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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85주년 특별기획 | 우리에게 北·中·日은 누구인가

“내가 제일 잘났어” 광기의 ‘삼국 阿Q정전’

한·중·일 비교문화학

  • 정윤수 | 문화평론가,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prague@naver.com

“내가 제일 잘났어” 광기의 ‘삼국 阿Q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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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西勢東漸에 응전한 제각각의 몸부림
  • ● 서울, 베이징, 도쿄의 삶 다를 바 없어
  • ● 3국의 ‘21세기적 파탄’ 살펴야 할 때
우선, 광기로부터 시작하면 안 될까. 왜?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다. 한·중·일, 이 세 나라의 문화와 그것에 의한 장구한 삶을 살피면서, 곧 비교하면서, 우리는 꽤 오랫동안 이 세 나라의 문화적 유형의 같고 다름에 너무 주목한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 말이다.

물론 한·중·일 세 나라의 문화는, 그 유형에서나 가치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적어도 현상적인 측면의 차이가 분명히 있고 그것은 문화사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세 나라를 구분해 판단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식기, 수저, 기와 문양, 전통 가옥의 지붕, 정원의 꾸밈새, 장례 절차, 사찰의 조성 원리 등은 기나긴 역사적 연대기 동안 세 나라의 적층된 삶의 정서들이 물질의 형태로 굳어진 것이므로, 그 세부 사실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검토하는 것은 틀림없이 비교문화학적 의의가 있다.

이를테면 김신연 한양여대 교수는 ‘한중일 차 문화 비교’(2013년)라는 논문으로 동북아 세 나라의 차 문화를 비교문화적으로 분석했는데, 우선 차를 따스한 물로 우려내서 마시는 행위를 가리키는 세 나라의 용어 자체가 다르다.



3국 문화의 같고 다름

우리는 주로 ‘다례(茶禮)’라고 하고, 중국은 ‘다예 표연(茶藝 表演)’이라고 하며, 일본은 ‘다도(茶道)’라고 한다. 이에 가치를 부여해 풀이하자면, 한국은 차를 마시는 과정에서 상대와의 관계와 예법을 존숭하고, 중국은 차를 우려내는 공정의 예술적 숙련과 기교에 집중하며, 일본은 그들 특유의 도를 차를 통해 구현한다. 김신연 교수는 특히 이 과정에서 한국은 맛, 중국은 향, 일본은 빛깔을 중시하는데 이를 다시 풀어보면 한국은 그윽한 맛을 추구해 녹차를 가까이하며, 중국은 은은한 향을 추구해 발효차를 선호하고, 일본은 빛깔이 고운 말차를 좋아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비록 차를 우려내 마시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서도 세 나라 고유의 일상 문화와 삶의 지향점을, 마치 곽 모양 휴지통에서 휴지 한 장을 탁 뽑는 듯한, 절묘한 이해를 도와준다. 예컨대 한국의 차 마시는 공간이 대개 온돌방이고 중국은 탁자를 둔 마루방인가 하면 일본은 다다미방에 무릎으로 앉아 저마다의 예법을 다하는데, 이 형태적 차이는 세 나라의 기질을 현상적 측면에서 설명해준다.

다시 풀이하건대, 한국은 찻잎을 가마솥에 넣어 덖으면서 이미 햇살과 바람과 토양에 의해 숙성된 찻잎에 더운 기운을 불어넣는 숙성의 문화를 선호하는데, 이는 각종 음식에서도 발견되고 사람살이의 관계를 강조할 때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깊게 사귀고 오래 가까이한 사람, 즉 친구의 의미가 자연을 머금은 찻잎을 한 번 더 덖어내는 것과 같다.



 한·중·일의 당대성

그런가 하면 향이 짙어 그것을 한 잔 머금은 사람에게서도 향이 우러나는 중국의 우롱차(烏龍茶)는 역시 대륙의 어떤 기질을 엿보게 하며, 집요하다고 할 정도로 극한의 탐미를 추구하는 일본 사람들이 빛깔이 선명하고 고운 찻잎에 열중하는 것 또한 단순한 차 문화 이상의 삶의 방법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차 문화를 포함해 의식주의 여러 측면, 즉 방의 원리, 전통 복식의 선, 마을 조성의 원리, 생로병사의 의례 등은 단순한 취미, 관심을 넘어서 비교문화적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맨 앞의 질문, 즉 ‘광기로부터 세 나라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할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타당하다.

당장 베이징과 도쿄와 서울로 가보자. 고층 빌딩에서 쏟아져 나온 기진맥진한 사람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에 홀로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거나 맥북을 두드리는 사람들, 초점을 잃고 거리를 배회하는 노숙인들, 젊고 화사한 옷차림을 했으나 피로에 지친 굳은 표정으로 좀비처럼 걷는 세 나라의 젊은이들, 그 틈틈이 보이는 연로한 사람들의 불만 가득한 얼굴, 거침없이 질주하는 오토바이와 급히 경적을 울리며 좌회전하는 차량들.

만일 지금 우리 눈앞에 이런 냉정한 풍경 사진이 한 장 있다면 그것만 보고 어찌 베이징과 서울과 도쿄를 구분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언뜻 봐서는 인종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으니 오직 분류 가능한 방법은 거리의 간판에 어느 나라 문자가 씌어 있는지 하는 것뿐이다.

21세기 글로벌 도시들의 이 놀라운 질적 유사성은 오랫동안 누적돼온 각 나라 전통문화의 형태적 차이보다 더 엄연하다. 게다가 실제로 지금 당대의 일상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이 점을 주의하지 않은 채 세 나라 (특히 전통) 문화의 외적 형태의 같고 다름에 주목하다 보면 실제로 중요한 요소, 즉 지금 이 순간 경쟁과 긴장과 충돌의 21세기 동아시아에서 형성되는 세 나라 주요 도시들의 실질적 삶이 사라지고, 갑자기 시곗바늘이 과거로 돌면서, 세 나라의 봉건 시기에 형성된 문화 요소들, 그것도 그 외적 형태의 유사성만으로 어느 나라는 자연친화적이고 어느 나라는 인공적이고 어느 나라는 과시적이고 어느 나라는 정교하고 또 어느 나라는 소박하다는 식의,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21세기의 격정적인 삶을 해명하는 데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구태의연의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묻건대, 광기! 동북아 세 나라의 근현대사를 격동으로 몰고 간 광기로부터 시작하면 안 될까,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근대의 광인들

동북아 세 나라의 근대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충격 속에서 저마다의 방식대로 응전한 격렬한 몸부림이었다. 아편전쟁의 충격을 입은 중국, 쇄국과 개화의 이중나선 속에서 혼돈을 겪은 한국, 탈아입구(脫亞入歐)로 일찌감치 줄달음쳤으나 이내 제국이 되고 전쟁을 일으켜 전범(그들은 비록 ‘패전’을 주장하지만) 국가가 된 일본. 이 세 나라의 근대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기필코, 필사적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은 낡은 옷을 벗어던져야 했으나 그것은 피를 동반한(근대의 각종 정치적 파동, 미증유의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 문화대혁명, 전공투[1960~70년대 일본의 학생운동], 6·10항쟁, 톈안먼 사태 등)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미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중국 신문학의 출발점으로 알려진 루쉰의 단편 ‘광인일기’를 보자. 루쉰은 이 단편을 1918년 ‘신청년’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아편전쟁에서 신해혁명에 이르는 격렬한 몸부림의 끄트머리에서 루쉰이 이제 본격적으로 근대를 살기 시작한 중국인들의 내적 불안을 미치광이 인간에게 투영한 작품이다. 광인의 수기 형식을 빌려 중국 고유의 가족제도와 그것을 떠받쳐온 유교 사상의 모순을 극한의 공포감으로 폭로하는 소설이다.

초라한 하급관리의 비루한 삶과 자기모순, 끝내 정신적 착란에 이르는 비참한 광기가 루쉰 특유의 날카로운 조소로 그려진다. 상관의 딸을 짝사랑한 광기와 착란의 세계에 휘말린 하급관리의 비참한 모습을 들춰낸 걸작이다. 광기에 들려 자신을 미관말직의 ‘개돼지’가 아니라, 가본 적도 없고 서푼어치 정보도 없으면서 스스로를 스페인의 국왕이라고 착각하게 된 사내는 식인(食人)의 욕망에 사로잡힌 채 이렇게 말한다.



100여 년의 ‘阿Q’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건 두려워서 모두들 지극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상대의 얼굴을 몰래 훔쳐본다. 그런 생각을 버리고, 마음 편히 일하고 길을 걷고 밥 먹고 잠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평안할까! 그건 단지 문지방 하나, 고비 하나 차이인데…. 그래도 그들은 부자, 형제, 부부, 친구, 사제, 원수들과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두 한패가 돼 서로 격려하고 견제하면서 죽어도 그 한 걸음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 것이다.”

루쉰의 예언적 표명은 국공합작과 대장정과 신중국 건설이라는 위업에도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과 1980년대의 톈안먼 사태와 21세기의 광기어린 소비욕망의 대륙굴기로 나타나고 있다. 그의 걸작 ‘아큐정전(阿Q正傳)’은 더 말해 무엇하랴. 바로 그 ‘정신승리’, 곧 한·중·일 세 나라의 현대문화 속에 면면히 내려온 광기 어린 전통, 즉 자기들 스스로 동아시아의 강자임을 다양한 변론으로 강조한 100여 년의 ‘아Q’ 말이다.

일본의 문학적 초상화는 광기와 죽음으로 점철돼 있다. 일본 근대문학과 그 정신을 대표하는 나쓰메 소세키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국가 이념인 ‘탈아입구’, 즉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돌입하자는 정책에 따라 국비 장학생이 돼 대영제국으로 떠났으나, 곧 런던의 질주하는 기차 소리에 놀라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근대가 무엇인지를 깊이 고뇌했다.

그는 병색이 완연한 노년에 이르러,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수도 있는 일본적 근대를 예감했다. 그는 ‘다행히’ 일본이 근현대 100여 년 동안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겪은 민주주의 시대, 즉 다이조 데모크라시를 겪지 않았으며, 그 이후 몰아닥친 광기의 군벌 전쟁 시기를 겪지 않았으며, 전범 국가가 된 일본도 겪지 않았다. 다만, 깊은 병이 들어 신음했다.

반면 1892년에 태어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비롯해 일본 현대문학의 기린아들은 대체로 자살했다. 저명한 사상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이 주목한 아쿠타가와의 1921년작 ‘신들의 미소’는 16세기 예수회 선교사 오르간티노의 시선으로 일본 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한다. 일본의 바깥에서 들어온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일단 섬 안으로 들어오면 ‘변조’된다, 즉 ‘우리의 힘’은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변조하는 힘’이라고, 이 소설을 통해 아쿠타가와는 말한다. 그러나 제대로 변조된 것일까.



수많은 ‘꺼삐딴리’의 풍경

1927년 7월 24일,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35세라는 젊고 예민하고 날카로운 나이에 자살해버린 아쿠타가와. 이는 시대적 죽음이 아니었을까. 그는 한때 ‘자경단(自警團)‘에 가담한 적도 있지만, 관동 대지진 때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사태 속에서 서로를 자극하고 흥분해 재일 조선인에 대한 박해를 얼마나 거침없이 자행하는지’를 목격하면서 일본적 근대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졌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단 하나의 시선이 아니라 교차하는 이질적 시선의 구성은 불가능한가?’라는 질문은 그의 걸작 ‘라쇼몽’으로 귀결됐으나, 곧 자살했다.

이후 ‘인간 실격’의 다자이 오사무,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리고 ‘금각사’ 이후 극우 열병에 빠져들어 할복한 미시마 유키오 등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소설가들의 자살이라는 선택은 비록 그 결정의 순간에 이성이 작동했다 하더라도, 근대적 광기의 어떤 압력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천황과 군벌의 2차대전, 그 종전과 전범, 그것을 씻기 위해 천황은 ‘인간 선언’을 하고 모든 일본인이 ‘1억 총참회’를 하고 새로운 옥좌에 오른 맥아더 사령관을 향해 집단적으로 존경과 복종의 편지를 쓴 전쟁 직후의 일본인들.

그렇게 그들 스스로 병을 치유했다고 여긴 후 다시 자위대를 창설하고 1964년 도쿄 올림픽을 통해 전범 국가가 아니라 패전 국가임을, 다시 말해 원폭 피해까지 입으면서 패전을 했으나 올림픽을 통해 평화를 호소한다는 식의 집단적 제의를 통해서나마 겨우 근대의 열병에서 벗어났던 광기가 여러 작가의 죽음에 드리워진 그림자였던 셈이다.

한국에서 광기는 이상의 ‘날개’로 시작해 이범선의 ‘오발탄’과 최인훈의 ‘광장’ 그리고 최근의 박민규나 편혜영에 이르는 불안하고 초조한 삶으로 연속된다. 파편화한 삶,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삶, 미니멀리스트 필립 글래스의 음악처럼 ‘균형을 잃어버린 삶’이 갑자기 들이닥친 근대 이후 한국의 초상화였다. 가혹한 제국 아래서 일본어로 연명하다가 대혼란의 6·25전쟁을 전후해 러시아어로 구명을 한 후 사태의 급변에 따라 이제는 필경 영어를 배워야 살아남을 것이라고 외친 수많은 ‘꺼삐딴리’의 풍경이 오늘에 이르도록 그로테스크한 기하학의 패턴처럼 반복되고 있다.


베이징, 도쿄, 서울의 오늘

‘내셔널리즘의 역설’로 유명한 일본 학자 오사와 마사치의 표현대로 21세기 일본은 “2011년 3월 11일에 도호쿠 지방의 태평양 연안을 덮친 동일본 대지진과 잇달아 발생한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 일본 근대사에 큰 전기를 마련한 이 사건들” 이후를 살고 있다. 일본의 근대적 약속이 두 사건을 겪으면서 일시적으로 붕괴된 것인데, 그 텅 빈 정서적 공황 상태를 아베 정권의 강력한 군사 전술과 일본 내 우파들의 혐한(嫌韓) 정서가 메우고 있다. 강력한 패권적 국가주의가 일본을 다시 지배한다.

한국의 21세기는 자학과 자조의 문화가 현상적으로는 지배적이다. 이를테면 인디 음악가 ‘커피소년’이 있다. 그가 부른, 키치적이라서 웃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나 갑자기 서글퍼지는 뮤직비디오 ‘영어’를 찾아서 들어보라. “배워도 배워도 안 된다 파란 눈 그들이 무섭다 / 배워도 배워도 새롭다 인사만 20년 했다 / 남들은 다 잘하는데 어떻게 한 거니 유학 갔다 온 거니 / 배워도 배워도 안 는다 혀가 꼬일 리가 없다 / 투 부정사가 왠 말이냐 조동사는 먹는 거냐”

이런 ‘웃픈’ 조건에서도 자기계발서는 또 얼마나 많이 팔렸단 말인가. 대체로 사회가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일수록 자기계발서는 더 많이 출시되고 더 많이 팔린다. 한국의 1980년대, 곧 전두환 독재 시절에 서점에서는 금세 부도나기 쉬운 달콤한 약속어음이 너무나 많이 팔렸다. 김형석, 안병욱, 유안진, 신달자, 황필호 같은 저자들의 달콤하지만 실은 어떤 약속도 보장하지 않는 언어들이 유행했는데, 그로부터 한 세대를 지나 최근 몇 해 동안 홍정욱, 김난도, 혜민스님, 김미경 등의 책들이 ‘열정은 노동’이 되는 시대를 가로질렀다. 하루 종일 열정페이에 시달린 한국의 젊은이들은 동네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을 사들고는 두 평짜리 고시원으로 기어들어간다. 이 순간, 국가는 없다.

중국의 21세기는 그야말로 ‘대륙굴기’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세계 정치, 세계경제, 세계 공장, 세계 백화점이다. 그 화룡점정이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다. 장려한 스케일! 태산이 솟아오르고 장강이 흘러넘친 이 거대한 스펙터클의 개막식 총연출을 맡은 중국 영화계의 상징 장이머우 감독은 아시아는 물론 수천 년 역사라는 중화주의의 관습적이고도 상투적인, 그것도 지나치게 과도한 상징을 남발했다.



팽창하는 국가주의

무엇보다 ‘중화주의와 56개 소수민족’이라는 주제가 반복적으로 노출된 것은 장이머우 감독과 중국 당국의 의도가 강하게 드러난 장면들이었다.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티베트나 신장 위구르족을 포함한 56개 소수민족의 아이들이 중화주의의 스펙터클 한마당인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오성홍기를 향해 충성의 경례를 했다.

이렇게, 동북아의 등짝을 후려친 세 나라의 가혹한 발전국가론 신드롬은 그 거대한 수레바퀴를 오직 생계와 생존을 위해 힘겹게 굴려온 가난한 자들과 그들의 자식들을 가차 없이 깔아뭉개고 있다. 그게 동북아 세 나라의 21세기다.   

키치적 뮤직비디오 얘기가 나온 김에 말하면, 21세기에 다시 팽창하는 세 나라의 국가주의 신드롬에 의해 세 나라의 예술가들은 키치적인 자기 희화화로 응전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중국의 현대미술이다. 이미 세계 미술시장의 블루칩이 된 완세현실주의(玩世現實主義) 경향, 즉 작품 속의 인물들(작가 자신의 초상을 포함해)이 극단적으로 자기 희화화하는 것이다. 팡리쥔(方力鈞), 웨민쥔(岳敏君), 양사오빈(楊少斌) 등이 주도했으며, 여기에 중국 특유의 ‘정치팝’이라고 불리는 작품을 발표한 작가 왕광이(王廣義), 위유한(余友涵), 리산(李山)등이 있다. 한편 ‘염속예술(染俗藝術)’이라고 해 왕칭쑹(王慶松), 뤄 브라더스(羅氏兄弟), 펑정제(俸正杰) 등도 출현한다.

어린 시절에 문화대혁명을 겪었고 한창 나이 때는 톈안먼 사태를 겪은 이 세대들은 기본적으로 ‘반(反)정부 반(反)체제 반(反)사회주의’ 경향을 띤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현대 중국의 물질적 욕망을 표현하는데, 어김없이 그들의 내면세계에 드리워진 압도적인 이미지, 즉 문화대혁명 시기의 정치 선전물이나 마오쩌둥 같은 인물의 형상 변조를 통해 권력과 인간과 욕망을 묻는다. 언뜻 보기에 화려한, 그러나 저속한 그래서 ‘염속예술’이라고 불리는 화풍도 대중 소비 시대에 대한 풍자와 대륙굴기 아래에 흐르는 권력적 욕망에 대한 비판을 담는다.

이러한 키치적 스타일로 권력과 삶의 미묘한 함수관계를 질문하는 작품 경향은 비단 중국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다양하게 변주된다. 소비사회를 풍자하면서도 그 안의 눈물 어린 삶을 엿보고자 한 최정화를 비롯해 아토마우스의 이동기,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권력의 이면을 풍자해온 강영민 등을 주목할 만하다.



다시, 문화의 비교를 넘어서

일본 근세기의 학문적, 예술적 위업을 이룬 사람 중에 오카쿠라 덴신이 있다. 일본 최대 무역항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는데, 이 사실 자체가 오카쿠라의 앞날을 예고한다. 봉건의 옷을 벗고 근대의 빛을 받아들이는 항구도시 출신이자 아버지가 하급 무사지만 요코하마에서 무역을 했기에, 덴신에게 근대적 이행은 자연스러운 개인사에 가까웠다. 6세 때부터 미국인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11세 때 도쿄외국어학교에 입학했고 14세에 현재의 도쿄대학 제1기생이 됐다. 그의 개인사가 곧 일본 근대의 과정이다.

덴신은 학교를 마친 후 문부성 관리가 돼 미술행정을 담당했는데, 1889년 도쿄미술학교(현재의 도쿄예술대 미술학부)를 건립한 후, 거의 혼자 힘으로 오직 일본 전통미술만을 가르치는 커리큘럼을 짰다. 1904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미술관의 동양미술 책임자가 됐는데, 여기서 덴신의 일본적 근대성, 나아가 동북아 세 나라의 근대성의 편린이 등장한다. 그는 서양 미술사의 체계 안에서 일본 미술사가 재편되고 검토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일본 미술사의 역사적 독자성과 미적 특수성을 모색했다. 그가 서방을 향해 일본적인 것의 위대함을 전파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맥락에서 덴신은 ‘차 이야기’를 쓰게 된다. 덴신은 이 책에서 일본의 다도를, 나아가 동양 정신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과연 그러한 것이 존재하는가. 덴신은 그 증거들을 악착같이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 책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유럽의 강호 러시아를 패주시키고, 곧 을사늑약을 체결해 제국의 발판을 다진 후인 1906년에 발간됐다. 다시 말해 단순한 일본의 다도 이야기가 아니라 메이지 유신 이후 탈아입구의 기치로 달려온 아시아의 제국, 일본의 문화적 위상을 상징하는 책이 된 것이다. 덴신은 이렇게 썼다.

“다도란 하찮은 일상 가운데 숨어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숭앙, 그것에 기초한 일종의 의례다. 다도는 순수함과 어울림, 보시의 신비, 사회질서의 낭만성 등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함에 대한 숭배이니, 말하자면 불가능의 연속인 이 인생에서 무언가 가능한 것을 성취하려는 은근한 시도다.”



현대적 경험 통찰할 때 

과연 그러한가. 찻잎을 뜨거운 물에 우려내서 마시는 일이 덴신에 이르러 거의 종교적 차원으로 숭배된다. 이 책을 번역한 정천구는 서구인의 오리엔털리즘, 즉 비서구 특히 아시아 문화와 삶에 대한 제국주의적 편견을 깨고자 한 노력을 평가할 수 있으나 “심미적이고 비역사적인 성향으로 인해 정치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함으로써 일본 문명이 최고라는 국가주의의 경향”을 보였다고 분석한다.

일상에서 차 한 잔 마시는 일에 상당히 비현실적이며 종교 숭배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비단 덴신의 경우, 그러니까 일본의 경우만은 아니다. 중국도 그러했고 한국도 그러했다. 다시 말해 거의 핀셋으로 집어내서 의미 부여라는 현미경으로 확대 관찰해야만 하는 이러한 과도한 열병이 동북아 세 나라의 근대적 삶을 지배했다.

따라서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세 나라의 전통문화나 일상생활에서 엿볼 수 있는 작은 차이에 주목해 그것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충분히 학문적인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세 나라가 겪은 근현대의 뜨거운 몸부림을 다 설명할 수 없으므로 이제 우리는 한·중·일 세 나라의 현대적 경험을 높은 시선에서 통찰하고 그것의 21세기적 파탄들이 어떻게 베이징과 도쿄와 서울에서 격렬하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오늘날 동북아 세 나라가 당면한 중요한 문제들을 설명할 수 없다면 세 나라의 전통문화는 저마다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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