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을 경험하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집보다 천막생활이 길던 시절 아내는 “억울함을 풀어보라”며 격려하다가도“세상에 고집 부려서 안 될 일도 있다”며 집으로 갈 것을 설득했다. 민주노총 산하단체 간부로 활동하던 그는 어느 날 내부 비판을 하며 탈퇴를 선언했다. 민주노총은 현장 의지와 상관없는 정치투쟁에만 골몰하며, 비정규직 문제에는 소극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수많은 노동현장의 고통과 아우성,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보다 북한의 수해와 북한 민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 삼아 이를 지원하는 운동의 상층부, 현장 노동자의 투쟁에는 함께하지 않으면서 북한 노동자와의 교류와 협력, 방북 행사에는 열정적인 수많은 그들.…
현장의 고통은 나 몰라라 하며 컴퓨터 앞에 앉아 구조조정과 해고 없는 철밥통을 움켜쥔 민주노총 상근자와 임원을 보면서 이제 이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것 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지난 10월27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 호텔. 곽민형(郭珉亨·53)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산업노동조합 비상대책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위는 그가 쓴 탈퇴성명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떠나며’의 일부다. 3쪽 분량의 글에는 10년간 몸담은 민주노총에 대한 애정과 질타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5개월간 고민하고 2시간 만에 쓴 탈퇴 성명”이라고 말했다.
기자회견 직후 곽씨는 캐나다로 갔다. 한의사로 일하는 친형이 이민 간 곳이다. 한 달간 캐나다에 머무르며 마음을 추스른 뒤 12월1일 귀국했다. 시차적응조차 되지 않은 그를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만났다.
곽씨의 첫 직장은 택시회사였다. 군대 제대 직후인 1975년 일자리를 찾다가 운전직을 택했다. 운전면허증이 자격증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백화점 셔틀버스 기사를 거쳐 대성산업가스의 전신인 대성산소에서 일했다. 대성산소에서 용역기사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해고된 뒤부터 민주노총 중앙위원, 중앙파견 대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민주노총 활동을 이야기하던 대목에서 그는 “애정을 갖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노동자로 일한 지 30년, 민주노총에 몸담은 지 10년. 무엇이 그로 하여금 뼈와 살을 묻었던 조직을 떠나게 했을까.
노동운동 없는 민주노총
“민주노총 내부 조직은 대부분 자주민주통일(NL) 계열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총연맹, 산업별기업연맹 모두 그렇습니다. 사무처까지 통틀어 임원을 100여 명으로 잡으면, NL이 90명, 민중민주(PD) 계열이 3,4명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동운동에 주력해야 하는데 정치투쟁에만 집중합니다. 매년 6·15, 8·15 같은 행사에서 조합원들은 누구의 지시인지도 모른 채 친북, 반미, 반정부 구호를 외칩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에게 ‘대북사업만 하느냐’고 비난하면 화를 냅니다. 그런 현실이 못마땅했습니다. 그 속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아니고, 본말이 전도된 것이지요.
탈퇴 결정까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몸담은 조직을 비판하는 것은 어쨌든 배신이니까요. 하지만 올해 들어 조직이 사분오열되는 걸 보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위원장은 도망 다니고, 조직은 비대위로 운영되고, 말이 안 되잖아요. 임기가 끝나면 다시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곽씨의 주요 관심 분야는 비정규직 문제. 그 역시 비정규직을 경험하며 노동운동에 발을 들였다. 1994년 그는 대성산소의 고압가스차 운전직으로 들어갔다. 당시 대형차 트레일러 운전업계에서 대성산소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비정규직이라는 건 입사한 뒤에야 알았다. 작업 내용, 작업 지시 주체 모두 정규직과 다를 바 없는 위장도급이었다. 하지만 업무량은 정규직보다 훨씬 많았다. 매일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대전, 전주, 여천을 돌며 납품과 특수가스 채우기를 반복했다. 다시 밤새 운전해 논산으로 가서 납품을 한 뒤 서울에 도착하면 다음날 아침. 이틀에 한 번꼴로 집에 들어가는 생활이 계속됐다. 그렇게 일하고도 하루 1, 2시간 일한 정규직 월급의 절반만 돌아왔다.
“신분 차이는 이해 합니다. 하지만 동일노동 동일가치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하는데, 너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5개 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모아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회사에서 탈퇴하라 해산하라는 압박이 들어왔지만 7명이 끝까지 남았습니다. 결국 회사에서 도급회사를 폐업해 해고된 조합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요.”
승소와 항소가 지루하게 이어지다 2003년에야 대법원 승소판결을 받았다. 사실상 해고 기간은 4년 남짓. 가장으로서 돈벌이를 못하고 투쟁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상가상 외아들이 자살하는 아픔도 겪었다. 힘든 일이 한꺼번에 찾아온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 뒤 곽씨는 민주노총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정규직 눈치 보는 지도부
비정규직은 이제 일부의 문제가 아닌 보편적인 삶의 단면이 됐다. 노동계에 따르면 비정규직 노동자는 850만명을 넘어섰다. 곽씨는 “실제 비정규직 노동자수는 1000만명 이상일 것”이라고 말한다. 봉급생활자가 1500만명이라면 3분의2가 비정규직인 셈이다. 곽씨는 “비정규직을 도울 조직은 민주노총밖에 없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상층부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활동가는 없다고 과감히 말하겠습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대립하는 면이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고를 피하려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깎아야 하는 조처가 따르니까요.
민주노총은 대공장, 정규직 위주의 조직입니다. 그래서 간부들은 공약을 비정규직 처우 개선으로 내걸면 선거에서 진다고 생각하지요. 현장의 목소리는 정규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니까요. 말로만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주장합니다.
예컨대 이랜드 투쟁 때 민노총에서 이들의 월급을 주겠다고 했지만 화섬의 억대 귀족 노동자들은 돈을 안 냅니다. 같은 현장의 비정규직과 고통을 분담하기는커녕 그들 앞에서 임금인상 파업투쟁을 합니다.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려면 정규직의 양보가 필수적입니다.”
‘양보’라는 모호한 단어를 어떻게 실천에 옮길 것인가. 곽씨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소통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일이든 문제를 해결 하려면 협의가 우선이다. 회의를 통해 의견 개진과 반론을 거쳐 합의에 이르게 된다. 노조 일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 실마리를 비정규직에게 문을 연 현대기아차 노조에서 찾았다.
현대기아차 외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노조활동을 하는 조직은 드물다. 비정규직은 노조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면서도 노조에 참여하기는 주저한다. 회사 눈 밖에 나면 생계 수단을 잃을 수 있다는 걱정에서다. 비정규직 개정법 등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 현안으로 떠올랐지만 노동계의 대응이 미미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곽씨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적대관계가 돼선 안 된다. 추세를 보면 앞으로 비정규직은 더 늘어날 것이다. 현재 정규직인 내가 정년퇴임한 뒤 재취업할 때, 또는 미래의 내 아이가 취업할 때 비정규직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정규직의 동의하에 50세 이상의 정규직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실시해야 한다”라고 했다. 아울러 그는 민주노총의 현실감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상에 치우친 민주노총의 방침은 전략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랜드, 대성, 하이닉스, 기륭전자, 코스콤,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 건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법원의 판결에 의한 인정은 있었지만 투쟁에 의한 인정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당사자들의 진의가 사라지는 경우를 종종 목도합니다. 적정한 합의점에 도달해도 도와준 사람들 때문에 구호에 그치는 요구를 계속하는 것이지요. 이 부분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라파즈한라시멘트 투쟁 때 교섭권을 갖고 협상했습니다. 프랑스로 원정투쟁까지 갔습니다. 일이 시끄러워지자 프랑스 본사에서 결국 해고기간 3년간 임금보상, 비정규직 고용, 노동조건 실사 등을 보장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현행법과 상관없는 회사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만하면 얻을 건 얻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민주노총 다른 지도자는 ‘조금 더 싸우면 다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생각해야 하는데 강성으로만 갑니다. 결국 희생하는 건 현장의 당사자들입니다. 또 민주노총은 명분만 움켜쥐고 문제해결을 등한시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대화를 해야 해법이 생깁니다. 일전에 노사정 대표자 회의를 제안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견을 나눠야 접점을 찾든 판을 깨든 상황이 진전됩니다. 그러나 민주노총 간부들은 상대편에 휘말린다며 반대부터 합니다. 지도부의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개인 영달을 위한 행동”
‘대응할 가치도 없다.…우리가 비정규 노동자를 위해서 얼마나 투쟁했나. 우리가 비정규직 입법을 막기 위해 13번이나 총파업을 했다. 이랜드 투쟁을 하면서 만든 공소장만 400여 페이지는 되는 것 같다. 이랜드 투쟁을 통해 130억원의 손해배상가압류가 걸려 있다. 민주노총 조합원이 11억원을 걷어서 이랜드에 성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비정규직을 위한 투쟁을 안 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고, 탈퇴의 변 중 민주노총은 1억원의 임금노동자를 위해 임금인상 투쟁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건 사실 무근이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한 인터뷰에서 곽씨의 탈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곽씨는 “몸담은 조직에 칼을 겨눴으니 비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직 말 못한 부분이 많다”는 반응을 보였다.
곽민형씨는 “민주노총이 명분 없는 정치투쟁에서 벗어나 노동자를 위한 활동에 매진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곽씨는 쉼 없이 일해왔다. 택시회사, 백화점 셔틀버스, 대성산소 등 직장을 옮기면서도 쉬는 기간은 거의 없었다. 그간 많은 노동자를 만났다. 활동하면서 경제적 정신적 고통이 많았지만 후회는 없다. 다만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과정이었다는 생각은 이따금 한다.
노동자들이 투쟁 자문을 하러 올 때마다 속이 뜨끔했다. 자칫하면 생활고와 가정파괴, 전과자의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 한번 싸움을 시작하면 기약이 없다고,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떨는지 모른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그는 아직 민주노총에 할 말이 많아 보였다.
“10년 전만 해도 민주노총 점퍼를 입으면 호의적이었습니다. 공단 아주머니가 커피 값을 안 받는 일도 흔했습니다. 지금은 누가 민주노총 점퍼를 입습니까. 민주노동당이 생기면서 지도부가 바뀌어도 그 나물에 그 밥이 된 뒤로부터 국민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탈퇴했지만 애정 어린 충언을 한다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과 함께하기로 결의한 뒤부터 민주노총 간부들은 자리에만 연연합니다. 패거리 투쟁을 합니다. 지역과 전혀 관계없이 라인에 있는 사람에게 후보 자리를 줍니다. 진보운동의 구호에만 현혹됐지 기성 정당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노동운동의 본질은 ‘노동자의 삶의 질’입니다. 그게 기초인 동시에 전부가 돼야 합니다. 생활임금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의 밑거름이 돼야 합니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하는 정치투쟁은 그게 아닙니다. 명분 없는 싸움이 아닌 실효성 있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2009년은 경제대란과 구조조정이 우려되는 해입니다. 허리띠를 졸라매도 판을 깨면 안 됩니다. 시향, 반월 공단의 작은 공장들이 중국으로 떠나는 이유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사용자가 있으니 노동자가 있는 겁니다. 경제가 어려우면 그것을 감안하는 태도를 보여야 ‘명분’과 ‘노동자 삶의 질’을 모두 챙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