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호

이문열 장편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제1부 / 제국에 비끼는 노을(4화), 기나긴 낮과 어둡고 무거운 밤

  • 입력2017-10-1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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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름 치솟는 어둑한 하늘 높이 커다란 독수리가 날아올랐다.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지혜의 독수리? 또는 요한계시록에 뜨는 묵시의 독수리? 그의 머릿속은 시사실(試寫室)의 불이 꺼지고 영사기에서 쏟아진 흑백의 빛살이 스크린에 영상을 펼쳐내기 시작할 때부터 추론과 예측으로 바쁘게 돌아갔다.

    이름은 들은 적이 있어도, 그가 연출한 작품 한 편 관람한 적이 없는 외국 감독의 영화를, 우리말로 더빙되지도 않고 한글 자막도 없이, 그것도 고색창연한 흑백으로 보게 되면서부터 예견된 당혹과 긴장이었다. 독일어처럼 읽어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되는 스웨덴 감독과 우리말로 ‘일곱 번째’를 한자식 수사(數詞)로 제목에 앞세운 영화 ‘제칠(第七)의 봉인’.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 늙고 지친 기사와 그의 종자(從者)가 나타난다. 입은 갑옷이나 장신구로 미루어 중세의 기사고, 종자 하나만 데리고 지친 모습으로 바닷가를 헤매는 것과 사슬갑옷 가슴 쪽에 붙은 십자가 문장(紋章)으로 미루어 오랜 싸움 끝에 바닷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십자군 기사쯤으로 보인다. 거기까지는 대사 한마디 알아들을 수 없어도 해독할 수 있는 화면이었다.

    그런데 의인화(擬人化)된 죽음이 나타나 구상과 추상이 뒤섞이면서 화면은 보다 면밀한 관찰과 빠른 판독을 요구했다. 검은 두건과 검고 헐렁한 외투, 하얀 가면이라도 쓴 듯 석고로 뜬 데스마스크 같은 얼굴의 죽음 또는 죽음의 사자가 늙고 지친 기사와 나누는 대화는 얼른 그 내용이 짐작 가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은 체스 판이 그들 간에 있었던 대화 내용을 이내 짐작하게 했다. 그들은 그 체스 판에 무얼 건 것일까? 석고로 뜬 것 같은 하얀 얼굴에 검은 두건과 길게 늘어뜨린 검은 망토. 흑백으로 그려진 체스 판에 얹힌 흰 말과 검은 말의 강렬한 대비 같은 것은 강요와도 같은 상징으로 삶과 죽음, 존재와 허무 같은 대비되는 관념들을 판독해내게 한다.

    뒤이어 이렇다 할 영상적인 서술이 없어, 자칫 회상으로 오인되기 쉬운 늙은 기사의 새로운 편력과 순례. 아마도 기사는 죽음의 사자와 두는 체스로 자신의 죽음을 유예시키며,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때껏 살아온 그리고 어쩌면 이제 곧 떠나게 될, 이 세계의 진상을 살펴보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종말, 그리고 허무로 다시 봉인될 것인지. 구원과 재생 또는 생명의 약속으로 새롭게 피어날 수 있을 것인지.



    기사와 종자의 마지막 순례 또는 편력은 숨 가쁘게 이어진다. 창궐한 흑사병과 세상에 널린 죽음. 채찍으로 스스로를 후려치며 그와 같은 신의 징벌을 부른 죄를 참회하는 고행자들과 시체를 뒤져 금품을 거둬가는 참혹한 도둑들. 두건을 쓴 채 죽은 자의 물크러지고 눈알 없는 얼굴, 고행자들의 순례 행렬과 충돌하는 광대들의 잔치. 성직자들에게 내몰린 예술가들이 죽음과 종말의 공포로 삶을 억압하는가 하면, 살아 있는 순간의 쾌락에 탐닉하는 대중은 그들에게 고용된 광대들을 조롱하며 종말도 영생도 아울러 야유했다.   

    어둡고 무거운 영화의 배경음악과 이런저런 효과음, 그리고 구형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에 남산 중턱까지 차오르는 대도시의 소음도 간간이 스며들어 시사실은 청각에 부담스러울 만큼의 음량에 짓눌려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제부터인가 그에게는 영사기 도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것도 다른 모든 소리를 압도하여 귓전을 가득 메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몫만큼의 잔잔하고 차분한 기계음으로서였다. 100평 가까운 시사실에 딱 네 사람만 앉아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는 게 그의 의식 바닥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 같았다.

    “볼만하지요? 작가 선생. 아마 이렇게 극장 개봉도 안 된 작품을 시사실에서 보는 경우는 처음인 것 같지만.”

    그의 의식이 잠시 영화 밖으로 벗어난 걸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유 교수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아,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주제는 대강 눈치로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가 그렇게 대답하자 유 감독이 말을 돌려 대화를 끊어버렸다.

    “그래봤자 러닝 타임 90분 남짓의 영화요.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았을 테니 마저 보고 난 뒤에 얘기합시다.”

    그사이에도 영화는 빠르게 진행되어 기사와 그의 종자는 세상과 사람들의 거리를 지나고 거기서 연출되는 갖가지 희비극을 헤치며 유예된 죽음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죄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소녀와의 조우는 속절없는 죽음과 종말의 비극성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녀가 악마에게 영혼을 넘긴 탓에 흑사병이 세상을 휩쓸게 되었다고 믿고 마녀재판에 부쳤다.

    기사는 악마에게 홀려 화형대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게 된 그 소녀에게 다가가, 거기서 자신이 찾고 있는 무언가를 보거나 듣고 싶은 듯했다. 그러나 기사는 그 소녀에게서 신을 찾을 수 없었듯 악마도 찾아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최후에 본 것이 악마라고 믿었지만, 기사는 그녀의 눈 속에서 죽음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절망과 두려움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기사는 그럴수록 더 간절하게 죽음과 절망으로부터 세상을 지켜줄 신을 찾는다. 신이 존재해야만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상징과 묵시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다분히 의도적인 구도 하나가 화면에 드러난다. 고행을 나선 순례자의 무리가 덮치는 바람에 무대에서 쫓겨난 젊은 광대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가 전혀 낯선 빛깔과 음색으로 새로운 형태의 세계를 연출한다.

    신선한 우유와 야생 딸기로 갈음된 식탁은 소박하고 건강한 삶을 상징하고, 젊고 아름다운 한 쌍의 부부가 드러내는 밝고 구김 없는 사랑은 곧 태어날 아이와 더불어 성가족(聖家族), 곧 요셉과 마리아와 어린 예수를 은유하는 듯하다. 새로운 생명과 이어갈 세상, 구원과 재생의 약속이 이행되고 그들 성가족의 머리 위에는 머지않아 영생과 불멸의 광배(光背)가 뜰 것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가면 너무나 뻔하고. 그래서 자칫 통속적일 수도 있는 구원의 약속, 부활과 영생의 의식은 그럴 때 흔히 해온 대로 진부한 낙관만으로는 처리되지 않는다. 거장(巨匠)의 특이한 반전으로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며 특이한 이미지의 구원송(救援誦)으로 전화(轉化)된다. 새벽 지평선 위에서 펼쳐지는 섬뜩하면서도 가슴 저린 죽음의 군무, 그러나 그대로 종말이고 사멸은 아닌, 어떤 아득한 유예의 심연으로 옮겨가는 이들의 기이한 춤이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배경으로 손에 손을 잡고 밝은 등성이 저쪽의 알지 못할 계곡으로 검고 인상적인 실루엣을 그려내며 춤추며 가는 그들. 시간의 모래시계를 차고 긴 자루에 크고 직각으로 휜 날을 가진 서양 낫을 깃발처럼 쳐든 죽음의 사자가 검은 망토를 바람에 휘날리며 앞장을 서고, 그 뒤를 기사와 그의 종자가 그 무렵 죽음의 군무(群舞)에 끼어들게 된 네 명의 동행과 함께 춤을 추며 따라간다. 그 끄트머리는 젊은 광대의 동료였다가 마지막으로 그 죽음의 군무에 끼게 된 또 다른 광대로, 그는 류트를 뜯으며 따라가고 있다.

    그 여섯의 춤사위나 악기를 다루는 동작 어디에도 거부하거나 주저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경쾌하고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악기를 뜯으며 오래 살아도 끝내 알 수 없었던 이 세상으로부터, 또한 그곳으로 옮겨 길이 머물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 같지는 않은 또 다른 어떤 심연으로 행진하고 있을 뿐이다.



    2.

    종영 벨도 울리지 않고 시사는 끝났다. 영사실에 불이 켜지자 유 교수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

    “어때? 볼만했어? 봐, 딱 95분이잖아.”

    그러는 그의 얼굴에는 엷은 홍조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술기운인가 싶었으나, 만날 때 멀쩡했던 얼굴에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도 따로 술을 마시는 기척이 없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유 교수가 기대하는 깊은 감동보다는 섬뜩하고 기괴한 이미지의 충격 때문에 그가 얼른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함께 영화를 본 곽 감독이 불쑥 끼어들었다.

    “정말 그 시간밖에 안 걸렸어요? 제겐 두 시간 분량은 돼 보이는데.”

    “자네 전에 이 작품 외국서 한 번 봤다더니 헛말이군. 그게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이 영화 러닝 타임이야. 찍는 데 도합 35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이나 잘 알려진.”

    유 교수가 핀잔같이 그렇게 말을 받다가 곽 감독이 자기 과에 전강(專講)으로 나오고 있으며 또 자신이 데려온 조교가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걸 떠올렸던지 더는 몰아세우지 않고 말머리를 그쪽으로 돌렸다.

    “이 작가도 두 시간짜리로 보였어? 그렇게 지루하더냐고.”

    “솔직히 조금 헤매기는 했지만 전혀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왜 굳이 제게 이 영화를 보여주셨는지도 짐작이 갑니다.”

    그러는 사이 먼저 시사실 출입구에 이른 조교가 서둘러 유 교수를 위해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선생님, 그럼 동보성(東寶城)으로 모실까요?”

    “아, 그래? 그러지. 그런데 자넨 잠깐 영사실에 들러 준비한 봉투 전해주고 오게. 우리 때문에 아침부터 나와 수고해준 사람들이야. 지난번에 우리 영화과 아이들 단체 관람할 때도 수고해주었고…. 영진공(映振公) 김 과장한테는 내 따로 인사하지.”

    유 교수는 조교에게 그렇게 지시하고 휘적휘적 앞장을 섰다. 알고 보니 동보성은 시사실 바로 앞의 소파로(小坡路)인가, 하는 남산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다 서울역 쪽 모퉁이 비탈로 약간 내려앉은 중화요릿집이었다. 차를 타고 그 길을 지나다보면 가끔 눈에 들어오던 한문으로 쓴 세로 간판이 오래 드나들던 집 같은 익숙함을 느끼게 했다.

    “시사회가 있을 때 이 동네 왔다가 이따금 들르는 집이라 오늘도 그냥 이 집으로 했는데 괜찮겠나?”

    “선생님 시간에 맞추느라 대구에서 첫차를 타는 바람에 아침부터 라면이 되었지만 뭐, 괜찮습니다. 워낙 국수를 좋아해서요.”

    “하긴, 중국집이라고 맨 면(麵)요리뿐인 건 아니니까.”

    유 교수는 그렇게 대꾸하고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일렀던지 마침 네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작은 모퉁이 방이 비어 있었다. 뒤따라온 곽 감독이 메뉴를 펼쳐보지도 않고 별로 의논하는 기색도 없이 먼저 넷이 함께 먹을 쟁반요리 둘에 고량주 한 병을 시키더니, 다시 학교에서부터 함께 온 그들 셋 앞으로 면류(麵類) 단품요리 셋을 시킨 뒤 그에게 물었다.

    “이 형, 식사는 뭘 하시겠소?”

    “그럼 저는 밥으로 하지요, 볶음밥.”

    그렇게 해서 대강 주문이 끝났을 무렵 영사실에 들렀던 조교가 뒤따라와 합류했다. 곽 감독의 일방적인 통보를 자신이 한 주문에 갈음한 조교가 뒤늦게 들어온 말리(茉莉)차를 모두에게 정성껏 따르는 동안 방 안은 잠시 어색한 침묵에 빠졌다. 곽 감독이 뜨거운 차를 소리 내어 불며 마시다가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유 교수를 흘깃 바라보더니 잔을 탁자 위에 천천히 놓으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 여기 이 형을 새벽같이 대구서 불러올리셨는데, 어째 아직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다. 아무리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명품이고 영화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교과서 같은 명작이라지만, 설마 영화 한 편 보자고 이 작가를 대구서 여기까지 부르신 건 아니지요?”

    그러자 그때까지 뜨거운 찻잔을 움켜잡고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던 유 교수가 기다렸다는 듯 아무런 징후 없이 진지함과 심각함으로 직진했다.

    “나는 내년 6월로 회갑이 되고, 감독으로 메가폰을 잡은 지 30년,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친 지는 20년이 되네. 그리고 다시 방금 본 ‘제7의 봉인’이 운 닿으면 나도 한번 꼭 만들어보고 싶은 영화 세 편 가운데 한 편이 된 지 또 20년이 지났네. 베르히만이 그 영화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지 2년 뒤에야 겨우 대학에 조교수로 자리 잡게 된 내가 세운 서원(誓願) 같은 것이지. 그제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도 그 필름이 들어온 게 있다는 걸 알고, 어렵사리 구해 아는 소극장 스크린에 처음 걸어보고 난 뒤에 말이야. 이쪽저쪽에 모두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는 교수임을 내세우고 떼를 써서….”

    “그런데 지난달 곽 감독님을 대구로 내려보내셨을 때 제가 시나리오 각색에 참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 소설이 영화가 되는 것조차 내켜하지 않자 이 영화로 저를 설득해보려 하신 거지요?”

    “처음에는 ‘오발탄’이나 ‘분례기’ 같이 비교적 원작이 단단한 내 영화를 보여주려 했지만 아무래도 그 걸로는 안 될 거 같아서.”

    “제가 그때 걱정한 것은 아직 우리 형편으로는 제 소설이 영화가 되기 어려울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제 ‘인간의 대지’는 액자소설인 데다, 액자는 또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작은 액자들로 쪼개져 있습니다. 곧 현대의 한국과 기원(紀元) 전후의 로마 세계로 나뉘고, 또 기원 전후의 로마 세계는 로마제국 및 중근동 여러 고대왕국들의 종교와 제의(祭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양과 중근동 로케(현지촬영)도 그렇지만, 거기서 연기할 외국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것도 너무 엄청난 일일 것 같아서요.”

    “천생 소설가 같은 소리구먼. 아니, 그럼 시나리오 각색이란 게 왜 있고, 감독의 작품 해석이나 연출권은 또 왜 필요한가? 내가 아니라도 그 원작 가지고 온 세계를 현지 로케하고 군나르(‘제7의 봉인’에서 종자 역) 같은 서양 성격배우 몇십 명씩 조연으로 쓰려는 감독은 한국에 아무도 없을 거야. 아니, 지금 우리 형편으로는 애초 그런 엄두를 못 내.”

    유 교수가 그래놓고 이번에는 거리낌 없이 핀잔 투로 곽 감독을 몰아세웠다.

    “자네, 아무리 문화홍보 영화니 대학생 영화니 하는 소리를 듣는다지만 그래도 영화를 세 편이나 극장에 올린 감독 맞아? 둘이 무슨 얘기를 했기에, 이 작가가 아직도 저런 엉뚱한 걱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서 하나? 그날 둘이서 술 한잔까지 하며 두 시간이나 진지하게 얘기해봤다며?”

    그가 서둘러 나서 곽 감독의 궁색함을 덜어보려 했다.

    “그때는 제가 이 걱정을 곽 감독님께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레짐작으로 영화화가 불가능하다고 보이는 작품을 원작으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제게 시나리오로 각색까지 해달라니 너무 당황해 그저 못 한다고만 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래놓고 나니 당장은 그 일로 서울서 대구까지 내려와 준 곽 감독님에게 너무 미안하더군요. 더구나 자신을 전임강사로 불러준 하늘 같은 선생님의 당부로 천 리 길을 오신 분의 간곡한 청탁을 단번에 거절한 꼴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장은 아마도 곽 감독님께 술부터 권하기에 바빴을 겁니다.”

    “그런데도 곽 감독은 다음 날 술도 안 깬 얼굴로 올라와 이 작가가 영화할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한 거야?”

    유 교수가 오히려 어이없어하며 그렇게 반문하자 곽 감독이 더욱 황망한 얼굴로 그를 보며 사정하듯 반문했다. 

    “하지만 이 형, 그날 그 말도 했잖소? 처음 이 형은 원작 소설도 이 나라에서 3만 부만 팔리면 만족하려 했다고. 지금 20만 권이나 팔린 건 허수(虛數) 같다고. 인세를 주는 것으로 봐서는 출판사가 조작한 허수 같지는 않지만, 아마도 독자의 허위의식이나 지적 허영이 쌓아올린 허수 때문인 것 같다고. 어쩌다 그게 맞아떨어져 베스트셀러가 된 책을 어렵게 영화로 만들어본들, 아무래도 문학 독자보다는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영화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먹혀들 수 있겠느냐고.”

    곽 감독이 유 교수의 말을 받는 대신 약간 허둥대는 목소리로 자신에게로 날아든 화살을 그에게로 돌렸다. 들어보니 모두가 자신이 한 말이라, 그가 약간 난처해져서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는데 마침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던 유 교수가 문득 따져 묻기를 그만두고 고량주 병을 따며 작은 회식 자리의 좌장으로 역할을 바꾸었다.

    그때부터 한동안 유 교수는 영화제작에서 약간 비켜난 주제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러다가 술 한 병이 거의 비어갈 무렵부터는 원작 소설에 대한 그 나름의 이해와 공감을 한담처럼 이어가면서 그에게 기습처럼 불쑥불쑥 물었다.

    “종교가 있소? 소설로 봐서는 크리스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소설은 ‘원더링 주스(방황하는 유대인)’ 모티프를 활용한 것 같은데, 유럽의 다른 작가들이 소설로 꾸민 것도 읽어보았소?”

    “혹시 도스토옙스키의 ‘대(大)심문관’을 끌어와 표절이니 모방이니 하며, 시비 거는 자들은 없던가요?”

    대개 원작 소설과 관계된 짤막짤막한 질문들이었는데, 그는 왠지 신문받는 것 같아 유 교수의 물음보다는 조금 더 길게 대답했다.

    “할머님과 어머니가 가혹한 반공 정권의 ‘적의 적’에 대한 호감을 기대하고 교회에서 피난처를 구하던 시절에 주일학교를 조금 나가보았습니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이 들어 있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외워 하계 주일학교 성경암송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지요. 그래봤자 초등학교 상급반일 때지만.”

    “제 소설 액자(額子) 속의 주인공 ‘아하스 페르츠’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 달린 주(註)에서 나왔습니다. 실직한 교황의 질문 끝에 달려 있던 것인데, 아마도 공동번역 성경에는 ‘아하수에로’로 나오는 아하스 베루스라는 이름을 독일식으로 발음, 표기한 것인 듯합니다. 나중에 유럽의 여러 작가가 ‘방황하는 유대인’ 모티프로 소설을 썼다는 것은 제 ‘인간의 대지’ 초고가 마무리 진 뒤에야 알았습니다. 그때도 가능하면 구해보고 싶었지만, 우리나라에는 번역된 것이 없고 원서로 구해보기도 어려울 때라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제가 게을러서인지 아직까지는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유럽 작가가 아닌,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라는 필명을 쓰는 일본 작가의 ‘귀향’이란 소설에서 ‘에헤이 줄스’라는 서명(署名)으로 세상을 방황하는 유대인 아하스 페르츠의 이미지만 빌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언어학적 경로로 ‘에헤이 줄스’라는 발음의 이름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대심문관’에 나오는 사탄의 유혹에 대한 해석은 도스토옙스키만의 독창적인 해석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그 세 가지 시험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해석한 때부터 아퀴나스의 성경 주해를 거쳐 한국 시골 목사들의 서가마다 필수 구비 도서로 꽂힌 이런저런 성서주석 전집에 이르기까지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은 대개 빵과 기적과 권세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그의 대답이 장황했던지 몇 번 말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사이에 술병이 비고 식사까지 거의 끝났다. 유 교수가 시계를 보더니 무슨 약속이 있는지, 다시 아무 예고 없이 본안으로 돌아가 진작부터 작정하고 있었던 것 같은 결론으로 들어갔다.

    “이 작가가 박 사장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었고, 원래부터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원작을 잘못 이해하거나, 전혀 가망 없는 작품을 연출해보려고, 헛된 망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소.”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조금 전에 제게 질문하신 그 세 가지만으로도 제 어수룩한 소설에 대한 선생님의 정밀한 점검과 이해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럼 이 작가가 말한 난점은 우리 쪽에서 각색으로 해결해보지. 좋아요. 오늘 내가 박 사장에게 떼를 써 이 작가를 여기까지 불러올렸지만, 생판 억지에 헛일한 건 아닌 셈이군. 어이, 곽 감독, 우리 전에 의논한 대로 그렇게 각색 끌어가면 그 소설 속 액자 없이도 맞춰갈 수 있겠지? 어때? 각색 자네가 한번 맡아서 해보지 않겠어? 다시 말해, 우리 배우들 중 누구도 기원 전후의 로마나 이스라엘, 중근동에 가지 않고, 유럽이나 아랍계 조연은 물론 엑스트라 하나 쓰는 법 없이 이 영화 찍어내는 걸로.”

    “선생님 뜻이 꼭 그러하시다면 한번…, 해보지요.”

    이전에 이미 서로 주고받은 말이 있는지 곽 감독이 별 주저 없이 그렇게 대답해놓고 흘긋 그를 보며 덧붙였다.

    “여기 이 형도 절 믿어주신다면.”

    그러자 유 교수가 몸까지 벌떡 일으키며 그를 보고 말했다.

    “그럼 됐소. 이 작가. 내 다음 주에 곽 감독 다시 한 번 서류 만들어서 대구 내려보내지. 원작 사용료는 전에 말한 그대로 하고. 인세(印稅) 개념 같은 걸루다 말이오. 그때 곽 감독 내려가거든 말로라도 각색 많이 도와주시고. 저 사람도 옛날에 신학교 기숙사 밥 먹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 이 일에 가장 적격이라고 맡겼지만, 이 형한테 물어볼 게 많을 게요. 그리고 이따가 박 사장 만나거든 안부나 전해주시오.”


    3.

    충무로 쪽 남산 발치에서 출판사가 있는 종각 부근까지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종각 앞에서 택시를 내려 종로통 일차선 이면도로로 몇 걸음 들여놓기도 전에 벌써 저만치 출판사 건물이 보였다. 출판사는 종로와 을지로 사이에 난 이면도로 모퉁이에 채 스무 평이 안 되는 건평(建坪)으로 성탑처럼 뾰족이 솟은 5층 건물의 3,4,5층을 모두 쓰고 있었다.

    아직 열 번을 다 채우지 못한 출입인데도 출판사 건물이 이제 더는 낯설거나 새롭지 않았다. 시각뿐만 아니라 거기에 이어진 공감각적 연쇄까지도 어느새 모든 게 오래된 체감처럼 그에게는 익숙했다. 그 건물 1층은 주단 가게를 열었는데, 도로면으로 시원하게 진열장이나 출입문을 내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참 아래를 창고로 써서, 그럭저럭 그 무렵 종로 쪽에 몰려 있던 주단가게 끄트머리에 끼일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우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층계를 내는 것으로 또 서너 평이 뺏겨 잘해야 열다섯 평 남짓으로 다방을 연 2층은 군색하기 그지없었다. 옹색한 카운터와 주방으로 다시 두세 평을 빼내고, 거기에 네 사람 앉는 소파가 둘, 두 사람이 마주 앉는 탁자가 서넛 해서 열댓 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동안 출판사와 관련돼 만난 사람들과 두어 번 내려가본 적이 있는데, 왠지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용건이 끝나기 바쁘게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동안 들락거리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직종으로서 출판 일을 구경하는 곳은 주로 3층이었다. 어깨높이의 합판 칸막이로 실내를 반으로 나눠 갓 여상을 나온 듯 아직 애리애리한 경리와 40대 중반의 사장이 비슷한 크기의 책상을 나란히 놓고 응접세트와 마주하고 있는 공간과 여덟 명의 편집부 직원이 30대 초반의 부장과 함께 일하는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편집부는 처음 그 세계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셈인 그에게는 구성부터 특이했다. 무엇보다도 부원 전원이 여자이고, 거의가 특정 여대 출신이라는 점이 그랬다. 거기다 한동안은 부장 역시도 그 대학 출신으로 써서, 그 별난 편집부의 인원 편성은 그곳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에게 얘깃거리가 되었다. 언젠가 그와 함께 그곳을 방문한 또래의 어떤 작가는 드러내놓고 그 편집부를 아무 여대 동문회라고 이죽거렸다.

    그들은 석 달에 계간지 한 권, 신인 중견 가리지 않고 매달 한 권 정도의 호평받는 시집과 소설집이 각 한 권, 다시 그 무렵 특히 화제가 되고 있거나 베스트셀러가 된 책을 중심으로 외국 작품 번역물이 시 소설 기타로 각 한 권에, 그 출판사가 작년부터 묶어가고 있는 문고판 세계명작 시 전집 한두 권과 그밖에 전집도 아니고 최신작도 아니지만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인기 있는 고전 급의 신역(新譯)판(대부분은 일본어 중역판을 원어에서 바로 옮기는 형식으로) 한두 권 보태 한 달에 여남은 권의 책을 묶어 서점 가판대에 올렸다.

    듣기로 그 출판사가 한 달에 열 권이 넘는 책을 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원래 편집인 겸 사장에, 제작 겸 영업사원, 그리고 경리 셋이서 출발할 때는 그 건물 3층만 썼는데, 그때는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책이면 무엇이든 찍어도 고작 1년에 서너 권이 넘지 않았다. 그러다가 쓰라린 문청(文靑) 시절을 보낸 사장의 이력이 작용한 것인지, 차츰 문예출판사의 성격을 띠더니, 다시 사장의 학맥, 인맥이 밑받침되어 좋은 편집위원을 동인(同人)으로 맞아들이면서 차츰 문예출판 위주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태 전에 제정한 ‘우리시대 작가상’이 1,2회 연거푸 신간 베스트셀러를 내게 되면서, 사세가 확장되어 출판 규모가 커지면서 그 무렵처럼 한 달에 열 권을 넘기게 되었다는데, 처음 그에게 그런 사사(社史)를 요약해준 노 부장은 그때 마침 나온 그의 제3회 ‘우리시대 작가상’ 수상 작품집 재판(再版)을 들어 보이면서 농담 삼아 보탰다.

    “이 책도 우리 출판사를 자신 있게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고요.”

    그가 회상인지 잡념인지 모르게 그런 출판사의 약사를 두서없이 떠올리느라 편집부 입구에서 잠시 어릿거리는데, 마침 제작 일을 맡고 있는 신입 직원 아가씨와 새로 나올 시집  표지 시안을 검토하고 있던 사장이 힐긋 그를 돌아보며 오래 근무한 직원 대하듯 말했다.

    “이형, 왔어요? 잠깐 그쪽에 앉아 기다려요. 이거 잠깐 보고 갈 테니.”

    그리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지, 다시 표지 시안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뭐라고 나직이 말하는 게 부분적인 수정이라도 지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응접세트가 놓인 칸막이 쪽을 살피니 어찌 된 셈인지 금요일 오후인데도 마주한 두 세트의 소파와 빈곳 여기저기 외따로 놓여 있는 인조가죽 씌운 테이블 의자 네댓 개가 모두 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 없는 인근의 문인들이 몰려들 시간으로는 좀 일렀다.

    그는 아무도 없는 응접세트를 두고 간단한 인사차 칸막이 너머 편집부 쪽으로 갔다. 열린 쪽을 마주하고 앉았던 노 부장이 피우고 있던 담뱃불을 끄며 일어섰다. 웃는 입술 사이로 치아 보정용의 은빛 강선(鋼線)이 반짝이며 그러잖아도 푸근하지는 않은 그녀의 인상에 알 수 없는 날카로움을 보태었다. 그러나 무언가 서랍 속에 준비하고 있던 서류 봉투를 꺼내면서 일어서는 그녀가 던지는 말투는 그새 식구끼리의 은근함이 배어 있었다.

    “오셨어요? 저리로 가시죠. 보여드릴 것도 있고 전해드릴 제안도 있어요. 알려드릴 것도 있고….”

    그 바람에 응접세트가 놓인 방으로 돌아온 그가 소파 한구석에 자리 잡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무는데, 서류 봉투를 든 그녀가 스스럼없이 옆자리에 와서 앉으며 봉투 안에 든 것을 꺼냈다. 그도 동갑내기 노처녀의 그런 무난스러움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거 선생님이 걱정하신 여성지 인터뷰인데 아주 잘 나왔어요. 그러고 보니 원고 재고만 쌓은 게 아니라 그런 쪽 인터뷰 준비도 하셨는가 봐요. 누구든 이 인터뷰 읽은 사람은 선생님이 누군지, 그리고 무슨 글을 썼는지 궁금해질 거예요. 그리고 여성지라고 무시하던 거 티 안 내신 것도 대단하고요. 그다음 이건 지난달 신문 문화면 소설 월평(月評)이에요. 4대 일간지 가운데 두 군데서 선생님 글을 다루었는데 각기 다른 작품이에요. 중편 하나 단편 하나. 나중에 쓸 데가 있을 것 같아 스크랩한 거니 잘 보존하세요.

    문예지 월평은 선생님도 찾아보시죠? 그것들은 따로 스크랩 안 했고…. 그리고 여기 독자 팬레터 한 통. 유명세 타신 지 반년이 다 돼가는데 출판사로는 처음 온 편지라 함께 넣었고.”

    “전해줄 제안은 뭡니까? 무슨 일인데요?”

    “‘문예중심’이라고 언론사 출판부에서 내년 봄 창간호를 내려고 하는 계간지가 있는데, 거기 주간으로 내정되어 출간 준비 중이신 분이 장편 분재(分載) 한번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왔어요. 계간지니까 석 달에 한 번인데, 한 번에 300매 안팎으로 연재하면 1년에 장편 한 권쯤 묶어낼 수 있게 되죠. 긴 장편이면 3년 정도 연재할 수도 있다는데 한번 해보시겠어요? 전에 왜 노트에는 원고지 800매 분량 정도 써두었지만 손을 보면 장편 상하권은 될 거라고 한 작품 있잖아요? 그때 뭔가 재미있는 내용이었는데.”

    “무슨 작품을 말하시는지는 알겠는데, 그건 얼른 대답하기 어려운데요. 내년 봄 창간이라지만 계간지라면 원고 마감은 연말이 될 텐데, 그러면 두 달밖에 안 남았어요. 거기다가 그 작품은 시작하면 1회에 한 600매씩 분재해서 한 해에 묵직한 상하권으로 마치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화닥닥 잘 되겠어요?”

    “고료도 특별 대우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이 선생님이 하신다면 분재도 한두 회 늦춰 실을 수도 있는 것 같던데요.”

    “어쨌든 그건 그렇고, 알려줄 건 뭡니까?”

    “어제부터 전화가 왔는데 혹시 김도균 씨나 채동관이란 사람 아세요?”

    “글쎄요…. 김도균이란 이름을 둘 아는데 어느 쪽인지 모르겠고, 채동관이란 사람은 처음인데요. 자기소개를 하지 않습디까?”

    “김도균 씨는 제가 알 것 같아요. 옛날 6·3사태 때 이른바 ‘서울대 몇 김(金)’ 가운데 하나인 그 사람 같아요.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아, 그라면 나도 알 것 같습니다. 할머니 쪽으로 인척이 되는데 대학 시절에 더러 뵈었던 분이죠. 고향서부터 얽혀 서울에서도 가깝게 지내는 편인 집안 형님 친구이기도 하고…. 그러나 채 뭐라는 사람은 성부터 아주 낯선데요.”

    “그런데 전화는 채동관이라는 사람이 더 열심이었어요. 마지못해 오늘 오신다고 했더니 이따가 4시에 자기도 이 아래 다방으로 오시겠대요.”

    그때 무언가를 거듭 다짐받으며 표지 제작 일을 맡아 하는 직원을 보낸 사장이 두 사람이 얘기를 주고받는 응접세트 쪽으로 와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노 부장에게 물었다.

    “연재 얘기는 했어? 그리고 반체제 쪽 사람들이 찾는다는 것도?”

    “예?”

    그가 난데없어하며 물었다.

    “김도균이 말이오. 한일수교 반대로 시작한 사람인데 얼마 전에 민투(民鬪)인가 뭔가 하는 반체제 쪽으로 어울렸다고 들은 것 같은데. 어쨌든 이따가 만날 때 그런 게 있다는 걸 알고나 만나세요. 요새 뭔가 좋지 않은 일 있어요. 지난 월초부터 뭔가 어수선하더니 내무부 장관 구자춘이 발표 들었지요? 남민전(南民戰)인가, 뭔가 사건 이름부터 요란스러웠잖소.”

    그래놓고 자신이 궁금한 물음으로 넘어갔다.

    “그래 유 감독 왜 그렇게 목을 매고 이 형을 불렀답니까?”

    “결국 영화 얘기예요. 저번에 곽 감독 내려왔다가 어그러진 것 같던 그 일인데, 아주 의욕적으로 나오시더군요. 만년의 대작으로 한번 잘 만들어보고 싶다고.”

    그리고 그는 영진공 시사실에서 만나 헤어질 때까지를 간략하게 요약했다. 박 사장이 자신의 일처럼 그렇게 성사된 것을 축하해주었다.

    “잘됐어. 잘됐소. 무슨 일을 시작하든 일류를 만나야 돼. 그런데 이 형은 이제 영화를 만드는 데도 일류를 만나 시작하는 거요. 유 감독에게 맡겨봐요. 내 고향 선밴데 실망시키지 않을 거요. 영화감독이라고 하니 흔한 딴따라로 보이지만, 녹록잖은 양반이지. 영화 공부는 제대로 한 사람이오. 한국 현대영화에 교과서로 쓸 수 있는 걸 꼽는다면, 반드시 유 감독이 만든 몇 편도 들어갈 거요.”

    그리고 다시 책 출간과 관련된 업무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새 칸막이 저편 자기 자리로 돌아간 노 부장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이 선생님, 전화예요. 벌써 두 사람 모두 이 아래 다방에 와 있대요.”


    4.

    그가 다방으로 들어서자 둘씩 앉아 마주 보게 놓인 소파 중에 다방 창문을 뒤로하는 쪽을 차지하고 앉았던 두 사람이 손을 들어 자기들이 그를 찾아온 사람임을 알렸다. 손위라고 하지만 많아야 대여섯 살 차일 텐데, 그가 다가가도 둘 모두 일어나는 시늉조차 없이 손으로 맞은편 자리를 권하는 품이 무슨 부서나 조직에서 사람을 많이 거느려본 이력 같은 걸 느끼게 했다.

    그가 갑자기 그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민감해지며 자신의 위치를 어디쯤 둘까를 궁리하는데 한쪽의 낯익은 얼굴이 앉은 채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김도균 씨였다. 진외가로 열촌 안에 드는 인척 형뻘인데, 짧은 대학 시절에 집안인 지우 형과 함께 재경(在京) 향촌 모임에서 더러 본 적이 있다.

    “만나려니 이상한 자리에서 다 만나네. 오랜만일세.”

    그가 그러면서 빙그레 웃듯 미소 지으며 내미는 김도균 씨의 손을 자기 두 손으로 공손하게 움켜잡으며 받았다.

    “아, 예.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우 형하고 함께 만나 뵈었던 게 벌써 10년이 다 돼가는군요.”

    유서 깊은 가문이 주는 선입관일까, 그를 보며 먼저 떠올린다는 게 영남관찰사 하기보다는 그 집안 종손 노릇이 낫다는 말이 있을 만큼 대단했던 가문과 지은 지 400년이 넘어도 아직 번듯한 아흔아홉 칸 종가라는 게 스스로도 엉뚱했다.

    “나는 늘 자네가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는데, 그래, 작가가 되었군. 우리 외손 가운데는 아주 신종 직업이네.”

    도균 씨가 다시 빙긋이 웃으면서 그렇게 말해놓고 손을 놓으며 곁에 앉은 사람에게 말했다.

    “어이 동관이, 서로 인사하게. 자네가 만나고 싶어 하던 작가 이불휴네.”

    “채동관입니다.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채동관이 그제야 억지로 일어나는 것처럼 엉거주춤 엉덩이만 약간 뒤로 빼며 손을 내밀었다. 그가 채동관의 손을 받으며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제야 채동관도 겨우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며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 이 채 선생은 지우하고 6·3사태 이후로 함께 활동해온 분이네. 지금은 잠시 재야 활동에서 비켜나 출판사를 하고 있네. 들어보았나? ‘동녘별’이라고.”

    “예 들어본 것도 같습니다만.”

    “하기는 요즘같이 험한 시대에는 출판 같은 게 훨씬 더 효율적인 투쟁의 길일지도 모르겠다마는.”

    그래놓고 도균 씨는 그 지방 사람들이 흔히 하듯 양쪽 대소가를 대상으로 하는 의례적인 안부로 들어갔다. 그 맹렬했던 6·3사태 지도부를 떨쳐 울리던 그 이름이나 그 뒤 10여 년에 걸친 재야 활동 이력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응대였다. 그가 좀 뜻밖이란 기분으로 도균 씨의 말에 대답하고 있는 사이에 다방 아가씨가 차 주문을 받아가고, 이어 커피가 나왔다.

    “그런데 일이 있으시면 절 그리로 부르시면 되지 어떻게 여기까지 걸음을 하셨습니까?”

    그새 모두의 커피 잔이 비었는데도, 재종고모가 되는지 삼종고모가 되는지 하는 인척의 의례에 따라 이미 돌아가신 지 20년이 훨씬 넘은 할머니의 ‘군군자(裙君子·치마 두른 군자)’ 추억에 매달려 있는 도균 씨의 턱없는 느긋함을 참지 못한 그가 그렇게 말머리를 돌려보았다. 그제야 도균 씨도 자신의 대책 없는 태평스러움을 일거에 지워버리려는 듯 본론을 서둘렀다.

    “실은 지우 때문에 자네를 불렀다. 저기 채 형도 지우 소개로 왔고.”

    “지우 형이 왜요?”

    “지우 형이 왜요, 라니? 그럼 자네 아직 그거 모르나?”

    “그거라니요?”

    “남민전(南民戰) 말이다. 거 왜, 구자춘이가 이달 초에 거창하게 발표한 거.”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만, 그게 왜요?”

    그래놓고 나니 퍼뜩 떠오르는 게 있어 급하게 한 달 전 지우 형을 만났을 때 기억을 급하게 되살려보았다. 그러나 무얼 꿰맞춰보기도 전에 도균 씨가 물었다.

    “자네 지난달에 지우하고 영현이 만나고 갔다며? 그때 그 친구들이 뭐라 하지 않던가?”

    “그분들 그때 두 분 다 문학 언저리에 계신 것 같던데요. 지우 형은 이철민이란 이름으로 연극 평론을 하고 있다 그랬고, 영현 선배는 벌써 여러 해 전에 문학평론으로 정식 등단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직 지우 형 글이 실린 잡지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때 채동관이란 사람이 그를 빤히 보며 물었다.

    “그거 말고 지우나 영현이가 복무에 관한 얘기를 하지는 않던가요?”

    “복무?”

    “이 시대의 문학이 무엇에 복무해야 하는지. 물론 우리 모두에게 공동선이어야 하겠지만 그 공동선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제야 그에게도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민중, 민족 뭐 그런 거 말입니까? 인민이란 말을 쓸 수 없어 만들어낸 애매한 조어(造語). 아니면 우리 세기 안에 용도 폐기될지도 모르는 낡고 닳은 피투성이 개념….”

    그는 새초롬해지는 채동관의 눈길 때문에 공연히 심사가 나 마음에도 없는 빈정거림으로 그날 그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제기하던 문제를 한껏 비틀었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도균 씨가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 나이는 많아도 금년에 나온 신출내기 소설가인 줄 알았더니, 벌써 많이 뒤틀려 있구먼, 왜 창비(創批) 아이들이 벌써부터 집적거리던가. 자네 형편 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 그리 외로 꼬는 건 아닐세. 더구나 지금 우리는 지우를 걱정해 여기 모인 거야. 채 형 말을 너무 껴듣지 말게.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뭔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사실 우리가 어디에 복무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는 요즘 새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10년 전 제가 글이나 한번 써볼까 해서 학내 문학 서클에 처음 기웃거리던 날부터 제기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고 문학 서클의 날쌘 선배들은 루카치도 힐금거렸지요. 선배님 물음과 직접 관계있는 얘기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런데 지우 형은 어떻게 된 겁니까? 달포 전에 만나 저녁 잘 먹고 헤어졌는데.”

    그러자 갑자기 김도균 씨의 얼굴이 굳고 어두워졌다.

    “정말로 전혀 모른단 말이지…. 그런데 지우가 아무래도 그 사건으로 달려 간 것 같애. 벌써 한 달 가까이 아무도 간 곳을 몰라.”
    “그럼 남민전? 에이. 설마 지우 형이 거기까지. 내가 알기로 형은 농촌 활동으로 시작해  주로 운동권 외곽 단체에서 독불장군으로 뛰었다고 들었는데요. 내무부 장관 발표 어디에도 지우 형님 비슷한 이름은 없고.”

    그러는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우 형과의 의미 있는 첫 만남부터 마지막으로 들은 후문과 추측까지 한 끝에 이어진 영화 필름처럼 재빨리 비쳤다 사라졌다.


    지우 형은 그의 윗대 조상과 17대 500년 전에 헤어진 형제의 자손으로 항렬로는 그가 둘이나 높아 조항(祖行)이 되고 촌수로는 32촌이 되는 먼 족친이었다. 그러나 십 리도 안 되는 이웃 마을에 살며 가까운 문중처럼 지내다보니 어려서부터 대강이나마 서로 알고 지냈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지우 형을 특별하게 기억하게 된 것은 어릴 적 우연히 형이 읽던 책 몇 권을 빌려보게 되면서부터였다.

    그중에 ‘백만 인의 웅변’이란 책이 한 권 있어 대강 훑어보고 나니 뒷 표지 앞 흰 간지에 소장자의 호와 이름이 한자로 적혀 있었다. 파란(波瀾) 이지우(李志宇). 그때 열세 살의 그에게는 아마도 지우 형 스스로 지은 듯한 그 호가 좀 엉뚱해 보였던 듯싶다. 그래서 힘들여 옥편에서 찾아보니 이번에는 그 별난 뜻이 그 호를 잊을 수 없게 했다. 곁들여 쓰여 있는 날짜로는 지우 형이 그 책을 가지게 된 해가 1960년 어느 날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겨우 고등학교 1학년, 열여섯 살의 지우 형은 무슨 생각으로 파란을, 거친 물결 또는 어수선하게 이어지는 어려움이나 시련을, 자호(自號)했을까.

    그러다가 지우 형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열네 살 때 마을 대표로 참가한 4H 경진대회에서였다. 그해 여름방학 고향 군(郡)으로 들어온 대학생 봉사단체들의 주도로 군내 4H경진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지우 형은 군소재지 고등학교 3학년으로 군 4H연합 총무였지만, 도내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한 적이 있어선지 그 경진대회 개회식 사회를 보았다. 겨우 열네 살 산골 고등공민학교 학생인데다 시답잖은 품목을 들고 작은 시골 동네 대표로 참가한 그에게는 그때 지우 형의 그런 위치가 거의 눈부실 지경이었다.

    그다음은 이태 뒤 겨우 검정고시를 통과한 그가 두 번째로 서울 길에 올라 고학을 한답시고 야간부 고등학교를 몇 달 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 다시 만났다. 그해 6월 초순 어느 날인가 광화문에서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한창일 때였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보니 지우 형이 멀리서도 눈에 띄는 삼베 바지저고리를 입고 대학생 시위대 행렬 선두에 서 있었다. 땀에 전 삼베 적삼 왼쪽 가슴께에 무슨 투쟁위원횐가, 저지위원횐가 하는 소속을 알리는 길고 좁다란 리본과 한일회담 결사 저지인지, 반대인지 하는 구호를 적은 리본을  두 개 나란히 안전핀으로 꽂고, 시위대 앞장에 선 지우 형을 그는 진즉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때는 곧 계엄군이라도 덮칠 듯한 긴박한 자리라 서로 알은체하지도 못하고 헤어졌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지우형도 그를 보았다고 한다.

    그 뒤 그가 대학을 갔을 때 지우 형은 이미 대학에서 제적되어 군대에 가고 없었고, 제대 후에 다시 변두리 대학에 옮겨 졸업한 지우 형이 어렵게 반체제 운동가의 길을 가고 있을 때는 그도 대학을 중퇴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때라 여러 해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파조(派祖)에 고향까지 같이하는 혈연적 지리적 인연이 깔려서인지, 아니면 스쳐 지나가면서 한 몇 번의 조우가 남긴 어떤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그 뒤로 만나지 못한 몇 년 동안에도 근황은 늘 듣고 있었다.

    그가 들은 근황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것으로는 벽제 일본인 위령탑 파손 사건이 있다. 조선 땅에서 죽은 일본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어느 얼빠진 관리가 경기도 벽제에 세워준 일본인 위령탑을 심하게 두드려 부수어버린 사건인데, 그가 늦은 제대 뒤에 만난 참여파 문인 하나가 다분히 과장되고 희화화된 그 전말을 전해주었다. 그때 지우 형은 트럭 한 대에 이래저래 모인 행동대 여남은 명과 소주 한 궤짝과 곡괭이 망치 끌 같은 철거 연장 한 가마니를 싣고 그 위령탑에 가서 하루 종일 그 소주를 마시며 그 연장들로 그 위령탑을 뿌리까지 때려 부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한두 달 뒤에 일본인들이 그 파손된 위령탑을 본국으로 옮겨 갔다는 신문 속보가 난 걸 보면 뿌리까지 부숴버렸다는 그 전문은 과장이 지나치게 심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다시 여러 해 만에 지우 형을 직접 만나게 된 게 바로 달포 전이었다. 어떤 문학 행사장에서 만난 고향 이웃 군 출신의 함영현이라는 소장 평론가가 자기소개와 함께 지우 형과의 교분을 앞세우며 셋이 따로 한번 만나기를 원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네 살의 나이 차이에다 오래 서로 알고 지나면서도 말없는 봉별(逢別)만 나누어온 터라, 서른이 넘어 정색을 하고 마주 앉아보니 좀 서먹했다. 그러나 서로 전해 들어온 대로 근황을 묻고, 지난 일을 되살려보는 사이에 그 서먹함은 이내 사라졌다. 그래서 대화가 활발하게 진전되던 중에 있었던 일이 조금 전 복무와 관련된 주제였다. 아직도 삼무자(三無子)로, 아비도 없고 이념도 없고 스승도 없이, 세상 밖에 남아 있고 싶어 하는 뻣뻣한 자의식을 건든 탓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의 리그에 끼어들 만큼 재활치료가 되어 있지 않다.

    그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무언가 두 사람만의 이야기를 주고받던 김도균 씨와 채동관이 문득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살폈다.

    “그런데 말이야, 이불휴 작가. 그간 여기저기서 몇 번 보기는 해도 속 깊은 얘기는 나누어보지 못해 그런데, 뭐 하나 물어보자.”

    도균 씨가 무엇 때문인지 일부러 지은 것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둘이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예, 무슨 일인데요?”

    “자네는 의식 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고, 또 지방 신문사라도 결기 있는 신문사 기자라고 들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 중에 교훈작자(敎訓作者) 형이 많고, 또 그 사람들은 잘 감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편 가르기에 냉담하다고 한다. 방금 여기 채동관 씨의 말에 따르면, 자네는 바로 그런 교훈작자 형이거나 타고난 정치적 허무주의자일 거라고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무심해 보여도 궁금해하는 이맛살의 주름은 제대로 그리며 그가 물었다. 그런 그의 말이 이상하게도 엄중하게 들려 그가 절로 겸손해졌다. 그럴 때 흔히 빠지기 쉬운 감정의 과장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도균 씨의 말을 받았다.

    “어떤 점이 저를 그렇게 보시게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자네가 실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모르겠다니까 구체적으로 말해보겠네. 우리는 이달 들어 내무부 장관이 두 번이나 직접 발표한 중대 시국 사건 가운데 하나를 얘기했고, 차차 유신정권의 신민당 총재 제명과 그에 따른 근래의 더 중대한 사태를 얘기하기 위해 자네의 관점이나 입지를 탐색하고자 했네. 그런데 자네는 그런 우리 물음에 별로 대답할 기분이 아닌 것 같군.”

    “아 그거였군요. 그거라면 바로 말씀드리지요. 비록 하루 이틀 사회면 톱으로 넘어갔지만 부마사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큰 변란, 혹은 그 전조 같습니다. 아마도 20년 가까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 우세로 진행되어온 지금까지의 단식(單式) 게임은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형태의 복잡한 리그전으로 재편되겠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 리그전이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그 대전표에 편성되어 있지 않거니와, 끼워준다 해도 전혀 끼고 싶지 않습니다.”

    그 뒤 얘기는 좀 더 이어졌으나 사실은 이미 단절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가 몇 마디 겉돌 듯이 이어지던 대화를 도균 씨가 다시 나서서 어렵게 한 매듭 맺어주었다.

    “그래도 이왕 우리가 만났으니 말은 해봐야겠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다 실없고, 자네한테는 지우 얘기나 좀 하자. 여기 이 채동관 씨, 출판한다는 얘기는 이미 했다. 그런데 그 출판이 반드시 영리를 위한 것은 아니고, 수익금의 많은 부분은 긴급조치, 특히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된 사람들의 가족을 돕는 기금으로 쓰여왔다. 이번 사건은 보아하니 긴급조치가 따로 필요 없는 시국사범이 될 것이고, 처리도 인혁당(人革黨) 못지않게 가혹할 것이다. 이번 이 일까지 ‘그들의 리그’로 치부하지 말고 지우 한번 도와줘라. 인기 있는 책 한 권이면 지금도 장마당에 나앉은 지우 안사람과 어린 것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원래 받을 만큼의 인세는 따로 자네에게 나오고.”


    5.

    서울로 돌아가는 먼 길에는 언제나 술이 흔했다. 나중에 식구대로 모두 서울로 옮겨 앉아 자리 잡을 때까지는 ‘돌아가는 길’이 되는 상경길은, 하룻 밤을 묵게 되는 날이면 언제나 술판으로 끝을 보았다. 그날 밤도 그랬다. 그날 상경 일정은 밤 12시 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가게 짜여 있었는데, 그래도 끝은 술판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단지 몸만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10년 전에 떠나온 그 세월 속으로, 거기서 헤어진 벗들이나 남겨두고 떠나와 그리워해온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며, 10년 세월 속에 유폐된 청춘을 찾아가는 것이며, 그 꿈과 눈물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날은 서울에 두고 온 옛 벗들 가운데서 그와 같이 일찍 고향을 떠나 번성한 도시와 근엄한 성관에서 꿈을 찾고 유복한 삶을 꾸리도록 내몰린 아이들과 취하는 데 바쳐졌다. 예전에 잠시 살았던 작은 시골 읍에서 같이 초등학교를 나왔으나, 거역 못할 부모의 기대와 자신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희망에 등 떼밀려, 중학교부터 도시로 나와 일류에서 일류로 학력을 쌓아가다가, 마침내 서울의 특정한 대학에서 모두 만나 젊은 날의 한때를 유쾌하게 취했던 그 아이들. 이제 어느새 성년이 되어 하나는 지방 도시에 판사로 내려가 있다가 그를 만나려고 그 금요일에 서둘러 올라왔고, 하나는 대기업의 투자 담당이 되어 소아시아 쪽에 전자제품 공장을 세우고 한 3년 투자 원금을 회수한 뒤 집권 군부 실세의 조카에게 받을 값 다 받고도 인심 쓰듯 그 공장을 넘긴 친구가 이번에는 그룹 로비를 담당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기 전에 그를 보려고 왔다.

    그들 셋이 허름한 룸살롱에서 아가씨 하나를 데리고 퍼마시는데, 공대에 갔다가 법대로 옮기고 법대에 가서는 난데없이 외무고시를 쳐 멀리 비엔나(빈) 근처에 영사로 있는 친구는 안주로 삼고, 역시 대기업 기획실에 있으면서 외국 큰손 바이어와의 미팅에 붙들려 빠져나오지 못하는 친구는 틈틈이 전화로 약을 올리며, 저녁 8시부터 11시 반까지 위스키를 세 병이나 마셨다. 그들에게도 그 10월의 어둡고 무거우면서도 스산한 분위기가 전혀 감지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도 그걸 의식 밖으로 끌어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1시 반이 턱에 차서야 그 둘과 헤어진 그는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뒤 어디가 어딘지 모를 길로 12시 20분 대구행 무궁화호의 예매된 좌석에 앉았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기차가 이미 동대구역 구내에 들어온 뒤였다. 그날따라 승무원들이 번갈아 객실을 드나들며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손님들을 깨웠다. 성말라 보이는 옆자리의 중년 승객이 가방을 챙기며 투덜거릴 정도였다.

    “오늘따라 사람을 와 이리 깝치노? 여객전무까지 잠도 안 자고.”

    그러나 그는 평상시와 크게 다른 걸 느끼지 못하고 일어나 승반대에서 작은 손가방을 내렸다. 다행히도 잠에서 깨어나기가 어렵지 않았듯이 숙취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대기업 자금 담당이 제대로 값을 물어주어 그랬는지 거기서 위스키 상표가 고급으로 잘 알려졌던 게 얼핏 기억났다.

    그런데 기차가 동대구역에 정지해 통로를 걸어 나오며 보니 플랫폼 쪽이 어딘가 이상했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나와 있는 것 같았고, 어딘가 움직임도 평소보다 더 분주한 것 같았다. 그 바람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해 집표구(集票口) 쪽으로 갔다. 벌써 여남은 명이 줄지어 서 있는 집표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락가락하는 아이들과 그들이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호외요, 호외!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줄을 선 사람들이 움찔움찔하는 듯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줄을 빠져나가 호외부터 받아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역구내를 빠져나오면서야 호외를 외치는 아이들에게서 사진 같은 것은 없고 시커먼 1호 활자만 외쳐대고 있는 것 같은 호외지(號外紙)를 받아 들었다.

    ‘대통령 각하 유고(有故) – 27일 04시를 기해 계엄령 발동.’

    그는 3단 기사도 안 되는 그 호외 기사를 읽어보고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새벽 기차에서 내려 잠이 덜 깨서인지 호외를 읽고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실은 그도 그랬다. 무언가 별난 감회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난감할 만큼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마비와 둔감에 빠져 평소에 허세 부리듯 써온 혼잣말을 뜻 없이 되뇔 뿐이었다. 이제 새로운, 수많은 ‘그들의 리그’가 벌어지겠구나. 한 배에서 난 개새끼들의….〈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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