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를 통해 정치권에 들어가게 된 건가요.
“이홍구 선생을 통해서죠. 정말 인품 있고 능력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론 정치에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다시 학교로 가서 학생들 가르치고 있는데 이회창 총재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좀 도와달라고. 제가 통일부에 있을 때 통일관계장관회의가 있었거든요. 이곳의 의사 결정이 느리니까 몇몇 사람이 대통령의 논리로 통일정책을 쉽게 주무르기 위해 통일관계장관전략회의를 따로 만들었어요. 공식 라인은 제쳐두고 빨리 끌고 가려고. 이회창 당시 총리는 법적 틀 내에서 하라며 반기를 들었죠. 그러면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사이가 틀어졌고요. 제가 이 사정을 잘 알기에 ‘아, 이회창은 대쪽이 맞다.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분 곁에 가게 됐어요.”
▼ 무엇을 도와달라고 하던가요.
“2002년 대선에 다시 도전할 텐데 한나라당에 젊은 부대를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가장 먼저 한 게 미래연대를 만든 일이죠. 제가 미래연대 초대 사무총장을 맡았고 그때 영입한 오세훈, 남경필, 원희룡, 임태희, 김부겸 등 6명이 공동대표를 맡았죠.”
▼ 소위 한나라당 소장개혁파의 태동…. 거기에 산파 노릇을 한 셈이네요?
“네. 2000년 총선에 미래연대 이름으로 21명의 후보를 내보냈는데 14명이 당선돼 왔습니다. 이들 소장개혁파의 힘을 바탕으로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대통령을 만들어야겠다고 구상했어요.”
▼ 그 구상대로 일이 됐나요.
“2000년 총선이 지나고 나서부터 당의 수구화가 급격히 진행됐어요. 올드한 분들이 전부 전면에 나서고…. 이 총재는 ‘7년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고 2002년 대선에 실패했잖아요. 제게도 큰 번민과 고민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2004년 총선 때 ‘아는 사람이 두 사람뿐인 동네’라는 서울 노원에 출마했다. 한나라당의 불모지에서 혁신적 보수의 깃발을 들겠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폭풍까지 불었다. 결과는 낙선. 1.9%포인트 차이의 아슬아슬한 낙선이었다.
그는 “내겐 가장 좋은 약이었다. 희망을 봤다”고 했다. 그는 9개 동 중 8개 동에서 이겼고 1개 동에서 졌다. 진 동네는 장애인 거주지와 임대아파트 밀집지로 그가 가장 공을 들였던 곳. 그는 “그때 깨달았다. 뭘 해주겠다는 식이 아니라 함께 같이 하자는 식이어야 한다는 사실을”이라고 했다.
“국회의원은 대기만 하는 자리”
권 시장은 2006년 서울시장 선거 때 오세훈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오 후보를 도와 승리를 이끌었다. 그(1962년생)와 오 시장(1961년생)은 거의 동년배에 고려대 동문이고 같은 미래연대 출신이라는 개인적 인연도 있다.
그러나 선거 후 그는 시장직인수위에 들어가지 않았다. 서울디지털대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오 당선인은 취임 9일 전 새벽, 부인과 함께 그의 아파트 입구에 찾아와 정무부시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는 “싫다. 내외분이 부근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이나 드시고 가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오 당선인 보좌관, 노원구청장 등 주변 사람들이 채근하고 강재섭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오세훈 도와주라”고 해서 맡게 됐다고 한다.
▼ 서울시에 출근해보니 어떻던가요?
“언론 환경도 호의적이지 않았고, 시의회도 한나라당이 다수였지만 오 시장을 자기 편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당시 만 45세인 그를 ‘애’라고 보는 분위기였죠. 제가 오 시장에게 ‘시장은 시정(市政), 나는 바깥 일, 이렇게 나누자’고 했습니다.”
▼ 바깥 일이라면….
“1년 365일 중 술 안 마신 날이 닷새밖에 안 돼요. 360일은 그냥 마신 게 아니라 완전 떡이 되게 마셨죠. 언론 관리 내가 했죠, 국회·시의회 관리 내가 했죠, 당원들 관리 내가 했죠, 시민단체 상대 몽땅 내가 했죠. 매일 저녁 약속이 두 탕, 세 탕. 서울시 출입기자가 몇 명쯤 될 것 같아요?”
▼ 글쎄요.
“300명쯤 됐어요. 회식 한 바퀴 돌고 나면 6개월. 그러면 출입기자가 다 바뀌어 있어요. (웃음) 1년 되니까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오 시장에게 ‘나, 할 만큼 했다. 그만두겠다’고 했죠. 오 시장이 ‘왜?’라고 묻기에 ‘힘들어 못 하겠다’고 했죠. 오 시장이 ‘조금만 더 있자’고 해 6개월 더 있었어요.”
▼ 부시장과 국회의원을 비교하면 어떤가요.
“국회의원 4년 하면서 입버릇처럼 ‘부시장의 100분의 1의 보람도 없다’고 했어요. 부시장 땐 몸은 고달팠지만 정말 ‘해피’했어요. 제가 계획을 현실화해나갔으니까. 재산세 공동과세, 강남권 구들이 엄청 반발했지만 설득해서 했죠. 강남 양천 마포 노원의 자원회수시설을 서울시가 공동으로 활용하게 하는 것, 해당 4개 구가 반대했지만 일일이 조정해 했죠. 노무현 정부가 용산 미군기지를 상업용도로 개발해 이전비용을 충당하려 했을 때 여기에 맞서서 자연생태공원으로 관철시켰죠. 낙선의 경험을 살려 장애인의 정치 참여, 교통편의 시설 확충, 복지증진을 위해 많은 일을 했고, 덕분에 ‘장애인 부시장’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어요. 반면 국회의원은 만날 대기만 해요. 하나도 되는 일이 없어요. 소장개혁파니 뭐니 해도 달라지는 게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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