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동안 지방세수, 총예산 규모 3배 증가
- 딸기, 멜론, 수박 등 명품 농산물로 고소득 농가비율 전국 3위
- 대가야교육원으로 교육경쟁력 확보
- 잊힌 역사 대가야를 국가적 문화관광자원으로 복원
- 대기업 유치 산업단지 조성, 은퇴자를 위한 전원도시 개발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9만여 명에 달했던 인구가 1990년대 말 3만6000여 명으로 줄고, 이 가운데 65세 이상 노인이 20%에 달할 만큼 고령은 오랫동안 쇠락한 농촌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말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지방세수가 1999년 100억원에서 2010년 290여억원으로 3배 가까이 늘었고, 예산규모도 630억원에서 2034억원으로 3배 이상 늘었다. 군 전체가 활발하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증거다. 이 지역이 10년여 만에 남부럽지 않은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된 비결은 뭘까, 궁금증을 안고 고령을 찾았다.
경북 내륙지역이라 교통이 불편한 오지일 것이란 선입관과 달리 서울톨게이트를 통과한 지 3시간여 만에 고령IC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전국 어디에서나 3시간대면 접근이 가능하다는 군청 직원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남북을 잇는 중부내륙고속도로와 동서를 관통하는 88고속도로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百年大計 다질 SOC구축
“고등학교 1학년 때 이곳으로 이사 왔어요. 전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여름방학이 되어서야 처음 집에 왔는데 하필 홍수로 다리가 잠겨 온종일 물이 빠지길 기다렸다 집에 갔지요. 겨울방학 땐 폭설로 버스가 다니질 못했고요. 뭐 이런 오지가 있나,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나 싶었습니다.”
“도로가 잘 되어 있다”는 기자의 말에 이태근(63) 고령군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고령 토박이가 아닌 이웃 성주 출신이다. 하지만 연고주의가 강한 농촌지역에서 1998년 민선군수로 당선된 뒤 내리 3선을 했다. 이례적인 일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줄곧 고령에서 살았고, 아이들은 다 고령에서 낳았어요. 본적까지 이곳으로 옮겼죠. 그래도 선거 때마다 ‘객지 놈이 군수하려 한다’는 소리가 나오더군요. 그럴 때면 전 ‘능력 있는 용병을 채용해 고령을 발전시키자’고 호소했습니다, 허허.”
지난해 영남일보에서 실시한 대구·경북지역 지자체장에 대한 지역민 평가에서 그는 1등을 했다. 같은 해 전국지역신문협회에서 지역발전에 공로가 큰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수여한 ‘행정대상’도 받았다. 고령군으로서는 용병을 성공적으로 고용한 셈이다.
“고령에 터 잡고 살면서 어떻게 하면 낙후된 이곳을 잘살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고령은 사실 인구가 늘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자리, 교육여건은 물론 상하수도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는데 누가 이사를 오겠습니까.”
그는 군수로 당선된 뒤 ‘고령의 100년 초석을 다진다’는 마음으로 사회간접자본(SOC) 구축에 총력을 기울였다.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를 확충하고 도시계획을 정비했다. 35%에 머물던 상하수도 보급률을 85%로 높이고, 고령읍에는 도시가스를 공급했다. 노인이 많은 지역 특성에 맞게 호스피스 제도와 의료시설도 확충했다.
지역 주력산업인 농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데도 힘을 쏟았다. 고령은 전체인구의 34%인 5000여 가구, 1만2000여 명이 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경지면적이 작아 생산량으로는 다른 지역과 경쟁할 수 없어요. 그보다는 명품 농산물을 만들어 질로 승부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빠듯한 군 예산을 쪼개 고기술, 고품질, 고소득을 뜻하는 ‘3고(三高)정책’을 펼쳤다.
“산모가 건강해야 좋은 아이가 태어날 수 있듯 땅이 좋아야 농산물 품질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그동안 화학비료를 남용한 탓에 농지 대부분이 망가져 있더군요. 지자체로는 전국 최초로 담당부서를 만들어 군내 모든 농지 상태를 꼼꼼히 점검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농지별 맞춤비료를 제작해 배포했지요. 땅이 살아나자 자연히 농산물 품질이 좋아지더군요.”
선택과 집중으로 연소득 1억원 농가 육성
농업기술 프로그램도 군 현실에 맞게 만들어 농민들을 교육했다. 또 농업정책대학, 농업기술대학, 농민사관학교 등을 통해 전문지식을 갖춘 농업인재를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맞춤식 농정 지원도 펼쳤다. 열심히 농사를 짓겠다는 농민들에게 토양개량과 영농자금은 물론 유통망까지 중점적으로 지원했다. 이들을 먼저 키워 다른 농가들의 성공모델로 삼겠다는 복안이었다. 처음엔 지원에서 배제된 농민들의 불만과 반발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저 사람들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화작물 개발과 보급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성산면 참외 품질을 개량해 성주참외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경쟁력을 키웠다. 참외 대체작물로 멜론도 도입했다. 처음엔 개구리참외로 불리며 고전했지만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지원한 결과 지금 고령 멜론은 전국 최고의 명품 멜론으로 자리 잡았다.
쌍림면 딸기는 천적을 이용한 친환경농법으로 당도와 향을 높였다. 우곡면 수박도 품질개량을 통해 최고의 당도를 자랑하는 특산품이 됐다. 쌀 역시 DNA 검사와 농약잔류검사를 엄격히 하며 품질을 높인 결과 지난해 경북 최고 브랜드 쌀로 인정받았다.
이외에도 농산물 품질을 높이기 위해 친환경농산물 인증제 도입, 우수농산물관리제도(GAP) 선별시설 설립, 최신식 비파괴당도선별기계 도입, 포장디자인 개발 등 각종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02년엔 한국능률협회에서 주관하는 지방자치혁신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통에도 적극 관여했다. 농협연합사업단을 구성하고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를 건립하는 등 산지유통구조를 개선하며 농산물 판로개척에 군이 나섰다. 그 결과 지난해 농협에서 선정한 산지유통혁신 연합마케팅 부문에서 전국 1위를 차지했다.
“생산에서 소비까지 공무원들이 하나하나 신경을 쓰며 농민들을 도왔습니다. 저도 일본까지 가서 멜론 수출 판로를 개척했지요.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니 농민들도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갖더군요.”
명품 농산물 필수조건 가운데 하나가 ‘유기농 친환경’이다. 고령군 내 친환경농업 면적은 1995년 11ha에서 2008년엔 426ha로 40배 가까이 늘었다. 유기농업이 성공하려면 땅에 미생물이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고령군은 지난해 미생물 배양·저장 시설을 갖춘 미생물 생산공장을 만들었다. 여기에서는 고초균과 BT균 등 6종의 미생물이 연간 5만6000L 생산된다.
지난해 완공된 미생물 생산공장은 고령의 유기농업을 발전시키는 데 기폭제가 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 고령군의 농업가구당 평균소득은 2800만원으로 전국 평균(2150만원)보다 훨씬 높다. 농산물을 통한 생산소득이 연 3000만원 이상인 고소득 농가 비율도 17.4%(798가구)로 전국에서 세 번째로 높다. 특히 전체 농가의 10% 가까운 357가구는 연 소득이 1억원을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고령군은 2012년까지 ‘소득 1억원 농가’를 500가구 이상으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농업 외 소득 기반 마련을 위해 녹색농촌 체험마을 활성화에도 주력하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에서 주최한 농촌마을가꾸기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개실마을이 대표적인 사례. 한 해 동안 이 마을을 찾은 방문객은 4만5000명 선으로 연매출액이 4억여 원에 달한다. 최근에는 올해 열리는 G20 정상회의 참석 정상들이 방문할 농어촌마을 ‘Rural-20’에 선정되기도 했다.
전국 최초 공립학원 ‘대가야교육원’
이 군수는 지역을 발전시키려면 농업과 공업의 균형 발전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1998년 190개에 불과했던 기업이 지금은 700개에 달합니다. 1000개가 되면 지역자립경제가 어느 정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를 위해 산업단지들을 건설 중입니다. 특히 일량산업단지에 대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 중이지요. 대기업을 유치하면 인구증가와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산업단지 개발과 함께 신도시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고령군 내에 기업 종업원뿐 아니라 재력 있는 도시 은퇴자들이 노후생활을 할 수 있는 전원마을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나이 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이를 ‘U턴’이라고 하는데 저는 앞으로 ‘J턴’이 새로운 트렌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나이가 들면 병원에도 자주 가야 하고 생활편의시설이 갖춰진 곳에서 사는 게 편하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보다는 대도시와 가까운 전원에서 생활하려 할 것이라는 뜻이죠. 고령군은 대구와 20분 거리여서 시 외곽 전원도시로 개발할 여지가 많습니다.”
이 군수는 지역 발전을 이끌 요인으로 교육환경 개선도 꼽았다.
“고령군민 대다수는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만 되면 대구로 이사를 갑니다. 열악한 교육환경 때문에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지요. 교육은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전체의 존폐가 달린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역경쟁력을 살리는 가장 큰 일은 교육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군민들이 더 이상 교육 때문에 고령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학생과 학부모가 만족하는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봤지요.”
이를 위해 이 군수는 2003년 교육발전위원회를 만들었고, 2004년엔 전국 최초로 교육지원계를 설치해 학교 사정을 파악하고 대안을 마련해 교육여건을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2006년 3월엔 전국 최초로 공립학원인 대가야교육원을 열었다. 중1부터 고3까지 성적 순으로 30명씩 뽑아서 방과 후 무료로 가르치는 시설이다.
“실력 있는 강사를 모셔오기 위해 연봉을 1억원까지 지급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군수가 입시학원을 만든 셈이죠. 처음엔 공교육을 해친다며 교사들이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서울대를 비롯해 명문대에 연이어 합격하자 주민들이 달려졌어요. 1년에 200명씩 대구로 전학 가던 아이들이 줄어들고 이제는 다른 지역에서 전학 오는 학생들까지 생겨났습니다. 대가야교육원에 들어오기 위한 경쟁이 너무 치열해 고민일 정도지요.”
연 관광객 300만명 찾아
대표적인 농촌체험마을인 개실마을에서 외국인들이 떡메치는 체험을 하고 있다.
“처음엔 다들 얼토당토않은 생각이라고 비웃었죠. 가난한 군 살림살이로 어떻게 역사를 되살리고 관광 인프라를 만들겠느냐는 것이었어요.”
그는 우선 군 예산으로 사학자들로 하여금 가야를 연구하게 했다. 관련 사료를 모으고 학술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물이 지역자치단체 최초로 지역의 역사, 사상, 문학, 예술, 민속 등을 종합적으로 집대성한 ‘고령문화사대계’의 출간이다. 올해 마지막 권인 민속편이 나올 예정이다.
지산리에 산재한 가야시대 고분도 발굴, 정비했다. 고령군은 내년에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2005년 대가야박물관, 2006년 우륵박물관, 지난해엔 대가야테마관광지를 만들었다. 가야문화를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개발하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다. 우륵의 생애를 다룬 만화와 뮤지컬을 제작한데 이어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를 원작으로 한 영화도 3D로 제작중인데 내년 1월 개봉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전국 우륵가야금경연대회, 대가야 문화예술제, 가얏고음악제 등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다. 2005년부터 시작한 대가야체험축제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3년 연속 국제축제이벤트협회(IFEA) 금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2010년도 문화관광축제’로도 선정됐다. 한국상품학회에서는 이 축제에 2009년 대한민국상품 대상을 수여했다. 이 축제를 찾은 관광객도 첫해 10만5000명에서 지난해 43만명으로 4배 이상 늘었다. 이 과정에서 200억원이 넘는 경제적 효과도 생겼다. 고령군은 올해 대가야체험축제가 50만명이 찾는 전국적인 축제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대가야를 문화상품으로 개발하면서 고령군은 1998년 5만7000명에 불과하던 연간 관광객수를 지난해 300만명까지 끌어올렸다.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이 연 600만명인 것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규모다. 고령은 이제 경주, 안동과 함께 경북 3대 문화권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또한 금강의 백제문화권, 영산강의 마한문화권, 한강의 삼국문화권처럼 낙동강을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평가받게 됐다. 고령군의 목표는 이 여세를 몰아 관광객 1000만명 시대를 여는 것이다.
“문제는 판을 벌여놓기는 했는데 주민들이 그 과실을 제대로 따먹지 못한다는 거예요. 관광객의 호주머니를 열게 하는 방법을 몰라요. 그저 관광객을 구경만 하는 수준이죠. 이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지역을 국제적인 관광단지로 성장시키는 것도 모색 중이다. 대가야는 고령군 회천에서 출발해 낙동강, 일본 이즈모에 이르는 물길을 통해 일본 고대 국가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 난징(南京)과도 역사·문화 교류를 했다. 일본 27개현 100여 개소에서 출토된 대가야 유물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가야국역사루트재현과 연계자원 개발’사업을 추진 중인 것. 2016년까지 고아리 회천변 일원을 복합관광단지로 개발할 계획인데, 총사업규모가 2000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민속마을, 토기공방촌 등 고대생활 체험지구와 건강 휴양지구, 문화예술센터, 문화공연장, 각종 공공편익시설 등을 건설할 계획. 대구 달성군 화원유원지 일대와 고령군 다산면 일원을 세계적인 복합레저공간 ‘에코-워터 폴리스(Eco-Water Polis)’로 개발하는 구상도 무르익고 있다.
“대구에 수상카지노 시설, 고령엔 에버랜드 같은 대규모 종합레저시설을 만들겠다는 계획입니다. 총 5조원 가까이 투자되는 초대형 사업이 될 것입니다. 벌써 모건스탠리, 울브라이트펀드 등 미국의 대형 펀드에서 3조원 이상의 투자 의향을 밝혀왔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게 건설되면 연간 20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고령군을 찾을 겁니다.”
가야문화권특구 지정 눈앞
가야는 고령군만의 것이 아니다. 과거 가야문화권에 속해 있던 지역은 고령을 비롯해 경북 성주와 대구 달성, 경남 거창·산청·의령·창녕·함양·합천·전북 남원, 장수, 전남 순천 등 영호남을 아우르는 12개 지자체에 달한다. 이 군수는 이들 지자체를 설득해 2005년 가야문화권행정협의회를 만들었다.
“가야문화는 영호남을 아우릅니다. 가야문화를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이루면 동서화합과 경제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야문화권지역발전협의회는 노무현 정부는 물론 현 정부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오는 6월이면 7개 지역을 묶어 가야문화권특구로 지정할 예정. 이렇게 되면 고령에 3800억원 등 총 1조1000억원이 지원돼 지역 경기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이 군수는 오는 6월로 3선 임기를 마쳐 더 이상 군수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 아쉬움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단체장의 소임은 혼자 마라톤을 뛰는 것이 아니라 계주를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자인 후임 단체장에게 바통을 잘 넘겨주는 게 중요하겠지요.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고령군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다음 군수가 일하기 쉽겠죠. 그게 군민을 위한 공직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