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수아 제라르의 ‘프시케와 에로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보니 단순히 ‘직업’만으로는 ‘내 안의 너무 많은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단지 ‘일’만으로는 실현되지 않는 수많은 자아가 남아 있었다.
어른이 되고 나니 ‘자아의 실현’보다는 ‘자아의 분열’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됐다. 인생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자아는 실현되기는커녕 점점 더 많은 수로 걷잡을 수 없이 분열됐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분열(?)은 ‘일’과 ‘사랑’의 분열이었다. 사실 이 분열은 내가 선택한 분열이라기보다는 외부에서 강요된 분열이었다.
사회는 ‘일’과 ‘사랑’을 동시에 쟁취한 여성을 우대하고, 여성의 본질적인 고민은 ‘일’과 ‘사랑’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라는 가치관을 심어줬다. ‘직업’은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해야 하는 여성의 인간적 한계를 시험하고, ‘사랑’에만 충실하고자 하는 여성 또한 현대 사회에서는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일과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여성에 대한 양가적 시선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강요된 선택의 기로가 여성의 ‘자아실현’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일과 사랑을 모두 조화롭게 성취한다 해도 완전한 자아실현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일’과 ‘사랑’을 다 합친다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삶’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일과 사랑말고도 더욱 복잡하고 다채로운 인생의 고민에 부딪힌다. 일이나 사랑만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인생의 수많은 통과의례를 경험하며 고민하는 여성들에게 힌트를 던져주는 것이 프시케나 자청비 같은 신화 속 여성들의 삶이 아닐까. 그녀들은 현대 사회의 여성들처럼 일과 사랑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 앞에 던져진 ‘운명’과 싸웠다. 자신이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상관없이 자기 앞에 주어진 ‘소명’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인간은 방황할 수밖에 없다. 프시케와 자청비가 평범한 ‘여성’에서 ‘여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이 단순히 자아실현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바꾸고 나아가 타인의 고통까지 치유할 수 있는 여성적 에너지, 곧 남성에게 결여되기 쉬운 아니마(anima)의 실현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해결해나가야 한다. 이것을 분별(sorting)이라고 말한다. 가정에서 어머니나 아내의 도움 없이 되는 일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양말 한 짝은 어디 있어?’ ‘준비물이 없어’라는 식으로 말이다. 가정에서 분별이 필요할 때 남성은 여성에게 간다. 남성은 흔히 세상사 같은 중요한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정에서 질서를 찾는 문제를 여성에게 미룬다. 그러면서도 남성은 여성에게 원래부터 골라내고 분별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로버트 A. 존슨 지음, 고혜경 옮김,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 동연, 2006, 91쪽
2 여성의 ‘빛’을 두려워하는 남성들
남성의 무의식에는 아내가 자기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그저 동의하기를 바라는 부분이 있다. 결혼을 바라보는 남성의 태도는, 자신을 위해 돌아가야 할 집은 필요하나 그 집이 골칫거리는 아니어야 한다는 식이다. 남성은 다른 일에 몰두할 때 집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여성은 남성의 이런 측면을 발견하게 되면 큰 충격을 받는다. 여성에게 결혼은 모든 것에 대한 서약이다. 그러나 남성은 그렇지 않다. 자신에게는 결혼이 삶의 전부였는데, 남편에게는 삶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며칠간 울었다는 여인을 만난 적이 있다.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 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