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로 본 주사파의 과거와 현재
- 임수경, 하태경의 엇갈린 인연
- “김일성에 대한 존경심이 굉장했다”
- 구학련<김영환> 반미청년회<조혁, 안희정> 자민통<구해우>이 3대그룹
- 구학련→반제청년동맹→민혁당 흐름이 통진당 당권파로 이어져
평양거리. 대동강 너머로 주체사상탑이 보인다. 북한이 1990년대 초반 한국으로 뿌린 삐라(작은사진).
한때 북한에 애정을 가졌던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이정희 전 대표 못지않은 수재다. 서울대 물리학과 86학번. 학력고사 성적은 자연계 전국 100등이다. 주사파 시비, 종북 논란 덕분에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1990년대 중후반 우파로 옷을 갈아입은 후 북한 인권 및 북한 민주화운동에 천착해왔다.
이 전 대표가 추락했다면 초선인 하 의원은 떴다.
종북 논란, 주사파 시비가 점입가경이다.
북한마저 끼어든다. 역(逆)종북 공세다.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여권 인사를 향해 “종북 행태를 까겠다”고 했다. 북한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종북 논쟁에서 검증의 도마에 올려야 할 기본 인물은 박근혜”라고 주장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박근혜만 봐도 2002년 5월 장군님을 접견하고 주체사상탑 등을 참관하면서 ‘친북 발언’을 적지 않게 했다. 정몽준 김문수 등이 우리에게 와서 한 말을 모두 공개하면 까무러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역(逆)종북 공세
박용진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박 전 위원장이 2002년 방북 당시 왜 만경대와 주체사상탑을 방문했는지 답해야 한다”고 공격했다
통합진보당의 당권을 쥐고 있던 이른바 종북파의 비례대표 후보 경선 부정으로 여론의 도마에 오른 종북 논란이 임수경 의원의 막말 파문으로 민주당으로 옮겨 붙었다가 박근혜 전 위원장에게까지 번진 꼴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사안이 희화화하고 있다. 배가 산으로 간다”고 꼬집었다.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은 얼마나 될까? NL 운동권 출신인 하태경, 임수경 의원의 엇갈린 삶을 언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때 주체사상을 신봉했던 사람’들의 현재를 들여다보자.
임 의원은 하 의원의 옛 동지다. 서로를 ‘태경아’ ‘수경아’라고 부른다. 두 사람은 1968년생으로 나이가 같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기 시작한 둘은 20대 때 민족해방(NL) 진영에 투신했다. 임 의원은 1989년 방북해 통일의 꽃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임 의원 방북은 주사파가 ‘기획한’ 것이다. 하 의원은 1991년 대학생이던 박성희·성용승 씨를 북한에 보내는 ‘기획’에 관여했다. 박 씨, 성 씨는 ‘임수경 루트’대로 베를린을 거쳐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 참석했다. 북한 쪽과 상시적인 연대 기구(범청학련)를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임 의원은 밀입북해 옥살이를 했고, 하 의원은 박 씨, 성 씨 밀입북 때 북한 쪽과의 연락을 맡아 구속됐다. 둘은 고 문익환 목사가 꾸린 ‘통일맞이’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친구로 지냈다. 하 의원은 문 목사가 사망한 후 우파로 전향했다.
‘신동아’는 2010년 6월호에서 하 의원의 곡절 많은 삶을 다룬 적이 있다. ‘세계 언론이 주목한 북한 뉴스 생산자 하태경 : 문익환 목사 북한에서 안기부 프락치로 몰려 화병으로 죽었다’는 제목이 달렸다. 그는 2010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문 목사를 안기부 프락치로 몰았습니다. 의견이 안 맞으니까 프락치라고 몰아세운 겁니다. 북한은 늘 그런 식이죠. 저도 순진했죠. 그런 말 안 되는 상대와 통일을 논했다니. 문 목사가 그것 때문에 화병에 걸리셨어요.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요. 친북(親北)세력은 그런 사실을 숨기려고 하죠. 친북 하는 사람들, 문 목사 존경하죠. 저 역시 지금도 문 목사 존경합니다. 저처럼 가까이서 본 사람은 존경할 수밖에 없어요. 안기부 프락치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사람들과 싸웠거든요. 주사파도 아니셨고요. 살아계셨다면 저처럼 바뀌셨을 겁니다. 그렇게 돌아가셨지만….”
임수경, 하태경의 삶은 대조적이다. 임 의원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혼 후 홀로 키우던 아들이 익사하는 아픔도 겪었다. 전향 이후 하 의원의 행로는 비교적 둥글었다. 중국 지린(吉林)대에서 국제경제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에 돌아와 SK텔레콤경제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했다. 북한 인권운동가로 이름을 얻었다. 친구 사이인 둘은 4·11 총선 때 “축하한다. 잘 해보자”는 내용의 덕담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하 의원은 6월 13일 전화통화에서 “섭섭하다” “화도 난다”고 했다.
“임수경 의원이요? 섭섭하죠. 화도 나고요.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변절자’라고 규정하다니요. 사과해야 해요. 탈북자에게도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고요.”
임 의원은 취중에 탈북자와 하 의원을 변절자라고 규정하면서 상소리를 했다. 취중진담인지, 음주실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김일성에 대한 존경심이 굉장했다”
“김일성에 대한 존경심과 믿음이 굉장했다”고 스스로 밝히는 최홍재 남북청년행동 대표도 1968년생이다. 1991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4·11 총선 때 서울 은평갑 선거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MBC 최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지냈다. 북한 민주화운동을 한다. 대북관(觀)이 강경하다.
최 대표는 ‘대학생 기획 방북’의 또 다른 주역이다. 박성희·성용승 씨를 북한에 보내는 일에 관여했다. 1994년 방북한 최정남 씨는 그가 직접 선발한 인물이다 임수경, 하태경 의원의 옛 동지인 그는 종북 논란이 불필요한 정쟁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2003년 6월 24일 민혁당 사건으로 복역 중 교도소 측의 배려로 특별휴가를 받은 이석기 씨(오른쪽)가 대전교도소 앞에서 동료 하영옥 씨를 끌어안으며 반가워하고 있다.
그는 고려대 총학생회장 시절 주사파 지하조직 자주민주통일운동그룹(자민통)의 ‘지도’를 받았다. 1990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현재는 민주당 소속인 윤진호 씨도 자민통이 관리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송갑석 씨를 전대협 의장으로 만들고, 고려대 총학생회장 윤진호 씨를 후원한 게 자민통이다. 자민통은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전대협을 사실상 주물렀다.
북한 선진화 운동을 하는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이 자민통의 리더였다. 그는 1994년 사회주의를 버렸다. 주사파 팸플릿 ‘강철서신’으로 유명한 김영환 씨와 함께 ‘푸른사람들’이라는 단체를 꾸리면서다. 주체사상을 완전히 버리는 데는 그 뒤로 10년이 더 걸렸다고 한다. 김영환 씨는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다 현재 중국에 구금돼 있다.
“사회주의를 버리고 주체사상에 회의를 품었는데도 극복하는 데 10년이 걸렸어요. 영환이형(김영환 씨)이랑 요즘도 청계산에 함께 다녀요. 올해 2월 마지막으로 산행을 하면서 몸조심하라고 당부했는데, 중국에서 그렇게 됐네요. 예전엔 법륜 스님이랑 영환이형 저, 이렇게 셋이 자주 만났어요. 지금 상황에서 적절한 얘기는 아니지만 영환이형이 주체사상을 버린 건 아니에요. 황장엽 선생하고 비슷한 거죠. 또한 뉴라이트 쪽 사람들에게는 주체사상의 정서 같은 게 남아 있어요. 정서는 남아 있는데 완전히 정반대로 간 겁니다.”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를 지낸 한 인사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황장엽 선생은 주체사상을 남한에서 발전시키려 했던 의도가 강했다. 주체사상은 북한 인권 문제와 다른 문제다. (황장엽 선생은) 주체사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강조한 게 아니라 주체사상을 남한에서 더 개선해 파급시키려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구 씨는 2000년대 초반 SK텔레콤 남북경협 담당 상무로 일하면서 주체사상의 잔향을 날려버렸다고 했다.
“게다가 이념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기업을 경험해본 게 주체사상을 버리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
중앙일보는 5월 29일자 1면에 구 씨와의 인터뷰 내용을 실으면서 ‘자생적 주사파 리더에서 자본주의 첨병으로’라고 썼다. 그는 ‘중도 보수’를 자처한다. 북한 민주화가 아니라 북한 선진화를 강조한다. 북한 정권을 바꾸려들지 말고 개혁, 개방으로 나아가게끔 정권을 진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2001년 9월 젊은 시절의 이상향이던 평양을 찾았다. SK텔레콤이 북한 휴대전화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협의하러 간 것. 눈으로 본 평양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노동당 간부 한 명이 찾아와 물었다. “자민통 지도원 동지, 김정일 장군님께서 동지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그가 답했다. “위원장님을 만나도 협의할 게 없습니다.”
안희정의 반미청년회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회의는 당권파 당원들의 의장석 난입과 폭력 사태로 파행을 빚었다.
김영환 씨의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은 반미청년회, 자민통과 달리 학생운동의 헤게모니를 쥔 적이 없는 소수파였다. 구학련·반미청년회·자민통이 1980년대 주사파 3대 조직으로 불린다. 구학련은 ‘강철서신’을 통해 주체사상을 보급하는 데 역할을 했으나 대중운동에서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주사파의 원조로 불리는 김 씨는 1986년 말 구학련 사건으로 안기부에 끌려가 50일 동안 고문당했다. 이 같은 경험이 김 씨를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김 씨는 1991년 강화도에서 북한 잠수정을 타고 월북해 김일성을 만나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남조선에서 지하당을 조직하겠다”고 다짐했다.
구학련은 반제청년동맹으로 이어진다. 통합진보당 옛 당권파의 리더 격인 이석기 의원이 반제청년동맹 중앙위원을 지냈다. ‘김영환 그룹’은 대중운동보다는 학습그룹을 만들어 책 읽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구학련→반제청년동맹→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최근 불거진 종북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민혁당은 김영환·하영옥·박OO 씨 3인이 중앙위원회를 구성했다. 김 씨와 함께 민혁당 해체를 결의하고 자수한 박OO 씨는 국제 관계 전문 변호사로 활동한다. 하 씨는 김 씨에게 “전향하려면 북한 접촉망과 자금을 넘기라”고 요구하곤 민혁당을 재건했다. 경기동부의 핵심인 이석기, 이상규 의원이 민혁당 출신이다.
민혁당 출신이면서 우파로 전향한 인사로는 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이 있다. 홍 상임위원은 4·11 총선 직전 “민혁당에 대한 증언을 듣고 싶다”는 ‘신동아’의 요청을 받고 곤혹스러워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공무원이 특정 정당의 특정 정파에 대해 얘기하는 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인권위 상임위원은 차관급 공무원이다. 그는 익명보도를 전제로 배경 설명을 해줬다. 그는 2004년 한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주사파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전대협, 한총련 등을 조직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소위 김일성 원전을 읽으며 북한 주도 통일 실현을 목표로 활동했다. 주사파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이라는 호칭을 써가며 김일성과 김정일을 진심으로 추앙했다.”
그는 2011년 2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철서신으로 유명한 김영환 알죠. 그 친구랑 민혁당을 같이 했습니다. 김영환도 자유주의자로 전향했죠. 구해우 중심 분파도 전향했고요. 핵심부의 다수가 이념을 바꾼 건 맞지만, 남은 친구들도 있죠, 일일이 거명하긴 어렵지만.”
‘신동아’는 남은 친구들이 누구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지금 가진 생각은 다르지만 어떻게 옛 친구들을 고발하느냐”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학련·반미청년회·자민통 외에 새벽그룹이라고 불리는 주사파 그룹도 있다. 정통 주사파에서 수령론을 부정하고 자주, 민주, 통일만 강조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범주사파와 새벽그룹은 격하게 대립했다. 자민통이 1989~92년 학생운동권의 헤게모니를 쥔 것은 새벽그룹과 연계하면서다. YTN 사장을 지내고 현재는 내일신문 발행인인 장명국 씨가 새벽그룹의 브레인이었다. 새벽그룹은 NL이면서도 노동운동을 강조했다. 장 발행인은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영환 씨가 전향한 뒤 서울대 주사파는 비주사 NL로 흘러갔다. 조통그룹이라는 연세대 중심 주사파 그룹도 활동했다. 1990년대 중반 학생운동이 약화되면서 주사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으나 2004년 경기동부가 민주노동당의 당권을 장악하고, 4·11 총선에서 민낯을 드러내면서 파문이 일었다.
변절, 전향, 전환
새누리당 심재철 최고위원은 6월 11일 국회에서 ‘종북 주사파 국회 입성 방지 대책’ 토론회를 열었다. 심 최고위원은 “종북 주사파가 국회에 들어왔으니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토론회에 참석한 보수 성향의 패널들은 “새누리당이 오버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임수경 의원과 4년간 함께 일을 했습니다. 임 의원은 대한민국을 긍정했고, 북한을 추종하지 않았어요.”(최홍재 남북청년동맹 대표)
“당 지도부가 과잉대응을 했습니다.”(새누리당 윤성현 의원)
“이석기, 김재연 의원 문제는 ‘머릿속을 열어보자’라는 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종북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 중심의 통일을 지향한다는 제한적인 의미로만 사용해야 합니다.”(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김종인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은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종북 논란은 오래갈 수도 없고 오래가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GDP 2만 달러가 넘는데 그런 문제로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수세력 일부에선 “주사파가 언론에 과잉 포장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시대착오적 인물들을 연일 지면을 통해 다루면서 오히려 키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자민통 리더였던 구해우 이사장의 생각은 이들과 다르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계기로 한국 정치에 주사파가 끼친 영향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사상은 절대로 쉽게 바뀌지 않아요. 민주통합당도 주사파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고 한쪽에 잔재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북한이 한국 내 지하조직에 ‘KAL기 폭파 사건은 미국 CIA와 안기부의 음모’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녹취록을 만들어 대학에 배포했어요. 주사파의 메커니즘을 구동했던 사람으로서 천안함 사건을 보면 당시가 떠오릅니다. 민주당의 주력은 386 운동권입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당대표 경선 때 새누리당을 향해 색깔론을 제기하지 말라고 강하게 나간 것도 주력의 표심을 잡으려고 그랬을 거예요. 임수경 의원은 성격이 급하고 솔직한 편이어서 민주통합당 주력의 밑바닥 정서를 취중에 적나라하게 표출한 것이라고 봅니다. 1980년대 학생운동에 주사파가 끼친 영향은 상당합니다. 주사파의 조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정치가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한미 FTA, 천안함 폭침, 제주 해군기지, 3대 세습이 리트머스 시험지예요.”
변절, 전향, 전환…. 일상에서 쉽게 쓰는 단어는 아니다. 주체사상이 도대체 뭐기에…. 주사파의 원조 김영환 씨가 1991년 방북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주체사상을 공부하고 싶다고 하자 김일성이 교수 1명을 붙여줬다. 김 씨가 물었다. “수령이 오류를 범하면 어떻게 됩니까?” 교수의 대답은 간단했다. “수령은 절대로 오류를 범할 수 없다.”
북한 체제는 유사 종교적이다. 주체사상도 그런 북한을 닮은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