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외의 ‘동양철학’은 중국의 아류일 뿐이라고, 세상에는 오로지 서양철학과 중국철학이 있을 뿐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극단적인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를 바탕에 깔고, ‘천하 맹주’라는 옛 영화를 되찾고자 부심하는 중국은 유교로 대표되는 국학(國學)의 육성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삼고자 시도하고 있다. 현대신유학의 힘을 빌려 동아시아의 모든 철학을 중국 중심으로 다시 세우겠다는 그들의 민족주의적 욕망 앞에서, 한국의 ‘철학적 현실’은 과연 어떠한가.
모두 12부작인 이 다큐멘터리는 15세기부터 지금까지 9개 강대국이 흥망을 거듭한 역사를 다룬다. 아홉 나라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소련), 미국이다. 그런데 각 나라의 성쇠를 다룬 1편에서 11편까지를 보면서 사실 필자는 특별한 감흥을 받지 못했다. 세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알 만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중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수준이 꽤 높아졌다는 점, 그리고 중국도 이제 이런 내용을 공중파로 방송한다는 데 내심 놀랐을 뿐이다(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마지막인 12편은 ‘대도행사(大道行思)’, 우리말로 하자면 ‘큰 길을 가는 생각’(EBS는 ‘21세기 대국의 길’로 번역했다)이라는 제목으로, 이전의 내용을 총괄하면서 대국이 되는 조건을 따져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귀가 번쩍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각국 학자들이 내놓은 답이 서로 엇갈리지만, 모두 중요하다고 동의하는 것은 사상과 문화의 영향력과 정치체제·제도의 개혁이다.”
이것이 ‘대국굴기’가 찾은 대국의 제1조건이었다.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미국 하버드대 조지프 나이 교수 인터뷰 화면이 자막과 함께 스쳐갔다. 경제의 중요성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사회발전이 사상과 문화의 혁신에 의해 인도돼야 하고, 그럴 때만 경제발전이 대국으로 가는 사회발전의 강력한 엔진이 된다는 것이 방송의 골자였다. 그 뒤에야 정치체제와 제도의 개혁, 국가의 리더십, 과학기술의 중요성 등이 차례로 강조된다.
이처럼 국가 지도부가 사상과 문화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이를 국민에게 ‘학습’시키는 나라가 중국이다. 오래된 문화대국의 자신감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들은 묻는다.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상과 문화를 꽃피웠으며, 앞으로도 꽃피울 수 있는 나라는 어디인가. 문화의 저력에 뿌리를 두고 인류의 미래를 이끌 수 있는 21세기 최강대국은 어느 나라인가. 직접 답하지 않지만 ‘대국굴기’는 이미 ‘중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21세기 대국의 조건
어느 시대나 경제력은 중요했지만, 단지 돈만으로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는 대국이 탄생한 경우는 없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적 가치에 민감하고 새로운 창조적 흐름을 만들어내는 민족과 나라가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경제적 성공은 그 뒤에 따라붙었다. 한번이라도 세계의 중심무대에 서본 나라들은 경험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이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사상과 문화를 존중한다.
중국은 지금 천하의 중심이던 옛 영화의 부활을 꿈꾸며 21세기 세계 초강대국을 향한 행보에 나섰다. 그들은 전통문화와 전통사상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고 있다. 중국은 자신들의 문화를 동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전통문화의 발굴이나 현대화 작업에 국가적 관심과 인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는 비단 중국만의 일이 아니다. 일본 역시 전통문화에서 국가발전의 새로운 목표와 동력을 찾고 있다. 국가와 주요 기업들이 연합해 일본 전통문화와 첨단기술을 결합하는 ‘네오 재패니스크(Neo Japanesque·신일본양식)’ 구축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유럽에서도 문화가 대세다. 유럽연합(EU)은 각국의 고유한 문화 다양성을 미국에 대항하는 유럽의 최대장점으로 육성하고 있다. 이는 모두 미국 중심의 일극(一極) 세계체제 이후를 대비하는 정신적·제도적·학문적 준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세계의 강국들이 모두 자국의 문화 전통에서 성장의 핵심동력을 찾는다. 그들의 가장 큰 자산은 자신들의 문화와 정신적 전통을 사랑하는 국민의 높은 문화의식과 자긍심이다. 물론 경제가치와 정치이념 역시 중요하지만, 이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사람이다. 인간다운 삶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잘사는 것인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은 그 사회의 문화수준과 삶의 질을 결정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원동력이 된다. 대국과 소국의 차이는 이런 성찰이 이뤄지는지 아닌지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대국은 다른 나라에 사상과 문화의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소국은 다른 나라에서 사상과 문화를 공급받는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아니면 신자유주의든 ‘제3의 길’이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닌 이상 그 길을 개척하고 남보다 앞서 구현한 나라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세상의 모든 나라를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상과 문화를 창조하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다. 전자가 ‘대국’이고, 후자는 ‘소국’이다.
고조되는 국학(國學) 열풍
2007년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상품은 할리우드도 한류도 아닌 ‘국학(國學)’이다. 중국의 전통문화 열풍은 가히 진풍경이라 할 만하다. 베이징스판(北京師範)대학 신문방송학과의 위단(于丹) 교수가 지난해 11월 TV 강의교재로 출간한 ‘논어’ 해설서 ‘論語心得’이 석 달 만에 250만부(해적판 포함 400만부) 이상 팔리면서 중국 출판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3월에 발간한 ‘장자’ 해설서 ‘莊子心得’은 초판을 100만부나 찍기도 했다. 비단 위단만이 아니다. “전통문화 관련 서적은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대학은 물론 각급 기관에 개설된 전통 사상과 문화 관련 강좌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이른바 ‘무착륙(no landing)’ 고공성장을 계속하는 중국 경제처럼, 최근 수년 동안 고조된 중국의 국학 열기도 식을 줄 모른다. 이런 현상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중국인이 최근 지속된 경제성장으로부터 자신감을 얻으면서 100여 년 전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민족의 자부심을 회복하려는 욕구가 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개혁개방과 경제개발 과정에서 영향력이 약화된 사회주의 이념의 빈자리를 대신할 원리를 전통에서 재발견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동아시아 전반에 여전히 남아 있는 민족주의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고, 서구 근대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전통으로의 회귀를 선택했다는 의견도 있다. 특히 대만, 홍콩과 미국의 화교 학자들을 주축으로 펼쳐진 문화보수주의 관점의 ‘현대신유학’, 그리고 ‘유교자본주의’와 ‘아시아적 가치’ 논쟁 등이 중국에 소개되면서 전통 사상과 문화에 대한 지식인과 대중의 관심이 고조된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국 철학’의 출생
이러한 지적, 문화적 요인 외에 좀더 현실적인 배경도 있다. 빈부격차와 부패확산 등 심각한 사회모순에 직면한 공산당이 시들어가는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민족감정을 고취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무엇보다 후진타오(胡錦濤) 체제가 이른바 ‘화해사회(和解社會)’ 건설을 국가의 단기목표로 설정하고 그 이론의 자양분을 전통사상에서 공급받으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국학에 범국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TV 등의 강력한 대중매체를 통해 국학 열풍을 확산시키며, 이를 애국주의 고취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런 여러 요인이 문화·사회·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결과물이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학 열풍이다.
중국인이 말하는 ‘국학’은 당연히 중국의 역사·문학·철학 등에 대한 연구를 가리킨다. 특히 ‘중국철학’이 그 핵심이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근대 국민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에는 ‘중국철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유교, 불교, 도교 같은 사상 유파의 개념만 있었을 뿐이다. 국학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도 ‘국학’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이는 ‘국가급 교육기관’, 즉 오늘날의 국립대학 정도를 가리켰다. 또는 ‘국가에서 장려하는 학문’을 의미하기도 했다. 자국의 고유한 사상이나 역사, 문화 등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는 현대적 의미의 ‘국학’은 국민국가의 출현 이후에 등장했다. 이처럼 중국철학이나 국학은 모두 근대 이후에 성립된 학문이다. 여기에 우리가 숙고해야 할 동아시아 근대의 모순과 역설이 담겨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동양철학’이라는 개념은 근대 일본의 발명품이다. 그것은 일본이 서양으로부터 ‘동양(Asia)’을 타자화하는 방법을 배운 뒤, 다시 스스로를 동양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만들어낸 이념적 장치의 하나였다. 일본을 맹주로 서양에 대적하는 동양의 공영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이른바 ‘대(大)아시아주의(Pan-Asianism)’ 이념을 구축하고 확산하는 과정에서 서양과 다른 동양의 정신 전통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동양철학’을 고안해낸 것이다.
중국인은 ‘동양철학’이라는 말 대신 ‘동방철학(東方哲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동방’이라는 말이 사실상 ‘동양’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은 맞다. 그러나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중국에서 말하는 ‘동방철학’이 우리가 생각하는 ‘동양철학’과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오만과 편견
중국 베이징대 철학과에 ‘동방철학’을 연구하는 전공분야가 있다. 이를 소개하는 베이징대 웹사이트의 글은 “이 연구(동방철학)의 특징은 중국을 제외한 다른 중요한 동방 국가 또는 지역의 철학을 주요한 연구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더불어 “동방철학은 중국의 철학연구 가운데 비중이 높지 않고 이 연구에 종사하는 연구자도 적다. 하지만 그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고 친절하게 부언한다.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사이트의 소개에 따르면, 동방철학은 “인도철학, 아랍 이슬람철학 및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일본 한국 베트남 등의 철학을 포괄한다.” 동방이 ‘서방’에 대응하는 포괄적 개념임은 분명한데, ‘동방철학’에는 ‘중국철학’이 제외돼 있다. 대체 무슨 연유일까.
중국에서 ‘동방철학’은 중국철학까지 포괄하는 큰 범주가 아니라, ‘중국철학’의 주변 내지는 하위에 위치한 ‘지역적 철학’ 또는 ‘아류 철학’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중국인의 의식에서 ‘서양철학’에 대응하는 것은 곧 ‘중국철학’이며, ‘동방철학’은 중국철학에 대한 ‘변방철학’일 뿐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중국과 서양의 철학이라는 문맥에서 ‘중서(中西)철학’이라고 하지, ‘동서양철학’이라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중화’와 ‘오랑캐’를 양분하고 중화를 그 중심에 두는 오래된 중화주의 세계관, 그리고 이른바 ‘동방’에서 중국문화의 세례를 받지 않은 국가 또는 지역이 없다는 문화적 자부심이 짙게 배어 있다.
중국인이 보기에는 유교와 도교는 물론 제자백가의 철학사상 모두가 중국철학이다. 심지어 동아시아의 불교조차 중국철학의 일부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중국화’한 뒤에 다시 한국과 일본 등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일본 일각에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를 존숭하고 유교를 중시하는 것이 흐뭇하고 대견하기는 하지만, 유교는 근본적으로 ‘중국철학’이며 한국이나 일본에서 구현된 유교는 단지 그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중국 지식인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동아시아 문명의 3대 골간으로 지목되는 유(儒) 불(佛) 도(道) 사상이 모두 중국에서 나와 ‘동방’의 변방지역으로 확산됐으므로, ‘중국철학’을 중심에 두고 그 하위에 나머지 ‘동방철학’을 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처럼 중국인이 동아시아를 사유할 때, 그들은 아주 쉽게 중국이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던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린다. 마치 한국인이 일본을 사유하며 아직기와 왕인을 떠올리거나 일본 천황가(天皇家)가 고대 한국의 후예임을 강조하듯이 말이다. 여기에는 상대 국가를 문화적, 정신적으로 동등하게 대접하지 않으려는 우월과 배타의 감정의 짙게 배어 있다. 그런데 서양에 대해서는 이런 정서가 발휘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해 안달이다.
이런 사유의 배후에는 서양에 대한 동경과 콤플렉스의 양가감정(兩價感情), 그리고 동아시아의 타자를 배제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잠복해 있다. 서구로부터 격심한 충격을 받은 후 이에 반발해 자기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기울고, 이로부터 비롯된 ‘오만과 편견’에서 다시 아시아의 이웃들을 폄훼하고 차별한다. 서구 문화를 숭배와 심취의 대상으로 삼는 동시에 반발과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서구의 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서구 제국주의보다 더욱 ‘오만’한 자세로 국가와 민족 경계 밖의 아시아인들을 ‘타자화’하는 이율배반, 이런 중층의 모순과 역설이 동아시아 근대의 전개과정에서 흔히 발견된다.
앞에서 중국 관영 TV가 ‘대국굴기’를 방영한 데 필자가 내심 놀랐음을 언급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서구 열강의 자본주의 발전을 긍정하고, 식민지 지배와 경제 수탈을 대국의 경쟁력으로 부각한다. 비록 제국주의의 폐해를 지적하지만 그 비중은 미미하다. 대신 부(富)를 향한 욕망을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인정하고 자유와 경쟁, 민권의 확대 등을 높이 평가한다. 중국이 아무리 무늬만 사회주의인 나라라고 하지만 어쨌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반대해온 사회주의 중국에서 자본주의 정신과 역사를 이렇게 거리낌 없이 ‘학습’한다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과 관련해 흔히 중국의 실용주의가 거론된다. 특히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이른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 유명하다. 그러나 덩샤오핑 이전부터 중국의 역사 자체가 실용주의의 거대한 실험무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철학은 그 태동의 순간부터 현실 문제에서 눈을 돌린 적이 거의 없다. 고대 제자백가의 관심사도 춘추전국의 혼란을 극복하는 데 있었지, 추상적인 진리나 이념 자체가 철학의 목적이 되지 않았다.
아침엔 절, 저녁엔 교회에
중국은 현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이념과 지식 종교도 받아들이되, 대신 받아들인 것을 철저하게 중국화해왔다. 그리하여 불교를 중국화했고, 공산주의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중국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 이른바 ‘마오쩌둥 사상(Maoism)’의 독자적 이론과 실천 영역을 구축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맞지 않게 되자 중국은 바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앞세운 덩샤오핑 이론으로 선회했고, 이제는 자본주의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다.
많은 한국인이 중국의 이런 문화 변동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단일한 이념이나 종교, 혈통, 생활방식 등에 집착하는 순결주의 성향이 한국과 한국문화에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은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데 취약하고, 중국인에 비해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 또한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서구의 사상과 지식 종교를 사대적으로 추수하면서, 이를 자기 현실에 맞게 변용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데도 익숙하지 못하다. 이런 문화 토대에서 보니 마오쩌둥 사상 위에 덩샤오핑 이론을 올리고 거기에 다시 자본주의 시장원리를 접합시키는 식의 중국식 사고방식과 시도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상과 지식의 변용과 융합, 그리고 새로운 창조는 중국인에게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현실에 도움이 된다면 아침에 절에 갔다가 오후에 도관(道觀·도교사원)에서 참배하고 저녁에는 교회당에서 기도하는 것에서 어떤 모순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중국인이다. 중국인은 언제나 현실을 중심에 두고, 어떤 선택이 중국을 위대하게 할 것인지를 추구한다. 이런 면에서 중국은 예로부터 국가 실용주의를 견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교조적 이념이 잠시 성행한 시기도 있었지만, 중국은 내부적으로 다양한 생각과 생활방식의 공존을 허용하는 관용의 전통을 지녔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전제가 있으니 ‘중화(中華)’ 자체의 정체성을 위협하거나 침해하는 요인은 철저하게 배격하고 평가절하한다는 점이다. 만일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더라도 완전히 중국적인 것으로 변용해버리고 만다.
차이와 다양성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관용과 실용주의 정신. 그리고 중화와 오랑캐를 양분하는 배타적 중화주의.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두 종류의 정신적 가치가 중국인의 의식 안에서 이렇게 병존한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되(不同) 중화의 공동체 질서에 부응한다(和)는 전통이 중국인의 정신과 문화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그러므로 중국과 중국인은 내부적으로 실용적이고도 관용적이되 외부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주체적이다. 중국의 이런 문화 체질이 21세기 인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를 확실하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운명적으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한국이 중국의 이런 사상과 문화의 추이를 세심하게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현대신유학의 태동
오늘날 중국철학의 추이를 관측하기 위해서는 지난 백수십여 년 동안 중국에서 일어난 철학적 변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불 연합군의 승리로 아편전쟁이 끝난 직후인 1860년대 초부터 중국 지식인들은 본격적으로 서양을 배우기 시작한다. 웨이위안(魏源) 등이 오랑캐를 배워 오랑캐를 이기자며 ‘이이제이(以夷制夷)’와 ‘사이제이(師夷制夷)’를 제창했고, 그 구호 아래 쩡궈판(曾國藩) 쭤쭝탕(左宗棠) 리훙장(李鴻章) 등이 주축이 된 양무(洋務)운동이 펼쳐졌다. 그러나 1895년 예상치 못한 일본과의 전쟁에서 청나라가 다시 패하면서 양무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본래 ‘양무’는 중국의 정신문명을 보존한 채 서양의 과학과 군사 기술을 배우자는 이른바 ‘중체서용(中體西用)’ 방식의 운동이었는데, 이제 이는 근본적인 회의에 직면했다. 대신 입헌군주제의 정치체제와 자유민권의 사상적 개혁을 수반하는 보다 혁신적인 변혁, 즉 ‘변법(變法)’을 시행해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캉유웨이(康有爲) 탄쓰퉁(譚嗣同) 옌푸(嚴復) 량치차오(梁啓超) 등이 그 대표적 논객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변법운동 역시 무술정변의 격동 속에서 실패하고 만다. 신분제의 탈피와 내각제도의 정비 등 폭넓은 사회정치적 개혁을 추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통 사상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여전히 강했고, 또한 몇몇 지식인의 급진적 구호에 머물러 사회변혁을 추동할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것이 한계였다.
그리하여 20세기에 들어서자 전통과 단절하려는 지식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1919년 5·4운동으로 상징되는 신문화운동이 그들에 의해 촉발됐다. 신문화운동은 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됐는데도 유교의 국교화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황제추대운동 등이 일어나는 데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천두슈(陳獨秀) 리다자오(李大釗) 후스(胡適) 등 신문화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지식인들은 당시 중국의 보수적 상황이 유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유교와 공자가 2000년 중국 전제정치의 정신적 지주이며 인간해방을 방해하는 봉건적 정치윤리문화의 근간이라고 비판하고 전통사상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打倒孔家店). 그리고 이를 대체할 대안으로 ‘민주’와 ‘과학’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근대사조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한편 이 시기에 근대적 철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철학과를 설치한 고등교육기관은 베이징대학이다. 1914년 베이징대에 철학과가 개설될 당시의 명칭은 ‘철학문(哲學門)’으로, ‘중국철학문(中國哲學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학과가 20세기 ‘중국철학’의 요람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이는 그 뒤 현실로 구체화한다. 신문화운동의 주요 논객이던 후스와 천두슈 등이 초창기 교수를 역임했을 뿐만 아니라, 슝스리(熊十力) 량수밍(梁漱溟) 펑유란(馮友蘭) 탕융퉁(湯用?) 같은 저명한 학자들이 베이징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현대 중국철학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특히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 학과의 졸업생으로 펑유란과 모쭝싼(牟宗三) 등이 각각 중국과 대만에서 현대신유학 담론을 주도했다. 1920년에는 오늘날 난징(南京)대 전신인 중양(中央)대에도 철학과가 개설됐는데, 팡둥메이(方東美)와 탕쥔이(唐君毅) 등이 이곳의 교수를 역임했다. 이들은 훗날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권을 따라 대만으로 가서 타이완(臺灣)대 철학과 등에 재직하며 역시 현대신유학의 담론을 이끌게 된다. 이들이 흔히 ‘현대신유가’ 내지는 ‘현대신유학자’ 등으로 불리는 대표적 학자들이다.
국가가 나선 ‘유교 중흥’의 위험성
대륙과 대만을 망라해 20세기 중국철학의 담론을 주도한 학자군은 위에서 언급한 ‘현대신유가’다. 현대신유가는 5·4운동 이후 중국과 서양의 문화가 충돌하는 복잡한 국면에서 형성됐으며, 공자와 유교에 대한 비판이 고조에 달한 신문화운동 시기에 공개적으로 유학 수호의 기치를 들고 나섰다.
현대신유가는 일제의 침략으로 중국이 위기에 처한 시기에 점차 힘을 얻었다. 1930년대에 본격화돼 1945년까지 이어진 항일전쟁은 중국의 민족정신을 고취하며 민족문화의 부흥을 외치는 현대신유학의 발흥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동시에 서양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현대신유가의 논객들은 비교적 체계적이고 완비된 철학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이론 역량도 갖추게 된다.
하지만 1949년에 중국이 공산화하면서 현대신유학자의 상당수가 대만과 홍콩 등으로 이주했다. 이어서 중국에서 문화대혁명(1966~76)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사상·문화·종교 전통, 무엇보다 유교가 철저하게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대신 같은 시기에 대만과 홍콩의 현대신유가는 중국 사상 전통의 옹호와 현대적 재해석에 몰두했다. 한편 문화혁명이 끝나고 본격적인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중국에서 다시 새로운 문화 열풍이 일어난다. 특히 하버드대의 두웨이밍(杜維明)을 필두로 하는 화교 학자들의 활약에 힘입어 1980년대에 현대신유학이 중국으로 유입돼 단기간에 크게 확산된다.
현대신유학자들은 대개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심성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중국 전통(유학)이 서양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그러면서도 이를 논증하기 위해 서양철학의 방법론을 즐겨 쓴다. 게다가 그 문제의식과 목표는 통속적인 민족주의와 결합되는 경향을 보인다. 리쩌허우(李澤厚)는 이런 현대신유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개괄한다.
신해혁명과 5·4운동 이래 20세기의 중국 현실과 학술 토양에서, 공맹의 유학과 정주학(程朱學), 육왕학(陸王學)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이를 중국철학 혹은 중국사상의 근본정신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고, 동시에 이를 주체로 서양 근대사상(‘민주’와 ‘과학’ 등)과 서양철학(베르그송, 루소, 칸트, 피히테 등)을 흡수하고 개조해, 현대중국의 사회 정치 문화 등의 영역에서 현실적인 출구를 찾고자 했다. (李澤厚, ‘中國現代思想史論’, 天津社會科學出版社, 2003년, 261쪽) |
몇 가지 핵심을 다시 정리해보자. 중국의 현대신유학은 ▲서구 제국주의의 동진에 따른 중국 민족(문화)의 위기를 배경으로 등장했고 ▲유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유학의 이념을 주체로 서양의 사상과 철학을 변용하며(中體西用) ▲현실에 적합한 이론을 모색한다. 각각 뚜렷한 문제의식과 목표, 구체적인 방법론과 현실성이 있었던 셈이다.
현대신유가의 문제의식, 목표, 현실성의 중심에는 모두 ‘중국’ 내지 ‘중화’라는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주제가 자리잡고 있다. 즉 중국의 위기에서 중화의 전통을 지키고 여기서 중국의 현실 문제 해결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철학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으므로 서양철학의 논리와 방법들을 활용한다. 물론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고민하고 또한 주체적인 각도에서 서양철학을 수용하고 변용하는 태도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것은 주체적인 고민이 취약한 한국의 철학자들이 오히려 배워야 할 점인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중국의 지식인들이 과도하게 ‘주체적’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민족주의에 경도되고 또 그 안에 갇혀서 민족에 대한 자신들의 지나친 애정이 초래하는 위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한계를 쉽게 노출한다. ‘중화의 우수성’이 그들 사유의 선험적 전제가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중국 지식인들의 민족주의 정서는 맹목적이다. 현대신유가 역시 이런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중국 문화의 우수성을 선양하려는 목표의식이 강하다 보니 그들의 사유가 ‘민족’의 테두리에 갇혀 보편성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담론은 민족과 국가를 앞세우는 권력의 이념적 도구로 쉽사리 전락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신유학은 대만에서 국민당의 일당독재와 권위주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사례가 있다. 사회주의 이념이 퇴조한 중국에서 오늘날 다시 유교를 중시하고 나선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 최근 중국에서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유교를 재평가하고 선양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하고 있는데, 그 배후에 현대신유학의 사상적 영향력이 작동하고 있다.
‘궁극적 우월성’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종종 민족주의나 종교근본주의 따위의 폐쇄적 이념으로 구현되고 그것이 다시 국가권력과 만나 치명적인 괴물로 변하곤 한다. 이는 역사가 가르쳐준 교훈이다. 나치즘과 군국주의, 그리고 21세기에 문제가 커진 기독교 근본주의나 이슬람 근본주의 등이 모두 비슷한 사례다. 오늘날 현대신유학 또한 통속적인 중화민족주의와 결합해 그런 전철을 답습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 21세기에 들어와 중국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그 우려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증대하는 것이 오히려 심각한 문제다.
‘천하 맹주’의 꿈과 민족주의
아시아 국가들, 특히 일본을 비롯한 한국 홍콩 타이완 싱가포르 등이 1970~80년대에 놀라운 고도성장을 이뤘다. 그 원인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서구 학자들과 언론들은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이들은 대개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성장이 이 지역의 문화적 공통성, 특히 유교 전통에 뿌리를 둔다고 보았다. 한편 이런 논의를 토대로 일부 학자들은 막스 베버의 ‘문화론’에 입각해 유교가 동아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주된 원동력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곧 ‘유교자본주의론’이다.
이 논의는 현대신유가의 전통을 계승한 학자들, 특히 구미에서 활동하는 화교 학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심화됐다. 그런데 1997년 금융위기가 아시아를 강타하자 아시아적 가치나 유교자본주의가 도리어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반전이 일어난다. 한때 동아시아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주목받던 가족주의, 협력적 인간관계,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유대, 조직에 대한 충성심 등이 이번에는 망국적인 족벌자본주의를 키우는 토양이자 관료주의를 심화하는 요인으로 비판받기 시작했다.
사실 그 출발 단계부터 ‘아시아적 가치’나 ‘유교자본주의’ 이론은 거센 반대에 직면했다. 우선 경제발전에서 문화적 요인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세계 경제체제의 구조나 변동에 대한 분석을 빠뜨렸다. 둘째, 유교의 특정 요소를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특정 요소에 꿰맞춰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풀이한다. 셋째, 개발독재와 국가지상주의를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다. 기업과 국가를 ‘가족’의 문맥으로 해석해 ‘계급화해’와 ‘조화사회’의 구호를 만들어내지만 이는 사실상 기업주와 국가권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넷째, 동아시아 문화를 ‘유교’라는 단일하고도 결정적인 요소로 단순화하는데, 이는 동아시아 문화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무시하는 위험하고도 추상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중국이 직면한 실존적 상황에서 볼 때 ‘유교문화권’이나 ‘유교자본주의’ 등의 담론은 분명한 현실적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중국의 ‘국학’이다. 지금 온갖 종류의 동아시아 담론이 중국 학계로 빨려 들어가 ‘국학’으로 재창조되고 있다. 이런 국학은 중국의 현실 문제 해결에 일정하게 기여한다. 이에 관해서는 앞에서 상세하게 설명했으므로 여기서 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중국철학의 태동기부터 집요하게 계속된 국학 탐구가 중화주의 세계관에 뿌리를 둔다는 사실은 다시 지적해야겠다. 그러니 중국의 국력이 무착륙 고공 성장을 계속하는 세기를 맞아 국학 열기가 전에 없이 고조되는 것은 곧 중화주의 세계관의 현대적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천하의 중심이었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중국과 중국인이 지금 유교 종주국의 위상 되찾기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누가 미래의 사상을 열 것인가
중국의 이런 시도가 가깝게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멀게는 인류 문명의 발전과 정신의 진화에 얼마나 기여하게 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지금으로서는 희망적이라기보다 우려되는 바가 더 큰 것이 사실이다. 중심-반주변-주변의 중층적 구조로 이뤄진 근대의 세계체제에서, 동아시아는 ‘반주변’ 내지 ‘주변’에 위치했다. 그곳에서 동아시아의 근대주체들은 중심을 동경하면서도 이에 대항하고, 변방의 이웃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도 이를 억압하는 분열적 증세를 드러냈다. 동아시아 근대의 이런 이율배반은 근대의 중심 밖에서 형성된 ‘변방’ 근대의 전형을 보여준다.
오늘날 동아시아인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 이중적 자기모순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즉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해방되는 것은 물론 동아시아의 이웃들과 호혜적이고 조화로운 평화의 연대를 이뤄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오염된 ‘동아시아’ 내지는 ‘동양’의 거품을 걷어내야 하는데, 그 거품의 상당 부분은 동아시아를 유교라는 하나의 코드 안에 가둬보고 또 그것을 중국의 것으로 환원하는 주장과 관련돼 있다. 중국이 이런 독단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이념에 몰두하는 것은 분명 불길한 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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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중국은 과연 동아시아 여러 민족과 국가의 친근하고 든든한 이웃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시대착오적인 ‘천하 맹주’의 옛 기억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선택은 중국의 몫이지만 그 행로에서 동아시아 다른 국가의 태도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특히 어느 때보다 사상과 문화의 역할이 중요하다. 중국이 사상과 문화의 영향력을 앞세워 대국의 길로 가려 하는 만큼 이에 대응하는 사상과 문화의 저력을 충분히 비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비단 중국 때문만도 아니다. 바야흐로 21세기의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누가 주도하느냐를 놓고 전세계에서 치열한 각축이 벌어지는 시점이다. 여기서 우리의 사상과 문화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답변은 독자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겠으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부분이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중국도 중국이지만, 실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사상과 문화의 진흥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