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증유의 사태였다. 인조가 청나라에 인질로 붙잡혀 있다 귀국한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던져 소현세자가 죽었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건 풍문에 지나지 않았다. 사도세자의 경우는 달랐다. 부왕의 지휘 아래 친자살해 사건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휘령전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정성왕후는 사도세자에게 친어머니와 다름없었다. 세자의 생모는 영빈 이씨지만 세자는 정성왕후를 법모(法母, 법적 모친)로 받들었다. 영조가 휘령전 앞에서 세자를 죽인 이유는 뭘까. 양친이 한마음으로 불효 불충한 자식을 엄벌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영조, 생모 영빈, 법모 정성왕후, 장인 홍봉한 등 4명이 일치단결해 세자를 극형에 처했다. 영조는 “꿈에 정성왕후 서씨가 나타나 세자의 역모 사실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생모 영빈의 고발에 따라 죽이게 됐다”고도 했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도 사건에 깊이 관련됐다. 휘령전 앞에 뒤주를 대령한 이가 바로 그다. 영조는 오래 전부터 친자살해를 염두에 뒀다.
모두가 희생자?
첫째, 영조는 세자의 생모 영빈에게 아들의 비행을 고발하도록 압박했다. 영빈이 자발적으로 세자를 죽이자고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왕이 세자를 제거하려는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영빈은 어쩔 수 없이 따랐을 것이다. 세자가 죽은 뒤 영빈은 시름시름 앓다 2년 만에 숨을 거뒀다.둘째, 장인 홍봉한도 사위를 죽이자고 나섰을 리 없다. 세자는 실로 오랫동안 장인을 믿고 따랐다. 영조의 강압이 없었다면 홍봉한이 사위를 가둘 뒤주를 기꺼이 궐내로 반입할 이유가 없었다. 세자가 죽자 홍봉한은 자신의 딸 혜경궁과 세손을 집으로 데려가 보호하기도 했다. 그랬건만 훗날 정략에 휘말려 사위를 버렸다는 얼토당토않은 비난을 받게 된다.
셋째, 영조는 일시적 감정이 폭발해 세자를 죽인 게 아니다.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아들을 여드레 동안이나 외면한 것을 봐도 친자살해를 결심한 부왕의 각오는 끔찍히도 단호했다.
영조의 손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현륭원지(顯隆園誌)’를 썼다. 1789년(정조 13) 10월,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 화성으로 이장한 뒤다. 정조는 임오화변을 ‘나경언 사건’(1762)의 결과로 인식했다. 나경언은 1762년 5월 22일, 사도세자의 비행을 조목조목 열거했다. 정조에 따르면, 영조는 나경언의 고발에 현혹돼 사랑하는 세자를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정조는 영조가 신하들의 모략에 속아 넘어가 사도세자를 죽였다면서, 아버지 사도세자뿐 아니라 할아버지 영조와 자기 자신도 당쟁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정조의 이러한 관점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고려해 설정된 것이다. 정조는 왕실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 왕실 구성원 모두가 당쟁의 희생자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것이다.
영·정조의 해석 차이
영조도 임오화변을 정치적으로 해석했다. 영조는 세자를 죽인 지 보름 만에 그의 복권(復權)을 명령했다. 장차 세손(정조)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영조는 자신이 죽인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이태가 지난 1764년엔 ‘금등지사(金縢之詞)’를 지어,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에 보관케 했다. ‘오직 종묘사직을 위해 세자를 제거했을 뿐, 왕위는 장차 현명한 세손(정조)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이 결정은 당파 싸움과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앞으로 절대 논란을 벌이지 말라….’ 대략 이러한 내용을 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임오화변의 원인을 사도세자 한 사람의 개인적 비행 탓으로 돌리는 것, 이것이 영조의 뜻이었다. 요컨대 세자의 죽음에 관해선 어느 누구에게도 정치적 책임이 없다. 영조의 입장은 단순명료했다.
정조의 해석은 달랐다. 그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책임이 일부 신하들에게 있다고 봤다. ‘현륭원지’를 편찬한 본의는 그러한 주장을 굳히는 데 있었다. 사도세자를 궁지로 몬 노론 벽파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일파를 정치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사망한 노론 벽파의 대신 김상로의 관작이 추탈됐다. 정조의 외종조부 홍인한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김상로와 홍계희 등을 ‘적신(賊臣)’, 즉 역적이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영조는 ‘금등지사’를 통해 장래의 정치적 보복을 차단하고자 했으나 무용한 일이 됐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이다. 효장세자가 죽고 8년을 기다린 끝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얻었다. 아들을 얻으리라는 기대가 얼마나 컸던지, 영조는 출산 장면을 곁에서 끝까지 지켜봤다고 한다. 부왕의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사도세자의 재주는 비상했다. 3세 때 ‘효경(孝經)’을 읽을 정도였다. 훗날 영조는 세자가 ‘생지(生知)’, 곧 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는 천재의 경지였다고 회고했다. 10세가 되자 세자는 부왕의 계획에 따라 노론 집안인 홍봉한의 딸과 결혼했다.
文 대신 武
사춘기에 이르러 세자는 부왕의 기대에서 멀어져갔다. 세자는 문(文)이 아니라 무(武)를 숭상했다. 성리학을 통해서만 군주의 덕이 길러진다고 확신한 영조로선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문인 가문에서 성장한 세자빈 혜경궁 홍씨에게도 뜻밖의 상황이 전개된 셈이었다. 혜경궁은 ‘한중록(閑中錄)’에서 세자의 출중한 무예 솜씨를 단 한 번도 칭찬한 적이 없다.반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아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예를 큰 자랑으로 여겼다. ‘현륭원지’에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대 최고의 군사전문가라는 사실을 누누이 설명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펴내기도 했다.
영조는 세자의 취향을 무시하고 성리학 공부에 집착했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영조는 줄곧 출생의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모 숙빈은 무수리, 곧 궁녀의 하인이었다고 전한다. 숙종의 여러 후궁 중에서도 숙빈은 신분이 가장 미천했다.
설상가상으로 영조의 친부는 숙종이 아니라 노론의 책략가 김춘택이라는 풍문이 파다했다. 김춘택은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손자로 인경왕후(1661~1680)의 친정 조카다. 그는 궁중과의 인연을 이용해 1694년 폐비 민씨(인현왕후·1667~1701)를 복위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궁중에 뇌물을 썼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일로 김춘택은 관헌에 체포돼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갑술환국(1694)이 일어나는 바람에 반대파인 남인이 축출되고 노론이 재집권했다. 김춘택은 다시 자유의 몸이 됐다. 그와 당파가 같은 노론들은 김춘택을 재집권의 공로자로 칭송했다. 반대파인 소론과 남인들은 그를 음모와 술수의 장본인이라며 성토했다. 그런 가운데 김춘택이 궁중을 드나들며 몰래 궁녀와 관계를 맺어 영조를 낳았다는 악성 루머가 퍼졌다. 김춘택이 영조의 친부라는 소문은 영조에게 큰 짐이 됐다.
집착과 불안
영조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도 억측이 무성했다. 1724년, 그의 이복형 경종은 젊은 나이에 급사했다. 그 바람에 ‘세제(世弟)’인 영조가 즉위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영조가 간장게장을 들여보내 경종을 독살했다고들 했다. 경종은 평소 간장게장을 좋아했다는데, 하필 이복동생(영조)이 선물한 게장을 먹고 급사했다는 것이다. 역사 기록으로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다. 사망 당시 경종은 37세에 불과했다. 왕은 본래 몸이 약했으나 워낙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했기에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억측이 생겨났다.경종 독살설과 김춘택 친부설을 18세기의 소론과 남인들은 공공연한 사실로 인정했다. 그로 말미암아 1728년(영조 4) 남부지방에서 이른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이 진압되자 영조는 탕평책을 펼쳐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영조는 왕자 시절부터 노론의 신세를 많이 졌다. 즉위 후엔 더욱 노론에 기대어 정권을 유지했다. 그 때문에 그의 탕평책은 사실상 노론 중심의 권력 재분배를 의미했다.
영조는 심리적으로도 불안했다. 매사에 의심이 많았고 권력에 대한 집착이 유별났다. 피해의식에 시달린 걸까. 왕은 자신의 학문적 능력을 과시하며 신하들에게 존경과 굴복을 강요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영조는 사도세자도 자신처럼 탁월한 학자 군주가 되길 바랐다.
더 큰 문제는 영조가 자신의 심적 불안을 세자에게 투사(投射)했다는 사실이다. 세자의 약점을 사사건건 들춰내 사정없이 매도했다. 과거에 선조가 세자 광해군을 괴롭힌 것보다 더욱 심했다. 심약한 선조도 그랬지만, 영조는 거듭된 선위(禪位,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줌) 소동을 일으켜 세자와 대신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영조는 10년도 넘게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강요했지만, 세자에게 아무런 실권도 주지 않았다. 영조는 세자의 무능을 줄곧 나무랐고, 혹시나 세자와 대신들이 반역을 꾀하지나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탈과 정신병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사도세자는 1752년경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태 뒤엔 심적 고통이 육체적 질환으로 전이될 정도였다. 홍봉한은 사위의 요청에 따라 약을 지어 보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훗날 정조는 아버지의 정신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현륭원지’에서 “양궁(兩宮,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에 금이 간 것은 과거 경종의 측근이던 (…) 궁녀들의 이간질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정조는 궁정 내부의 암투를 강조하며 역사적 진실을 외면했다.
사실은 그와 달랐다.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은 점점 악화됐다. 일단 발작하면 통제 불가능 상태에 빠지곤 했다. ‘한중록’엔 그런 사실이 역력히 기록돼 있다. 영조도 세자를 폐위하면서 생모 영빈의 말을 빌려, 세자가 100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세자는 1761년(영조 37) 1월, 자신이 사랑하던 후궁 경빈 박씨도 살해했다. 혜경궁 홍씨나 생모 영빈의 목숨도 위태로웠다.
정순왕후의 등장
어떤 역사가는 사도세자의 정신이 끝까지 말짱했다고 주장한다. 정조의 ‘현륭원지’를 잘못 믿어서일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일탈행위를 모른 척했다. 기껏해야 아버지가 힘든 궁중예법을 실천하느라 잠시 우울증에 걸린 것처럼 묘사했다.요컨대 영조가 세자에게 끝까지 속마음을 열지 못한 건 불행의 원천이었다. 아들과의 관계에서 부왕은 솔직하지 못했다. 부왕의 권위를 무조건 끝까지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되레 허약함의 표징이요, 위선임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부왕 때문에 세자는 정신병에 걸렸다, 이렇게 말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부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일 일이 아니라, 관계 회복을 위해 자신의 마음부터 열었어야 했다.
영조의 불안증은 권력투쟁에서 비롯됐다. 선조와 광해군, 인조와 소현세자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도세자 역시 과열된 당파 싸움 때문에 애를 먹었다. 16세기 말부터 당쟁은 한층 격화됐고, 궁중의 암투와 정쟁은 서로 복잡하게 얽혔다. 여기에 부왕 영조의 잘못된 처신이 겹쳤고, 사도세자의 정치력이 부족한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세자를 미워한 영조는 숙의 문씨를 총애했다. 궁녀이던 그는 1753년(영조 29)에 지위가 소원(昭媛, 정4품)으로 올라갔고, 1771년(영조 47) 숙의(淑儀, 종2품)로 승격됐다. 영조와의 사이에 화령(和寧)옹주와 화길(和吉)옹주라는 두 딸을 뒀다. 문 숙의는 왕자를 낳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래서였겠지만 숙의는 노론 대신 김상로(金尙魯)와 친정 오빠 문성국(文聖國)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무고하는 일에 앞장섰다. 정조는 즉위하기 무섭게 문 숙의를 궁중에서 쫓아냈다(1776). 그해 8월 10일엔 사약을 내렸다.
궁중의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건 1759년(영조 35) 영조의 재혼이다. 계비 정순왕후는 세자보다 열 살 연하였다. 왕후가 대군을 낳을 경우 후계자가 뒤바뀔 게 뻔했다. 정순왕후가 입궁하자 대신들 중엔 세자에게서 등을 돌리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정순왕후의 친정이 혜경궁 홍씨의 친정과 갈등을 빚는 건 당연했다. 혜경궁의 ‘한중록’에도 그런 사실이 나타나 있다. 뿌리 깊은 갈등 때문에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를 처단했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실권을 거머쥔 정순왕후는 혜경궁의 아우 홍낙임을 처형했다. 해묵은 원한을 갚은 것이다.
사도세자를 보호하려 애쓴 대신들은 조현명, 이종성, 박문수 등 주로 소론이었다. 나중엔 조현명의 아들과 손자가 힘을 썼다. 노론 중에도 이천보와 유척기 등은 세자를 감쌌다. 하지만 부자관계가 악화되자 보호의 손길은 절로 약해졌다.
‘비상수단’ 선택
1759년(영조 35) 정순왕후가 궁에 들어오자 부자간의 불화는 정점에 달했다. 1760년(영조 36) 8월부터 무려 열 달 동안 두 사람은 한 차례도 대면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1762년(영조 38) 윤 5월, 친자살해의 참극이 벌어졌다. 사태를 거기까지 몰고 간 큰 책임이 영조에게 있다.왕이 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다니,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만일 영조에게 정신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하들이 당파 싸움에 매몰되지 않았더라도 피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격렬한 당쟁과 영조 및 사도세자의 인간적 결함이 교직된 결과다.
영조, 사도세자, 정조에 이르는 왕실 3대의 부자관계는 이례적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왕실이란 특수 사정을 감안해도 심했다. 아버지 영조는 세자를 지나치게 다그쳤다. 평화로운 어린 시절이 사라지자 사도세자는 줄곧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불안증에 시달렸다. 아들은 결국 성격 파탄자가 되고 말았다. 당황한 영조는 병든 아들을 치유할 방법을 구하기는커녕, 친자살해라는 비상수단에 호소했다.
궁중의 비극이 겹치자 정조는 견디기 힘든 청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워낙 비범하고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백성의 힘든 삶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현명한 왕으로 성장했다. 그래도 정조의 가슴 한쪽엔 아버지의 빈자리가 남긴 깊은 그늘이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