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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속에 스스로를 유배한 ‘고독한 남자’

‘이상한’ 정치인, 섬 같은 국회의원 조순형

원칙 속에 스스로를 유배한 ‘고독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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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짜 남자는 힘센 자가 아니다. 순정을 지키는 자, 오래 견딜 줄 아는 자, 위기 앞에 정직한 자다.
  • 조순형은 진짜 남자다.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했고, 소신껏 살기 위해 외로움을 자청했다. ‘정치력’이 부족해 실세가 되지 못한 그는 대신 신뢰를 얻었다. 국민이 밥 한 그릇 사고픈 정직한 국회의원이 됐다.
원칙 속에 스스로를 유배한 ‘고독한 남자’
여의도의 4월은 꽃 반 사람 반이다. 1년 볼 꽃을 하루에 다 봐버리겠다는 듯, 강둑 메운 사람들의 표정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비장하게 사는 데는 이골이 난 우리 아닌가. 꽃놀이패에 휩쓸려 가다 보니, 그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비장한’ 곳, 국회가 코앞이다.

봄 냄새에 숨 한번 깊이 담근 후 실내로 들어선다. 국회도서관. 5층 의원열람실은 한가하기가 밥 때 지난 청요리집 같다. 안쪽에서 노신사 한 명이 느릿느릿 걸어나온다. 조순형(68·민주당) 의원이다.

약속시간을 한참 어긴 주제라 안 그래도 미안한데 인사하는 얼굴에 웃음기가 없다. ‘미스터 쓴소리’ ‘여당 속의 야당’이라는 평을 하도 많이 들어온 터라 그저 그런가보다 한다. 꼬장꼬장한 동네 어른치고 웃음 많고 말 많은 이 없지 않은가.

자리에 앉자 첫 마디가 “나 같은 사람을 뭘 보러 오셨어요”다. 그런데 이때 얼굴에 슬금 번지는 미소가 뜻밖이다. 계면쩍은 듯 뾰로통한 듯, 낯선 손님 앞에 선 아이가 엄마 치마꼬리 잡고 늘어지며 웃는 바로 그 웃음이다. 웅얼웅얼 낮은 목소리에는 서울 토박이 특유의 ‘예스런 정중함’이 묻어 있다. 그러고 보니 얼굴 대한 몇 분 동안 한번도 눈을 맞추지 못했다. 무뚝뚝한 시선은 탁자 위로, 창문 밖으로, 마주잡은 두 손 위로 하릴없이 허둥거린다. 소파에 푹 묻어 앉지도 않는다. 딸뻘이나 될까 한 사람 앞에서, 지금 이 노신사 쑥스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선량의 사표인가 외곬의 별종인가



“저는 뭐 한 일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고, 그저 보통 사람이에요. 보좌관이 어떻게 약속을 잡았나본데,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안 하고 싶어요. 전 정말 보여드릴 게 없어요.”

대안이 없다 했더니 “허… 참…” 하며 난감해한다. 헐뜯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허 참, 이상한 정치인이다.

이 ‘이상한’ 정치인은 그러나 벌써 5선을 자랑하는 관록의 국회의원이다. 유석 조병옥 박사를 아버지로, 조윤형 전 국회부의장(작고)을 형으로 둔 ‘정치명문’의 후예다. 초선의원 시절부터 ‘대쪽’ ‘영원한 야당’ 소리를 들어온, 그래서 여야를 막론하고 초·재선의원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선배 정치인 중 하나다. 그 해 가장 모범적 의정활동을 펼친 의원에 수여하는 ‘백봉신사상’을 1회(1999년)부터 4회 연속 수상키도 했다(3회는 고사). 시민단체가 뽑은 ‘의정활동 1등 의원’, ‘국정감사 최우수의원’으로 선정된 것만 무려 7차례다.

그러나 한편 그는 외로운 정객이다. 같은 야당이라도 험한 길로만 돌아온 덕분에 출마할 때마다 당 이름이 달랐다. 어렵게 싸워 이기고도 진짜 힘 있고 번드르르한 직책은 거의 맡지 못했다. 당 최고위원이니 원내총무니, 선출직에도 몇 번 도전해봤지만 다 실패했다. 평소 그를 존경한다던 젊은 의원들도 정작 표 대결이 시작되면 그를 외면했다. 역시 너무 ‘이상한’ 국회의원이어서일 게다. 그는 골프도, 술도, 청탁도, 줄서기도, 지구당 관리도 잘 안 한다. 돈도 없고 계파도 없고 말주변도 없고 친화력도 별로 없다. 이래서야 그 치열한 총선에서 5차례나 승리했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273명 중 섬처럼 외떨어져 있는 별난 중진(重鎭) 조순형. 그는 ‘진정한 정치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우리 시대 선량(選良)의 사표인가, 아니면 현실정치에 적응 못한 외곬의 온실 속 이상주의자인가.

■ 첫 번째 날

조의원은 우익 독립운동가이자 1960년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낸 유석 조병옥 선생(1894~1960)의 3남2녀 중 막내다. 조부는 유관순 열사와 함께 아우내장터 만세사건을 주도한 조인원씨다.

유석의 고향은 충남 천안시 병천면이지만 조의원은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즈음부터 집안 살림이 극도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부부가 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유석의 반일노선 때문이었다.

“선친께서는 두 번에 걸쳐 5년간 옥살이를 하셨어요. 고생이 없을 수 없었겠죠.”

설명은 담백하기만 하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느냐고 물어도, 그저 “자녀를 위해 희생을 많이 하셨다”는 정도로 입을 닫고 만다.

유석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인텔리였다. 숭실전문·배재전문 등에서 수학한 후 도미(渡美), 콜롬비아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조의원의 어머니 노정면 여사(작고)도 이때 같이 유학생활을 했다. ‘부부란 비슷해야 한다’는 미래의 시아버지와 정혼자의 강력한 지원 덕분이었다. 노여사의 학비는 양가가 반씩 부담했다. 4년 후 노여사가 펜실베이니아주 드류대학을 졸업한 후에야 둘은 혼례식을 치렀다.

―가장 어렸을 때 기억이 뭐지요.

“다섯 살 땐지 여섯 살 땐지, 어머니 손잡고 어딜 갔더니 용수 쓴 사람들이 주욱 지나가고 있더군요. 당시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선친께서 재판받으러 가는 길이었대요. 어머니께서 절 데리고 방청을 가신 거죠.”

―철들기 전 선친이 특별한 분이란 걸 알았나요.

“뭐 하여간 독특했죠. 남다른 데가 있는 아버지라고는 생각했어요. 일정한 직업도 없고, 출입도 들쭉날쭉하고.”

―무슨 특별한 교육 지침을 갖고 계셨을 법도 한데요.

“의식 교육 같은 건 거의 하지 않으셨어요.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도 있고 하니 머지 않아 해방이 되리라는 걸 짐작은 하셨겠죠. 창씨 개명을 안 했는데 그 때문에 형제 모두 학교에서 곤욕을 많이 치렀어요. 큰형님은 징병 때문에 쫓겨다니고, 큰누님은 여학교(경기고녀)를 졸업하고도 소학교 선생 자리 하나 못 얻었지요.”

―어머니 고생이 크셨겠네요.

“어떻게든 가정을 유지하려 애를 많이 쓰셨어요. 나중에는 집까지 차압당해 안국동인가 어디 여관 방 하나를 빌어 살았지요. 모친께서 그곳 상 봐주는 일을 맡아 의식주를 해결했어요.”

급기야는 식량을 좇아 고향 병천으로까지 밀려갔는데,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이 됐다. 조의원이 열살 때였다. 서울 돈암동 네거리 전차 종점에 자그마한 집을 구했다. 부친인 유석은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돈암초등학교를 거쳐 서울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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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나리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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