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정심은 완벽한 준비에서 나온다
최연소 군수와 최연소 도지사라는 타이틀로 알려지다 보니,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리고 그다지 좋은 배경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경력을 쌓을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거창의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농사일을 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새벽이면 네 남매를 위해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어머님 슬하에서, 산하(山河)를 놀이터 삼아 개구쟁이로만 자랐다.
시골에서 부의 척도는 논밭의 크기였기 때문에, 큰 농사를 짓는 부농이 되겠다는 막연한 꿈 정도가 있었지 싶다. 자연스럽게 거창농업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읍내’라는 큰 세상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것저것 폭넓게 읽은 독서로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농사를 짓더라도 ‘알고’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난생 처음 공부에 매달렸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겨울, 서울대 합격통지서를 받았으며,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자신감과 패기로 서울로 향했다.
‘등고자비(登高自卑)’
그러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작은 시골도시가 전세계였고 우주였던 시골 소년에게 서울이 가져다준 문화 충격은 대단했다. 시골집에서는 학비 외에는 기대할 수 없었기에,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했다. 그렇게 박사과정을 마치고, 시간강사로 재미를 붙여갈 즈음에 국회의원 보좌관직을 제안받았고, 고민 끝에 정치인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제대로 된 정치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던 1995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에 참여하여, 사회정책실장을 맡아 한국정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1997년 한나라당의 대선 패배가 내 인생의 중요한 고비가 됐다. 여의도연구소에서의 고민과 대선 패배의 충격이 나를 바꾼 것이다. 길은 현장에 있다는 생각이었다. 주위의 만류도 있었지만 고향으로 내려왔다. 등고자비(登高自卑·높이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랄까, 그런 심정이었다.
“젊은 사람인데, 됐네”라는 주위 어르신들의 과분한 인정으로 1998년 38세의 나이로 도의원에 당선되고, 4년 후에는 거창군수가 됐다. 그리고 2년 후에 경남도지사 보궐선거가 있었다. 너무 젊고, 또 지금 실패한다면 지금까지 이뤄놓은 것들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며, 나를 걱정해주는 분들도 계셨지만,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대통령 탄핵사태의 여파로 당이 무척 힘들 때였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당에 활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경선에 참여했다. 한나라당 당원 동지들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믿음을 주셨기에 공천을 받고, 도지사로 당선될 수 있었다. 2004년 도지사로 재선되고, 도민들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겸손한 도전
젊은 도지사의 성공 비결이 뭘까? 지금까지 나를 키운 것은 주위의 사랑과 삶에 대한 태도인 듯하다. 아직도 9시 뉴스가 끝나면 고향에서 전화로 걱정해주시는 아버지,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정화수를 올리는 어머니, 어린 시절 자연에서 배웠던 호연지기, 정치를 시작하면서 어느 덧 나의 좌우명이 되어버린 ‘겸손과 도전’, 무신불립(無信不立·신뢰가 없으면 바로설 수 없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준비가 나를 이끌어가는 힘인 듯하다.
운은 어떨까? 마키아벨리의 견해로 대신하고자 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의지와 결단력, 능력(virtu) 등에 더하여 운(fortuna)도 중요하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여신이기 때문에 보다 과감하고 힘 있게 움직이는 사람의 편에 서게 마련이다. 운명이라는 위험한 강에 대비해서 제방을 쌓고 시대에 적응하지 않으면 운명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현실을 냉정하게 읽고 미래를 준비하는 자에게 운명의 여신은 미소 짓는다.
▼ 김호철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후회’를 생각하면 1초도 느슨하게 보낼 수 없지요”
배구와 함께한 세월이 50년을 바라본다. 배구 선수, 배구 국가대표, 배구 감독으로 살아왔다. 보통 운동선수는 어릴 때 운동을 시작한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은 인생목표도 남보다 일찍 갖게 된다. 그 목표는 자신과의 싸움, 경쟁, 운동에 대한 열정이 뒤섞여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원래 육상을 했다. 다니던 학교에서 배구부를 창단하면서 배구로 종목을 바꿨다. 열두 살 때의 일이다. 배구는 내 적성에 꼭 맞았다. 그렇게 시작한 배구가 평생의 일로 이어졌다. 어려서는 좋아서 열심히 했지만 선수 생활을 하면서 배구 선수로 대성하겠다는 목표를 품었다.
극복 못할 단점은 없다
처음에는 공격수였다. 그러나 키가 176cm에서 성장을 멈췄다. 키는 작지만 순발력은 뛰어나니 세터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공격수로 남고 싶었지만 그러자면 키 때문에 희망이 없었다. 하지만 배구는 계속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포지션을 바꿔서라도 배구를 계속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세터로 전향한 뒤 키를 극복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신체적인 부족함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키는 작지만 기량이 뛰어난 외국 선수들의 경기 모습을 연구했다. 지인을 통해 일본과 불가리아 선수들의 경기장면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구해 반복해서 봤다. 키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갖고 태어난 나의 일부다. 원망해도 소용이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보다는 극복할 방법을 찾는 게 생산적이다.
20세에 국가대표 선수의 꿈을 이뤘다. 오직 국가대표라는 꿈을 보며 달려온 운동생활이었다. 국가대표가 최고의 영광이고, 그 꿈만 이루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대표선수가 되고 보니 심적으로 더 힘들어졌다. 내가 모르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한참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과의 싸움에 지칠 때면 배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면서 다시 도전할 마음이 불끈 솟았다.
나는 오랜 기간을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다. 선수 생활도 하고 감독 생활도 했다. 이탈리아와 인연을 맺은 건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세계선수권대회를 이탈리아에서 했는데, 내 플레이를 본 이탈리아 관계자가 3년 뒤 연락을 해왔다. 스카우트돼서 그쪽으로 가게 된 것이다.
배구도 배구였지만 사실, 유럽에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강했다. 배구도 하고 돈도 벌고 여행도 하며 견문을 넓히고 싶었다. 떠나기 전에는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가서 잘 적응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다름’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인생에서 환경은 무척 중요한 요소다. 한군데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환경을 바꾸는 게 좋다.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고 선수 생활을 그만두면서 자연히 지도자의 꿈을 가졌다. 그 꿈을 품은 뒤 외국 유명 감독들의 연습 방법, 지도 방법, 데이터 분석법 등을 꾸준히 배웠다. 스스로 공부하며 차근차근 준비했다.
우선순위에 전력투구
지도자가 되길 원한다고, 준비한다고 해서 모두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다.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이 따로 있다.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도 지도자의 자질이 없다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나는 세터 출신이라 다른 선수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심중을 읽는 능력을 갖게 됐다. 그런 면이 지도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 선수들과 말이 잘 통하지 않을 때는 행동으로 대화했다.
감독 생활을 할 때는 항상 새벽 2, 3시에 잔다. 분석 파트가 따로 있지만 혼자서 끊임없이 경기를 분석하고 선수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고민한다. 현대 팀을 맡았을 때 선수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경기에 져도 편안히 잠을 잤다. 한마디로 승부욕이 없었다. 선수들을 혹독하게 훈련하고 경기에 지면 잠도 안 재우고 밥도 안 줬다. 그렇게 해서 현대는 우승팀이 됐다.
나는 운동, 사회 생활, 음주가무 등 뭐든 그때 최선을 다하라고 얘기한다. 배구 이외에 골프를 무척 좋아하는데, 시즌에 들어가면 쳐다보지 않는다. 현재 중요한 일에 전력투구해야 후회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밤잠 없이 노력해도 안 되는 건 능력 부족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항상 어려운 건 실천인데, 이를 위해서는 마음을 독하게 다잡아야 한다.
▼ 윤동한 한국콜마 대표이사
작은 꿈을 향해 걷다 보면 큰 꿈에 가 닿는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오뉴월의 초등학교 운동장. 한 무리의 어린이가 청백으로 나뉘어서 릴레이 경주를 하고 있다. 고만고만하게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격차가 벌어졌다 좁혀졌다 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어느새 청군, 백군 상관없이 각자의 경쟁에 몰두한다. 한 팀의 승리로 경주는 안타까움과 박수소리가 뒤섞여 마무리된다. ‘내게 맡겨진 릴레이의 한 구간을 어떻게 달려가느냐.’ 인생도 이런 릴레이와 같다.
우리는 ‘인생 설계’ 또는 ‘계획’에 비춰 각자에게 맡겨진 구간에서 최선을 다했는지를 판단하려 한다. 나는 ‘설계’ ‘계획’이라는 계산적인 표현 대신 ‘꿈’이라고 말하고 싶다. 큰 꿈을 가져라. 그리고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작은 꿈을 수없이 꾸어라. 하나의 작은 꿈을 이루면 다시 새로운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라. 그러다 보면 어느 날 현실이 된 큰 꿈을 발견할 것이다.
‘유지, 소봉가, 리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이를 유지(有志)라고 부른다. 사전적 의미는 ‘좋은 일에 뜻이 있는 사람’이다. 일본에서는 소봉가(素封家)라고 한다. 높은 식견과 재력을 갖추고 그 지역에 절대적 영향력을 갖는 민간인을 뜻한다. 우리가 즐겨 말하는 리더(leader)의 개념도 이와 비슷하리라. 나에게 큰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 않고 ‘유지, 소봉가, 리더’라고 답하겠다.
‘순풍에 돛 단다’는 말이 있다. 타이밍의 중요함을 뜻하는 문구다. 하나의 결과는 준비와 실행 시기를 택하는 결단을 거쳐 탄생한다. 결과 없는 행동은 헛수고에 불과하다. 순풍에 맞춰 돛을 달아야 멀리 항해할 수 있다.
나는 꿈을 위해 1970년대 최고 직장이던 금융기관에서 중소 제조업체로 이직했다. 그때부터 큰 꿈을 위해 작은 꿈을 하나하나 실천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하는 ‘나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 보면 편안하고 안전한 길이라기보다 험한 도전의 과정이었다. 그런 길을 선택하고 씩씩하게 걸어온 동력은 오롯이 스스로 만든 꿈이었다.
꿈을 구체화해 실천하는 과정은 언제나 보람찼다. 작은 꿈 하나하나를 이루는 것을 상상하면 현재의 고통은 사라지고 긍정의 에너지가 샘솟았다. 때를 상상하면 현재의 고통은 사라지고 긍정과 감사의 에너지가 솟아났다.
서울올림픽 이후 국내경제 호황과 빠른 승진은 나에게 결단을 재촉했다. 결국 나는 1990년 창업이라는 주사위를 던졌다. 3년간 몰두했다. 전부를 던졌다. 내 인생의 운명을 걸었다. 이런 노력의 보상이 돌아오는 기미를 느끼기 시작했을 때의 쾌감이란, ‘낚시꾼의 손맛’ 저리 가라 할 ‘전율!전율!전율!’이었다.
실천의 기쁨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나는 ‘공부’라는 또 다른 꿈을 품었다. 그 결과 지금 박사학위도 받게 됐고, 대학의 강의도 맡게 됐다. 맡겨진 구간을 멋지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지금 추진하는 꿈은 다음과 같다. 뜻있는 과업을 실천하기 위해 한국콜마를 오래가고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 즉 강소기업(强小企業)으로 만들겠다는 꿈이다. 창조성, 합리성, 적극성, 자주성이 업무의 표준이 되는 기업, 이를 위해 ‘독서, 근검, 겸손, 적선’이라는 규범을 실천하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꿈이다.
하나하나 맞닥뜨린 과제를 해결해나가다 보면, 나는 자연히 우리 사회의 유지, 소봉가, 리더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릴레이 경주를 하며 꾸던 소년의 꿈에 다가가는 과정이 참으로 행복하다.
▼ 이기수 고려대 총장
신념으로 쓴 계획표로 이룬 총장의 꿈
‘나의 인생 설계’라는 주제를 받아 들고 그동안 걸어온 여정과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해본다. 산간벽지에서 태어나 어렵게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뒤 반드시 총장이 되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교수도 영광된 자리이지만 조국과 민족, 나아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고려대학교의 최고경영자로서 해야 할 일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총장에 오르기 위해 무려 4수(修)를 했다. 세속적인 명예욕 때문이었다면 진작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 발전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신념이 있었기에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도전했다. 그런 만큼 지금 이 순간 총장으로서 단 한 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새벽 3시에 시작하는 하루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조심스러운 한편 쑥스럽다. 그러나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한 진솔한 나눔이 신동아 독자에게, 특히 후학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장기적인 계획과 단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인생 전체에 대한 종합적인 계획을 세운 뒤 그에 따른 하루, 1년, 혹은 3년에 걸친 단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나의 하루는 새벽 3시에 시작된다. 전날 잠자리에 든 시간과 관계없이 새벽 3시면 눈을 떠 그날의 할 일을 정리하고 계획한다. 오늘 하루 처리해야 할 업무, 편지와 e메일, 강의 준비, 써야 할 원고 등을 살핀다. 진주에서 유학하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 한 달에 한 번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야 했다. 경남 하동군 집에 어머니를 뵈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부터 시작된 습관이 아닌가 한다.
또 다른 나의 습관은 기록이다. 일상의 모든 일을 수첩에 기록한다. 소소한 일이라도 어느 순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난 사람의 신상을 기억하면 좋은 인상을 심어주며 시비를 가릴 일이 있을 때는 기록이 중요한 근거로 작용한다. 기록을 하면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룰 수도 없다. 일일계획표를 세워 끊임없이 진행상황을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성공적인 인생 설계의 50%는 완성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는 주변 어르신의 말씀에 자극을 받아 진주로 유학을 결심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땅을 등지고 유학을 선택한 것이 고려대 총장으로 성장한 실마리가 아니었나 싶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 정한 목표를 향한 강한 의지, 그리고 결단력이 필수다.
내 인생 여정은 국내에서 교육받은 24년, 독일 유학을 비롯해 외국에서 연구한 16년, 국내에서 교육에 봉사한 24년으로 대별된다. 나는 교수를 천직으로 알았다. 그래서 연구와 강의, 집필과 학회활동 등 학술연구와 봉사에만 매진했다.
“실패도 자기계발의 도구로 삼아라”
앞으로 계획은 이렇다. 총장직을 성실히 수행하고, 75세까지는 독일·미국·일본·중국 등 외국에서 그간 접었던 연구·강연 활동을 했으면 한다. 그 뒤에는 집필 작업에 들어가 학자로서의 소원인 ‘기업법’을 완성하고, 개교 125주년이 되는 2030년에는 총장으로서 기획한 ‘2030 프로젝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90세에 들어서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지나온 여정을 돌아보며 세상을 돌아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한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맹자는 일찍이 ‘궁즉독선기신 달즉겸선천하(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고 말했다. 어떤 일을 도모하다 실패하면 자기 자신을 계발하고, 만일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전심전력으로 모두를 위하여 봉사하라는 것이다. 인생을 설계하는 이에게 나는 이 가르침을 전하고 싶다. 아울러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인내하고 근면성실함으로 임하라는 ‘만도내근(萬道耐勤)’의 정신도 가슴에 아로새겼으면 한다.
▼ 이현세 만화가
“내일 스러질지언정 오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라”
계획은 중요하다. 인생의 계획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계획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현재를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순간순간 전부를 소진하려 노력한다. 내일 못 일어날지언정 오늘은 배터리가 닳을 때까지 몰입한다는 자세. 이것이 내가 계획을 잘 실천하기 위해 터득한 방법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대학 진학이 힘들어지자 전공분야 없이 진로를 정해야 했다. 연좌제에 걸려 공무원이나 군 쪽으로는 시험을 볼 수 없었다. 연좌제가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외국에 나갈 수도 없었다. 내가 가진 재주는 그리는 일인데 눈이 색약이라 미술을 하기도 힘들었다. 좌절과 원망을 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낙천적으로 생각했다. 딱 한 달간 술을 마신 뒤 ‘내 운명은 만화인가 보다’라는 생각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만화의 개념을 바꾸자”
당시만 해도 평생 만화를 그리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만화를 좋아했지만 만화에 대한 인식이 험한 때였다. 스토리와 새로운 캐릭터를 구상하는 게 너무 힘들어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23세 때 만화가로서 확고한 목표를 갖게 됐다. 계기는 일본 만화가 시라토 산페이(白土三平)의 만화 ‘가무이전’이었다. 30권으로 구성된 대작 ‘가무이전’은 당시 일본에서 보기 드물게 사회주의 성향의 내용을 담았다. 그 만화를 보고 만화는 어린이의 전유물이라는 그간의 생각을 고쳐먹었다. 만화로 표현할 메시지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무엇을 쓸 것인가 생각하다가 우선 자전적인 작품 ‘5계절’을 냈다. 일단 나 자신부터 정리해야 다른 주제들을 소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 반응은 좋았고 그 뒤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만화를 그리며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재미없는 만화는 그리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였고, 한번 다룬 소재는 다시 활용하지 않겠다는 게 다른 하나였다. 처음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던 당시 만화는 ‘공부에 방해가 되는 책’에 지나지 않았다. 왜 그런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화의 대상이 어린이에 한정됐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때 만화를 대중화해 어른이 봐도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겠다는 목표를 품었다.
나는 다양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던지고 싶다는 생각에 속편을 내지 않는다. 스포츠를 다뤄도 야구, 권투, 축구 등 한 종목씩 다뤘다.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독자에게 던지는 이야기꾼으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목표대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며,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이 작가가 또 무슨 이야기를 그려낼까” 하는 호기심의 대상으로 남고 싶다.
기록과 반성의 일상
지난해에는 만화가에서 교육자로 방향을 바꿨다. 교육자로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것이다. 10년 동안 만화작업을 하며 겸임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학교에 적을 두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여전히 만화작업이 재미있고 구상할 작품이 많은데 그리고 싶은 만큼 만화를 그리지 못할까 하는 걱정에 교수직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이전과 다른 생활이지만 학생과 함께하는 삶에 만족한다.
앞으로 목표는 손자에게 들려줄 동화를 만화로 그리는 것이다. 예전 어린이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지금은 그런 풍경이 사라졌다. 만화의 형태로 동화를 들려주겠다는 꿈을 일흔 살이든 여든 살이든 꼭 이루고 싶다. 안데르센의 동화가 될 수도 있고 학습만화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성격이 매우 낙천적이다. 여러 어려움과 상처를 겪으며 스스로 터득한 삶에 대한 태도다. 그래서 내일을 생각지 않고 오늘 최선을 다한다. 알찬 삶을 꾸리기 위한 다른 비결로는 일기가 있다.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기록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자신의 계획과 실천한 내용을 매일매일 기록하면 도망갈 구멍이 없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1년의 마지막 날이 왔는데도 실천한 일이 없다면 ‘나는 뭐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닌 스스로에게 말하는 정직한 글이기에, 사유의 폭을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 거창한 계획을 세워두고 시작도 하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긍정적으로 매일을 기록하면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는다. 내 책상에는 시간 날 때마다 끼적인 이야기, 숫자, 작품 아이디어가 담긴 종이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