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2월17일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 확보는 항상 주변국의 국가이익과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북한의 급변사태는 이 지역에서 ‘힘의 공백’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변국들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한반도에서 자국의 이익을 장기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일단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주변국들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확보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일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물론 주변국들간의 주도권 경쟁은 탈법적이고 무원칙적인 경쟁이 아니라 국제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국제법이 명시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해석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정치의 논리가 작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북한 급변사태 발생에 따른 외부세력의 개입 가능성을 검토하고, 이에 대한 한국의 대책을 모색하고자 한다.
북한의 급변사태란 정권과 체제의 정상적 운영이 마비된 상황, 즉 무정부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북한에 사회적 대혼란이 일어나더라도 김정일 정권의 사회통제력이 건재하다면 이를 급변사태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혼란이 남한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으로 작용하는 상황, 나아가서 주변국의 국가이익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이들이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을 뜻한다. 즉 북한의 급변사태란 ‘남한 및 주변국에 중대한 안보위협으로 작용할 만한 무정부상태’를 의미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국제법에서는 무정부상태를 불완전 무정부상태와 완전 무정부상태로 나누어 취급하고 있다. 불완전 무정부상태란 기존 정부가 중앙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이에 대항하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반도(叛徒)단체가 기존 정부와 투쟁하는 내란 상태에 있는 경우, 혹은 기존 정부는 붕괴됐으나 이를 대체하기 위한 둘 이상의 반도단체가 각기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상호 투쟁하는 내란 상태를 말한다. 이에 비해 완전 무정부 상태는 기존 정부가 중앙 통제력을 상실하고 이에 대항하는 반도단체가 전무하거나, 기존의 정부가 붕괴됐으나 이를 대체하기 위한 반도단체 상호간의 투쟁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남한의 독자적 개입 가능할까?
원칙적으로 국제법상 모든 국가는 불완전 무정부 상태일 경우에는 개입할 수 없다. ‘국내문제 불개입 원칙’을 준수해야 하므로 내전에 개입할 권한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즉 ‘일국의 내란에 대한 자위적 개입’, ‘정통정부의 요청에 의한 개입’, ‘국제연합에 의한 제재를 위한 개입’은 적법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경우 개입의 정도와 방법이 어디까지인지는 모호하지만 실질적인 개입의 폭은 국제법의 틀 안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완전 무정부상태는, 그나마 불완전한 정부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국가의 부재’ 또는 ‘국가의 소멸’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주변국들 또한 붕괴된 국가의 영역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없어지게 된다. 완전 무정부상태에 있는 지역에 대한 주변국 등 외부세력의 개입은 국제법상 아무런 저촉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외부세력의 개입은 이를 완전 무정부상태로 볼 것이냐 불완전 무정부상태로 볼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개입을 원하는 측은 완전 붕괴로 규정하고, 그렇지 않은 측은 불완전 붕괴로 규정할 것이다. 중앙적인 판단권자가 없는 국제사회의 현실로 볼 때 완전 붕괴냐 불완전 붕괴냐를 둘러싼 논쟁은 결국 강대국 중심의 파워게임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