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여의도 입성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빨강이든 파랑이든 색깔 진하게 가져야”

  • 글: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4-05-27 17: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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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성당원제, 정책 차별성, 1인2표제가 총선 성공요인
    • 당 강령 과격한 건 사실…그러나 헌법 위배라고 보진 않아
    • 부유세는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 위한 사회안전망 재원
    • 능란한 비유법은 노동자 설득과정에서 익힌 수사학
    • 사회주의 꿈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 같은 종자
    여의도 입성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민주노동당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 한양빌딩 4, 5층을 중앙당사로 쓰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영등포시장 공판장으로 옮겨가고 한나라당이 천막당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당사만 놓고 보면 민주노동당이 제일 버젓하다. 노회찬(魯會燦·48)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당사 쇼’를 한다”고 평가절하했다.

    한양빌딩은 과거 새정치국민회의의 당사였다. 권영길 대표의 방은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쓰던 방이다. 몸이 불편한 DJ가 사용하던 특수화장실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건물주가 노 총장에게 “DJ가 여기 있다가 대통령이 됐다. 터가 좋은 건물”이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터가 좋긴 좋은 모양이다. 민주노동당은 창당(2000년 1월30일) 4년여 만에 의석수 10석을 차지하며 제3당으로 부상했다.

    민주노동당 당사의 집기는 하나같이 작고 검소하고 실용적인 것들이다. 노 총장은 약속시간보다 20분 가량 늦었다. 사무총장실에 부속실 같은 것도 없고 노 총장 방에서 기다리는 동안 ‘손님’에게 물 한잔 내놓는 사람도 없었다. 무슨 일로 왔는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문 밖이 시끄러워 내다보니 당사를 찾은 한 당원이 당직자에게 “야 실장이면 다야. 무슨 벼슬하는 줄 알아”라며 언성을 높였다. 육탄전 직전에서 멈췄다. 당직에 대한 존경이나 예우 같은 것은 없는 당이라는 것을 잠깐 동안에 체험할 수 있었다.

    “국회의원이 최종목표 아니다”

    노 총장은 4·15 총선기간 TV에 민주노동당의 간판 토론자로 나서면서 일약 스타로 떴다. 친구들과 저녁 먹는 자리에서도 사인받으러 오는 사람이 줄을 서 “자존심 상해서 다시는 너하고 저녁 안 먹겠다”는 핀잔을 듣는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정당득표율을 13.1%로 끌어올리는 데는 노 총장의 역할이 컸다. ‘노회찬 국회보내기 운동본부’라는 인터넷 사이트도 생겼다. 민주노동당 주변에선 노 총장이 비례대표 7번이었다면 전국구에서 7번까지 당선되고 끝났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비례대표 의석배분기준(유효득표의 3.0%)에서 0.179 %가 부족해 ‘10선(選)’의 꿈이 깨졌다. 노 총장은 자민련이 의석배분에서 배제되면서 개표 막판에 당선이 확정됐다.

    -4월15일 저녁부터 16일 새벽까지 비례대표 의석을 놓고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밤새 엎치락뒤치락했는데요. 잠을 제대로 못잤을 것 같습니다.

    “당선되면 한번 포부 있게 일해보는 거고, 안 될 경우에 대비해서도 마음 정리를 빠르게 했어요. 안 되더라도 내가 선거과정에서 얻은 게 많고, 우리 당의 현실로 볼 때 여러 역할을 해나가야 하니까요. 우리가 일을 궁색하게 진행했지만 포부가 크고 목표는 높은 곳에 있습니다. 국회의원 되는 게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창당 4년 만에 의미 있는 승리를 이끌어낸 요인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첫째 당 운영에서 진성(眞性)당원 제도를 택해 차별성을 보여줬고 깨끗한 정당이란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습니다. 둘째는 정책의 차별성입니다. 아직까지 일각에 민주노동당 정책에 대한 거부감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50~60% 지지를 목표로 했던 건 아닙니다. 초기에 다른 당과 현실적 차별성을 만들어내 지지세력을 규합하는 데 성공한 거죠. 사회주의냐 사민주의냐를 따지는 이념적 차별성은 공허하거든요. 부유세나 무상교육, 무상의료처럼 실생활과 관련 있는 정책적 차별성으로 독자영역을 구축했습니다. 우리는 탄핵문제와 관련해 열린우리당과 같은 입장을 취했음에도 2중대란 얘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민주노동당은 확실히 다르다는 인식을 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죠.

    셋째는 1인2표제입니다. 1인2표제는 우리가 위헌소송을 내 쟁취한 법률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진보정당이 발전하는 데 비례대표 정당투표제가 크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간 1인2표제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를 했습니다. 정당투표제가 처음 시행된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8.23%를 얻었습니다. 1인2표제로 광역의회 전체의석의 10%를 선출하기 때문에 다른 당에서는 거의 관심을 안 뒀어요. 우리는 거기에 목숨을 걸다시피 해 8.23%를 얻고 광역의원 9명(비례대표)을 당선시켰습니다. 남이 보기에 전국적으로 시의원, 도의원 9명을 확보한 것에 불과했겠지만 우리로서는 일종의 라이선스를 얻은 셈이 됐죠. 제3당 지위를 얻음으로써 국고보조금을 받았고 그 결과 대통령선거 때 5% 이상 얻은 정당이 참여하는 방송토론에 권영길 후보가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전국적인 정당으로 알려지게 됐고요. 어차피 지역에서 몇 석 안 나온다고 봤기 때문에 정당득표를 선거운동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탄핵풍이 없었다면 민주노동당 의석이 더 늘어났으리라 생각합니까.

    “사실 탄핵안이 가결된 날 우리는 심각한 위기를 느꼈어요. 지지율이 올라가다가 탄핵 때문에 휘청거렸습니다. 나중엔 극복됐지만…. 탄핵이 없었더라도 이 정도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열린우리당은 이번 총선을 통해 과반 제1당으로 약진했지만 영남에서 의미 있는 의석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한나라당은 호남 충청에서 참패했다. 민주당과 자민련은 이번 총선에서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든 지역당이 됐다. 지역에 관계없이 전국에서 고른 득표율을 보였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전국당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이번 총선에서 우리 선거의 고질인 지역주의가 사라질 단서가 보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바로 정책정당끼리 붙는 겁니다. 보수와 진보정당이정책으로 대결할 때 지역주의의 벽을 깰 수 있습니다. 지역주의는 국민이 틀어쥐었다기보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조장한 측면이 강합니다. 지역주의가 쉽게 없어지지는 않겠지요. 다른 대안이 계속 스며들어 그 부분이 넓어지고 지역주의의 비중은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탈지역주의, 정책 중심, 정체성 중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빨강이든 파랑이든 색깔을 진하게 가져야 합니다.”

    -보수적인 인사들은 지역갈등보다 보혁대결이 더 위험하고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걱정하던데요.

    “지역갈등이 겁날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무력충돌로 발전하지는 않았잖아요. 보혁(保革)대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국가들을 봐도 다 보혁구도잖아요. 전세계에서 보혁구도가 아닌 나라는 미국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보혁으로 감으로써 정책 중심의 투표가 이뤄집니다. 우리의 지역주의는 수십 년간에 걸쳐 형성된 지역 카리스마와 관련돼 있었거든요. 이번에 그게 다 제거됐기 때문에 지역주의가 복원되기는 어렵습니다.

    박근혜씨가 영남을 YS만큼 대표할 수 있을까요. 아니거든요. 마찬가지로 호남에서 한화갑씨가 DJ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거든요. 지역을 묶어주던 인격체가 없으므로 지역주의가 재생산되지 못하는 거죠. 오랫동안 형성된 문화가 그냥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점점 완화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 봅니다. 그 빈 공간에 보혁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계층의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것처럼 덮어놓을 수는 없죠. 드러내놓고 치료할 시기라고 봅니다.”

    -꼬박꼬박 당비를 내는 당원이 국회의원 후보와 당 대표를 선출하는 진성당원 제도는 민주노동당이 처음 시도했는데 열린우리당도 벤치마킹을 하더군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민주노동당이 처음 발명한 제도는 아니죠. 민주노동당도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수입했습니다. 우리 당은 국회의원 한 명 없이 당을 만들어서 4년을 버텨온 독특한 정당입니다. 명망가도 없고 돈도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진성당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 있는 자 들으라’

    이쯤해 총선 이야기를 접고 노 총장의 삶의 이력을 더듬어보는 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촌철살인의 비유와 부드러운 토론술로 스타가 된 노 총장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고 이 나라가 지향할 사회체제에 관해 어떤 생각의 틀을 갖고 있는 사람일까.

    온라인과 오프라인 자료들을 뒤져봐도 그의 성장기와 관련한 기록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경기고를 다니며 유신반대 유인물을 제작하고 첼로를 연주할 줄 알며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한 뒤 용접기술을 배워 공장에서 일한 위장취업 1세대 인물. 그를 둘러싸고 ‘위험한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에서부터 ‘균형감각을 갖춘 운동가’라는 찬사가 엇갈린다.

    노 총장은 부산에서 태어나 초량초등학교와 부산중학교를 나왔다. 부모는 함흥 출신으로 피난민 생활을 하다 만나서 결혼했다.

    아버지는 북한에 있을 때 원산도서관에서 일했다. 만주로 징병가는 열차 안에서도 하이네 시집을 볼 정도로 시를 좋아하던 문학청년이었다. 노회찬의 ‘회’자는 항렬이고 ‘찬’자는 아버지가 좋아하던 시인 이찬(월북)에서 따왔다. 어머니는 북한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아버지는 월남 후 부산에서 제약회사에 다녔다. 피난민촌에서의 살림은 중산층 이하였다. 노 총장 위로 누나가 있고 밑으로 남동생이 있다.

    “집안 분위기가 생활수준과 무관하게 문학과 예술을 애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문학과 예술이 밥 먹여주냐고 말할 때 부모님은 밥을 덜 먹더라도 문화생활을 해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두 분은 사글셋방에 살면서도 오페라를 보러갈 정도로 예술을 사랑했습니다.”

    노 총장은 중학교 1학년 때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부모는 학업성적이 좋아야 한다는 얘기보다 베토벤의 ‘운명’을 더 들으라는 얘기를 했다. 중학교 때는 부산시향 첼로 수석주자 배종구씨에게 배웠다. 경기고에 다닐 때는 음악선생의 소개로 국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주자 양재표씨에게 사사했다.

    그는 1973년 경기고 1학년때 정광필군(대안학교 교장)과 둘이서 유신반대 유인물을 제작해 살포하는 사고를 친다. 제목을 성경 구절에서 따와 ‘귀 있는 자 들으라’로 했다. 첫머리에 서울대 4·19 선언문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를 인용한 뒤 격렬하게 유신체제를 비판했다. 필적이 드러날까봐 등사기를 사용하지 않고 청타집에서 16절지 양면에 인쇄를 했다.

    여의도 입성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룰라 브라질 대통령 포스터를 배경으로 선 노회찬 사무총장.

    ‘귀 있는 자 들으라’라는 제목은 서예를 하던 같은 반 이종걸군(열린우리당 의원)이 큰 글씨로 썼다. 둘이서 밤에 전교생의 책상 속에 일일이 넣고 다녔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1973년 11월 경기고는 이 사건으로 조기방학했다. 중앙정보부의 막강 수사력으로도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다. 1974년엔 경기고에서 유신반대 데모가 일어났다. 다행히 든든한 배경을 가진 동문들이 감싸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노 총장은 대학입시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방과 후에는 흥사단이나 정당을 찾아가고 돈이 생기면 청계천 고서점가에 들렀다. ‘사상계’를 읽고 막판엔 레닌까지 탐독했다. 그는 데모를 하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데모 잘하던 대학이 서울대와 고려대였다. 그는 서울대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재수를 했다. 1차 서울대에 떨어지고 2차 대학에 붙었지만 입학하지 않았다.

    재수생시절부터 성북경찰서 담당형사의 감시를 받았다. 친구들이 대학에 다니며 감옥에 드나들기 시작할 때였다. 재수생 신분이면서도 대학생들과 서클을 만들어 유신반대 운동을 했다.

    3수를 하던 중 입대영장이 나왔다. 신길동사무소에서 1년 반 방위복무를 마치고 대입 공부를 했다. 이번엔 붙는 쪽으로 선택해 고려대 정외과에 합격했다. 고등학교 동기생들은 76학번이지만 그는 3년 늦은 79학번이다.

    대학교 4학년 때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기아자동차 생산직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예비군 관계로 대학생임이 밝혀져 탈락했다. 평생 노동자로 살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1982년 학력을 중졸로 속이고 영등포기계공고 부설 청소년직업학교에 들어가 용접기술을 배웠다.

    ‘왜 이 길이냐’

    2급 용접기능사 자격을 취득하고 독산동 대림보일러에 취직했다. 산업용 보일러를 제작하는 회사였다. 보일러는 용접 부위를 엑스레이로 찍어 계량검사를 할 정도로 치밀한 용접이 필요하다. 기능사 자격증 덕에 일당 5000원을 받았다. 일반 근로자들이 고작 1500원 받을 때였다.

    대학생이 학력을 속이고 생산직 근로자로 취업해 노동운동을 하고 근로자를 의식화하는 위장취업 현상이 공안당국에 포착돼 제3자 개입(지금은 폐기됨) 혐의로 구속되기 시작한 것은 1984년부터다. 그는 1981년도에 공장에 취직한 위장취업 1세대다. 1983년부터 제5공화국의 현실에 절망한 대졸자가 차떼기로 공장에 몰려들었다. 그는 1985년 인천에서 위장취업자 150명을 모아 서클을 만들었다.

    그가 용접공으로 일하는 것을 부모가 안 것은 1985년이었다. 형사들이 가끔 부산 집에 찾아오니까 아들이 평탄하지 않은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용접일을 한다고 고백하자 놀라는 기색이 완연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꽥하고 소리를 질렀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냐.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 기여할 수도 있지 않느냐. 불쌍한 사람 돕는 게 그 길밖에 없느냐며 반대했습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워낙 한다 하면 하는 애로 각인돼 있으니까 못 말렸죠. 한번 격렬하게 반응한 후로는 사실상 용인해 주었어요. 어머니가 2, 3년 전에 신문기사 스크랩북 10권을 주더군요. 제가 용접일을 한다고 고백한 날로부터 10년 동안 신문에서 노동문제 기사를 오려 모은 것이죠. 스크랩북 표지에 ‘왜 이 길이냐’는 제목이 붙어 있더라구요. 아들이 노동운동을 한다니까 왜 그 길이냐고 연구하신 거죠. 국회의원에 당선된 날 아침 전화통화를 했는데 아버지(노인모·80)는 좋아하셨지만 어머니(원태순·75)는 여전히 긴장하셨어요.”

    1982년 수배를 받아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될 때까지 7년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그는 007처럼 도망다녔다. 형사들이 자취방을 덮쳤을 때 지붕을 타고 달아났다. 경찰이 체포된 친구를 이용해 덫을 놓았을 때도 친구 뒤에 형사들이 깔려 있는 것을 먼저 발견하고 튀었다. 친구들은 경찰에 끌려가 ‘노회찬의 소재를 불라’는 압박과 고문을 당했다. 1985년 인천 5·3사태 때는 비합법 조직을 끌고 참여했다.

    1987년 6월에는 인민노련을 만들어 비슷한 조직들을 통합했다. 1990년 민중당이 창당될 때 장기표 이우재 김문수 이재오가 간판이었지만 지구당 위원장의 80% 이상이 인민노련에서 나왔다. 그는 민중당이 만들어지는 과정엔 참여했지만 민중당이 창당돼 1992년 4월 해산될 때까지 감옥에 있었다.

    “민중당이 1992년 총선에서 참패하고 나서 ‘간판’들은 ‘진보정당 그만하겠다’며 나갔지만 지구당과 중앙당 집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민중당 잔여조직을 바탕으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만들어 진정추의 대표가 됐습니다. 그 뒤 연세대 오세철 교수가 하던 민중정치연합과 통합해 진보정치연합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진보정당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썼습니다. 진보정당이 과거에 왜 실패했는가. 첫째로 민주노총 같은 대중조직을 끌어들이지 못했습니다. 둘째 운동권의 고질적 분열입니다. 그래서 진보정당이 제대로 만들어지려면 민주노총을 데려와야 하고 전국연합(NL)을 동참시켜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1997년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삼았습니다. 민주노총 진보정치연합 전국연합 세 조직이 ‘국민승리21’을 만들고 권영길 후보를 내세워 대선을 치렀습니다. 이것이 민주노동당으로 발전한 거죠.”

    “사회주의는 역사의 유물 아니다”

    -얼마 전 TV에 나와 정형근씨와 토론하는 것을 인상 깊게 시청했습니다. ‘인류문명 5000년 중에서 자본주의는 200년밖에 안 된다. 자본주의가 완벽한 체제는 아니지 않느냐. 우리는 자본주의 다음 단계의 사회를 만들어보려 하는데 그것을 사회주의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더군요. 노 총장이 말하는 ‘다음 단계의 사회주의’는 동구(東歐)와 소련에서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 혹은 잔명(殘命)을 보전하고 있는 쿠바나 북한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건가요.

    “다르죠. 그들도 나와 같은 이상을 품고 시작했지만 실제로 만들어진 사회는 민주주의와 자유가 부족했습니다. 시장을 배제하고 국가통제만으로 경제를 꾸리는 비현실성이 드러났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히틀러 독재에 버금가는 공포정치를 불렀습니다. 스탈린 공포정치도 있지 않았습니까.

    국가계획경제의 한계도 드러났습니다. 사실 계획 없는 경제란 없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에 자본주의 국가가 더 많은데 폐쇄적으로 운영되다 보니 문제가 생긴 거죠.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는 제도도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켰습니다. 특히 개인숭배는 아주 잘못된 거죠. 원래 사회주의는 그런 거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건데 적지 않은 나라에서 개인숭배가 극심했습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철권통치에 환멸을 느낀 학생들 사이에 급속도로 좌경화가 확산됐습니다. 그러다 민주화가 진전되고 동구와 소련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자생적 사회주의자가 전향서도 쓰지 않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노 총장은 동구권이 무너질 때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지금 무슨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심각하게 논의했었으니까요. 많은 사람이 동구 사태를 보며 ‘사회주의 안하겠다면 남아 있을 이유가 있느냐’며 진짜로 전향서도 안 쓰고 떠났습니다. 인민노련 당시 19명이 감옥에 갔는데 그중 4명이 지금 판사,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젊은이들의 좌경화는 전두환 체제가 상당 부분 원인제공을 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체제가 아니었으면 사회주의운동이 없었겠느냐. 그건 아닙니다.

    나도 한때 소련과 북한에 대해 호감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서는 더 일찍 실체를 알게 됐고 소련이 망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곤란한 사회라고 규정했습니다. 소련과 북한을 사회주의의 이상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예요. 인간이 만들어놓은 사회주의는 실패할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 이상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아요.

    사회주의 몰락의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답사까지 다녀왔습니다. 1989년 12월 구속중일 때 수사관들이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며 TV뉴스를 보여줬습니다. 그 다음에 소련도 무너졌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바로 동구와 소련에 가보고 싶었지만 여권을 안 내줘 못가다가 1996년에야 러시아와 독일에 갔습니다. 나름대로 훑어보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네 가지 잘못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는 겁니다.”

    -동구와 소련의 몰락과 함께 인류를 대상으로 한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난 것 아닐까요. 봉건주의가 역사의 유물이듯 사회주의도 역사의 유물이 된 것 아닙니까. 사회주의에 아직도 미련을 갖는 사람은 실패를 인정하는 데 따른 수치심 허탈감 그리고 희생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새로운 합리화를 모색하는 게 아닐까요.

    “역사의 유물이라고 할 수는 없죠. 소련사회에서는 유물이 됐지만 사회주의 전반이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자본주의도 역사의 유물입니다. 사회주의의 경직성에 대해서는 나도 날카로운 비판자입니다. 심지어 레닌도 관념적 사회주의자보다는 합리적 자본주의자가 더 낫다는 글을 썼습니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전부 다 완벽하고 깨끗하고 합리적이고 머리 좋은 건 아닙니다. 게으른 사람, 꼴통, 이중인격자가 있는 거죠. 킬링필드의 폴 포트도 사회주의자입니다. 사회주의가 인민을 망하게 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의 꿈 자체가 원래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 총장의 방에는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 룰라는 세 번 떨어지고 네 번째 도전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룰라는 세 번째 떨어지고 나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노선을 포기하고 노동당의 강령을 사회민주주의로 고쳤다. 페르난드 엔리케 카르도수 대통령에게 불만이 쌓여 있던 브라질 유권자들은 노동당 강령이 온건노선으로 바뀌자 2002년 대선에서 룰라에게 승리를 안겨줬다.

    -룰라 사진을 방에 걸어놓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2002년 15명을 이끌고 단장으로 브라질 대선을 참관했습니다. 룰라도 만나봤죠. 경제수준, 군사독재의 경험, 노동운동을 뒤늦게 시작해 정당을 만든 과정이 약간의 시차가 있을 뿐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룰라 사진을 가리키며) 저게 포스터입니다. 홍보 정치기술을 연구하기 위해 홍보물을 몽땅 가져왔거든요. 소련이 망하고 전세계에서 본뜰 사회주의 정당 모델이 없는데 그나마 사회주의적 이상을 갖고 있고 우리와 비슷한 게 브라질 노동당입니다.”

    -정형근 의원과 벌인 TV토론 뒤에 반응이 어땠습니까. 방송사의 기획 의도는 대표적인 공안검사와 대표적인 공안사범을 붙여보자는 것이었겠지요.

    “나는 정 의원이 인권을 탄압한 사람이라 보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본인이 직접 고문하지는 않았지만 고문을 지시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토론의 형태를 수비형으로 끌고 갔어요. 왜냐하면 정 의원 입에서 나오는 얘기들도 민주노동당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의 하나일 테니까요. 그래서 해명하는 자리로 활용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를 꺾으면 통쾌할지 모르지만 당에 돌아오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수비형으로 하다 보니 정 의원을 왜 확실하게 공격하지 않았냐는 내부 비판을 받았습니다.

    시청률이 엄청 오르자 MBC에서 한번 더 할 테냐고 물어 나는 OK했죠. 정의원도 OK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당에서 난리가 났어요. 정 의원이 하겠다는 의사를 굽히지 않자 한나라당이 MBC를 공격했어요. 한나라당에 적대적인 MBC가 한나라당 이미지를 ‘정형근’으로 덮어씌우려는 의도라고 비난했습니다. 결국 MBC가 손드는 바람에 좋은 기회가 사라졌죠. 참 아깝습니다.”

    -1987년 1월에 ‘살인강간고문정권 타도투쟁위원회’를 만들면서 ‘ㅌ ㄷ’이라는 약칭을 썼던데 ‘ㅌ ㄷ’은 김일성이 1926년 조직했다는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약칭과 같은데요.

    “일종의 장난입니다. 일부 운동권에서 김일성과 관련된 역사를 신앙시했지만 나는 그런 경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어요. 나는 세상에서 PD로 분류됐습니다. NL 친구들은 역사가 김일성부터 시작된다고 말하잖아요. 1919년 3·1운동 때 여덟 살 먹은 김일성 수령이 돌멩이를 던졌다는 게 전기에 나오지요. 말이 안 됩니다. 그런 데 대해 거부감이 일었습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때라 조직 명칭이 ‘타도살인강간고문정권’이어서 그냥 약자로 ‘TD’ 또는 ‘ㅌ ㄷ’이라고 한 거예요.

    -김일성을 숭배한 사람은 아니었단 말인가요.

    “김일성을 숭배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ㅌ ㄷ’을 함부로 쓰면 안 되죠. 불경죄죠.”

    운동권 용어에 생소한 독자를 위해 설명을 곁들이자면 NL과 PD는 1980년대 좌파운동권 내부의 노선을 지칭한다. NL(National Liberation)은 스스로 민족해방파라고 불렀고 공안당국과 반대파에선 주사파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노선 때문이다. PD(Proletariat Democracy)는 민중민주주의 계열이다. 일종의 사회주의 전단계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1989년부터 2년6개월 옥살이

    -1989년에 감옥에 간 건 무슨 죄목이었나요.

    “여러 사건과 관련돼 수배를 당했습니다. 인민노련 조직 자체가 경찰의 수배를 받았습니다. 인민노련에서 ‘노동자의 길’이란 잡지도 냈는데 잘 나갔습니다. 노사분규에 개입했고요.”

    -어떤 법조문이 적용됐습니까.

    “국가보안법 7조(반국가단체 고무찬양 동조)죠. 나는 법정에서 내가 북쪽을 도왔다는 증거를 대라고 검찰에 요구했죠. 나는 PD라서 북쪽하고 관계가 안 좋은 걸로 알려진 집단에 속했거든요.”

    1989년 12월 구속돼 1992년 4월까지 2년6개월을 살았다. 청주교도소엔 이창복 김현장씨 등 정치범이 20명 가량 수감돼 있었다. 정치범들은 독방에만 갇혀 있지 않고 약간의 자유가 있었다. 거기서 나이 든 축에 속한 노 총장은 학생들을 매우 엄하게 대했다고 말했다.

    “술을 못 담가먹게 하고 바둑도 못 두게 했습니다. 바둑 다섯 판 두면 하루 해가 갔거든요.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는 술을 담가먹었지만 청주교도소에선 먹지 않았습니다.”

    교도소에서 술을 담가먹는 법은 흥밋거리로 한번 소개해볼 만하다. 교도소에서 나오는 빵의 껍질을 벗겨내면 이스트가 섞인 흰살이 나온다. 여기에 차입된 요구르트를 붓고 의무실에서 타온 원기소를 섞으면 제법 알코올 도수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청주교도소에 검사가 찾아와 반성문을 쓰면 집행유예로 풀어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하고 만기출소했다.

    민주노동당의 강령 ‘민주 평등 해방의 새 세상을 향하여’는 정치 경제 통일 외교 국방 노동 여성 농어민 도시빈민 인권 사회복지 보건의료 교육 문화 언론 환경 과학기술 분야에 걸쳐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강령에는 재벌총수 일족의 재산환수와 재벌해체,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사적 소유권의 제한, 한미군사조약 폐기와 미군철수, 주35시간 노동 등 과격한 주장이 많다. 대한민국헌법의 기본이념과 상치된다고 볼만한 대목도 여럿 눈에 띤다.

    -의회에 진출한 정당으로서 과격한 정강정책은 손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격한 건 사실인데요. 헌법을 위배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사적 소유권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헌법에도 국가의 계획과 통제를 허용하고 있어요.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사적 소유권에 어느 정도 제한이 가해지지 않는 나라는 없습니다. 기업 구조조정이나 다주택 소유자 중과세도 사적소유권 제한에 해당됩니다.”

    -민주노동당 지지자 중에 강령을 꼼꼼히 읽었더라면 표를 던지지 않았을 사람도 꽤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찬찬히 강령을 따져 봤으면 표를 안 던졌을 사람도 있을 겁니다. 반대로 우리를 찍지 않은 사람 중에 강령을 꼼꼼히 봤더라면 진짜 민주노동당 찍을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물론 강령이 조금 더 세련될 필요는 있어요. 과격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화장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민주노동당이 사회주의를 꿈꾼다고 해놓고 아직 시장과 소유 문제에서 정교한 프로그램을 만들지 못했거든요. 거친 표현만 있습니다. 현실성 있게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을 흡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어요.”

    사적 소유권 부정하지 않아

    -민주노동당 강령 중에서 소위 ‘부유세’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부자 중에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고 근면하게 노력해서 부자가 된 사람도 많습니다. 부유세는 마치 부자를 죄악시하는 느낌을 줘요. 부자가 투자해 경제가 성장해야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건데요. 강남에 사는 부자들에게 부유세를 매기겠다고 공언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특정지역 주민에게 공포심을 주려는 의도라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부자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강남에 관한 이야기는 정형근 의원이 TV토론에서 ‘민주노동당이 강남 부자 때려잡으려 한다’고 말해 ‘부유세 낼 분들인데 왜 때려잡느냐’고 반론을 펴다 나온 말입니다. 민주노동당 조사에 따르면 한국만큼 부자가 세금을 적게 내는 나라는 없습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때 직장인이 세금을 가장 많이 내고 있어요. 소득이 완전노출되니까.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부유세 개념은 고소득에 대한 누진세율을 다른 나라 수준으로 높여보자는 겁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에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낮은데 사회복지는 더 나은 나라가 꽤 많아요. 월드컵까지 치른 나라에서 한 달에 40만~60만원만 받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유세를 재원으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사회 안전망을 만들어야 합니다.

    종합토지세도 일종의 부유세입니다. 금융부분은 토지만큼 누진세율이 적용되고 있지 않지만 토지는 이미 해결됐다고 봅니다. 종합토지세는 개정할 의사가 없어요. 나머지 부분은 종합토지세 수준으로 누진세를 때리자는 게 부유세 개념입니다.”

    -40대 위기론을 말하던데요. 무슨 의미입니까.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이라고 한 것은 불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역설적으로 그런 말이 나온 거라 생각해요. 40대는 유혹이 가장 많은 시기입니다. 내가 좋아했던 선배들이 대개 마흔을 넘기면서 인생관이 현실적으로 바뀌더라고요. 그 분들 뒤에서 욕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나는 저렇게 안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후배들한테 얘기했어요. 나를 잘 지켜보라는 뜻에서 40대 위기론을 말한 겁니다.”

    -노 총장은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는데 ‘젊어서 사회주의 안 하는 사람은 심장이 없는 사람이고,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사회주의를 하는 사람은 바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많이 듣던 말이죠. 나는 대한민국에서 좋은 교육을 다 받은 사람이고요. 어떻게 보면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다 구경한 사람입니다. 외국도 여러 차례 갔다 왔고….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생각이 더 강해져요.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면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죠. 사회주의 덕분에 자본주의가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지금 자본주의는 온갖 규제 천지거든요. 반대와 비판이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개선된 거죠.

    사회주의의 이상을 갖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 왕정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사람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 자기가 좋아하는 얘기를 하게 해도 될 정도가 됐다고 믿어요. 친북(親北)할 사람은 내놓고 하라고 해도 아마 드물 거예요. 설득력이 없으니까.”

    그의 사무실에는 민주노동당 대표단이 2000년 10월 방북기념으로 받은 돌가루 그림이 걸려 있다. 삼지연에서 바라본 백두산 천지의 모습이다.

    -북한에 가본 적 있습니까.

    “평양과 묘향산에 가봤습니다.”

    -어떻던가요.

    “만감이 교차했죠. 나는 사회주의를 공부한 사람입니다. 교과서에 있는 사회주의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곳은 거기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탈린시대의 계획경제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경제문제가 너무 심각해 기왕의 정책으로는 회복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나는 북한이 어려운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사회주의를 많이 연구해 (북한 실상을) 더 깊이 있게 보았어요. 결론적으로 기존 방식으로는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미국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 살고 있더군요.”

    노회찬 총장은 TV토론에서 숱한 어록을 만들어냈다. 노회찬 어록은 인터넷에서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50년 동안 한 판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어 이제 판이 새까맣게 됐습니다. 이젠 판을 갈아야 합니다.”“한국의 야당은 죽었습니다. 누가 죽인 것이 아니라 자살했습니다.”“열린우리당은 길가다 지갑 주었으면 신고해야 돼요.”“정동영 의장은 사흘 굶어서 4년 잘 먹자는 겁니까?”“편파방송 운운하는데 그렇게 자랑스러운 탄핵가결 장면을 방송이 계속 보여주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실생활과 관련한 비유를 잘 하시더군요. 비유법을 능란하게 구사하는 원인을 나름대로 추측해봤습니다. 배움이 짧은 근로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그런 수사학이 발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맞습니다. 노동조합 하면 큰일 날 것으로 아는 사람에게 노동조합의 단결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면서 보통의 경우처럼 말하면 1분도 듣지 않고 가버립니다. 얘기가 쉽고 재미있어야 합니다. 재미 속에 내용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들은 뒤 머릿속에 남는 게 있어야 합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얘기하는 거죠. 그게 우리 활동이었고 직업이었으니까.”

    -약간 촌스러운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은 뭡니까.

    “‘토지’와 ‘장길산’. 둘 다 스무 번씩 읽었습니다. 장길산은 한국일보에 연재될 때부터 읽었고 토지는 현대문학과 문학사상으로 옮겨다닐 때부터 읽었습니다. 외우다시피 했어요.”

    전재산 700여만원, 한달 생활비 60만원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서 비유법이 발달한 거 아닙니까.

    “그분들한테는 못미치지요. 한국 문학작품이 워낙 뛰어나거든요.”

    노 총장은 강서구 등촌동 24평형 아파트에 산다. 1억1500만원짜리 전세다. 재산은 얼마나 될까.

    “빚이 많아요. ‘매일노동뉴스’라는 일간지를 10년 했거든요. 가격을 올릴 수 없어 적자를 봤어요. 부채가 1억원이 넘습니다. 선관위에 후보등록할 때 자산과 부채를 합하니 700여만원 플러스로 나오더군요.”

    -플러스라니까 다행이네요.

    “임기중에 책을 두세 권 써서 빚을 갚을 생각입니다. 플러스 1억원까지는 만들어야죠.”

    -고정수입이 없는데 생활을 어떻게 했습니까.

    “빚을 많이 졌어요. 애가 없어 생활비는 한 달 60만원이면 해결됩니다.”

    -시중에는 부담 없이 운동하려고 일부러 자녀를 안 가졌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아닙니다. 둘 다 늦게 결혼했고 내가 7년간 수배당하다가 감옥 갔다 오니까 첫 애를 갖기엔 너무 늦은 나이가 된 거죠. 아이를 갖기 위해 한약도 먹고 용하다는 병원에 다니며 꽤 노력했어요. 지금은 포기했죠.”

    조선왕조실록 테마로 책 출간

    노 총장의 부인은 여성의전화 조직위원장이고 강서양천지역 여성의전화 대표다. 항간에는 그의 결혼을 둘러싸고 루머가 떠돈다.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일부러 초등학교 학력, 수수한 외모의 여공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다. 노 총장은 강하게 부정했다.

    “결혼이라는 게 한 번 하는 건데요. 이념을 실천하려면 책을 더 읽거나 행동하면 되는 것이죠. 결혼은 한평생 가장 내밀한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자면 첼로도 부숴버려야죠.”

    -지금도 첼로를 연주합니까.

    “아니요. 첼로 연주를 안 한 지 20년 됐습니다. 이번에 갑자기 어느 방송사에서 첼로를 켜보라고 해서 광대처럼 20년 만에 켜보긴 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첼로를 연주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자취방에 살며 노동하고 밤에 들락거리는 사람은 첼로를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는 1988년 12월 33세 때 두 살 연상의 김지선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인천 출생이다. 그녀는 열여섯 살 때 언니의 주민등록증을 갖고 여공으로 취직했다. 21세 때는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란 책의 무대인 삼원섬유에서 노조 부위원장을 했다. 인천에서 5, 6차례 해고를 당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감옥에도 두 차례 다녀왔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조화순 목사 김근태씨(열린우리당 의원)와 함께 일했다. 동일방직사건 때도 외곽 지원에 나섰다. 1978년 여의도 5·16광장에서 부활절 예배를 볼 때 연단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빼앗아 여공들의 현실을 토로하다 붙잡혀 감옥에 갔다. 그녀는 인천노동운동의 누나이자 언니 같은 존재다.

    여의도 입성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노회찬 사무총장의 집무실은 작고 소박하다.

    -위장취업자 중에 좋은 대학 나온 여성도 많이 있었지 않습니까. 거기서 배우자를 고를 수도 있었을 텐데….

    “팔불출인지는 몰라도 내 처는 그런 친구들로부터 대단히 존경받던 사람이었습니다.”

    -프로포즈를 했다가 처음에 퇴짜 맞았다는 것도 사실이겠군요.

    “아내와 함께 운동을 한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과 조화순 목사가 다 미혼여성이거든요. 운동하던 여성들이 결혼하면 평범한 주부가 되는 걸 보고 자기들끼리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결혼을 안한다는 서약식을 가졌다고 해요. 독신주의죠. 거절할수록 이 여성과 결혼해야겠다는 욕망이 강해졌습니다.”

    부인이 분명히 중학교 졸업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결혼하고 나서 뒤늦게 고입검정고시를 준비하겠다고 나서더라는 것이다.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재건중학교 출신이었다. 그는 고입검정고시 시험 보는 날 아내를 태워주러 고시장에 갔다. 10대부터 50대까지 전부 ‘멀쩡하게’ 생긴 남녀가 죽 줄을 서서 걸어오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내는 나중에 대입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노 총장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은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이란 책을 저술해 돈을 좀 만졌다. 그 책은 교보문고에서 5주 연속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10쇄를 했다.

    “인세수입이 정확히 얼마인지 계산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몇 번 나눠받고 당겨 쓴 돈도 있습니다. 여하튼 인세로 빚을 다 갚았습니다. 노트북을 장만하고 처한테도 조금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빚이 쌓여가는 거죠.”

    -조선왕조실록을 다 읽었습니까.

    “망망대해 같은 조선왕조실록을 다 읽으려면 평생 걸립니다. 나름대로 아이디어 기획을 해 60~70개의 테마를 잡았어요. CD 실록을 검색하는 방법으로 책을 썼어요. 시간 나면 두세 권 더 쓰려고 해요. 실록에 재료가 무궁무진하거든요.”

    -보수적인 계층에서는 민주노동당을 싫어하잖아요. 실명을 거론해 미안하지만 단병호씨가 뉴스에 나오면 경계기제가 작동해 TV를 꺼버린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노 총장은 유머가 있어 경계기제가 허물어진다는 거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단병호씨보다 훨씬 위험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2002년 대통령선거 때는 민주노동당 지지도가 4~5%였습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정책 지지도는 22%였거든요. 왜 정책지지도는 22%인데 당 지지도는 4%인가. 민주노동당의 이미지를 정책지지도만큼 올리려면 우리 당에 대한 오해를 풀어줘야 합니다. 불필요하게 과격하거나 너무 비현실적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나는 우리 당 안에서 중간보다 왼쪽에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75%는 나보다 오른쪽에 있을 거예요. 나보다 더 부드러운 사람이 많다는 거죠. 불필요하게 경계심을 발동시키거나 경직된 자세를 극복하는 게 과제입니다.”

    -양복은 몇 벌이나 있습니까.

    “다섯 벌인데 한 벌은 짜깁기를 했고 한 벌은 너무 작아요. 그래서 가용 양복이 세 벌입니다.”

    -동복, 하복으로 구분하면….

    “춘하추동 구분 없는 4계절 양복입니다.”

    -유시민 의원이 캐주얼 차림으로 의원선서를 하려다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는데요. 단병호 당선자는 의원선서할 때 양복을 입을까요.

    “안 입을 거 같은데요. 내가 그 분 양복 입은 걸 최근에 한 번 봤어요.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느라 까만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입었더군요. 정말 그로테스크했습니다. ‘야 저 사람 다시는 양복 입으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얼굴이 전형적인 노동자상이지 않습니까. 사파리를 입으면 그나마 수더분해 보이는데 양복 입으니까 자기 옷이 아니예요. 그래도 지금 사법고시 1차 합격한 딸을 둔 아버지인데….”

    -민주노총이 단병호 위원장 시절에 자주 총파업을 하고 시내 가두행진을 벌여 시민들이 짜증을 냈습니다. 전태일 정신계승대회 때는 새총으로 볼트 너트를 쏘아대고 화염병까지 던졌지요. 격렬한 투쟁방식에 대해 여론이 나빠요.

    “말이 총파업이지 실제로는 총파업이 아니거든요. 실속 없이 상대방을 격앙시키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거죠. 총파업을 남발하는 노선은 문제가 있다고 내가 계속 비판했습니다.”

    -지금 이수호 위원장은 노선이 조금 다르지요.

    “그렇죠. 나도 일찌감치 실속 없는 강성투쟁을 비판한 글을 많이 썼어요. 과거에 전투적 잡지에 그걸 비판한 글을 써서 크게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전투적 조합주의도 문제지만 대기업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이미지가 좋은 모기업은 이른바 ‘5호 담당제’를 실시하고 있어요. 거기에 엄청난 돈을 쓰는 거죠. 과격한 노조를 예방하는 비용이라고 합리화합니다. 한국에서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은 존재에 대한 위협을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어요. 그러니까 극단적인 일이 자주 생기는 거예요.

    삼성그룹에서 수도권 노조담당 임원을 모아놓고 내게 이야기(강연)를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노동조합과 함께하는 경영마인드부터 배우라고 했습니다. 물론 노동운동도 지금 노선대로 계속 가면 어려워집니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도 단순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정규직은 고임금에다 탄력적인 고용조정이 어려우니까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쓰는 거 아닙니까. 정규직의 경직성 때문에 비정규직이 생긴 거죠.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없다고 하는데 실제로 한국은 프랑스보다 노동자 해고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프랑스에선 정리해고 하느니 그냥 쓰겠다고 할 만큼 정리해고가 어렵습니다. 비정규직도 30%밖에 안 되잖아요. 우리나라는 60%입니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조직률이 11%입니다. 이에 비해 프랑스 30%, 독일 40%, 일본 25%입니다. 스웨덴은 조직률이 90%예요. 이렇게 노동운동의 힘이 약하다보니 기업주가 비정규직을 차떼기로 쓰는 데도 막지 못하는 거예요. 비정규직 문제를 모두 정규직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과의 관계에서 수직적인 하청제도에 묶여 있습니다. 중소기업 스스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요. 정부의 지원 또는 대기업의 양보가 필요한 거죠.”

    -한국도 유럽식으로 종국엔 보수·진보 양당체제로 갈 것이라고 보는 겁니까.

    “그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이 약간 왼쪽으로 가고 열린우리당은 4·15 총선 이후 오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에서 영남 지역주의를 빼고, 맨 오른쪽에 있는 분들을 내보내면 열린우리당과 별 차이가 없어요. 열린우리당은 종자가 다른 것처럼 얘기하는데 내가 볼 때는 한나라당과 같은 종자예요. 다만 개혁적인 사람 대여섯 명이 더 있을 따름이지요. 대동소이합니다.

    다만 서로 싸우고 살아온 오랜 역사가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섞이기는 어렵겠죠. 영국에서는 20세기 초에 노동당이 나타나면서 자유당이 망하고 보수당과 노동당 체제로 갔거든요. 영국에서는 열린우리당이 망한 거죠.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는 한나라당이 망하리라고 봅니다. 지난 10년 동안 한나라당의 행태를 볼 때 그렇습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나라당은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나라당 중심으로 보수가 통합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다음 대선에서도 한나라당은 안 됩니다. 내가 보기엔 대권을 잡을 인물도 없어요.”

    “한나라당엔 대권 잡을 인물 없다”

    -한나라당을 감정적으로 미워하는 것 같군요. 근거를 갖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지지세력은 같습니다. 여하튼 보수정당에 표를 던지는 유권자 입장에서 볼 때 한나라당은 퇴행적이에요. 시대를 끌고 나가는 게 항상 진보는 아니죠. 진보든 보수든 능력만 있으면 끌고 나갈 수 있는 거예요. 열린우리당은 별로 가진 것도 없으면서도 시대를 끌고 가잖아요. 작은 걸로 계속 큰 걸 얻어가잖아요.

    그런데 한나라당 쪽을 보면 거꾸로 가고 있어요. 두는 수마다 퇴행적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영남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정당이 43년만에 제1당이 안 됐다는 겁니다. 그쪽이 대권을 놓친 적은 두 번이나 있었지만 원내 제1당을 놓친 적은 5·16 이후 43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나는 이걸 우연한 일로 보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 현상은 계속 굳어져서 대세가 될 겁니다. 한국의 보수진영을 주도하는 세력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상당기간 지속될 겁니다. 한나라당이 미워서가 아니에요. 내가 열린우리당을 더 좋아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박근혜 체제가 들어서고 나서 어디까지 변할지는 모르지만 살아 남으려면 계속 왼쪽으로 갈 거예요. 그리고 열린우리당은 계속 오른쪽으로 가 두 당은 점점 차이가 없어질 거예요. 그러면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먹느냐, 이건 좀더 지켜볼 문젠데 지난 10년을 놓고 관찰해보면 열린우리당쪽이 먹을 거 같다는 거죠. 내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 한나라당 의원 중에 한 분이 영국에서 보수당이 살고 자유당이 죽은 것처럼 한국에서도 한나라당이 먹는다고 말하데요.”

    한나라당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화를 안냈으면 좋겠다. 어디까지나 민주노동당의 분석이고 희망사항일 뿐이다.

    “유시민은 강변 심하고 당파성 강해”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은 TV토론회에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을 함께 오른쪽으로 밀어놓고 민주노동당이 왼쪽을 다 먹으려는 전략이라 말하던데요.

    “맞습니다. 내 시각 자체가 의도적입니다. 그래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전선이 큽니다. 신문기사는 이 전선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메워지고 있죠. 민주노동당과 다른 당과의 전선은 미약하거든요. 우리는 이 전선을 키우려 합니다. 우리는 정치구도를 보수 대 진보로 만들어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거죠.”

    -지난번에 스포츠신문과의 포장마차 인터뷰에서 김근태 김문수 유시민 의원에 대해 언급했다가 물의가 일자 다음날 바로 사과하셨죠.

    “스포츠지 기자가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 하면서 인터뷰하자고 해서 갔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초짜’라서 실수를 한 거죠. 인터뷰 기사가 그렇게 나올지는 몰랐습니다.”

    -유시민 의원에 대해서는 왜 ‘논평할 수 없는 품질’이라고 했습니까.

    “똑똑한 사람이죠.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자유주의적 정치인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강변이 심해요. 당파성도 너무 강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잘못한 것도 있고 잘한 것도 있는 거 아닙니까. 지식인은 잘한 것을 평가하고 잘못한 걸 지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노대통령의 잘못은 무엇이든지 다 논리를 만들어 합리화시킵니다.”

    -여당 소속이다보니 대통령을 변호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그런다면 이해하겠어요. 평소에는 군계일학처럼 하잖아요. 장점이 참 많은 사람인데…. 노무현은 대통령 4년 하고 끝날 사람인데 신처럼 떠받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나는 원래 우상숭배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종교는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는 무종교주의자입니다. 아내는 천주교회에 다닙니다. 아내한테 제발 교회 다니자는 말 하지 말라고 합니다.”

    -종교에 대해 비판적입니까.

    “그렇죠. 경전은 거의 다 읽었어요. 성경 불경…. 탄허스님께 배우러도 다녔습니다. 하지만 학문 내지 교양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죠. 신격화하는 걸 체질적으로 거부하니까요.”

    -평소 자주 하는 말은 어떤 겁니까.

    “어려움이 닥칠 때 ‘잘못돼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냐. 우리가 죽는 것도 겁 안 나는데 뭐가 겁나느냐’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내 철학입니다.”

    -죽기를 겁내지 않는 인생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까.

    “남들 편하게 지낼 때 엄청 고생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고생보다 훨씬 더 큰 행복도 많았습니다. 여한이 없어요. 20대, 30대는 물론이고 40대까지 즐거운 일이 많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정도 생겼지요. 내가 각박한 직장생활을 했더라면 출세를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미운 놈이 생겼겠지요. 이 동네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겁 나는 것 없는 게 내 철학”

    -어떤 차를 몰고 다닙니까.

    “차를 사본 적이 없습니다. 중고 티코를 얻어 망가질 때까지 썼습니다. 다음에 쏘나타 구형 1991년식을 얻어 24만㎞까지 탔다가 고속도로에서 여러 차례 서길래 폐차했습니다. 조사를 해봤더니 의원이 되면 기름값 80만원에 차량유지비가 30만원 나오더군요. 산타페를 사려고 합니다. 경유를 사용하니까 기름값이 덜 들 것 같아서….”

    -기사도 채용할 겁니까.

    “기사 월급으로 전문가 보좌관을 채용하고 운전은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습니다. 운전면허 없는 정책보좌관과 어디 함께 갈 일이 있으면 내가 운전하는 거죠.”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봉급 중에서 180만원만 집에 가져가고 나머지는 당비로 내기로 했다죠. 사실 의정활동을 제대로 하자면 후원금을 받아도 모자란다는데, 의원으로서 돈에 쪼들리면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을까요.

    “장기적으로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정치현실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깊기 때문에 구부러진 막대기를 펴기 위해 당분간 반대편으로 더 구부려야 합니다. 자극을 주기 위해 임시로 하는 거지 계속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는 깨끗한 이미지를 줌으로써 최근에 민노당 지지도가 20%선으로 높아졌다고 자랑했다.

    -주량은 어느 정도입니까.

    “소주 한 병. 자금사정이 넉넉하면 배갈도 마십니다. 안주로는 중국요리와 생선구이 또는 찜을 좋아합니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 부인한테서 몇 차례 전화가 걸려왔다. 총선 후 처음으로 인천에서 처가 식구들과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었다. 7시 약속이라는데 인터뷰가 길어져 벌써 8시를 넘기고 있었다. 부인의 성화가 심한지 “당신이 전화를 안 끊어서 지금 출발을 못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위험한지는 모르겠으나 유머는 풍부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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