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인종청소 내세운 광기 어린 살인·집단강간

  • 글: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3-10-27 18: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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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촌의 화약고 발칸반도에서 3년 반에 걸쳐 치러진 내전은 보스니아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유엔의 미지근한 대응, 서구 열강의 늑장 개입은 무고한 인명 희생을 키웠다. ‘유럽의 킬링 필드’란 악명을 낳은 보스니아 내전의 아픈 상처를 들여다본다.
    인종청소 내세운 광기 어린 살인·집단강간

    ① 사라예보 시내를 내려다보는 트레베비치산 언덕의 파괴된 집. 세르비아계는 이 언덕에서 시내를 향해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② 내전으로 파괴된 건물 옆을 지나가는 보스니아 병사. ③ 보스니아 회교도들은 인종청소란 명목으로 집단살해당했다. 페허가 된 거리를 지나는 무슬림 여인.

    지난 9월20일 보스니아(정식 국가명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 접경마을 스레브레니차에선 보스니아 내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도식이 열렸다.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도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내전 끝무렵인 1995년 여름 세르비아계 무장세력에게 집단 학살당한 7000∼7500명의 보스니아 회교도(현지 사람들은 이들을 ‘보스니악’이라 부른다)들의 넋을 기렸다. 클린턴은 이 자리에서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인종청소의 광기(genocidal madness)’라 비난했다. 하지만 과연 클린턴과 미국은 이 학살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미국은 지난 1991년 석유가 걸린 걸프지역에 대해 ‘지구촌 평화를 지키는 세계경찰론’을 내세우며 개입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이해관계가 없는 보스니아에선 대량학살이 자행되는데도 그저 바라만 보다 뒤늦게 군사개입을 했다.

    보스니아 내전(1992년 4월∼1995년 12월)은 1980년대말 90년대초 동베를린장벽 붕괴, 구소련연방 해체와 맞물린 유고연방의 분해과정에서 일어난 종족간 분쟁이다. 3년 반 동안 끌었던 보스니아 내전은 대량난민,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유엔보스니아평화유지군(UNPROFOR)과 나토군의 군사적 개입, 비정부 민간 구호단체들의 개입, 그리고 언론보도의 집중 등 기존 전쟁들과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그래서 일부 국제정치학자들은 보스니아 내전을 ‘새로운 전쟁’이라 부른다.

    전쟁이 인류문명을 얼마나 뒷걸음질시키는가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보스니아를 가보면 된다. 수도 사라예보는 지난 1984년 동계올림픽을 치렀던 곳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폭 50∼100m의 밀야츠카강을 끼고 옛 건물들과 현대식 빌딩들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도시였다. 하지만 내전을 치르면서 사라예보는 철저히 파괴됐다. 락토 믈라디치 장군이 이끄는 세르비아계 무장세력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의 유고연방군이 건네준 중포화기로 사라예보를 마구 포격했다. 1993년 7월23일에는 16시간에 걸쳐 3777발의 포탄이 사라예보 시내에 떨어졌다(‘뉴욕타임스’ 1993년 7월24일자).

    철저히 파괴된 사라예보



    사라예보는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다. 트레베비치산을 비롯, 사라예보를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들에 포진한 락토 믈라디치군이 마구잡이로 쏘아댄 포격은 사라예보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시장에 장을 보러 나온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세르비아 저격수들은 평화롭게 시가지를 걸어가는 시민들을 향해 마치 사냥이라도 하는 듯 총을 쏘아댔다. 이로인해 약 1만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1990년대 전반기 사라예보를 휩쓴 포격으로 파괴된 병원, 호텔, 신문사, 관공서 건물들은 내전이 끝난 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않은 채 흉한 몰골로 서 있다.

    지어진 지 100년이 넘는 아름다운 보스니아 국립도서관이 파괴되고 그 안에 있던 귀중한 서적들이 불태워진 것도 보스니아 내전 때였다. 사라예보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간선도로 주변은 내전의 포화를 말해주듯 지금도 보기 흉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사라예보를 처음 찾는 방문객들은 ‘이곳이 정말 동계올림픽을 치렀던 도시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당시 올림픽 참가 선수들의 숙소로 지어진 고층아파트들도 일부는 벽이 허물어지고 천장이 내려앉았다.

    보스니아 내전은 20세기 인류사에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런 전쟁으로 기록된다. 400만 인구의 40%가 살던 집을 떠나 고달픈 난민 신세가 됐고 40%의 집들이 불타거나 파괴됐다. 25만∼30만명의 시민이 내전으로 죽었다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 1995년 6월 클린턴 미 대통령이 앨 고어 부통령과 함께 CNN의 앵커 래리 킹과 대담을 나눴을 때 그는 “내전 희생자 가운데 절반 가량인 13만명이 내전 초기 1년 동안에 희생당했다”고 밝혔다. 내전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는 인종청소 차원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국제적인 인권단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2003년 8월에 낸 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직도 1만7000명 가량이 실종 상태다. 가족들은 그들이 죽임을 당한 뒤 어딘가에 암매장됐을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보스니아 곳곳에선 아직도 발굴작업이 진행중이다. 보스니아 당국이 최근 밝힌 바에 따르면, 1995년 내전이 끝난 뒤 지난 8년 동안 약 1만8000구의 시신이 발굴됐다.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약 1만1500명. 나머지 6500명의 유골은 훼손이 심한 탓에 신원조차 확인이 안 된 상태다. 부녀자들도 보스니아 내전의 피해자들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세르비아계 무장세력에 성폭행당했다.

    세르비아계 정치 지도자로 내전을 이끌었던 라도반 카라지치와 세르비아계 군사령관 락토 믈라디치는 현재 헤이그 유고전범재판소(ICTY)에 전쟁범죄자로 기소된 상태.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같은 발칸 전쟁범죄 혐의로 현재 헤이그에서 재판 을 받고 있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전 유고연방 대통령)와는 달리, 세르비아계의 은밀한 보호 아래 아직껏 도망중이다.

    필자는 카라지치가 살던 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트레베비치산을 넘어 세르비아계 영토인 스르프스카 공화국 안에 있는 팔예(Palje) 마을이 카라지치의 본거지였다. 사라예보에서 팔예로 가는 길은 아슬아슬한 고갯길을 따라가는 험난한 길이었다. 게다가 고갯길 곳곳에는 내전의 흔적이 역력했다. 파괴된 2층 벽돌집, 대인지뢰 조심 팻말….

    고갯길에서 잠시 쉬면서 세르비아계 운전사는 이렇게 말했다. “카라지치가 지금 어디 숨었는지는 우리 같은 사람은 잘 모른다. 분명한 점은 그는 내 마음속에 영웅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우리들의 지도자이고 대통령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내 친구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다 그를 숭배한다. 한마디로 카라지치는 우리들의 영웅이다.”

    사실상의 분단국가

    흔히 ‘보스니아’로 불리는 이 나라의 공식이름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1995년 12월 보스니아 내전 에 종지부를 찍은 데이튼평화협정에 의해 태어난 기묘한 형태의 연방국가다.

    이 국가는 다시 두 개의 공화국으로 나뉘어 각각의 대통령과 수상, 그리고 의회를 두고 있다. 두 개의 공화국이란, 보스니악(Bosniak, 일반적으로 보스니아 회교도들을 가리키지만 인종적인 공식 명칭은 보스니악이다. 인구비율 48%)과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인구비율 14.3%)이 합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과 세르비아계 주민들(인구비율 37.1%)의 ‘스르프스카공화국’이다. 두 공화국의 면적은 거의 같다(보스니아 51 대 스르프스카 49). 이 두 공화국 연합이 우리가 흔히 부르는 ‘보스니아’다.

    그래서 보스니아 사람들도 명칭의 혼란을 막기 위해 공식 국가이름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국가 차원의 BH’로, 이에 속한 두 공화국 중 하나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은 그저 ‘연방’으로 부른다. 보스니아 회교도들과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의 연방은 2명의 대통령, 세르비아인들의 스르프스카공화국은 1명의 대통령을 두고 있어 모두 3명의 대통령이 있다. 이들 세 명의 대통령은 8개월마다 한 번씩 돌아가며 의장직을 맡아 ‘국가 차원의 BH’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4년이 임기이므로 두 번씩 ‘대표 대통령직’을 맡는 셈이다.

    이처럼 말만 연방국가일 뿐, 보스니아는 사실상 두 개로 쪼개진 분단국가나 마찬가지다. 데이튼평화협정 서명에 깊이 개입했던 미국과 유럽연합이 발칸반도에 더 이상의 국경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연방국가일 뿐인 것이다.

    필자도 보스니아 현지를 취재하면서 분단의 체험을 했다. ‘국가 차원의 BH’ 수도이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험준한 트레베비치산을 넘어 스르프스카공화국의 주요도시인 팔예로 가려면, 사라예보 외곽인 도브리냐로 가서 차를 타야 한다. 도브리냐는 두 공화국을 가르는 경계선에 자리한 마을이다. 그런데 필자가 버스정류장에서 사라예보 시내로 전화를 하려고 공중전화에 사라예보에서 산 카드를 넣으니, 작동이 안 됐다. 알고 보니 그 전화는 오로지 스르프스카공화국으로만 통하는 전화였다. 사정이 이러니 ‘연방’ 쪽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스르프스카공화국으로 도망가면 잡을 길이 막연해진다.

    외세의 침략 받으며 동화와 분열 거듭

    보스니아는 다른 발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숱한 고난을 치러왔다. 서로 언어와 문화, 그리고 종교가 다른 세 개의 종족이 섞여 살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이 지역이 외세의 침략을 받으며 동화와 분열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역사에 관한 비교적 객관적인 서술로 이름을 얻은 노엘 말콤(영국 역사학자)의 ‘보스니아 약사(Bosnia, A Short History, 1994년판)’에 따르면, 고대 시절 지금의 보스니아 지역 주거민들은 코소보와 마찬가지로 알바니아계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일라이리언(Illyrians)들이었다.

    인종청소 내세운 광기 어린 살인·집단강간

    보스니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과 ‘스르프스카공화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로마제국이 강성하던 기원전 3세기 무렵 보스니아 지역 대부분은 로마제국에 귀속됐고, 서기 6세기 후반부터 슬라브족들이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이들이 세르비아계의 조상이다. 로마 제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보스니아 지역은 500년 동안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헝가리계, 베네치안계, 그리고 비잔틴계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지배했다. 그러다 12세기 들어 헝가리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헝가리 치하에 있던 1200년 무렵 보스니아 왕국을 세워 일종의 자치를 즐겼다.

    14세기말 보스니아를 포함한 발칸반도는 격랑에 휩싸였다.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반도로 세력을 뻗쳐오면서 잇단 전투 끝에 1463년 보스니아는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로 바뀌었다. 그 뒤 16∼17세기 보스니아는 유럽의 기독교 세력과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력이 부딪치는 최전방이었다. 400년 동안 이어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으며 보스니아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회교도로 개종했다. 1877∼78년 러시아-터키 전쟁 뒤 열렸던 베를린회의를 거쳐 보스니아의 통치권은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넘어갔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제국의 황태자 프란시스 페르디난도를 저격 암살한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을 불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이 지역이 ‘세계의 화약고’란 악명을 얻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함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 왕국(공식명칭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영토가 됐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발칸반도도 전쟁의 격랑에 휘말렸다. 나치 독일군이 세운 크로아티아 괴뢰정권은 1941년 보스니아를 합병한 뒤, 수천 명의 세르비아계 주민을 유대인, 집시들과 함께 강제수용소로 내몰았다. 1945년 보스니아는 반(反)나치 게릴라 투쟁을 이끌었던 티토군에 의해 해방을 맞았고 유고연방으로 출범했다.

    티토는 다민족사회인 유고연방을 이끌어가기 위해 특유의 정치적 리더십과 더불어 ‘형제애와 통합’을 강조했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선 민족 개념보다는 계급이 강조된다. 보스니아 같은 다민족사회의 통합을 위해 티토는 민족을 잊고 계급을 강조했지만, 1990년대 발칸반도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진리임을 입증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위대한 세르비아’ 건설을 깃발로 내걸어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자극, 대중적 인기를 얻어 1989년 실권을 잡았다. 이는 거꾸로 유고연방 내의 다른 공화국들로부터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1991년 슬로베니아가 벨그라드에서 보낸 세르비아계 주축의 유고연방군과 10일 동안의 짧은 전쟁을 거쳐 가장 먼저 독립을 얻었다. 슬로베니아에 비해 크로아티아는 짧지만 혹독한 대가를 치른 뒤에야 유고연방에서 독립할 수 있었다. 7개월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1만명이 죽임을 당하고 7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유고연방군(세르비아군)은 전쟁 초기 크로아티아 국토의 30%를 점령했으나 결국 물러났다. 크로아티아 동부 세르비아 접경에 가까운 부코바르는 세르비아군의 포격을 받아 도시가 쑥대밭이됐다. 아드리아 해변의 아름다운 휴양 도시로 유럽의 피서객들이 몰리던 두브로브니크도 1991년 12월 유고 해군의 함포사격을 받아 파괴됐다. 유네스코가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던 두브로브니크 시내의 오래된 건물들이 무너진 것도 그때의 일이다.

    당시 함포사격을 지휘했던 혐의로 2001년 11월에 체포됐던 미오드라그 조키치(전 유고 해군 부제독)는 지난 8월말 헤이그 전범재판소에서 스스로 유죄를 시인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란 명분 아래 군사작전을 폈지만, 두브로브니크에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거의 없었다. 이런 고난을 딛고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란조 투지만(크로아티아 대통령)이 이끄는 무장세력이 세르비아계를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보스니아처럼 외부(나토)의 군사개입에 기댄 것이 아니었다.

    보스니아는 크로아티아보다 훨씬 더 혹독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슬로베니아나 크로아티아가 소수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빼면 단일종족으로 구성된 지역인 데 비해, 보스니아는 다종족 사회였다(1991년 당시 인구분포는 보스니아 회교도 43%, 세르비아계 35%, 크로아티아계 18%였다). 이런 인종적 복잡성이 보스니아를 오랜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간 1차적인 요인이다.

    1991년 10월 보스니아 회교도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이 손을 맞잡고 유고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할 것임을 선언했고 1992년 3월 국민투표에서 99.4% 찬성으로 이를 확정했다. 보스니아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 참가 자체를 거부했다. 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발칸의 새 독립국가들을 차례로 인정했다. 1991년 말 독일이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했으며 1992년 들어 유럽공동체(EC) 국가들과 미국이 잇따라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나섰다.

    국제사회의 축복 속에 독립을 인정받긴 했지만, 보스니아는 3년 넘게 전란을 치르면서 만신창이가 됐다. 큰 그림으로 보면 세르비아계 대 보스니악-크로아티아계의 전쟁이었다. 초기 보스니아 내전은 세르비아계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진행됐다. 벨그라드의 밀로셰비치 정권은 보스니아 지역내 정부군의 무기를 모조리 세르비아계에 넘겨주었다. 그렇게 해서 8만에 이르는 세르비아계 무장병력이 생겨났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깃발 아래 뭉친 이들의 목표는 다른 종족들을 몰아낸 뒤 이웃 세르비아(유고연방의 중심지인 벨그라드 정권)와 합쳐 ‘대(大)세르비아’를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내전 초기 세르비아계는 우세한 무장력을 바탕으로 보스니악(보스니아 회교도)과 크로아티아인들을 쫓아내거나 강제수용소에 가두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토면적의 70%를 세르비아계가 차지했고 크로아티아계는 20%를, 보스니아 회교도들은 수도인 사라예보 지역과 그 나머지 지역에 근거를 두었다.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을 말할 때 회교도들 사이에 ‘인간 도살자’로 불리던 아르칸이란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유엔의 추산으로는 보스니아 내전에 약 2만명의 세르비아 민병대가 참전했는데, 아르칸은 그 지도급 인물로 꼽혔다.

    극단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아르칸의 본명은 젤리코 라드나토비치. 벨그라드 축구구단의 구단주로 여러 이권사업에 손대면서 밀로셰비치의 손발 노릇을 해온 벨그라드 비밀경찰과 가까이 지내왔다. 아르칸은 발칸에서 전쟁이 터지자, 실업자와 거리의 깡패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킨 뒤 ‘호랑이’ 민병대를 조직했다. 나중에는 독자적인 언론매체를 통해 신병을 모집하기도 했다. 세르비아 경찰과 유고연방군(세르비아군)이 이들에게 탱크와 대포를 대주었다. 그후 이들은 비(非)세르비아계에 대한 무차별 살육, 강간, 강도행위를 저질렀다.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성공적인 개입의 예로 ‘안전지대’를 꼽을 수 있다. 이 ‘안전지대’는 세르비아계 점령지역에 고립된 보스니아 회교도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설정된 것. 유엔 특사인 사이러스 밴스(전 미국 국무장관)와 유럽공동체(EC)의 특사인 데이비드 오언(전 영국 외무장관)이 벨그라드 정권과의 협상을 통해 끌어낸 것으로, 총 10개의 안전지대가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 안전지대마저 세르비아계가 벌인 무장공세 앞에 무너졌고 학살의 피바람이 불었다. 숱한 보스니아 회교도들이 굶주림과 질병, 또는 세르비아계의 학대로 죽어갔다. 특히 일부 수용소에서는 여성들에 대한 조직적인 강간이 이뤄졌다. 이런 성적 학대는 ‘인종청소’ 차원에서 ‘이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이곳을 떠나라’는 메시지가 담긴 악랄한 범죄로 비판을 받았다. 일부 세르비아인들이 강간 혐의로 헤이그 전범재판소에 섰지만, 그 숫자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보스니아 내전 막바지에 7000명의 보스니아 회교도들이 무참히 살해된 스레브레니차 학살사건(1995년 7월)은 보스니아 내전에서 일어난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다. 보스니아 동부, 세르비아 접경지대에 자리한 스레브레니차는 회교도 집단거주 마을로서, 유엔이 선포한 10개 안전지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계는 그곳에서 4만명에 이르는 보스니아 회교도들을 지키던 유엔보스니아평화유지군(UNPROFOR) 소속 네덜란드 병력을 몰아낸 뒤 인종청소 범죄를 저질렀다.

    세르비아계는 적대적인 전쟁예비병력을 없앤다는 구실로 10대 소년에서 50대 장년에 이르는 보스니악들을 마구 학살, 집단무덤에 파묻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에서 일어난 최악의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스레브레니차에서는 지금도 시신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유고전범재판소는 지난 2001년 8월 세르비아계 장군 라디슬라프 크르스티치에게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 책임을 물어 징역 46년형을 선고했다.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 사라예보로 넘어왔던 사람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사라예보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스브레냐 난민수용소에서 만난 술레이만 델리치의 증언.

    “내전 초기 보스니아 회교도들은 세르비아계가 집단학살이나 인종청소를 저지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모두들 ‘이 마을에서 수백 년을 살아왔는데’ 하며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생활터전인 밭과 집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갈수록 사태가 심각해졌다. 남자들이 잡혀가 강제수용소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했고 여자들은 강간을 당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식들이 들려왔다. 이웃마을도 세르비아군에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일가친척들과 상의해 피난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모든 재산을 놔두고 떠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난길에 보니 전에 회교도들이 살던 집들 가운데 번듯한 것은 세르비아인들이 차지하고 집 바깥에 세르비아 3색기를 내걸고 있었다. 성경에 양의 피를 칠해 유대인의 집임을 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피난길 곳곳에서 마주친 세르비아 민병대는 엄청난 ‘통과세’를 요구했다. 아내는 손에 끼고 있던 결혼 반지마저 빼주어야 했다. 그렇게 생돈을 뜯기며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사라예보에 닿은 후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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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니아 내전에 종지부를 찍은 데이튼평화협정에 서명하는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보스니아의 이제트 베고비치 대통령(앞줄 왼쪽부터).

    미 중앙정보국(CIA)은 1990년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할 것이란 정보를 미리 알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1991년 소련이 붕괴돼 조각날 것이란 점도 미리 예측하지 못했다. 따라서 미 정보당국은 보스니아 내전의 진행방향이 어느 쪽으로 흘러갈 것인가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고 미국이 내전에 적극 개입할 의사를 가졌거나 병력파견 준비를 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임기말이었던 조지 부시 행정부는 군사적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당시 미 국방장관 딕 체니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보스니아 내전은 비극적인 일이지만 발칸반도는 몇백 년 동안 분쟁을 치러왔던 곳”이라며 “적극 개입할 뜻이 없다”고 밝혔다(사맨서 파워, ‘지옥으로부터의 문제’ 2002년판).

    미국은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유엔에게 짐을 맡겼다. 유엔 안보리는 결의안(1992년 8월)을 통해 모든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겠다고 나섰다. 1992년 4월에 유엔 모니터 요원 100명을 파견한 후 6000명의 유엔평화유지군(영국군 1800명 포함)을 유엔보스니아평화유지군(UNPROFOR) 이름으로 파병했다. 그러나 이들은 적극적인 평화구축보다는 식량호송차량 보호와 난민 보호가 주목적인 경보병 부대였다. 탱크로 중무장한 세르비아계 세력의 무력도발을 막기엔 어림없는 병력이었다.

    1993년 집권한 클린턴도 보스니아 개입에 소극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콜린 파월(당시 미 합참의장)을 비롯한 미 군부는 클린턴에게 “군사개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건의했고, 클린턴은 이를 받아들였다. 파월은 의회 증언대에서 “보스니아 내전을 그치게 하려면 병력 40만명이 파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또다시 베트남 수렁에 빠질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를 두고 세르비아계 정치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현재 전범 수배중)는 “만일 미국이 2000명의 해병을 보스니아로 파견한다면 그 2000명을 지키기 위해 다시 10만명을 파병해야 할 것이다. 이는 베트남으로 가는 지름길이다”라고 조롱했다(‘뉴욕타임스’ 1994년 11월27일자 인터뷰).

    그해 10월 소말리아 모가디슈 시가전에서 미 해병 18명이 살해당한 사건은 클린턴 행정부로 하여금 보스니아 개입을 더욱 멈칫거리게 만들었다(소말리아 신드롬). 당시 세르비아계 텔레비전들은 모가디슈 거리에서 현지인들이 미 해병의 시신을 끌고 다니는 장면을 되풀이해 방영했다.

    클린턴 행정부 안에서 보스니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공습)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유엔대사(뒤에 국무장관)도 그 중 하나다. 그녀는 “나토의 이름으로 세르비아 극단주의자들을 공격해 대량학살을 멈추도록 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녀가 유엔대사로 있던 1993년 5월 발칸반도에서의 전쟁범죄를 다루기 위한 유엔특별법정(ICTY)이 문을 열었다. 올브라이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쟁범죄를 재판했던 뉘른베르크 원리들이 다시 확인됐다. 이는 이긴 자의 법정이 아니다. 참된 승자는 진리다”라고 기뻐했다(마이클 샤프, ‘발칸의 정의’ 1997년판).

    미국이 보스니아 내전에 본격적으로 군사 개입을 한 것은 3년 넘게 숱한 희생자를 낳은 뒤였다. 1995년 8월말, 마침내 나토군은 세르비아군 전략거점을 겨냥해 공습을 시작했다. 보스니아 내전을 끝낸 것은 일반적인 ‘전쟁 피로’ 현상 때문이었지만 나토군이 공습하지 않았다면 더 오래 끌었을 것이다. 뒤집어보면 나토군이 좀더 일찍 내전에 개입했다면 그만큼 보스니아인의 희생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보스니아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던 건 나토 공습이었지만, 크로아티아계 병력이 잇달아 세르비아계를 격파한 것도 전쟁을 끝내는 데 한몫했다. 1995년 초여름 크로아티아군은 세르비아계 무장세력이 점령하고 있던 보스니아 서부와 크로아티아 동부지역에서 그들을 몰아냈다. 1995년 8월 이들 보스니아 회교도-크로아티아 연합세력은 세르비아계 전략거점인 트라지나를 공격했다. 여기에 나토 공습이 가세하면서 전세는 세르비아계에 불리해졌다. 세르비아군의 포로가 된 일부 유엔군 병력이 나토의 전략적 공격 목표물에 쇠사슬로 몸이 묶이는 사건이 벌어진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미국의 발칸 정책 목표는 미군의 희생 없이 내전을 끝내는 것이었다. 이는 서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발칸 내전이 장기화하면 난민들이 서유럽으로 대량 흘러들어오는 부정적인 현상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공습에 앞서 종전 협상에 나섰다. 미국측 협상대표인 리처드 홀브룩 국무차관은 1995년 8월 사라예보로 향했다. 당시 사라예보 국제공항은 세르비아군의 포격으로 폐쇄된 상태였다. 홀브룩 일행은 험준한 발칸의 산악도로를 통해 사라예보로 들어가다 낭떠러지 길에서 세르비아계의 공격을 받아 3명이 죽었다. 민간인, 군인을 통틀어 보스니아 내전에서 미국인이 사망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홀브룩이 사라예보에 머물고 있을 때, 사라예보 시장에 세르비아계가 쏘아댄 포탄이 떨어져 37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홀브룩은 워싱턴으로 전화를 걸어 “우리를 워싱턴으로 불러들이고 폭격을 시작하자”고 건의했다(리처드 홀브룩,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1998년판).

    보스니아 사라예보대 학장 바히드 클랴이치(정치학)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전 초기인 1992년 서유럽과 미국이 보스니아를 외교적으로 인정한 것은 벨그라드의 밀로셰비치 정권에게 보스니아 내전에서 손을 떼라는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는 그런 메시지가 단순히 외교적인 치장이나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보고,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에 배후 지원을 계속했다. 내전이 3년 넘게 끌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 다음인 1995년 여름에야 나토군이 개입했지만, 이미 거센 피바람이 불고 지나간 뒤였다.”

    1995년 8월30일의 나토군 공습은 그런 과정을 거쳐 벌어졌다. 세르비아군에 대한 나토군 공습이 시작된 지 2개월 뒤 휴전이 합의됐고 1995년 12월 리처드 홀브룩(전 유엔대사)을 특사로 내세운 미 클린턴 행정부가 벨그라드의 밀로셰비치를 평화협상의 세르비아 쪽 중재자로 삼아 데이튼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렸다.

    조화로운 다민족사회 건설은 요원

    데이튼평화협정 뒤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나토군이 주축이 된 평화유지군이 보스니아로 들어갔다. 아울러 유엔임시행정청(UNMIBH)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이 오랜 전란으로 만신창이가 된 보스니아로 들어갔다.

    보스니아 재건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데이튼 평화협정 이행감시(고위대표부, 약칭 OHR), 법질서 유지와 사법체계 정비(UNMIBH), 선거 등을 통한 민주화제도 정착(유럽안보협력기구, OSCE), 난민 처우개선(UNHCR), 평화유지활동(SFOR) 등 다각도로 이뤄졌다. 이 국제기구들은 지금도 보스니아 재건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지금껏 미국과 유럽연합은 경제원조라는 당근으로 보스니아를 재건함으로써 평화를 뿌리내리려 해왔다. 현재 보스니아 재정적자의 상당폭을 동유럽민주화지원기금(SEED)이나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이 나서서 해결해주고 있다. 이런 재정지원을 바탕으로 보스니아는 조화로운 다민족사회를 건설한다는 일종의 국제정치적 실험을 하고 있다.

    보스니아는 동유럽에서도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1240달러(2001년, 세계은행 통계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대학 교육을 마쳤어도 일자리가 마땅치 않다. 실업률은 40%에 이른다(2002년, 미 CIA 통계자료). 오랜 내전과 가난에 절망한 많은 보스니아 사람들이 서유럽으로 옮겨갔고 젊은이들도 보스니아를 떠나고 싶어한다.

    1995년 데이튼평화협정에 따라 내전을 멈추긴 했지만, 깊어진 갈등의 골을 메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바히드 클랴이치 교수는 “데이튼협정이 전쟁보다야 낫지만 진정한 평화와는 아직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데이튼협정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미국과 서구국가들, 그리고 협상의 다른 당사자인 밀로셰비치가 보스니아의 분단을 고착화하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고 지적한다. 세르비아계인 미르코 페야노비치(사라예보대 정치학교수)는 이와 관련해 “세르비아계인 스르프스카 공화국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밀로셰비치가 대세르비아를 이루고자 했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버렸다고 여긴다”고 전한다. 그는 “우리 지식인들도 겉으로는 조화로운 다민족사회의 건설을 말하지만,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토론을 벌이다 보면 어느 순간 국가보다 민족이 앞서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2002년 10월의 총선에서 보스니아의 두 공화국(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 스르프스카) 모두 온건중도보다는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정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이것이 오늘의 보스니아 정치풍향계다.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조화로운 다민족사회를 보스니아에 건설한다는 목표가 이뤄질 날은 멀어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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