혁명이 자본주의 세계와 단절하기 위한 혁명이었다면 이번 혁명은 자본주의 세계와 결합하기 위한, 자본주의 세계에 더 잘 들어가기 위한 것이라는 진단이다.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문화혁명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소비문화의 확산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적인 것, 즉 중국 전통문화의 부활이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현대화 과정 속에서 ‘중국적인 것’이 부활한다는 점이다. 경제가 발전하고 시장경제시대가 열리면서 일어나는 소비문화의 확산은 당연한 현상일 수 있지만, 경제에서는 현대적인 것을 추구하면서도 문화에서는 ‘중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는 것은 예사로운 현상이 아니다.
더구나 이런 흐름은 최근 들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중국적인 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를 감안하고 보면, 지금 중국에서 중국적인 것이 대대적으로 부활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일찍이 없던 새로운 현상이다.
중국은 1840년 발발한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뒤 서구와 일본에 거듭 영토를 내줬다. 민족적 위기에 처한 중국을 변화시키려던 사람들에게 중국적인 것은 줄곧 타도와 부정, 비난의 대상이었다. 서구 열강이나 일본에 패해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멸종될 위기에 처한 원인이 바로 그 중국적인 것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 근현대 민족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은 중국적인 것을 타도해 서구적인 것으로 바꾸거나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바꾸지 못하면 중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었다.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루쉰(魯迅)도 그렇게 생각했고 훗날 마오쩌둥도 그렇게 생각했다. 루쉰은 중국 청년들에게 중국책을 읽지 말라고 권했고, 마오쩌둥은 유가(儒家)문화를 봉건문화의 상징으로 보고 사회주의 문화 건설을 위해서는 그러한 ‘낡은 악’을 청산해야 한다고 여겼다.
공자와 명절과 天人合一
이러한 생각은 개혁개방이 시작된 1980년대 중국인도 마찬가지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문을 열어 세계를 보니 다른 나라, 특히 서구는 저만큼 앞서 있고 중국은 형편없이 낙후해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당시 중국 지식인들은 중국적인 것이 문제라고 보았고, 중국 문명의 상징인 황화는 진작에 죽었다고, 아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외쳤다. 중국의 황색 문명을 해체하고 서구 해양문명을 상징하는 청색 문명을 중국에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절정이 바로 1989년 천안문 시위였다. 요컨대 아편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 중국적인 사고와 가치관, 문화는 민족의 위기 극복과 부흥을 위해 반드시 타도하고 청산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중국적인 것’의 비극적인 운명은 1990년대 후반을 넘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제는 중국적인 것이 찬양의 대상이 돼 부활하고 있다. 중국적인 것의 부활과 중국적인 가치의 재발견이라는 새로운 문화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 극명한 예가 공자(孔子)의 부활이다. 공자는 루쉰에게도, 마오쩌둥에게도, 1980년대 개혁주의자들에게도 부정과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장경제시대 중국문화의 상징이자 자존심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2004년 9월28일에는 공자 탄생 2555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처음으로 중국 정부가 주관하는 공자 기념제가 열렸고, 최근에는 한 인민대표회의 의원이 공자 탄생일을 국경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안건을 제출했다. CCTV의 논어 강좌는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며 교재가 슈퍼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이고, 중국 각처에 논어 등의 유가 경서(經書)를 암송하는 전통 방식의 사설 교육기관이 생겨났다. 또한 중국 정부는 11차 5개년 계획(2006~2010년) 기간 초·중등학교 교육에서 고전경서 교육의 비중을 크게 높이기로 했다. 정부 정책은 물론 민간의 문화소비에서도 공자와 유학이 완벽하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적인 것의 부활은 유학에만 그치지 않는다. 전통복장인 탕좡(唐裝)과 치파오(旗袍), 심지어 순수 한족 복장인 한푸(漢服)가 패션으로 유행하고, 전통매듭과 중국식 인테리어가 인기를 누린다. 상점이나 식당마다 향을 피우고 재물신을 모시는 미신까지 부활하고 있다. 과거 중국 공산당이 모조리 금지했던 일들이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중국 문화유산을 봉건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방치하고 파괴했지만, 2005년 중국 정부는 매년 6월 둘째 토요일을 문화유산의 날로 정하고 주요 문화재를 보호하는 법을 만들었다. 전통 민속명절을 국경일로 삼자는 법안도 제출됐다. 현재 중국에서 국경일은 노동절인 5월1일과 정부 건국일인 10월1일뿐이다. 여기에 더해 단오절, 청명절, 중추절 같은 전통명절을 법정 공휴일로 삼자는 법률안이 제출된 것이다.
중국적인 사유방식을 되살리자는 움직임도 줄기차다. 예컨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유방식이 장차 중국의 발전이나 인류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강조한다. 최근 들어서는 경영, 인재관리 영역에서도 중국적인 것이 부활하고 있다. 요즘 중국 출판계 최고 베스트셀러는 중국식 인재관리와 중국식 경영법에 관한 서적들이다. 중국 고대의 상술, 인재관리 기법을 다시 발굴하려는 것으로 중국인에게는 중국식 경영법, 중국식 인재관리법이 적합하다는 내용이다.
인물, 문학의 새 기운
중국적인 것의 부활은 중국 정부와 중국 공산당이 미래 국가발전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하면서 더욱 힘을 받고 있다. 중국적인 것의 재건작업을 통해 중국 공산당과 중국 정부가 중화 민족문화의 계승자요 수호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내내 중국 공산당은 한자를 간체자(簡體字)로 만드는 등 중국 전통문화의 파괴자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이미지를 벗고 중국 전통문화의 수호자이자 민족문화의 계승자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최근 중국에서 중국적인 것이 부활하는 현상이 전적으로 중국 정부와 공산당 기획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보다는 정부와 당은 물론 지식인과 민중을 망라해 현재 중국에 감돌고 있는 하나의 시대정신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시대정신의 등장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 정부와 공산당이 국민 통합, 민족 통합, 더 넓게는 중화권 통합의 문화적 기제로 전통문화를 이용하는 측면도 있고, 중국 공산당이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의 하나이기도 하며, 경제성장으로 자부심이 강해지면서 나타난 대중 차원의 문화 민족주의 성격도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적인 것의 미래적 가치를 재발견해 현대적이면서도 중국적인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중국의 길을 모색하려는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지구화 시대 중국문화의 개성을 찾으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고, 중국인에게 좀더 밀착된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처럼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벌어지는 ‘중국적인 것’의 대대적인 부활은 분명 근대 이후 초유의 현상이다.
중국 지식인들을 접하다보면 가끔 그들의 독특한 발상법을 발견하곤 한다. 현실의 어떤 문제에 맞딱뜨렸을 때 외국 사례를 중심으로 사고하기보다는 전통에는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 전통에서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찾아내고 이를 자원으로 삼아 현재의 문제를 검토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여기서 전통이란 근대 이전의 전통이기도 하고, 근현대 이후일 수도 있고, 혹은 바로 이전 시기에 있었던 중국의 경험이기도 한다.
이런 접근법이 가능하려면 전통 속에 풍부하고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해야 한다. 또한 낯선 외국의 사례를 수입하기보다는, 비록 실패했을망정 자기 현실 속에서 한 번 검증한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발상법이 전제돼야 한다. 중국은 바로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 풍부한 전통이 있는데다, 중국인은 기본적으로 ‘길을 가기 전에 먼저 돌을 던져보는(投石問路)’ 경험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전통에 묻는 중국인의 독특한 발상법이 나온 배경이다.
요즘 중국 문학이 새로운 활기를 찾고 있는 현상도 따지고 보면 이런 문제 접근방법이 전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상문화시대에 문학이 대중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중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중국 문학계는 이런 위기의 타개책을, 이전의 전통 속에서 문학이란 무엇인지 소설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물으며 모색하고 있다. 중국 문학의 전통으로 돌아가 소설과 문학의 위기를 고민하는 과정이 중국 문학에 새로운 활기를 가져다주고 있다. 요컨대 문학에서 중국적인 것을 재발견함으로써 문학의 새로운 출로를 모색하는 것이다.
중국 문단에서 중국적인 것의 재발견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이룬다. 하나는 주로 소설을 어떻게 쓸 것인지와 관련해 전통소설을 재발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문학이란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며 지금의 중국 문학을 반성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학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다.
먼저, 소설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관해 전통소설을 재발견하는 작업은 위화(余華), 모옌(莫言), 한사오궁(韓少功) 같은 현재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시도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문화혁명이 끝난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도식적인 문체에서 탈피하기 위해 서구 모더니즘 소설과 흡사한 매우 실험적인 문체를 구사했던 작가들이다. 이들이 이제는 중국의 전통 서사방식으로 돌아간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들여다보자. 작가는 빼어난 이야기 솜씨를 바탕으로 허삼관이라는 독특하고 개성 있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의 소설은 우선 재미있는 이야기, 특히 사람 이야기다. 허삼관은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의 주인공인 아큐의 후손으로 보일 만큼 개성이 넘친다.
이런 식의 소설 수법은 우리에게는 퍽 익숙하다. ‘삼국지’가 바로 그렇다. 한국인이 ‘삼국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겠지만, 대표적인 이유로는 유비, 조조, 관우, 장비 등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개성을 갖고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들 수 있다. 그 인물들이 펼치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재미를 준다. 그리하여 소설은 사람 이야기가 되고, 사람과 이야기의 관계는 수식 관계나 종속 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가 된다. 그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사람을 만들어내고 또한 흥미진진하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늘어놓아 이야기에 대한 대중의 갈증을 채워주는 것이다.
중국에서 소설, 특히 장편소설은 원래 이처럼 ‘이야기’였다. 위화는 그런 중국 소설의 이야기 전통을 부활시켰다.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요즘 들어 소설이 위기를 맞은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이야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잘하는 소설가는 갈수록 적어진다. 그런데 위화는 이런 소설의 위기 시대에 중국 전통소설이 지닌 이야기의 마력을 부활시키면서 전통적 소설기법을 새롭게 재현했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소설을 갱신하고 중국 문학을 갱신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붉은 수수밭’으로 잘 알려진 모옌은 더욱 더 중국적인 전통 서사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예 과거 중국 소설양식을 채용해 한 회, 한 회가 끊어지는 이른바 장회체(章回體)로 소설을 쓰는가 하면, 과거와 현재, 영적인 세계와 현실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사람이 짐승으로 변하기도 하고 귀신으로 변하기도 한다.
“문학은 원래 사회적인 것”
위화와 모옌이 주로 과거 중국의 대중적 소설기법을 재현하는 데 관심이 있다면, 한사오궁은 주로 옛날 문인들이 썼던 이른바 문인소설의 기법을 재현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그의 소설은 흡사 소품이나 에세이 같다. 소설과 산문의 경계에, 사상을 담은 에세이와 이야기의 사이에 서 있다. 이게 무슨 소설이냐고 힐난하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로 그는 근대 서구에서 들어온 소설의 개념 자체를 해체하고 다시 질문한다.
근대 이후 중국에서 중국적인 것이 타도와 부정의 대상이었듯 소설 창작 방법 역시 서구 소설의 문법을 어떻게 잘 따를 것인지가 중국 현대 작가들의 고민이었다. 중국 소설의 모범은 서구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제 중국 문단을 대표하는 세 작가는 오랫동안 중국 문학을 지배해온 서구적 소설 개념, 서구식 소설 쓰기를 재검토하는 가운데 소설에서 중국적인 것을 재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중국 문학에 새로운 활기를 가져다주고 있다.
중국적인 것을 재발견하려는 또 다른 흐름은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문학이 무엇이었는지를, 즉 문학의 의미를 되묻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중국 문학을 비판해 중국 문학의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는 것이다. 2005년 말부터 중국 문단에서 쟁점으로 떠오른 이른바 ‘기층문학’과 관련한 논의가 대표적이다. 요즘 중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이자 가장 위험한 뇌관은 빈부격차, 즉 기층 민중의 생존위기와 비참한 삶이다. 이러한 현실에 중국 문학계에서는 문학이 비참한 처지에 몰린 민중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삶을 문학에 담아야 한다는 이른바 ‘기층문학’ 주장이 대두하고 있다.
‘기층문학’을 역설하는 이들은, 중국에서 문학의 영향력이 축소돼 위기를 맞은 것은 문학이 소수를 위한 중산계급 취미를 만족시키는 일에 몰두해 ‘글쓰기를 위한 글쓰기’에 치중함으로써 작가 개인의 사적 기록물이 돼가는 데 큰 원인이 있다고 진단한다. 중국 문학에서 사상과 정치적 격정이 사라지고, 현실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관방 이데올로기나 찬양하기 때문에 독자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작가들이 눈을 돌려 사회와 민중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문학이 현실과 맞물리게 해야 하고, 작가들이 지금 중국에서 발생하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그 근거로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문학이 무엇이었는지를 재검토한 결과를 든다. 원래 중국에서 문학은 개인의 사적 기록물이 아니라 사회적 기록이고, 정치·사회·경제와 밀접한 연관을 지녔다는 것이다. 현실 비판과 민중 현실에 대한 관심이 시경(詩經) 이래 중국 문학의 전통정신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중국적인 문학 전통 차원에서 보자면, 사회에 대한 관심을 저버린 채 개인 생활, 그것도 대다수 중국인의 생활이 아니라 중산층 이상의 생활만 담고 있는 중국 문학은 전통적인 문학정신에서 일탈한 것이라고 본다. 요컨대 중국 문학의 위기는 본래의 정의, 전통적으로 수행해온 역할에서 벗어난 데 한 원인이 있고 이 일탈 때문에 대중과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험성과 메시지
이러한 생각 때문에 이들은 중국 문학이 활기를 찾고 중국인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중국 문학 본연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들어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실직한 노동자 문제나 농촌에서 도시로 온 ‘농민공’ 문제를 다룬 소설이 많아지고, 한국의 1980년대 노동시 같은 작품들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흐름 때문이다. 중국 문학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시대 중국인이 느끼는 삶의 어둠에 다가가면서 새로운 활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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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특히 2000년대 이후 강력하게 등장한 중국 문화의 새로운 트렌드, 새로운 문화혁명의 하나로 등장한 중국적인 것의 부활은 한편으로는 위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중국적인 것의 부활이 민족주의의 문화적 표현이거나 지배 이데올로기를 문화적으로 포장하는 차원이라면 이는 중국에는 물론 다른 나라에도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중국적인 것의 재발견이 문화가 획일화하는 지구화 시대에 새로운 문화 출구를 모색하는 일환이라면 나름대로 유용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 특히 동아시아에 하나의 참고사례를 제공할 수도 있다. 중국에서 중국적인 것이 부활하는 현상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