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최초의 집단 따돌림 자살자 문창숙을 보도한 1937년 당시의 잡지기사.
문창숙은 2교시부터 수업을 빠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깔끔하게 정돈된 기숙사에서 문창숙은 눈 내리는 창 밖을 우두커니 내다보았다. 한참 지나 문창숙은 결심을 굳힌 듯, 책상 앞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써 내려갔다. 한 장, 두 장, 석 장…. ‘레미제라블’과 ‘여자의 일생’을 좋아하던 문학소녀 문창숙의 펜촉은 거침이 없었다. 편지지 위에는 가끔씩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다섯 통의 편지를 쓰고 나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문창숙은 기숙사 식당으로 가는 대신 우산도 없이 뒷산으로 뛰어올랐다. 눈물 젖은 문창숙의 두 뺨에 매서운 칼바람이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눈밭에 찍힌 문창숙의 발자국은 쏟아지는 눈에 덮여 이내 사라졌다.
다섯 통의 유서
1교시 수업이 끝난 후 김상용 교수를 만나러 학장실에 간다던 문창숙은 오전 일과가 끝날 때까지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문창숙의 책상 위에는 1교시에 펼쳐놓은 교과서가 그대로 놓여 있었고 책가방도 등교할 때 그대로 책상 옆에 놓여 있었다. 같은 반 학생들은 문창숙의 빈 책상을 바라보며 오전 일과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영문과 동급생들은 문창숙의 행방을 찾아 교정을 뒤졌다. 그러나 문창숙은 학장실에도, 교정에도, 식당에도, 기숙사에도 없었다. 문창숙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김상용 교수는 문창숙의 소지품을 뒤지게 했다.
‘끝내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인가.’
김상용 교수는 때늦게 후회가 밀려옴을 느꼈다. 아니나다를까 문창숙의 기숙사 책상서랍에서 기숙사 사감 박은혜 선생, 아버지, 오빠, 동생, 1학년 학우일동 앞으로 보내는 다섯 통의 편지 형식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유서에는 구구절절 애끊는 하소연이 적혀 있었다.
“오빠. 먼저 가는 누이를 용서하세요. 누명을 벗었다고 좋아했는데, 필적이 같다고 다시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죽음으로써 누명을 벗고 저의 결백을 드러내 보이렵니다.”
오전까지만 해도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던 학생이 유서를 써놓고 사라지자 학교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김활란 부교장 이하 전 교직원과 학생, 사환까지 거센 눈발을 헤치며 문창숙을 찾아나섰다.
한 시간쯤 지난 오후 2시경, 학교 사환이 뒷산 송림에서 나뭇가지에 목을 맨 문창숙을 발견했다. 열서너 살 먹은 어린 여사환은 공포에 절어 울먹이며 비명을 질렀다. 사환의 비명을 듣고 근방에서 문창숙을 찾아 헤매던 여학생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가는 동아줄 하나에 의지해 나뭇가지에 매달린 문창숙의 육신에는 소복이 눈이 쌓여 얼어붙어 있었다. 스무 살 전후 여학생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흐느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