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후웅씨는 올해 여든된 할머니다. 안동의 광산김씨 유일재(惟一齋) 종가의 종부다. 남편은 6·25 때 월북했다. 슬하에 혈육 한 점 없다. 아니 없지는 않았는데 어려서 홍역에 잃었다. 평생 혼자 살아왔다. 그는 자신을 위해 새옷 한 벌 스스로 산 적 없고 더운 음식 한번 스스로 입에 넣어본 적이 없다. 서른이 좀 넘으면서부터 ‘죽으면 썩을 몸’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는 무상이나 허망을 말하지 않는다. ‘어느덧 백발’은커녕 ‘세월이 어찌 이리 더디 가냐?’고 탄식한다. “왜 살아도 살아도 끝이 안나노?” 할 때가 있고 “내가 아직 칠십밖에 안됐단 말이라? 한 구십 년은 산 것 같은데”라고 천지신명의 계산 착오를 항의하고 싶어할 때도 있다. 김후웅 할머니는 바로 필자의 고모다.
사돈의 팔촌까지는 남이 아니라는 생각, 죽으면 썩을 몸이라는 생각, 그건 유일재(惟一齋) 종부 김후웅씨의 도저한 인생철학이다. 그에게는 유희도 없고 오락도 없었다. 휴식이나 재충전의 시간 같은 건 더구나 필요치 않았다. 그저 눈만 뜨면 일을 했다. 잠자는 시간을 따로 여퉈놓지도 않았다. 한밤에도 새벽에도 무언가 일거리를 끊임없이 찾아냈다. 바느질을 하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정 할게 없으면 콩바가지에서 썩은 콩이라도 골라내야 직성이 풀린다. 그의 일에는 목적이 없다. 돈을 벌기 위함도 성취감을 노린 것도 아니다. 다만 죽으면 썩을 몸을 재우거나 놀려두는 것이 너무도 아깝고 안타깝기 때문이다.
죽으면 썩을 몸
김후웅씨의 철학에 ‘죽으면 썩을 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반대되는 사상이 또 하나 있다(하긴 그는 사상이란 말이 딱 질색이다. 남편이 사상이란 괴물 때문에 북으로 넘어가버렸다고 여기니 그럴 만하다). 그건 신외무물(身外無物)이라는 이데올로기다.
추운날 옷을 얇게 입은 사람을 만나면 그는 펄쩍 뛰면서 목에 건 수건을 벗겨서 걸어준다 “날 추운데 몸을 얼려놓으면 그 냉기가 3년을 가니더, 신외무물인데 왜 요량없이…” 하며 혀를 차고 누가 행여 끼니때를 놓쳤다고 말하면 “그라면 창주(창자)가 말라버리니더. 신외무물이지 딴 게 뭐가 중하다고…”하면서 팩 우유라도 하나 사와서 먹이지 못해 안달한다.
그러나 그 신외무물은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언제나 타인에게만 해당되는 원칙이다. 스스로의 몸은 ‘죽으면 썩을 몸’이고 다른 사람의 몸만 ‘신외무물’이다. 김후웅씨는 일생 ‘죽으면 썩을’ 자신의 몸을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서 ‘신외무물’인 다른 사람의 몸을 돌보며 살아왔다.
상반된 그 두 가치가 충돌을 일으킨 적은 한번도 없다. 갈등 또한 없었다. 자신의 몸을 남의 몸과 저만치 분리하는 태도를 뭐라고 이름붙여야 할까. 희생이라기엔 너무 자발적이고 겸손이란 말은 너무 여리고 자학은 영 개운치가 않고 사랑이라기엔 쓸쓸하고 허무라고 불러봐도 적절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그에게 지난해 경천동지할 변화가 생겼다. 50년이 넘게 ‘죽으면 썩을 몸’을 각성하고 살아온 그가 여든 다된 나이에 갑자기 인생에 애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는 전화가 왔다. “야야, 통일이 되기는 될라?” “언제 돼도 되기야 되겠지요.” “내가 통일될 때까지 살아낼라?”
통일. 그 애매모호한 추상, 그러나 그것이 이제 그의 인생의 구체적인 목표가 되었다. 김후웅씨가 새삼 통일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 것은 전쟁 전에 헤어진 남편이 평양에 살아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확인한 건 한참 전이다. 남북공동성명, 이산가족 상봉, 적십자회담, 북한 방문단… 그런 뉴스가 있을 때마다 하도 속아 기대조차 않도록 길이 들었다. 그랬는데 작년 2월 드디어 그 남편을 금강산에 가서 만나고 돌아왔다. 실로 54년 만의 만남이었다.
만남의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내복 사고, 상비약 사고, 비누 치약 사고, 달러를 바꾸고, ‘거기 같이 사는 안노인’에게 줄 반지도 하나 샀다. 김후웅씨는 금강산 상봉 현장에서 울지 않았다. 사연 절절한 사람들을 따라가며 비추는 텔레비전 카메라도 이 부부를 오래 주목하지는 않았다. 감격을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