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정초마다 안방에 내걸렸던 아버지의 ‘윤정희 달력’|채윤희

  • 글: 채윤희 올 댓 시네마 대표

    입력2004-06-02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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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이면 아버지는 우리 4남매를 앉혀놓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숨죽이며 듣던 아버지의 영화 이야기는 고스란히 4남매의 꿈이요, 미래가 되었다.
    • 영화, 연극, 광고 분야에 각각 진출한 우리를 키워낸 것은 다름아닌 아버지의 ‘영화사랑’이었다.
    정초마다 안방에 내걸렸던 아버지의 ‘윤정희 달력’|채윤희

    1961년 큰오빠인 연극연출가 채윤일(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졸업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이 필자의 아버지, 앞줄 맨오른쪽이 필자.

    ‘아버지’를 추억한다?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한테 그 누구와도 다른 아버지에 대한 유별난 추억이 있는지 스스로도 의문이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 여느 아버지처럼 평범하신 분이었기에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라면 별로 할말이 없을 것만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30여 년이 지났다. 게다가 살면서 아버지를 떠올린 적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돌아가신 아버지께는 죄송스런 말이지만 거의 잊고 지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수학과 회계에 능통했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글을 쓰려니, 아버지란 이름은 어머니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가슴을 떨리게 하는 것 같다. 흔히 어머니와 딸 사이에 존재하는 애증, 연민, 희생과는 다른 종류의 떨림, 특별하지 않기에 더 살갑고, 항상 곁에 두고도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애틋한 그런 느낌 말이다.

    정말 나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 유별나거나 남다른 것이 아니다. 그저 생활 속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음식이나 수학공부, 그리고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영화 같은 것에서 나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말이 별로 없으셨던 아버지는 수학과 회계에 유독 능통하셨다. 그렇다고 계산에 빠르고 잇속을 챙기는 분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학문으로서의 수학을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1960년대 초부터 1972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금속가공 분야의 제조업체에서 경리책임자로 일하셨는데 당시 회사에서 ‘걸어다니는 사전’으로 불렸다. 또 아버지는 수학 선생님들도 어려워하던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서 주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곤 했다. 공부하다가 모르는 수학 문제를 여쭈어보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시기도 했다. 타향에서의 생활에 빨리 적응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뒤늦게 당신의 전공분야인 회계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셨는데,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행복해하셨던 것 같다.

    정직함을 생활신조로 삼았던 아버지는 수학을 잘해야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정직한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그러기 위해선 수학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수학에 능통하셨던 분답게 우리들에게 ‘삼단논법(?)’으로 교훈을 주신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대로라면 나는 수학을 못하기 때문에 정직하지도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 나름의 그 논리가 오히려 아버지의 교훈을 곱씹으며 삐딱한 길로 나가지 않게 해주는 신호등이 되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심지어는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다음에는 형제간에도 폐를 끼치지 말라고 하셨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신 걸까. 얼른 생각하기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이 쉬워 보이지만 그 말에는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방법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간에, 나 역시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수학=정직’ 강조한 삼단논법

    우리 형제는 외가 쪽을 닮았는지 수학 분야에는 영 재주가 없어서 아버지의 기대를 채워드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은 죄송스럽다. 한 명이라도 아버지의 뒤를 따랐으면 좋았을 텐데 하나같이 그러지를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우리 4남매가 하는 일에 대해 반대만 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묵묵히 바라보시며 마음속으로는 성원을 해주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4남매가 한결같이 수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예능 계통에 진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좋아하신 분야와는 전혀 다른 길이었지만 자식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반대하지 않으신 것은 지금 생각해도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유난히 수학을 좋아하셨던 아버지지만 논리적이기만 하고 따뜻한 감성과는 거리가 먼 메마른 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수학 못지않게 좋아하신 것이 바로 영화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개봉 영화가 바뀔 때마다 꼭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여가활동이 아니었나 싶다. 노래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신 어머니와, 수학과 회계 에 능통하신 아버지는 겉보기에 닮은 점이 거의 없는 부부 같았지만 영화라는 최고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 역시 1주일에 3~4번씩 영화 관람을 즐기는 영화광이셨던 것이다.

    두 분이 살면서 닮아간 것인지, 원래 그런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부부의 연을 맺으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영화 관람은 아버지와 어머니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공통 관심사였다. 아버지는 워낙 무뚝뚝한 성격이라 여간해서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는데 영화를 보고 오신 날만큼은 예외였다.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이면 예외없이 우리 4남매를 앉혀놓고 그 날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딸들과는 달리 아버지를 어려워했던 오빠들도 이날만큼은 아버지 곁에 앉아 아버지의 영화 이야기를 함께 즐기곤 했다.

    유년 시절 숨죽이며 듣던 옛날이야기만큼이나 재미있었던 아버지의 영화 이야기 속에는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 꿈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은 고스란히 우리 4남매의 오늘로 이어졌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예능 계통의 재능도 그때 부쩍 자랐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큰오빠(채윤일 극단 세실 대표)는 연극연출가로서의 꿈을 키웠고, 작은오빠(채윤직)는 광고디자이너의 꿈을, 그리고 나는 영화기획자의 꿈을, 동생(채승희)은 연극배우의 꿈을 조금씩 키워나갔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이 무작정 좋았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는 일이었다니 돌이켜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영화배우 중에서 윤정희씨를 특히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새해가 되면 윤정희씨 사진이 들어 있는 달력을 안방에 걸어놓아 어머니와 불화 아닌 불화를 일으키기도 하셨다. 요즘에야 잘 볼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유명 배우들 사진으로 만든 달력이 최고 인기였다. 여기에 당시 최고의 여배우였던 윤정희씨 사진이 빠질 리 없었고, 아버지는 그 달력을 꼭 챙겨다가 방안에 걸어놓고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어머니의 눈총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 물론 아버지는 영화배우 윤정희도 좋아하셨겠지만 그보다는 영화를 너무나 좋아하셨기 때문에 영화배우들의 사진이 실린 달력을 걸어놓으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아버지의 소년 같은 감수성을 어머니는 충분히 이해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는 간혹 예쁜 여배우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몇 번 내비치기는 했지만 달력만큼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어머니가 좋아하던 배우의 사진도 그 달력 어느 페이지엔가 숨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윤정희씨가 웃고 있는’ 한 달만 참아내면 어머니가 좋아하는 배우의 사진도 실컷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것들을 보면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죄송스러운 표현이지만 꽤나 ‘귀여운’ 면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마치 사춘기 소년소녀들처럼.

    돌이켜보니 내 생활 깊숙한 곳엔 아버지의 잔상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알게 모르게 나는 이미 아버지가 살아오신 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내가 영화 일을 하는 것도 어쩌면 아버지의 영향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영화홍보를 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나눠줘야지’ 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결국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아닐까.

    지금도 영화를 관람하고 집에 돌아가 자식들을 앉혀놓고 그날 본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줄 또 한 명의 아버지가 어느 극장에 앉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일을 할 때 더욱 힘이 나고 자부심이 샘솟는 것 같다.

    아버지는 특별히 입맛이 까다로운 분은 아니었지만 냉면만큼은 미식가를 자처할 정도로 예민하셨다. 웬만한 냉면으로는 아버지의 출중한 입맛에 맞출 수 없었으니 말이다. 조금만 간이 안 맞거나, 혹은 면발이 조금이라도 굵거나 가늘면 그렇게 좋아하는 냉면이라도 잘 드시지 않았다.

    아버지의 고향은 이북이다. 1·4후퇴 당시, 아버지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여행 가듯이 고향인 원산항을 떠나셨단다. 아버지가 유독 냉면을 좋아하셨던 것은 아마도 고향이 그리워서였을게다. 지금도 간혹 냉면 집에 갈 때면 후르르 냉면을 드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서라도 함께 가서 그 유명한 본고장의 냉면 맛을 보았을 텐데….

    아버지의 ‘냉면 철학’

    이북 출신의 아버지 덕분에 우리 가족은 특별한 날이면 고깃집보다는 유명하다는 냉면집을 찾아다니곤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의 입맛은 고스란히 빼다 박았는지 우리 4남매는 냉면을 무척 좋아한다. 이제부터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땐 솜씨좋은 냉면집을 찾아가 냉면 한 그릇 먹고 영화를 한 편 봐야겠다. 그리고 달뜬 기분으로 그 누군가에게 신나게 영화 이야기를 꺼내볼 참이다.

    이제 나도 아버지 못지않은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란 이름은 누구에게나 마냥 어린아이 같은 추억을 안겨주는 모양이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아버지 곁에는 늘 어린아이였던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아버지가 좀더 오래 사셨더라도 내가 기억하고 싶은 내 모습은 아버지 옆에 서 있는 어린 시절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 추억 속의 그림에서는 아버지와 그 옆의 ‘어린아이’가 훨씬 잘 어울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세월은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 아버지를 회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다고 느끼는 걸 보니 말이다.



    이렇게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건 아버지가 남겨주신 고마운 선물임에 틀림없다. 아버지를 추억하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유달리 기억나는 것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잔잔한 미소를 짓게 되는 것 같다.

    이제는 몇 장 되지 않는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아버지,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늘 이렇게 곁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내가 일부러 끄집어내지 않아도 나와 함께하시는 아버지. 새삼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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