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대-4년제 대학 편입 학력
- “동욱이는 너무 센 기를 타고났기에 밟아주어야 한다”
- ‘난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란 영화로 큰돈 벌다
- 애견단체 따라다니다 애견 관련 서적 세 권 저술
- “촛불시위 때 인터넷 촛불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나 때문”
- 정치인과 대통령을 개에 비유해 언론을 타다
- 박 대통령 진돗개에 비유한 칼럼 보고 신동욱 찾은 박근령
- 15만원짜리 반지를 나눠 낀 신동욱과 박근령의 산상 약혼식
- 신동욱은 ‘제2의 최태민’인가?
- 육영재단 운영권 놓고 대립하는 박근령과 박지만
“저는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만나고 나서는 ‘운명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을 만날 수는 있겠지만, 부부가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운명을 이야기 하는 것은 결혼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혼식 한 달 전에 결혼을 발표하고, 제일 먼저 처형이 될 박근혜 전 대표 댁을 방문해 청첩장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3일 전 박 전 대표께서‘통보받은 적이 없다.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박지만 회장도 오시지 않겠다고 하시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거센 반발이 있을 것이란 예감 말입니다.
결혼식 날은 중간고사 기간이었기에 새벽에 천안에 있는 학교(백석문화대학)에 다녀와야 했습니다. 아침에 지하철을 탔는데 객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결혼에 반대해 저를 테러할 것 같았습니다. ‘이들이 덤벼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죽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 어떻게 죽어야 하나? 그래도 각하의 사위인데…,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말고 의연하게 죽자. 그래야 이 집안에 누가 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안은 교대역에서 학교 버스로 갈아 탄 후 비로소 사라졌습니다. 학교 일을 마치고 오전 10시30분쯤 서울로 돌아오는 시외버스를 탔더니 승객이 딱 다섯 명이었습니다. 전날 밤 잠을 설쳤기에 졸음이 몰려오는데 다섯 명이 나를 해치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상상이 몰려왔습니다.
택시를 타고 이 사람이 메이크업하는 곳에 도착한 후 공포가 사라졌습니다. 이 사람과 같이 있으면 나를 해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오후 2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결혼식은 4시인데…. 결혼식장에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쩌나, 결혼식은 무탈하게 끝날 수 있을까, 오만가지 걱정이 몰려왔습니다.”
申東旭 光一
그는 신동욱(申東旭·40)이다. 직업은 백석문화대 광고마케팅 학부 겸임교수. 그는 2007년 2월4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딸 박근령(朴槿·54)씨와 약혼했고, 1년 8개월 뒤인 2008년 10월13일 결혼했다. 박씨의 약혼자 시절 그는 18대 총선에 한나라당 중랑을 예비후보로 도전했다 떨어진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초혼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는 박근령씨보다 열네 살이 적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결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그는 결혼식이 끝난 직후 MBC-TV가 들이민 마이크에 “결혼식을 무사히 끝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천기를 누설하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1979년 저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고향인 경남 산청군 금서면 주상리에 살았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빨래터에서 울고 계셨어요. 그래서 ‘엄마! 왜 우나?’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임금님이 돌아가셨다’라고 했습니다. ‘왜 돌아가셨는데?’ 하니까 ‘부하가 쏜 총에 맞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울린 사람은 나쁘다는 생각에, ‘내가 임금님 복수를 꼭 해줄게’라고 말한 기억이 있습니다.
2007년 초 이 사람과 약혼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자 금서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나라님의 부마가 나왔다’며 그해 4월 말 열린 동창회 체육대회에 불러주었습니다. 저는 2남5녀의 막내인데 저희 남매는 전부 이 학교를 나왔습니다. 덕분에 모처럼 7남매가 모이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제가 서른 살 되던 해 함께 할아버지 산소를 벌초하며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산소를 잡아준 지관이 이 자리에 묘를 쓰면 지리산 천왕봉의 정기를 받은 명랑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이 산소를 쓴 후 어머니가 태기가 있어 너를 가졌다. 그때 우리 집안에서는 아들이 하나뿐이라 매우 불안해했는데, 너를 낳고는 걱정이 사라졌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저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약혼자를 데리고 고향에 내려갔으니 남매들 사이에서는 자연히 저를 중심으로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남매는 비워둔 고향집에 가보았는데 집이 반쯤 무너져 있었습니다. 넓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마당엔 풀이 들어차 있었고요. 그러자 형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집 마당은 비만 오면 질퍽거렸기에 대청 앞에 징검돌이 있었다. 동욱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그 돌에 동욱이 이름을 새겨 넣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왜 새깁니까” 하고 물으니, 아버지는 “동욱이는 천왕봉과 집 뒤에 있는 왕산(王山)의 기운을 함께 받고 낳기에 기가 너무 세, 밟아줘야 큰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누님들께 ‘제 이름을 새긴 징검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데요? 누님들은 보셨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전부 고개를 가로저어요. 그러자 형님이 ‘네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에 내가 뒤집어놓아 아무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시고, 대청 앞에 있는 길이 60cm쯤 되는 돌을 뒤집어 흙을 닦아냈습니다. 그러자 ‘申東旭 光一’이라고 새겨진 한자가 보였습니다. 형님은 이름을 밟으면 불길하다는 생각에 뒤집어 놓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돌은 부산 형님 댁에 보관돼 있습니다.
제가 지금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돌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말로 신동욱이 하나의 빛을 낸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이젠 죽을 것 같지 않습니다. 결혼하기 전,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혼을 막으려고 무슨 짓이든 하려 했겠지만, 지금에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가 빠진 카리스마
청산유수. 집중력이 좋은 것 같았다. 자기 말에 자기가 취해서 말하는 버릇이 있는 것도 같았다. 웅변을 했다면 아주 잘 했을 것이다. 그의 말에는 사람을 잡아당기는 힘이 있었다. 기가 약한 사람은 쉽게 빨려들 것이다. 그러나 카리스마는 말솜씨 하나로 형성되지 않는다. 실력과 재력과 인품도 갖춰야 한다. 사회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이가 빠진 카리스마’를 포착해낸다.
자기 이야기에 빠진 그를 꺼내놓을 필요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눈치가 빨랐다. 그는 “나는 어떤 것도 속일 수 없다. 나를 공격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기에 나의 모든 것은 발가벗겨져 있다. 내가 거짓말을 하면 그 순간 나는 바로 매장된다”며 어릴적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1968년 2월 태어난 그는 금서국민학교를 거쳐 경호중학을 다니다 2학년 때 부산에 살고 있던 형님 댁으로 가, 사상중학을 졸업했다. 소년의 꿈은 정치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산 구포의 성도고등학교에 입학해 학생회장을 지냈다. 고등학생 시절 그는 이따금 가출을 하며 방황했다고 한다.
“형님 내외분의 형편은 긴박했다. 아들 하나에 딸 셋을 두었는데, 큰조카가 나와 세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러니 형수님이 하루라도 허리를 펼 수 있었겠는가? 나는 학생회장까지 지내고 졸업했으나, 졸업식 날 아무도 축하해주러 오지 않았다. 꽃다발도 없이 교문을 나서면서 나는 ‘세상은 다 그런 거야…’하며 내가 나를 위로했다.”
그는 “정말로 학생회장을 했느냐”는 질문에 “당시에는 학생 선거로 뽑았기에 내가 뽑힐 수 있었다”라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좋고 배짱이 있다면 학생들을 휘어잡아 선거에서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더 이상 확인해보지 않기로 했다. 그는 경남대 정외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했다. 그리고 ‘신군’으로 불리며 부산의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잡부로 일하고 저녁에 단과학원에 나가 공부했다.
이때 그는 한 잡지에서 빨간 폰티악을 몰고 다니면서 ‘가왕(歌王)’ 조용필 씨와 맞먹는 수익을 올린다는 성우 배한성씨 기사를 읽었다. 그는 ‘돈이 고팠으므로’ 자신의 목소리가 좋은 만큼 성우나 배우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이듬해 2년제인 부산 경상전문대학 방송연예과에 88학번으로 입학했다. 이 학교 선배로는 배우 송강호씨가 있고, 후배 중에는 가수 배기성씨와 탤런트 장혁씨, 코미디언 신봉선씨가 있다.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그는 LPG 충전소에서 일을 하다 육군 8사단 훈련소로 입대했다. 그리고 바로 전경으로 차출돼 서울 용산경찰서에 있는 서울기동대 15중대에 배치됐다. 일경(一警) 시절 그는 하극상이라는 죄목으로 영창에 갔다오기도 했다.
‘난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
영창에서 나온 그는 지금 타워팰리스가 들어선 서울 도곡동의 93중대에 배치됐다. 93중대는 백골단으로 불리며 시위자들을 체포하는 조직이었다. 1992년 1월 수경(首警)으로 제대한 그는 바로 복학했다. 복학과 동시에 성우나 배우, 탤런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버렸다. 그는 만들어지는 사람보다는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연출의 중요성을 안 그는 부산 MBC가 주최한 영상공모전에 도전해 연출상과 작품부분에서 금상 없는 은상을 받았다고 한다.
졸업을 앞둔 그는 문화콘텐츠 분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거원영역(映易·영화무역, 지금의 ‘거원시네마’)에 입사했다. 그는 주로 기획실에서 일했는데 1997년 거원영역이 무너졌다. 그 뒤치다꺼리를 하던 그는 1998년 초 천안에 있는 남서울대학 광고홍보학과 야간부 3학년에 편입했다. 그리고 IMF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그해 8월 ‘씨뉴(cinew)필름’이라는 영화 수입회사를 차렸다. 사장이 된 것이다.
이러한 때인 2007년 봄 육영재단 앞에 있는 나무 수백 그루가 잘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은 박근령씨 결정으로 신동욱씨가 주동이 돼서 한 것이었다. 이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나무는 가지치기만 했는데, 박근령·신동욱씨가 풍수인의 말을 듣고 그것마저도 잘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싸움이 벌어졌다. 이러한 때인 2007년 6월7일 행정법원은 박근령 이사장 등에 대해 이사장 직무정치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한 달 후 발생한 것이 신 교수가 주장하는 중국 유인납치 사건이었다. 이런 식으로 육영재단은 갈등을 거듭했는데, 이 대립으로 인해 양측은 20건이 넘는 소송을 주고받게 되었다. 갈등이 커지면 육영재단은 제3자에게 넘어갈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세운 영남대학도 분규로 인해 임시 이사진이 들어감으로써,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씨는 영남대 이사회를 돌려받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육영재단은 제2의 영남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박지만씨 측의 행보가 빨라졌다.
박지만측 임시이사 선임한 법원
박지만씨 측이 자기 세력으로 임시이사 선임을 법원에 신청하자 법원은 박지만씨 측 손을 들어주었다. 재단 운영권이 박지만씨 측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정에 반발하는 것이 재단 직원들과 박근령씨 측이다. 재단 직원들은 박지만씨 계열이 들어오면 사람을 새로 바꿀 것이라는 두려움에 반대하고 있다.
이렇게 복잡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던 2008년 18대 총선이 다가오자 신 교수는 한나라당에 중랑을구 후보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조선일보 기자를 지낸 진성호 후보에게 밀렸다. 18대 총선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다음 치러진 선거라, 한나라당 공천=당선을 의미했으므로 공천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반발이 컸다. 그는 다른 탈락자들과 함께 한나라당 당사와 이재오 최고위원 집을 찾아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그는 한나라당에서 공천을 받은 사람들이 입은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한다며 이들을 입만 벙긋거리는 금붕어에 비유했다. 이러한 공세는 18대 총선이 본격화하면서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2008년 10월 그와 박근령씨는 박근혜 전대표와 박지만 회장이 불참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이렇게 신동욱과 박근령, 육영재단은 얽히고설켜 있다.
‘뮤튼트 에일리언’의 선택
박근령씨와 결혼한 신동욱씨 앞에는 네 가지 큰 문제가 놓여 있다. 첫째는 박근혜-지만씨로부터 결혼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는 아직 박근혜 박지만씨를 만나지도 못하고 있다. 둘째는 법원 결정으로 박지만씨 측에게 넘어간 육영재단을 지키는 것이다. 박근령과 박지만씨 사이의 갈등이 커지면, 교육청은 임시 이사를 파견해 육영재단을 박씨 남매로부터 떼어낼 수도 있다.
셋째는 그의 정치적 야심을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란 문제다. 많은 사람은 신동욱씨가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박근령씨와 결혼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박근령씨와의 결혼이 실패로 끝나면 그는 정치적인 야망을 이루기 힘들어진다. 야먕을 이루려면 그는 박근령씨와의 결혼생활을 잘 이끌어야 한다.
넷째는 육영재단 직원들에 대한 문제이다. 한때 육영재단 직원들은 박근령씨에게 접근하는 그를 백안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법원이 박지만씨 측이 선임한 임시이사 신청을 받아들이자 태도를 바꿔 신동욱씨와 한배를 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직장을 지키겠다는 차원에서 신 교수와 손을 잡았다. 그를 지지하는 육영재단 직원들의 기대를 그는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가.
모든 문제는 박근혜·박근령·박지만·신동욱이 화해할 수 있는냐란 문제로 귀결된다.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는‘申東旭 光一’을 실현하게 된다. 실패한다면 그는 ‘박근령의 최태민’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고 그가 수입했던 성인 애니메이션 제목과 같은 삶을 산 사람이 된다. 신 교수가 수입했던 애니메이션 뮤튼트 에일리언은 ‘돌연변이 괴짜’로도 의역할 수 있다. ‘뮤튼트 에일리언’은 그 앞에 놓인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극장주들은 내가 전주(錢主) 없이 영화사를 차린 것을 알고 ‘신동욱씨’라고 불렀다. 젊은 탓도 있었겠지만 사장으로는 추호도 대우해주지 않은 것이다. 영화 수입업자는 극장주와 뒷거래를 하고 연예지 기자들에게 촌지를 돌려야 하는데, 나는 돈이 없었다. 나를 신 사장으로 불러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IMF 경제위기 속에 직배 영화사들이 무너져갔다. 이러한 때 그는 성인 애니메이션이라는 틈새시장을 발견했다. 당시 외국에서는 미국의 빌 플림튼(Bill Plymton) 감독이 만든 ‘난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I married a strange person)’라는 성인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는 1만달러(당시 한화로 약 900만원)에 수입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녀 간신히 돈을 마련해 계약금을 지급하고 1998년 11월14일부터 서울 종로2가에 있던 코아아트홀에 3주간 영화를 상영했다. 그런데 계약한 후 이 영화가 프랑스 앙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대박의 조짐을 보인 것이다.
입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와 연일 만석이 이어졌다. 그는 “코아아트홀이 만석이면 하루 3000만원의 수입이 들어온다. ‘오늘도 만석입니다’하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코아아트홀 밑에 있는 맥주집에서 ‘아, 그래. 오늘도 좋은 날이군’ 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이 애니메이션으로 나는 분당에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을 벌었다”라고 말했다.
“ ‘南’字만 가리면 …”
그의 운명을 예측한 것 같기도 한 ‘난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는 어떤 애니메이션일까. 당시 국내에서는 국산 성인 애니메이션 ‘누들누드’가 히트를 치고 있었다. 1998년 11월12일자 ‘한겨레 21’은 이렇게 보도했다.
‘누들누드와는 전혀 코드가 다른 만화영화다. 섹스를 소재로 했지만, 그 섹스는 스트레이트가 아니라 칵테일이다. 그것도 몹시 노련한 바텐더가 혼합한 미묘한 맛이다. 그 바텐더의 이름은 각종 국제영화제 수상에 빛나는 빌 플림튼. 날아가며 교접하던 오리 한 쌍이 안테나에 부딪히며 번쩍한 광선을 맞아 초능력을 지니게 된 남자 주인공이 그 괴력 때문에 이런저런 놈들의 추적을 받지만 그 적들을 다 물리친다는 줄거리다.’
‘난 이상한…’ 덕분에 그는 ‘신 사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붙었다. 2001년 2월 남서울대학을 졸업한 그는 천안에 있는 호서대학이 서울 예술의전당 앞에 문을 연 벤처전문대학원 석사과정 제1기생에 도전했다. 당시 호서대는 BK 21을 따내면서 이 대학원을 세웠기에 일류대 출신이 많이 몰렸다.
그는 불안할 때마다 ‘나는 잘할 수 있다’는 쪽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지원자의 학력이 높다는 것을 알고 그는 심호흡을 하고 면접장에 들어갔다. 김홍 대학원장은 대뜸 “신 선생은 잘못 오신 것 같아요”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목소리를 깔고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남’자만 가리면 저도 서울대 출신입니다”라고 받아쳤다. 그 순간 김 원장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합격이야 합격! 우리가 원하는 이는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이야”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나는 대학원 생활을 재밌게 했다. 그런데 2기생을 뽑기 위해 학교에서 제작한 카탈로그를 보니까 명문대 출신 재학생만 소개하고 나는 뺐더라. 그래서 교직원에게 ‘왜 나는 뺐소’ 하고 따지니까, ‘이해해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호서대를 빛나게 할 사람은 나일 것이요’라고 쏘아주었다.”
당시 대학원장이던 호서대 김홍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대학원은 BK 21로 만들어진 것이라 명문대 출신이 많이 몰렸다. 경쟁률은 3대 1 정도였고 서울대 출신이 7명,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입학한 사람도 있었다. 면접 때 신동욱씨가 ‘나도 ‘남’자만 가리면 서울대 출신 아닙니까’라고 해 웃었던 기억이 난다. 재학 시 그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내 신 감독과 신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비즈니스 모델 특허 등록
큰소리를 친 대로 그는 이 대학원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재학 중 두 건의 비즈니스 모델 특허를 출원해 등록하고 정통부장관상을 받아 전자신문에도 보도됐기 때문이다. 이때 그가 낸 특허 중의 하나가 사이버 촛불이다. 그의 말이다.
“2008년 초 촛불시위가 얼마나 거셌는가? 그런데 인터넷상에서는 전혀 촛불이 켜지지 못했다.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나는 일찌감치 사이버 촛불의 가치에 주목했다. 앞으로는 상(喪)을 당하면 컴퓨터상에 가상 캔들(candle·촛불)을 켜놓고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고 조문하는 시대가 올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사이버 상에 촛불을 구현하는 것을 특허로 출원해 등록했다. 이러니 내 동의가 없으면 인터넷상에는 촛불이 올라올 수 없었다.”
김홍 교수는 그의 비즈니스 모델 특허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2001년 고려대생 이수현씨가 일본 지하철역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고 숨진 사건이 있었다. 그로 인해 이씨를 추모하는 행사가 줄을 이었는데, 이때 신동욱씨가 사이버상에서 이씨를 추모하는 행사를 이어가게 하자며 사이버 촛불 아이디어를 냈다. 쉽게 설명하면 사이버 머니 100원을 내면 이씨를 추모하는 촛불을 사이버상에 얼마 동안 켜 있게 하는 것이다. 사이버 머니를 내는 사람이 많으면 촛불은 계속 켜져 있게 되는 것이다.
신씨가 이 아이디어를 냈을 때 학생들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서 많은 토론이 벌어졌다. 신씨는 너무 빨랐다. 그가 이 아이디어를 2007년쯤에 냈더라면, 그리고 정치적 성향이 저쪽이었다면, 그는 촛불시위 때 큰 히트를 쳤을 것이다. 그는 창의적인 면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인터넷 공간에서 타들어가는 양초의 구현방법’과 ‘인터넷 도깨비 광고방법’을 특허청에 출원해 각각 393011호와 509436호로 등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2001년 그는 빌 플림튼 감독이 만든 새로운 애니메이션 ‘뮤튼트 에일리언(mutant aliens·돌연변이 외계인이라는 뜻)’의 수입을 추진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찾아와 쑤석거렸다. “하려면 크게 해야지. ‘난 이상한…’처럼 단관(單館) 개봉을 하지 말라고…” 크게 하라는 것은 도박을 하듯이 남의 돈을 빌려서 동시 개봉을 하라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넘어갔다.
야반도주
그래서 1만달러를 주고 ‘뮤튼트 에일리언’을 수입해 16개 극장에 걸었는데, 딱 하루만 걸리고 전 극장에서 내려졌다. 참담한 참패였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호서대 대학원 졸업식 날이었다. 특허를 출원한 것 등 때문에 정근모 총장으로부터 총장상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모든 개봉관에서 뮤튼트 에일리언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었다.
성인 애니메이션 ‘난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의 포스터.
그가 야반도주를 한 2002년은 34세 되던 해다. 인생에서 결혼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데 일 이야기만 계속하고 있으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 “결혼은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의 안색이 변했다.
“결혼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이다. ‘난 이상한 …’이 대박을 터뜨린 1998년, 대학 과 후배와 결혼해 1남1녀를 낳고 2004년 1월 이혼했다. 전처는 부산의 있는 집 출신이라 나와 많이 달랐다. 쉽게 말하면 그가 재산세 50만원을 낼 때 나는 5만원도 못 냈다고 보면 된다. … 아이들이 참 보고 싶다. 하지만 친권을 포기했기에 양육비도 주지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다. 이혼하는 조건이 그것이었다.”
그는 “실패한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풀어놓았다. 둘의 관계는 전처가 그를 더 따르는 형태였다고 한다. ‘난 이상한…’의 계약금이 모자라 발을 굴렀던 그는 결혼식을 하면 부조금으로 계약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결혼을 했다고 한다.
확실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결혼생활의 불협화음은 ‘뮤튼트 에일리언’의 실패로 증폭된 것이 분명했다. 그는 “뮤튼트 에일리언이 실패한 후 ‘나는 사업으로는 안되겠구나. 사업을 하려면 융통성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깔끔하게 이혼하지 못했다. 이혼을 한 후에도 전처를 만나 2006년 둘째아이를 낳았다. 이것 때문에 그는 박근령씨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세력으로부터 “박근령씨와 결혼하기 위해 위장 이혼했다”는 공격을 받았다.
부도로 인해 생활고가 자심할 때 처가에서는 그에게 택시기사라도 하라고 했다. 그는 정말로 택시기사를 할 생각으로 경기도 택시기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러나 택시기사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듬성듬성 “이혼 후 전처는 아이들의 이름을 바꾸었다”고까지 했으므로 그쯤에서 ‘취조(取調)’를 마치기로 했다.
신동욱씨가 특허청으로부터 받은 특허증.
부도를 내고 도망친 사람에게는 하루가 정말 길다. 긴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가 이들의 고민이다. 이때 발견한 것이 애견사업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모 애견협회가 주말마다 전국을 다니면서 애견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는 협회 일을 거들어주고 먹을 것과 잘 곳을 제공받았다. 그로서는 더없이 고마운 생활이었다.
그러다 애견 인구도 많고 애완동물학과를 개설하는 전문대학이 늘고 있는데, 애견과 그 관리에 대해 설명하는 자료는 전무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블루오션의 발견. 이때부터 그가 떠올린 것이 어린 시절의 꿈인 정치였다. 그는 자신의 롤 모델로 영화배우 출신으로 미국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을 꼽는다.
정치인이 되려면 택시기사보다는 교수가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교수가 되려면 책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이를 악물고 애견에 대한 책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김정연씨와 공저로 2004년 4월부터 2005년 1월 사이 ‘도서출판 한진’을 통해 애견 관련 책 세 권을 내놓았다.
백석문화대 교수로 임용
세 권의 저서가 나왔을 때 그는 ‘교수가 되는 문’을 두들겼다. 2004년 말, 다섯 개 전문대학의 교수 모집에 도전한 것이다. 전문대학을 나와 편입해 학사를 따고 간신히 석사학위를 받은 그가 박사 자격도 없이 교수에 도전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그는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04년 신동욱씨가 받은 경기도 택시기사 자격증과 신동욱씨가 김정연씨와 공저로 낸 애견 관련 저서.
나는 ‘벤처를 가르치는 대학의 직원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받아쳤다. 교직원은 웃으면서 ‘신 선생님이 상처를 받으시면 술 사드릴게요’라고 대꾸했다. 그렇게 해서 원서를 냈지만 한 군데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해 마지막 날 무속인이 된 대학 여자 후배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다 ‘내 운세 좀 봐달라’라고 했다. 후배는 입으로 휘파람을 불며 집중하더니 ‘선배, 죄송합니다만, 올해는 문서 운이 없네요’라고 했다.”
‘안되는구나….’ 안되면 될 때까지 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다섯 개 대학에 제출했던 석사논문을 회수해 다른 대학의 교수 모집에 제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백석문화대학(전문대 과정의 학교)을 찾아갔다. 교직원은 논문을 달라고 하는 그에게 “제출한 자료는 돌려주지 않는다고 공고하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는 “당신네들이 내 인생을 책임질 것이냐”고 따졌다. 그러자 직원은 “윗분들과 상의해보고 답을 주겠다”고 해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백석문화대학에서 전화가 왔는데 “교수로 임용됐으니 월요일 학교로 오세요” 하는 것이었다. 백석문화대학은 임용 발표를 늦게 했던 것이다. 그는 2005년 3월 백석문화대학의 겸임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러자 “상처 받으시면 술 사 드릴게요” 라고 했던 호서대의 행정 직원이 “신 선생님이 사고 칠 줄 알았다”며 깔깔거렸다.
교수가 됐으니 박사를 따는 것이 좋을 듯했다. 마침 호서대가 그를 불렀다. 당시 호서대는 서울 삼성동에 있는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를 흡수했는데, 3학기 동안 장학금을 줄 테니 박사과정에 들어오라고 했다. 2005년 가을, 그는 이 대학원대학교의 정보경영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리고 모든 학업을 마치고 졸업시험도 통과했으나 논문을 제출하지 못해 박사학위를 받지 못한 상태로 있다.
2005년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도피자’ 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 때다. 앞에서 끌어줄 가족도 선배도 없었지만 그는 어릴 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를 밀어붙였다. 정치판으로 자신을 집어넣은 것이다. 당겨주는 사람 없이 밀어붙이는 힘만으로 꿈을 이루려는 사람에겐 ‘상한선’이 없어야 한다.
엘리트는 자존심이 있어 절대 어느 선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1등의 고통도 알기에 어느 선 이상으로 올라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기가 설정한 ‘하한선’과 ‘상한선’ 속에서 평탄하게 살아가는 것이 엘리트의 속성이다.
반면 괴짜와 영웅은 하한선도 없고 상한선도 없다. 이들은 그냥 상승하다가 예상치 못한 덫에 걸려 고통을 받는다. 괴짜는 여기서 끝나지만 영웅은 덫을 뚫고 더 크게 일어선다. 그의‘장인’인 박정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신동욱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노사모가 위장 잠입한 것 아니야?”
노무현 정부 시절 노사모의 위력은 대단했다. 노사모는 사이버상을 무대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디지털 정치의 위력을 실감한 한나라당이 2005년 11월말 디지털정당 위원장을 공모한다는 공고를 냈다. 인터넷과 관련된 특허를 갖고 있는 신 교수는 즉각 지원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추천인란을 채울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한 그는 ‘그래,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이니, 내가 추천인이 되자’라는 생각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이것이 히트를 쳤다. 위원장 후보로 추천된 것이다. 그러자 이 선거의 선거위원장을 맡게 된 김희정(37·부산 연제) 의원이 그를 보자고 했다.
“보좌관이 찾아와 김 의원이 저를 보자고 한다기에 의아하게 생각하고 갔더니, ‘내가 신 교수께서 위원장 선거에 나갈 수 있도록 추천했다’고 했습니다. 한나라당에서는 저를 노사모가 아닌지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노사모가 한나라당 디지털정당 위원장에 당선되면 큰일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뒷조사를 했다는 것이 김 의원의 이야기였습니다.”
일반 선거와는 다른 디지털 투표 방식으로 치러진 이 선거에는 김명주(41·경남 통영) 의원과 강용석(39·마포을) 17대 총선 출마자, 김우석(41) 여의도연구소 기획위원 등 신 교수와 나이가 엇비슷한 서울대 출신의 한나라당의 386들이 대거 도전했다. 그리고 김명주 의원이 당선자가 되었다.
이 선거에서 2등과 3등을 한 사람은 자동으로 한나라당 전국위원회 상임전국위원이 되고, 4등과 5등은 전국위원회 전국위원이 된다. 그는 5등을 했으므로 전국위원이 됐다. 선거가 끝난 후 당선자를 중심으로 술자리가 마련했다. 신 교수는 이때 ‘술을 말아먹는 것(폭탄주 제조하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고 한다.
“대낮에 여의도 맨해튼호텔에서 폭탄주를 만드는데, 술을 섞어서 휘 돌리고, 잔을 덮었던 휴지를 천장으로 ‘휙’ 던지는 거라.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대요. 그렇게 해서 여러 순배를 돌린 후 당선자가 저를 보고 ‘신 교수께서는 전국위원이 되셨으니 2차를 쏘시죠?’라고 했습니다. 눈앞이 아득해졌습니다. 이런 자리의 술값이면 교수 봉급 세 달치가 날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주는 술을 받아 옆으로 15도 꺾은 자세로 공손히 마시고 속으로 ‘위원장님 저는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저는 보스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김의원이 껄껄 웃으면서 ‘걱정마시오. 2차는 내가 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1년간 나는 술자리에 가면 뒷짐을 지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돈은 한번 내면 계속 내야 합니다. ‘없는 놈이 있는 척하면 죽는다’는 것을 영화 사업을 통해 처절하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표와의 만남
2006년 시무식이 있은 후 박근혜 대표가 새로 전국위원이 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박 대표와 악수하는 순간 사람들은 전부 허리를 90도 각도로 꺾었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이를 본 그는 속으로 ‘이 사람들 정신이 있어? 그렇게 인사한다고 해서 박 대표가 당신들을 기억이나 할 것 같아?’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차례가 되자 박 대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박 대표의 손을 힘을 주어 잡았다.
악력(握力)을 가한 상태였기에 자연 다른 사람들보다는 길게 악수하는 모양이 되었다. 이때 그는 박 대표의 눈을 바라보며 속으로 ‘나를 꼭 기억해주시오. 당신은 나의 도움을 받는 날이 있을 것이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렇게 인사를 끝내자 한 동료가 쿡 찌르며 “신위원, 안 무서워. 나는 박 대표를 보면 박정희를 보는 듯이 오싹한 느낌이 들어”라고 했다. 그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에는 정치 지망생이 즐비했다. 하나같이 명문대 출신들이다. 정당 생활이 처음인 그는 한 술자리에서 당료 생활을 오래 해온 간부를 붙잡고 어떻게 하면 한나라당에서 출세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돈이 많아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돈이 없다’고 했더니, ‘폭탄주를 잘 마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폭탄주를 잘 마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좋던 나쁘던 언론에 많이 이름이 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내가 명색이 광고홍보 전공 교수인데 그런 쪽이라면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목한 것이 2006년이 개띠해인 병술년(丙戌年)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내가 개에 대한 책을 세 권이나 내지 않았습니까?”
병술년 설날이 다가오자 그는 17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7명의 정치인 이미지를 개에 빗대 풀이한 ‘명견에 비친 7룡’이라는 글을 만들었다. 이 칼럼에서 그는 박근혜 대표를, 소형견이지만 외유내강형으로 자립심이 강하고, 유순한 외모에 비해 거친 면도 갖고 있는 대한민국 부동의 인기견 몰티즈에 비유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청계천 복원과 서울시 교통체계를 개편하면서 독불장군과 불도저 이미지를 보여줬다’며 도베르만에 비유했다. 손학규 경기지사는 삽살개에 비유했고, 열린우리당 쪽의 고건 전 총리는 골든레트리버, 이해찬 국무총리는 로트와일러,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풍산개, 김근태 열린당 상임고문은 불테리어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이 칼럼은 연합뉴스를 통해 보도됐으므로 그는 이름 석자를 언론에 올리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진돗개, 노무현은 …
그런데도 어느 캠프에서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띄우는 방법으로 계속 개를 키워드로 삼기로 했다. 그해 추석이 오자 그의 미니 홈피에 ‘대통령을 닮은 개’라는 칼럼을 연재했다. 이 칼럼에서 그는 “흔히 정치판을 개판이라고 하지 않으냐. 이는 권력과 개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대통령의 개는 왕이랍시고 왕왕 짖을 것이고, 총리의 개는 2인자랍시고 멍멍 짖을 것이고, 내각의 개는 밥그릇 챙기느라 낑낑 짖을 것이고, 여야 대표의 개는 하루를 멀다하고 물고 뜯어야 하니 왈왈 거리며 짖을 것이고, 단체장의 개는 여야 눈치를 보느라 끙끙 거리며 짖는다”라고 비유했다.
그는 한나라당 처지에서는 적장인 노무현 대통령도 개에 비유해보기로 했다. 잘못하면 국가원수모독죄로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추석에 역대 대통령과 함께 비유하는 것이니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 대통령을 ‘평소에는 얌전하고 신사적인 것 같지만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골통정신이 강한 샤페이를 닮았다’고 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체격은 작지만 날렵 기민·대담·용맹하고,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근성을 가진 진돗개’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세인트버나드에 비유했다.
그리고 진돗개에게는 별 다섯, 세인트버나드에는 2개 반, 샤페이에는 1개 반의 평점을 주었다. 이 칼럼도 언론 보도를 탔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한나라당 당직자로부터 “박 대통령의 둘째따님이 당신을 만나보고자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의문을 품고 식사 약속에 응했다. 그런데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은 1시간 정도 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그는 5분 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스타일인지라 참지 못하고 “이사장님은 내 인생의 1시간을 허비하게 했습니다”라고 쏘았다.
박 이사장은 그가 명견에 비유해 아버지를 높이 평가해준 데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려고 자리를 마련한 것인데 늦게 왔다. 어쨌든 그는 명함을 건네고 대화를 해나갔는데 박 이사장은 끝내 명함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명함을 드렸으면 이사장님도 명함을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고 또 따지자, 박 이사장은 미안하면서 명함을 주었다.
대화는 겉돌았다. 그는 박 이사장을 다시 볼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인연이 있으면 뵙지요”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가 권영세 의원이 이끄는 영민포럼 사람들과 관악산 등산을 갔다가 한 전화를 받았다.
박근령이 도움 요청
그는 ‘뮤튼트 에일리언’실패로 인한 빚을 다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모르는 번호가 찍히는 전화는 받지 않았다. 사채업자들은 끈질기게 전화를 걸지만 세 번 정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는다. 그런데 이 전화는 10여 번을 계속해 걸려왔다. 사채업자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음성을 변조해 “누구십니까”라고 하자 저쪽은 “박근령입니다”라고 했다.
그제서야 자기 음성으로 돌아온 그가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시간이 되면 만나고 싶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만났을 때 박 이사장은 육영재단의 고충을 이야기하며 재단의 자문위원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는 박 이사장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냥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귀부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박 이사장은 박 대표의 동생이 아닌가. 그는 박 대표와 이명박 시장 캠프를 가리지 않았지만, 대선 캠프에 참여해 일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박 이사장의 부탁이 예민한 상황을 만들 것으로 보았다. ‘박 대표가 대선에 출마하면 육영재단은 물론이고 정수장학회와 영남대 이사회 등이 문제가 된다. 박 대표로서는 이를 막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육영재단의 자문위원을 맡아달라니….’그리고 육영재단 사정을 알아보니 매우 복잡했다. 그의 말이다.
“길을 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소. 구해줘야겠지요. 그런데 둘도 없는 흉악범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남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살려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 이사장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 같은 사람을 붙잡고 도와달라고 했겠습니까. 두말 않고 자문위원을 맡기로 했습니다. 대선이 다가오는 예민한 시기에 말입니다.”
육영재단 일에 관여하게 된 그는 재단에서 가장 큰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박 이사장 자신임을 파악했다고 한다. 박 이사장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런 일이 있으면 큰일납니다”라고 하면, 박 이사장은 그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 탓인지 박 이사장은 무조건 이명박 시장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는 박 이사장이 세상을 바로 보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14세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한 박근령-신동욱 부부.
그래서 그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 청계천으로 나가보자고 했다. 그날 두 사람은 청계천 초입에서 신당동까지 걸었는데, 박 이사장은 청계천 물줄기를 보고 “야, 좋다!”를 연발했다. 이때 그는 “이시장은 위대한 전략가입니다. 청계천을 보지 않고 그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청계천에 걸려 있는 다리들을 보세요. 전부 다르게 설계돼 있습니다. 왜 이렇게 설계했을까요”라고 물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박 이사장의 눈과 귀를 열어주려고 했다.
그는 박 이사장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보았기에 등산을 제의했다. 등산은 박 이사장을 사람들로부터 떼놓는 방법이기도 했다. 박 이사장이 주저하자 그는 “이사장께서 꼭 알아야 할 일이 있다면 사람들은 산으로 갖고 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일이라면 별일 아닐 것이고요. 사무실에서는 항상 이사장 곁에 있으려고 하면서도 산으로는 못 오겠다고 하는 사람은 진짜로 충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충고했다.
2007년 초 그는 박 이사장과 함께 청와대가 보이는 인왕산에 올랐다. 정상에 오른 박 이사장은 청와대를 보고 회상에 잠겼다. 이때 그는 “CEO는 정상에서 산 전체를 봐야 하는데, 이사장께서는 골짜기의 나무 한 그루를 붙잡고 씨름하고 계셨습니다. 사람을 선별해서 쓰십시오”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급격히 가까워져 그해 2월4일 관악산 정상에서 산상 약혼식을 올렸다.
박근령의 콤플렉스
그쯤에서 기자는 신 교수와의 대화를 접고 박근령씨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박 이사장은 대통령 딸이기도 하지만, 경기여중,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한 엘리트가 아닌가. 이러한 그가 전문대학 출신에 14세나 어린 무명의 정치 지망생과 결혼한 것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자는 신 교수와 7시간 대화했고 박근령씨와는 3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박근령씨와의 대화에서 중점적으로 들으려고 한 것은 그와 박근혜 전 대표와의 관계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있기 전 박정희는 서울 신당동에 살았으므로, 박근령씨는 장충국민학교에 입학해 다녔다. 그리고 청와대로 옮겨가면서 4학년 때 청운초등학교로 전학갔다.
이때부터 그는 경호원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언니는 가톨릭 신자라 성심여중, 성심여고를 거쳐 서강대로 진학했으나 미술을 잘한 그는 경기여중, 경기여고로 진학했다. 그리고 피아노를 좋아해 서울대 작곡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박근령은 경호원을 자주 따돌리기로 유명했다. 그는 경호 때문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했다. 박 전대표가 대학 4학년으로 프랑스에 잠시 유학 가 있고, 그가 대학 2학년이던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이 쏜 총을 맞고 사망했다. 그로 인해 박 전대표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하게 되었다.
1977년 대학을 졸업하게 된 박근령씨에게는 그런 역할을 부여되지 않았다. 그는 “좋은 혼처가 나오면 결혼을 시킬 것이라고 해서 요리 학원에 다녔다”라고 말했다. 언니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동생은 신부수업을 하는 쪽으로 갈린 것이다. 이때 박근령씨는 언니를 돕는 일을 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나는 언니가 하는 것을 같이 좋아했다. 신기한 것이 생기면 갖고 있다가 언니에게 보여주고, 언니가 좋아하면 나도 함께 좋아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께서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주신 것 같다. 물론 혈액형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전공이 다르다 보니 가는 길이 달라졌지만, 나는 항상 언니를 따라 하고 언니에게 잘하려고 했다.
롯데백화점이 막 문을 열었을 때 언니와 함께 갔는데 사람들이 언니를 알아보고 몰려들려 혼이 난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을 후 언니는 외부 출입을 삼갔다. 그러나 나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자유로웠다. 언니가 외국 정상과 만남을 앞두고 어떤 한복을 입어야 하나 고민하면, 나는 동대문시장에 나가 언니가 좋아하는 색깔의 ‘천조각’을 구해와 보여주곤 했다.
서점에 가서도 언니가 좋아하는 책이다 싶으면 사서 갖다주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 책을 보고 언니가 좋아하면 합격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합격이었다.”
박근혜를 내조한 박근령의 반란
1979년 10·26사건이 일어났을 때 기자는 고3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의 관심은 대통령 유자녀에게 쏠려 있었다. 박대통령 국장이 치러지던 날 카메라는 3남매를 자주 비췄다. 그러나 기자는 박근령씨의 얼굴은 끝내 보지 못한 기억이 있다.
박근혜씨와 박지만씨는 고개를 들고 국장을 치렀으나 박근령씨는 앞머리를 내린데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국상 때 왜 얼굴을 감추었느냐”고 묻자 그는 “얼굴이 알려지면 불편해진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다”라고 대답했다.
3남매는 사저인 신당동 집으로 옮겨갔으나 집이 좁고 너무 낡았다. 그러자 한일합섬과 동아건설 등 박대통령 덕분에 성장한 기업들이 십시일반으로 지원해 성북동에 집을 지어주었다. 집 공사는 경남기업이 했다. 이 집에 입주한 후 박근혜씨는 아버지의 유산인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그리고 한마음병원 등의 일을 하게 됐다.
“언니는 일이 많았다. 집으로도 서류를 가져와 살펴보았다.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던 부인들이 자주 집으로 찾아오셨기에 언니는 청와대에 있을 때처럼 자기 생활이 없는 삶을 살았다. 외국 손님도 찾아왔다. 외국 부인이 찾아오신다고 하면 언니는 그 나라에 대한 정보를 구했는데, 그것을 찾아주는 것이 내 일이었다. 동생(박지만)은 장교였는데 집에서 출퇴근했다.”
박근혜씨와 박지만씨는 바깥 생활을 하느라 바빴고 성북동 집을 지키면서 내조한 것은 박근령씨였던 것 같다. 박근령씨는 “재단에서는 사무국장이 언니를 돕지만 집에서는 내가 그 일을 했다”라고 말했다.
1982년 박근령씨는 이런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중매로 P금속 창업자의 장남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결혼은 금방 파탄났다. 그는 “결혼해서 몇 달 안돼 남편이 미국 지사로 발령 났는데,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다. 언니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이었다. 언니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빤히 알고 있는데 나만 미국에 갈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나도 명함을 갖고 싶었다”
이것으로 결혼생활은 막을 내리고 그는 성북동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의 ‘그림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림자 생활에 지쳐가고 있었다. 자기 생활을 하고 싶었다. 1986년 장충동으로 집을 옮길 때쯤 그는 독립을 추구했다. 미국에 있는 한 지인을 찾아간 것이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는지, 미국에서 살 만한지’ 알아보려고 간 것이다. 그는 사업거리도 알아보았다. 생활비는 괜찮은 보디숍(화장품가게) 등에 투자해 만들려고 했다. 그는 “삼십이 넘었는데도 남앞에 내밀 명함이 없다는 것을 매우 창피하게 여겼다”고 말했다.
그의 검토는 오래 걸렸다. 1990년 그는 드디어 미국에서 살 생각을 하고 이민 준비에 들어갔다. 영주권을 얻기 위해 이민 전문 변호사도 만났다. 이때 육영재단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박근혜씨가 이사장을 하고 있던 육영재단에서는 최태민씨의 파워가 막강했다. 최씨는 이사장실 옆에 책상을 두고 재단에서 올라오는 모든 서류를 구두로 결재했다. 최씨의 전횡이 심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박정희 대통령의 문경보통학교 제자인 이순희씨가 이끄는 숭모회가 반기를 들었다.
이 사건으로 박근혜씨와 최태민씨는 육영재단에서 물러나고 박근령씨가 이사장에 취임했다. 박근령씨도 명함을 갖게 된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박근령씨는 “누구도 언니에게 재단에서 나가라고 한 이는 없었다. 서로 살아가는 길을 상의하고 싶은 것이 많았은데, 이상하게도 언니와는 접촉이 되지 않았다. 주변에서 차단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박근령 이사장의 육영재단은 그런 대로 운영되다 노무현 정부 시절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첫째 문제는 신동욱 교수도 지적했듯 박 이사장이 인(人)의 장막에 갇힌 것이 문제였다. 전임자인 박근혜 이사장 시절 최태민씨가 육영재단을 좌우했듯이 박근령 이사장 시절에는 몇몇 사람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때인 2007년 박근령 이사장이 신동욱 교수와 약혼하며 급속히 가까워졌다. 신 교수는 재단의 감사실장 타이틀을 받아 재단 일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박근령은 原石이다”
관악산 산상 약혼으로 신 교수는 박근령 이사장과 불가분의 관계가 됐지만, 두 사람이 말하는 약혼식에는 눈물겨운 면이 있다. 육영재단 사람들은 박근령씨의 재산이 전무하다고 말한다. 박근령씨가 사는 아파트는 박지만 회장이 마련해준 전셋집인데, 명의는 박근령씨와 박지만 공동으로 돼 있다고 한다. 차는 재단의 것을 쓰고, 재단에서 받는 봉급이 그가 쓸 수 있는 돈의 전부라고 한다. 신 교수의 말이다.
18대 총선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신동욱씨(왼쪽에서 세 번째)가 신동욱씨가 주도한 핫바지 시위와 한나라당 공원을 비난하는 그의 포스터(오른쪽 사진).
신 교수는 약혼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말자고 했으나 기록은 해놓자고 했다. 육영재단 앞에는 ‘대한뉴스’라는 잡지사가 있다. 두 사람은 잡지사에 약혼식 사진을 주고 약혼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새나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보도되면서 일파만파가 되었다.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 박근혜 대표의 동생이 14세 젊은 남성과 재혼한다니 언론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그때부터 “재단과 관련해 악성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신 교수의 말이다.
“신당동 사저는 기념사업회 소유로 되어 있기에 이사장 재산은 전무입니다. 왜 내가 이러한 분과 결혼했느냐고요? 역설적으로 그의 무소유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상이 이사장을 돌멩이로 만들어놓았다고 보았습니다. 남들은 쓸모없는 돌로 보았는지 모르지만 저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원석(原石)으로 보았습니다. 이사장은 정말 착한 여자입니다.
이사장은 저에게 ‘교수님 세상이 무서워요. 사람들이 무서워요’라고 했습니다. 이사장에게 그런 정보만 주었기에 그는 세상을 무서워하고 세상이 하자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무서워하지 마세요. 이사장님은 제가 목숨을 바쳐 지켜드릴 것이니 목숨이 두 개예요’라고 했습니다.
약혼 소식이 알려진 다음부터 재단에서 나와 이사장을 떼어놓으려는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인터넷에는 내가 징역을 산 적이 있다는 음해가 나돌았고요. 2007년 3월8일에는 나를 자동차로 치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붙잡혀 실형을 살았습니다. 박근령 이사장을 이용해 치부하다가 내가 나타나니까 방해하는 세력이 등장한 것입니다.”
테러 당했다고 주장하는 신동욱
2007년 2월 신 교수는 재단의 감사실장이 되었다. 그러자 그를 가리켜 ‘제2의 최태민’이라고 비난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비난의 소재로는 그가 이혼한 전처와의 사이에서 2006년에 낳은 아이가 자주 거론됐다. 이때부터 신 교수는 상당한 견제를 당하게 된다.
그해 여름 그는 중국 웨이하이(威海)로, 돌을 가져오는 사업을 하자는 사람을 따라갔다가 마약을 흡입하는 현장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다쳐 칭다오(靑島)주재 한국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귀국했다. 그는 경찰에서 마약 복용 혐의로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가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신 교수는 중국에서 사람들에 이끌려 마약을 접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혼을 막기 위해 누군가가 자기를 중국으로 유인해 마약을 접하게 한 후 중국공안에 신고했다고 주장한다.다리는 마약 흡입 문제로 중국 공인 병원에 입원 했을때 탈출하다 다친것이다.
재단에는 외부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었던 조모씨는 “외부세력이란 박지만 EG회장을 가리킨다”라고 말했다. 당시 박지만씨는 박태준 전 포철회장의 배려로 포스코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산화철을 가공해 반도체 재료를 만드는 EG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재단에는 박 전대통령과 관계된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는데, 이들은 박 전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 회장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재단에는 박 회장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박지만씨 세력이 육영재단 일에 관여한 것은 두 사람의 결혼 가능성과 재단이 제3자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2007년 서울 성동교육청은 육영재단이 불법 운영돼온 사례를 적발해 이를 시정하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성동교육청은 ‘공익법인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이러한 지시를 한 것인데, 이에 박근령 이사장 측은 반발했다. 육영재단은 창설 이래 단 한 번도 정부 보조금을 받은 적이 없으므로 그는 정부가 육영재단 일에 관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개 사람들은 박근혜와 박근령 박지만은 한편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세 사람은 갈등해왔다. 성동교육청의 지시는 박 전 대표가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오른 시점에 나온 것이니, 정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박근혜 흔들기의 일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치인 박근혜는 육영재단 일은 맡을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성동교육청은 박근령씨가 이끄는 육영재단 일에 개입해 둘을 떼어 놓으려 했다. 박근혜씨 남매 처지에는 아버지의 유산인 재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박지만씨가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