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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매춘에 병들고 수치심에 떠는 여성 홈리스들의 밑바닥 인생

“20만원만 구해줘요. 애를 떼야 하는데 돈이 없네”

강간·매춘에 병들고 수치심에 떠는 여성 홈리스들의 밑바닥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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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식에게 버림받고 지하도에서 연명하는 70대 할머니, 만삭의 배를 움켜쥐고 돈을 구걸하는 임산부, 남편의 폭력을 피해 무작정 거리로 나온 모자, 갈 곳 없는 늙은 윤락녀.
  • 서울 거리를 배회하는 여성 홈리스는 200여명에 이른다.
강간·매춘에 병들고 수치심에 떠는 여성 홈리스들의 밑바닥 인생
“으악, 배아파 죽겠네. 이봐요, 아가씨. 나 20만원만 구해줘. 애를 떼야 하는데 돈이 없네. 오빠랑 올케언니한테도 달라고 했는데 돈이 없대. 아이고. 배가 아파 밤에도 제대로 잘 수가 없어.”

7월7일 밤 11시, 비까지 내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서울 영등포역 대합실. 갑자기 한 젊은 여성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삐쩍 말라 언뜻 보기엔 임산부같지 않았지만 헐렁한 티셔츠를 걷어올리자 남산만한 배가 드러났다. 임신 9개월. 올해 37세인 한수정(가명)씨는 계속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돈 좀 달라”고 소리쳤다.

“여성전용쉼터에 들어가 쉬어야 한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자”는 상담원들의 권유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배를 여러 번 세게 치던 그는 정신을 잃은 듯 오랫동안 허공만 쳐다봤다.

한씨는 4개월 전부터 영등포역에서 살았다고 한다. 아이 아빠가 누구고 왜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하게 됐는지 묻는 말에는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노숙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다는 걸로 보아 노숙과정에서 임신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아이가 생긴 걸 알았을 때부터 떼려고 했지. 그런데 돈이 없잖아. 쉼터에 가면 아이를 낳으라고 하니까 가지 않았지. 그러다 보니까 이 지경이 됐어요. 이제는 길에서 자는 게 너무 힘들어. 몸도 무겁고 배는 찢어질 듯 아픈데, 바닥이 너무 딱딱해.”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이하 노다지) 거리지원팀에서 영등포역 일대를 담당하고 있는 이세진씨는 “병원에 가자고, 쉼터로 가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는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강제로 끌고 갈 수는 없기 때문에 지금은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영등포역, 여성 홈리스의 홈

노숙인이라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거리로 쏟아져나온 실직 남성들을 떠올리게 마련이라 홈리스 여성의 존재는 낯설기만 하다. 실제로 집 없이 떠도는 여성의 상당수는 쉼터나 쪽방 등에서 머문다. 따라서 노숙인이라는 표현보다 ‘홈리스’라는 말이 적당하다.

어쨌든 2004년 6월 ‘노다지’ 집계에 따르면 한씨처럼 거리를 배회하는 홈리스 여성은 서울에만 30여명, 노숙인 쉼터에 머물고 있는 여성은 154명이다. 서울시 전체 노숙인을 3000여명으로 볼 때 홈리스 여성은 고작 5∼6%에 불과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홈리스 여성들은 철저히 세인의 관심 밖으로 내팽개쳐져 있다. 정부나 민간 지원도 남성 위주로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특히 말 그대로 ‘노숙’을 하는 여성은 강간 등 강력범죄나 매춘의 유혹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7월7일 저녁 8시 영등포역 광장에서는 모 종교단체가 무료급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130명 정도의 노숙인이 길게 줄을 서 밥을 타 갔는데, 간간이 여성들도 섞여 있었다. 그중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눈에 띄었다. 생김새가 귀여운 김가희(가명)씨는 한 달 전부터 영등포역을 중심으로 근처 쪽방, PC방, 만화방 등을 전전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돈이 없을 때는 그냥 ‘난장치기’(길거리 노숙을 일컫는 말)도 했단다. 김씨는 처음 보는 기자에게 사탕을 주며 스스럼없이 말을 건넸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 한쪽이 푸르스름하게 부어 있었다.

“엄마한테 맞은 거예요. 반지 낀 손으로 맞아 (다리를 들어올리며) 여기도 시퍼렇게 멍이 들었어요. 여기서 지내는 걸 엄마가 알아버렸거든요.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는 제가 미쳤다며 집에 가둬놓으려고 했는데, 전 다시 탈출했죠. 갑갑한 집에 있느니 여기서 생활하는 게 훨씬 편해요.”

“거리에서 자는 게 위험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며 “이게 있거든요(남자친구가 있다는 뜻). 오빠가 지켜줘서 위험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한다. 남자친구와는 영등포역에서 만났다고 했다.

예쁘장한 외모의 이지연(가명·34)씨는 항상 남성 노숙인 5∼6명과 함께 다녔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같이 있던 한 남성이 “우리 지연이, 참 예쁘죠? 난 결혼하고 싶은데, 자꾸 날 피해.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라고 말하자 이씨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영등포역 대합실에는 60∼70대의 할머니 5∼6명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노숙생활 2년 가까이 된 ‘고참’들이다. 대개 자식들에게 버려진 경우지만 본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편이 구치소 들어갔거든. 남편이 나와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지. 자식? 딸아이가 하나 있는데, 간호사라 지금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어. 지금은 남편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거야.”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강순심(가명) 할머니의 이야기다.

한 할머니는 요실금 때문에 노숙인 쉼터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요실금 증상이 잘 때 더 심하게 나타나는데,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것. 지금은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있다는 이 할머니는 처음 보는 기자에게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건네는 등 살갑게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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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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