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4반세기 동안 ‘맨유’ 제국 이끈 영국 축구의 지배자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2-02-21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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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섭고 냉정하다. 걸핏하면 독설과 폭언을 일삼는다. 언뜻 보면 ‘괴팍한 성격의 고집쟁이 영감’이지만 카리스마와 냉철한 판단력, 젊은 인재를 육성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축구 감독이 됐다. 바로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최고 클럽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끌고 있는 알렉스 퍼거슨 경(卿)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지만 퍼거슨 감독은 무려 26년 넘게 ‘맨유’를 이끌며 맨유를 세계 최고의 인기 구단이자 감동적인 스토리 콘텐츠를 보유한 기업으로 만들었다. 특히 그는 과거의 명성에 기대어 근근이 명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카멜레온처럼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최고의 감독이자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에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항상 감독직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즐거움이 사라질 때까지 이 직업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돈이 오가는 프로 스포츠계에서 감독의 목숨도 파리 목숨에 불과할 때가 많다. 제아무리 명장이라 해도 현재 성적이 좋지 않으면 시즌 도중 경질되는 수모를 겪어야 한다. 하지만 강산이 거의 세 번이나 바뀔 시간인 만 26년간 세계 최고의 팀을 이끌고 있는 감독이 있다.

    한국 축구 팬에게는 박지성이 뛰는 팀으로 유명한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다. 1986년 11월 맨유 감독으로 부임한 그는 현재까지 26년간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프리미어리그 감독들의 평균 수명이 1년 7일이라는 통계를 감안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맨유 감독으로 총 1428경기를 치러 이 중 847경기에서 승리했다. 대부분의 감독이 승률 50% 미만인 점을 감안할 때 59.3%의 승률 또한 대단한 기록이다.

    이뿐만 아니라 퍼거슨은 맨유에서 영국 프로 축구팀 사상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 달성을 비롯해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데이비드 베컴,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두 호날두, 폴 스콜스, 게리 네빌, 라이언 긱스, 에릭 칸토나, 박지성, 로이 킨 등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스타 선수도 발굴하며 그 자신을 그 어떤 스타 선수보다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런 퍼거슨 리더십의 요체는 과연 무엇일까.

    퍼거슨은 누구인가



    퍼거슨은 1941년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의 주요 도시 글래스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선박장에서 일하는 전형적인 영국 노동자 계층의 일원이었다. 집안 형편은 가난했지만 퍼거슨과 한 살 아래인 그의 동생 마틴 퍼거슨은 모두 축구에 재능을 보여 일찌감치 축구선수가 됐다.

    선수 알렉스 퍼거슨의 경력은 감독 퍼거슨에 비해 보잘것없었다. 퍼거슨은 1958년 퀸스파크에서 정식 선수로 데뷔했다. 주 포지션은 포워드였다. 이곳에서 2년을 보낸 뒤 1960년 세인트 존스턴으로 이적한다. 가능성을 인정받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1964년 던퍼민 애슬레틱에서 선수 퍼거슨은 축구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세 시즌 동안 88경기 66골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스코틀랜드의 최고 명문팀인 글래스고 레인저스로 이적했다. 스타 선수가 많았던 레인저스에서 퍼거슨은 기대에 미치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1969년 폴커크로 이적해 선수 겸 코치로 활약하며 지도자 인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퍼거슨은 1974년 은퇴한 후 이스트 스털링셔라는 아마추어팀에서 정식 감독으로 데뷔했다. 주전 골키퍼도 없는 악조건, 주급 7만 원에 불과한 열악한 현실에서도 특유의 지도력을 보인 그는 그 성과를 인정받아 세인트 미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도 2부 리그의 약체팀이었던 세인트 미렌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키는 활약을 보였다.

    그 성과로 그는 명문팀 애버딘의 감독직을 맡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1970년대 당시에도 스코틀랜드 축구의 양대 산맥은 퍼거슨이 선수로 뛰었던 레인저스와 셀틱 두 팀이었다. 하지만 퍼거슨 휘하의 애버딘은 이 양강 구도를 깨뜨리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스코틀랜드 팀 역사상 최초로 유러피안컵 우승까지 차지했다. 퍼거슨은 애버딘에서 지내는 8시즌 동안 프리미어 우승을 포함한 총 10개의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감독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맨유와의 운명적 만남

    애버딘에서 명장의 기반을 닦은 퍼거슨을 탐내는 팀은 많았다. 영국 프리미어리그는 물론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 다른 유럽 빅 리그의 명문 클럽들로부터도 러브콜을 받았지만 그는 1986년 맨유를 택했다. 퍼거슨이 맨유를 택했을 때 맨유 구단과 팬, 심지어 그 자신도 맨유에서 26년간 수장으로 근무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퍼거슨이 오기 전 맨유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25년간 감독으로 근무한 명장 매트 버스비 경의 색채가 짙게 남아있었다. 1968년 버스비가 감독을 그만둔 후 무려 5명의 감독이 맨유를 거쳤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퍼거슨 역시 맨유 감독을 맡은 초기에는 팬들의 기대만큼 빨리 맨유에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안겨주지는 못했다. 퍼거슨의 부임 첫해 맨유의 리그 성적은 11위에 불과했다. 1987~88년 시즌에는 리그 2위에 올라가 우승에 한 발짝 다가섰으나 1988~89년 다시 7위로 미끄러졌다. 1989~90년 시즌 초반에도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자 분노한 팬들은 그의 사퇴를 요구했다.

    위기의 순간을 돌파할 수 있었던 계기는 결국 성적이었다. 1989~90년 시즌 맨유는 퍼거슨 부임 후 최초로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첫 우승 후 퍼거슨은 팀 전력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며 성공 가도를 달려나갔다. 1990~91년 시즌에는 스페인의 명문팀 FC 바르셀로나를 꺾고 UEFA컵 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은 맨유가 23년 만에 이뤄낸 유럽 클럽 대항전 우승이었기에 맨유 팬들의 기쁨은 더 컸다.

    1992~93년 시즌에 퍼거슨 감독은 드디어 프리미어 리그 첫 우승을 달성했다. 시즌 초반에는 리그 10위까지 떨어졌으나 이탈리아 출신 에릭 칸토나를 영입한 후 상승세를 타면서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은 잉글랜드 1부 리그가 프리미어리그로 이름이 바뀐 첫해에 달성한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 컸다.

    퍼거슨이라는 날개를 단 맨유는 단순히 프리미어리그의 주요 팀이 아니라 세계적인 명문 클럽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1993~94년 시즌에는 팀 설립 후 최초로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이를 더블 크라운이라 한다. 당시만 해도 보잘것없는 신예였던 데이비드 베컴, 라이언 긱스, 게리 네빌, 폴 스콜스 등을 대거 중용한 퍼거슨은 1995~ 96년 시즌 또 한 번 더블 크라운을 이뤄냈다. 영국에서 더블 크라운을 두 차례 달성한 감독은 퍼거슨이 최초였다.

    ‘트레블 신화’로 세계적 명장의 반열에 오르다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트레블 혹은 트리플 크라운은 한 클럽 팀이 동일 시즌에 자국 정규 리그, 자국 축구협회(FA·Football Associations), 유럽 축구의 왕중왕전이라 할 수 있는 유럽 축구협회(UEFA·Union of Euro-pean Football Associations), 챔피언스리그 이 3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는 일을 말한다. 1955년 UEFA 챔피언스리그가 시작된 후 공식적으로 트레블을 달성한 클럽은 6개에 불과하다.

    퍼거슨은 프리미어리그 팀을 지휘해 트레블에 오른 최초의 지도자다. 이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맨유는 1998~99년 시즌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달성한 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독일의 바이에른 뮌헨과 맞붙었다. 스페인 FC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누캄프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맨유는 기적의 역전승을 달성했다. 종료 직전까지 0대 1로 뒤졌지만 후반 추가 시간 3분에 테디 셰링엄과 솔샤르가 연속 골을 터뜨리며 2대 1로 역전승했다.

    이 경기는 아직까지 유럽 축구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고 있다. 다 잡았던 우승컵을 눈앞에서 놓친 바이에른 뮌헨 팬들은 이를 ‘누캄프의 비극’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퍼거슨은 트레블을 달성한 직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으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트레블을 달성한 후에도 퍼거슨은 탁월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맨유를 이끌면서 여러 개의 우승컵을 추가로 들어 올렸다. 특히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 형제 등 소위 ‘퍼기의 아이들’로 불리는 유망주들을 세계적인 축구 선수로 키워내며 맨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데도 큰 기여를 했다. 현재까지 퍼거슨 휘하의 맨유는 19번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해 기존 18회 우승을 차지했던 리버풀의 기록을 깬 상태다.

    다만 맨유는 지난해 5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FC 바르셀로나에 3대 1로 패했다. 이 경기를 포함해 최근 FC 바르셀로나와의 역대 전적에서 열세를 보이면서 유럽 최고의 축구팀이라는 명성은 살짝 빛이 바래기도 했지만 맨유가 여전히 프리미어리그를 비롯해 세계 축구 역사상에 남을 명문 팀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없다.

    퍼거슨 감독이 주는 교훈

    1) 리더는 ‘영건’ 발굴의 귀재여야 한다

    감독 퍼거슨이 명장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끊임없이 유망주를 발굴해 맨유의 장기 전성시대를 열어왔다는 점이다. 프리미어리그의 경쟁팀인 첼시가 로만 아브라모비치라는 러시아 재벌 구단주의 막대한 자금력으로 세계적인 스타급 선수들을 불러 모아 정상에 올랐다면 베컴, 네빌, 긱스, 스콜스, 나니, 호나우두는 물론이고 박지성에 이르기까지 재능 있는 유망주를 발굴하는 퍼거슨의 수완이 없었다면 오늘의 맨유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맨유의 자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퍼거슨 감독은 이렇게 대답한 바 있다. “맨유의 강점은 단연 유소년시스템이다. 1999년 트레블의 주축이었던 베컴, 스콜스, 네빌형제, 버트 등은 1992년 청소년컵 우승 멤버였고, 이들이 성장해 1998~99년 시즌의 트레블 우승 주역이 됐다. 최고의 스카우팅 시스템을 갖춰 유능한 영재를 많이 뽑아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퍼거슨은 1986년 맨유에 부임하자마자 유소년 시스템을 점검하고 정비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 퍼거슨 직전 맨유를 맡았던 론 애킨슨 감독이 완성된 선수만을 선호하는 것과 무적 대조적이었다. “현재의 실적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강팀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는 신조를 지닌 퍼거슨은 맨유의 정식 경기가 끝나면 유소년 팀의 경기를 보러 다녔다.

    이런 퍼거슨의 노력이 빛을 발한 때가 바로 1995~96년 시즌이다. 당시 팀의 간판선수들이 시즌 전 갑작스러운 은퇴를 발표하면서 큰 난관에 부닥치자 퍼거슨 감독은 자신이 발탁하고 육성한 유소년 팀 선수들을 대거 1군 무대로 등록시켰다. 당시 수많은 사람이 이를 무모한 도전이라고 했으며, 어린 선수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퍼거슨의 결정을 비난했다. 당시 한 기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길 수는 없다”고 퍼거슨을 조롱했다.

    하지만 퍼거슨의 안목과 결정은 그해부터 바로 성과를 거뒀다.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때 뛰었던 어린 선수들은 ‘퍼기의 아이들’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잉글랜드 프로축구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었다.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 달성 멤버의 주축도 이 ‘퍼기의 아이들’이다. 그중 폴 스콜스, 게리 네빌, 라이언 긱스 등은 아직까지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퍼거슨 감독과 함께 맨유를 이끌고 있다.

    또한 될성부른 떡잎들과 성장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을 고루 영입하며 팀을 강하게 만들어왔다. 박지성, 에릭 칸토나, 로이 킨, 드와이트 요크, 야프 스탐, 반 니스텔루이, 크리스티아누두 호날두 등은 모두 영입 당시 비판도 받고 우여곡절도 겪은 선수다. 하지만 퍼거슨은 자신의 선택을 믿었고 이들 모두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또한 최고로 이끌고 있다.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퍼거슨 감독(왼쪽)이 경기 전날 공개훈련에서 박지성을 따로 불러 뭔가를 주문하고 있다.

    인재 발굴과 육성 능력이 리더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젊은 인재를 발굴하는 안목과 예지 능력은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다. 훌륭한 리더는 훌륭한 구성원이 될 사람을 선택하고 그들을 발전시킬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감독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단기 성과에만 집착하다 보면 결코 퍼거슨처럼 수많은 선수를 길러내고 그 자신도 26년간 장기 집권할 수 없다.

    2) 리더는 조직원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

    퍼거슨 감독은 다혈질 성격과 독설로 유명하다. 화가 나면 세계적인 스타였던 베컴에게도 축구화를 던질 만큼 불같은 성질로 유명하지만 리더 퍼거슨에게 이런 무서운 면모만 있었던 건 아니다. 선수 개개인의 개성과 장단점을 존중하고 한 번 믿은 선수는 끝까지 믿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따뜻한 면도 있다는 것이 그가 감독으로서 가지는 두 번째 장점이다. 대표적인 예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맨유에서 뛰었던 프랑스 출신의 스트라이커 에릭 칸토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칸토나는 퍼거슨만큼이나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길들지 않은 야생마 같은 선수였다. 퍼거슨은 칸토나의 재능을 간파하고 다른 이들이 실패한 칸토나 길들이기에 성공해 그의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칸토나는 걸핏하면 훈련시간에 늦었고 복장 또한 불량할 때가 많았다. 퍼거슨은 다른 선수들이 같은 행위를 했을 때 거침없이 육두문자를 날리고 혼을 냈지만 칸토나에게는 채찍 대신 당근을 썼다. 당근을 쓸 때 더 유용한 선수라는 점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퍼거슨의 칸토나에 대한 인간적 배려는 1995년 1월 크리스털 팰리스와의 경기에서 벌어진 ‘쿵푸 킥’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이 경기에서 칸토나는 크리스털 팰리스의 수비수 리처드 쇼를 발로 차 심판으로부터 퇴장명령을 받았다. 칸토나가 경기장을 나오는 순간 크리스털 팰리스의 팬 한 명이 칸토나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다. 이에 격분한 칸토나는 그 팬에게 달려들어 이단 옆차기를 날렸다. 안전요원에게 끌려 나갈 때까지 칸토나는 몇 차례 더 주먹질을 했다.

    퍼거슨은 이 사건으로 칸토나가 선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징계를 받을까 우려했다. 이에 퍼거슨은 프리미어리그 축구협회가 칸토나에게 징계를 내리기도 전에 자체적으로 4개월 출장정지를 결정했다. 축구협회(FA)의 중징계를 완화하고자 한 조치였다. 결국 칸토나는 영국 FA로부터 8개월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칸토나에게도 큰 손실이었지만 당시 블랙번과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다투던 맨유 역시 상당한 전력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맨유는 블랙번에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퍼거슨에게는 우승을 내준 슬픔보다 선수생활에 대한 의욕을 잃은 칸토나를 보듬어 안는 일이 더 시급했다. 칸토나의 경기감각을 위해 지역 하위리그 팀과의 경기를 주선했던 퍼거슨은 FA로부터 어떤 형태의 경기에도 칸토나를 출전시킬 수 없다는 경고를 받는다. 칸토나는 영국에서 선수 생활이 끝났다는 생각에 짐을 싸 프랑스로 돌아가버렸다. 퍼거슨은 칸토나를 설득하려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는 밤을 새우며 “너에게는 아직 미래가 있다. 너의 재기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칸토나를 달랬다. 퍼거슨의 노력 덕분에 칸토나는 다시 마음을 추슬러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징계가 풀린 후 첫 경기였던 리버풀 전에서 골을 넣으며 퍼거슨의 신뢰에 보답했다.

    퍼거슨이 칸토나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다른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97년 5월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한 칸토나는 은퇴 전 퍼거슨에게 자신의 은퇴 계획을 말하고 당분간 비밀로 해줄 것을 요청했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는 퍼거슨이 당시 맨유 최고의 공격수로 잘나가고 있던 칸토나의 갑작스러운 은퇴를 끝까지 비밀로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퍼거슨은 자신과 절친한 친구 사이인 몇몇 기자의 집요한 취재에도 공식발표 때까지 이 사실을 함구하며 칸토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3) 리더는 심리전의 고수여야 한다

    퍼거슨은 또한 심리전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는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주제 무리뉴 레알 마드리드 감독 등 여타 스타 감독들과 고단수 심리전을 벌인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퍼거슨은 백전노장의 노회함을 유감없이 발휘해 때로는 자극적으로, 때로는 유순하게 행동하며 맨유 선수단과 상대편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요리한 바 있다. 정량적으로 분석하기 힘들지만 퍼거슨의 노련함은 팀의 성과 향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그 자신의 스타성과 맨유의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95~96년 시즌을 퍼거슨은 맨유 청소년팀 출신인 베컴, 게리 네빌, 폴 스콜스 등 당시 신인으로 대거 물갈이를 하고 시즌을 맞이했다. 애스턴 빌라와의 개막전에서 맨유는 1대 3으로 패했지만 이후 케빈 키건 감독이 이끄는 리그 1위팀 뉴캐슬을 맹렬히 뒤쫓기 시작했다. 선두 뉴캐슬을 따라잡기 위해 퍼거슨은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여기에는 고도의 심리전도 포함됐다.

    퍼거슨은 뉴캐슬과 경기를 앞둔 팀에 공개적으로 “우리와 할 때 열심히 싸운 것처럼 뉴캐슬과 할 때도 열심히 싸워달라”고 말했다. 뉴캐슬이 어쩌다 지기라도 하면 “오 신이시여. 나는 키건을 동정합니다”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퍼거슨은 키건 감독이 상처를 잘 받고 감정적으로 유약한 인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심리전만으로 맨유가 우승을 차지하진 않았겠지만 키건 감독은 퍼거슨과의 경기에서 유난히 서툰 모습을 많이 보였다. 결국 시즌 마지막 맨유는 대역전극을 벌이며 뉴캐슬을 제치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맨유는 1995~96년 시즌에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더블 크라운을 달성했다.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퍼거슨의 독설은 아스날의 벵거 감독과 대치할 때 절정을 이뤘다. 더블 크라운을 달성한 맨유는 프리미어리그를 지배했지만 1996년 아르센 벵거가 아스날에 부임하면서 양상이 사뭇 달라졌다. 처음에는 일본 클럽팀을 맡다 영국으로 건너온 무명 감독 벵거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벵거는 ‘교수’라는 별명답게 차분하고 꼼꼼하게 팀을 운영하며 아스날을 프리미어리그 최정상팀으로 올려놓았다.

    이에 퍼거슨은 “아르센 벵거는 감독의 수치다”라는 식으로 벵거 감독의 전술과 운용 방식을 비난했다. 벵거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퍼거슨에 대한 질문은 더 이상 받고 싶지도 않으며 질문을 받는다고 해도 답변하지 않겠다”로 일관했다. 감독간의 앙숙관계를 포함해 두 팀의 경쟁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는 프리미어리그의 전설로 남은 ‘피자 게이트’에서도 잘 알 수 있다.

    2004년 10월, 49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이어가던 아스날은 할리우드 액션으로 논란이 된 루니의 페널티킥 유도에 무너졌다. 맨유에 0대 2로 패해 분을 참지 못한 아스날 선수들은 맨유의 퍼거슨 감독에게 피자를 던졌다. 이는 집단 싸움으로 번져 언론 지면을 장식했다. 앙금이 가시지 않은 2005년 2월 또 사단이 났다. 아스날의 하이버리 구장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두 팀 선수들은 경기 전 입장을 기다리던 터널에서 다시 충돌해 몸싸움을 벌였다. ‘터널 게이트’다.

    하지만 이런 두 사람의 혈전도 2000년대 중반 막강한 자금력으로 무장한 첼시가 등장하면서 바뀌었다. 주제 무리뉴라는 포르투갈 출신의 젊은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미하엘 발락, 애슐리 콜, 미카엘 에시앙, 숀 라이트 필립스, 살로몬 칼루, 존 오비 미켈 등을 영입하며 첼시를 프리미어리그 정상팀으로 올려놓았다. 특히 맨유에서 입단식까지 치렀던 미켈이 첼시로 이적한 사건은 퍼거슨 감독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는 아스날보다 첼시를 더 미워했다.

    첼시라는 공공의 적이 등장한 후 퍼거슨과 벵거는 휴전을 택했다. ‘싸우다 정이 든다’는 옛말도 있듯 퍼거슨과 벵거 역시 최근에는 서로에게 우호적인 언급을 일삼고 있다. 최근 벵거 감독은 “퍼거슨이 은퇴하면 나는 싸울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라이벌 관계를 즐기고 있으며 이러한 경쟁은 아스날과 맨유 모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4) 리더는 조직원보다 더 성실해야 한다

    퍼거슨은 이미 일흔이 넘었다. 한국 나이로는 벌써 일흔둘이다. 이미 은퇴를 하고 노년을 즐길 나이건만 그는 여전히 축구장을 누비며 팀을 이끌고 있다. 오래전에 연금을 받을 나이가 된 그는 고 바비 롭슨 감독에 이어 프리미어리그 감독 중 노인연금을 받을 수 있는 두 번째 감독이 되기도 했다.

    퍼거슨에게 은퇴 유혹이 없었던 건 아니다. 실제 그는 2002년 한 차례 은퇴를 선언했다 번복한 바 있다. 퍼거슨은 종종 1999년 5월 트레블을 달성한 직후 바로 은퇴했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나는 내 자식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내가 팀을 떠난다면 아마 그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가끔 1999년 5월 바르셀로나의 그 밤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날이 내 감독 경력의 마지막 날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구단의 만류로 은퇴 계획을 접은 그는 이후 10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맨유를 지키고 있다. 또한 매일 오전 7시에 훈련장에 나와 일과를 시작한다. 선박장에서 고된 육체 노동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던 아버지를 통해 배운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퍼거슨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젊은 지도자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성실함이다. 약 40년간 감독으로 재직하며 쌓아온 부로 얼마든지 노후를 즐길 수 있지만 그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축구와 맨체스터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리더가 먼저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 리더가 아무리 훌륭한 성과를 내도 조직원들은 그 리더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 ‘맨유를 최고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퍼거슨 리더십’, 심재희 · 한화철, 2007, 메가트렌드

    ● ‘알렉스 퍼거슨 열정의 화신’, 데이비드 미크 · 톰 티렐, 최보윤 옮김, 2007,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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