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호

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高麗의 거란 견제 덕에 宋, 통일 대업 이뤄내다

  • 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입력2017-10-1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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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원할 것 같던 제국 당(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안·사의 난은 내란이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전이었다.
    • 발해와 거란이 호시탐탐 당의 빈틈을 노렸으며
    • 신라는 당이 혼란기에 접어들자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쿠틀룩 빌게를 수령으로 한 몽골고원의 위구르족은 745년 바스밀, 카를룩 등 여타 부족과 함께 아쉬나 부족의 후돌궐을 멸망시키고 위구르제국을 세웠다. 위구르제국은 동으로는 다링허 유역, 서로는 카스피 해까지를 영토로 해 840년까지 번성했다. 747년 쿠틀룩 빌게가 죽은 후 모옌초르가 승계했는데, 모옌초르 통치기인 751년 고선지의 당나라군과 사라센군 간 탈라스 전투가 벌어졌다.



    唐의 몰락

    위구르제국은 안·사의 난(755~763) 때 당나라를 지원했으며, 당나라가 약화된 틈을 타 간쑤(甘肅)와 신장(新疆)으로 진출했다. 840년 기근과 내란으로 약화된 위구르제국은 같은 돌궐계 키르기스족에게 정복당했다. 간쑤와 신장 일대로 대거 이주한 위구르인들은 농경민화했다. 오늘날 신장-위구르 지역엔 1000만 명에 달하는 이슬람계 위구르인이 거주하며 중국 중앙정부와 대립한다.

    당(唐)은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해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가 통치했다. 당의 추락을 재촉한 안·사의 난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자.

    755년 11월 중앙아시아 부하라(安國) 출신을 선조로 둔 범양(허베이)-평로(랴오시)-하동(산시·山西) 절도사 안록산(安祿山)은 부장(部長) 사사명(史思明)과 함께 오늘날의 베이징인 위양(漁陽)에서 반기를 들었다. 안록산의 병력은 당나라 병력의 3분의 1인 15만 명에 달했다. 안록산은 동라돌궐(5대 10국 시대 때 주인공이 되는 사타돌궐이 속한 부족), 거란·해(奚), 실위(室韋) 등 북방민족을 포함한 15만 대군을 이끌고 12월 초 황허를 건너 12월 중순 장안으로 진군하다가 곽자의(郭子儀)가 이끄는 돌궐군 주축 삭방군(朔方軍)에 패하자 일단 위양으로 후퇴했다.



    이즈음 발해는 안록산이 당나라 공격에 실패할 경우 자국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수도를 북만주 상경(上京)으로 옮겼다. 발해의 우려와 달리 756년 초 다시 서쪽으로 진군한 안록산군은 농우·하서 절도사 가서한(哥舒翰)이 이끄는 당나라군을 장안 동쪽 관문 동관(潼關) 밖에서 대파했다. 안록산군이 장안에 접근해오자 현종은 쓰촨으로 파천했다.

    현종을 대신해 아들 숙종(肅宗)이 즉위한 후인 756년 8월 당나라는 위구르군의 지원을 받아들였다. 757년에 들어서면서 안록산군의 상황도 급변했다. 안록산의 큰아들 안경서(安慶緖)는 이복동생이 후계자로 지명될 가능성이 커지자 1월 안록산을 독살하고 황제에 등극했다. 안경서군은 그해 4월 당나라군을 격파했다.


    안·사의 난에 개입한 위구르

    위구르의 카를룩 가한은 아들 타르두슈 빌게에게 4만 기(騎)의 말을 주어 당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757년 9월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은 안경서군을 공격해 6만 명을 참수(斬首)하는 대승을 거두고 해족(奚族) 군단이 지키던 장안을 빼앗았다.

    장안과 낙양을 잃은 안경서는 허베이의 업(鄴)으로 후퇴했다. 758년 9월 곽자의가 지휘하는 20만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이 업으로 진격해오자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중앙아시아 샤흐리 샤브즈(史國) 출신 사사명은 이때 13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어 안경서보다 세력이 컸다. 사사명은 안경서를 위기에서 구해줬으나 이듬해 3월 안경서로부터 양위를 받은 다음 그를 살해했다. 불과 2년 후인 761년 3월 사사명도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피살돼 사조의가 황제로 즉위했다.

    762년 4월 당나라 숙종이 환관에게 시해되고 아들 이숙이 대종(代宗)으로 즉위했다. 대종은 토벌군을 일으키면서 위구르를 설득하고자 사신을 보냈다. 뵈귀 가한(타르두슈 빌게)이 사조의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히려 당나라를 공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대종은 발해에도 사신을 보내 발해왕을 왕(王)으로 정식 인정하는 등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당나라는 우여곡절 끝에 뵈귀 가한을 설득해 동맹을 다시 맺는 데 성공했으며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은 사조의군을 대파했다.

    그해 10월 다시 낙양에 입성한 위구르군은 약탈과 방화, 살육을 자행했다. 763년 1월 사조의는 달아나다가 안록산의 부하이던 이회선에게 죽임을 당했다. 안록산의 난은 당나라의 내전인 동시에 위구르, 돌궐, 거란·해, 발해, 토번 등이 관련된 국제전이기도 했다. 당나라가 안·사의 난 후유증에 시달리던 763년 10월 간쑤 방면에서 남진해온 토번군은 장안을 약 보름간 점령했다가 후퇴했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 시라무렌 강-다링허 유역의 거란 세력이 급성장했다. 안·사의 난 이후 덕종(德宗), 헌종(獻宗), 무종(武宗), 선종(宣宗) 등은 당나라의 급속한 쇠락을 막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덕종은 균전제에 기초한 조용조(租庸調)를 대신해 1년 2회 화폐로 세금을 걷는 양세법(兩稅法)을 도입하면서 재정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헌종은 819년 고구려계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 이사도(李師道)의 난을 평정한 후 절도사의 권한을 대폭 줄이는 등 군사력을 재건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발해·거란, 唐의 빈틈 노리다

    안·사의 난 와중이던 761년 이사도의 조부 이회옥(李懷玉)은 반란군의 공세를 피해 고종사촌 후희일과 함께 2만여 병력을 이끌고 다링허 유역(평로)에서 보하이(渤海)를 건너 산둥반도에 상륙해 10여 개 주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당 조정은 이회옥(당 조정이 ‘정기’라는 이름을 하사)을 평로·치청(랴오시·산둥)절도사에 임명했다.

    이정기는 산둥(齊)의 경제·군사·외교권을 장악했으며 점차 반당(反唐) 노선을 걸었다. 이정기는 777년 강남과 화북을 연결하는 요충지 쉬저우(徐州)를 포함한 5개 주를 추가 점령해 제나라(치청)를 최강 번진으로 만들었다. 아들 이납(李納)을 거쳐 806년 손자 이사도가 뒤를 이었다.

    헌종은 투항해 온 번진들을 앞세워 815년 12월 이사도의 제나라 공격에 나섰다. 이사도는 당나라가 군수물자를 저장해놓은 하음창을 불사르는 등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장화이(江淮)와 허베이 번진 거의 전부가 당 조정에 가담하자 이사도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협공을 받은 이사도는 819년 위박(魏博) 번진 전홍정과의 산둥성 서부 운주·동아 전투에서 대패했으며 부하 유오(劉悟)가 이사도를 죽이고 투항했다. 이로써 765~819년 55년간이나 지속되던 이정기 일가의 제나라는 멸망했다.

    덕종, 헌종, 무종 등의 노력에도 당나라는 무조(武照·측천무후) 초기나 현종 전반기와 같은 성세(盛世)를 회복할 수 없었다. 토번, 위구르, 거란, 남조, 발해 같은 인접국이 기울어가는 당나라의 빈틈을 노렸다.

    이렇듯 극도의 위기상황임에도 당에서는 우승유가 대표하는 신진 관료와 이덕유가 대표하는 보수 관료 간 대립인 우·이(牛·李) 당쟁이 나날이 격화됐다. 40년간 계속된 우·이 당쟁은 환관의 정권 장악을 야기했다. 현종 때부터 영향력을 키워온 환관은 금군(禁軍)을 배경으로 황제를 옹립하기도 하고 폐립·독살하기도 할 만큼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황소의 봉기

    새롭게 경제 중심지가 된 화이허-창장 유역의 장화이와 허베이를 연결하는 쉬저우의 번진들에서 군란(軍亂)이 종종 발생했다. 868년 남조와의 국경지대인 구이저우(貴州)에서 시작돼 화이허 유역까지 확산된 방훈(龐勛)의 난은 돌궐 사타부(沙陀部)와 설필부(契苾部)의 지원을 받아 겨우 진압됐다.

    방훈의 난이 끝난 지 불과 7년 뒤인 875년 산둥 출신 황소(黃巢)는 농민을 선동해 반당(反唐) 봉기를 일으켰다. 소금과 차(茶) 밀매업자가 반란군의 핵심 역할을 했다. 당나라는 재정을 재건하고자 소금과 차에 대한 전매제도를 실시했으며, 이는 소금과 차 상인들을 파산으로 몰고 갔다.

    황소는 북벌을 단행해 880년 낙양과 장안을 점령하고 제(齊)를 세웠다. 황소는 기품 있는 인물이었으나 잡다한 배경을 가진 60만 대군을 통제할 능력은 갖지 못했다. 명나라 말기 순(順)을 세운 이자성과 같이 황소에게는 특히 인재가 부족했다. 황소가 통제력을 잃어감에 따라 할거하던 절도사들의 반격이 심해졌다. 황소는 부장 주온(朱溫)의 배반과 사타돌궐족 출신 안문절도사(雁門節度使) 이극용(李克用), 티베트계 탕구트족(黨項族) 수장 탁발사공(拓跋思恭) 등의 연합 공격을 받고 점령한 지 2년 4개월 만인 883년 4월 장안을 빼앗겼다. 황소는 결국 884년 고향인 산둥의 태산 인근 낭호산(狼虎山)에서 자결했다.

    황소의 난으로 절도사들의 독립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머슴 출신 주온은 경쟁자이던 병졸 출신 봉상절도사 이무정(李茂貞)과 사타돌궐족 수장 이극용을 제압한 다음인 907년 소선제(昭宣帝)로부터 선양받아 카이펑(開封)을 수도로 양(梁)나라를 세웠다.



    태조 왕건과 해상세력의 연계

    당나라에 밀착해 발해를 견제하던 신라도 당이 혼란기에 접어든 9세기 초 이후 위기에 봉착했다. 왕위에서 밀려난 무열왕계 김헌창(金憲昌)이 웅주(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중앙군에 진압됐다. 왕위 쟁탈전은 더 격화돼 민애왕이 시해된 희강왕을 이어 즉위하고, 신무왕은 민애왕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다.

    왕권 불안정은 신라의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군진(軍鎭)을 근거로 한 해상세력이 등장했다. 군진은 해적이 발호(跋扈)하면서 이에 대처하고자 설치한 것으로 청해진(완도), 당성진(남양), 혈구진(강화), 패강진(황해도 평산)이 대표적이다. 군진들은 당나라 번진들 및 왜, 발해 등과의 교역을 통해 부(富)와 세력을 함께 키웠다.

    828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장보고는 1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청해진을 중심으로 서해와 동중국해 일대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중앙에 진출해 민애왕을 시해하고 신무왕을 즉위시키는 등 군사력을 과시했다.

    중앙권력이 계속 약화되는 상황에서 지방군벌 진훤(甄萱·견훤)은 한반도 서남부에 후백제를 세웠으며 신라 방계왕족 출신 김궁예(金弓裔)는 한반도 중부에 후고구려를 세웠다. 후백제는 강남의 오월, 남당과 통교했으며 후고구려는 후주(後周) 등 중원 국가들과 통교했다.

    918년 김궁예의 부장 왕건(王建)이 김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고구려계 해상세력으로 추정되는 왕건 일족은 혈구진과 패강진을 포함한 해상세력과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었다. 왕건이 후백제 배후지 나주를 점령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혈구진, 패강진 세력은 이렇듯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경주 주변으로 영역이 축소된 신라의 경순왕은 935년 고려에 투항했다. 고려는 936년 진훤과 맏아들 진신검(甄神劍) 간 갈등으로 내란 상태에 처한 후백제마저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영역으로 하는 발해가 쇠약한 상태에서도 강력해진 거란의 동진을 일정 기간 막아줬기 때문이다.


    五代十國

    주전충(朱全忠)이 당 왕실을 무너뜨린 후 중국 최후의 대분열기인 5대 10국 시대가 열린다. 주온에서 개명한 주전충이 세운 후량은 화북을 지배했으나 중국 350주 가운데 5분의 1인 70주밖에 지배하지 못하는 반쪽 정권이었다.

    4세기 초 서진(西晉) 말기와 같이 사해(四海)가 삼발 솥 안의 물처럼 끓어올랐다. 거란은 랴오허 유역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몽골고원과 만주, 신장을 통합했으며 중원도 노렸다. 사타돌궐족 이극용의 아들 후당(後唐)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은 주전충의 후량에 이어 이무정이 산시(陝西)성 서부를 중심으로 세운 기(岐)와 왕건(王建)이 쓰촨에 세운 전촉(前蜀)을 멸했다. 후당(사타돌궐)은 석경당의 후진(사타돌궐)에, 후진은 유지원의 후한(사타돌궐)에, 후한은 곽위(郭威)가 세운 후주(한족)에 멸망했다.

    고려 광종 때 과거제 도입에 공을 세운 쌍기(雙冀)가 바로 후주 출신이다. 후당, 후진, 후한 등 사타돌궐 왕조들이 황제 직할 금군(禁軍)을 한족 출신 위주로 충원하다가 마침내 한족에 의해 축출돼 한족 왕조 후주(後周)가 탄생한 것이다.

    5대(907~979) 왕조는 황허 유역 카이펑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10국(國)은 지방에서 힘을 길러 중원의 사슴을 노렸다(逐鹿·축록·사슴을 쫓는다는 뜻으로 정권 또는 지위를 얻기 위한 다툼을 이르는 말).

    10국은 양저우의 오(吳), 난징의 남당(南唐), 청두의 전촉(前蜀)과 후촉(後蜀), 광저우의 남한(南漢), 타이위안의 북한(北漢), 창사(長沙)의 초(楚), 항저우의 오월(吳越), 푸저우의 민(閩), 장링의 남평(南平) 등으로 남당이 오를 계승하고, 전촉이 망하고 후촉이 세워진 것에서 알 수 있듯 같은 시기 존재한 것은 아니다. 지리적 측면에서 볼 때 5대 왕조는 황허 유역, 10국 중 북한은 산시(山西)성 중북부, 전촉과 후촉은 창장 중상류, 남평과 초는 창장 중류, 오와 남당은 창장 하류, 오월과 민, 남한은 각기 연안(沿岸)인 저장, 푸젠, 광둥에 위치했다.



    ‘마지막 황제’ 이욱의 詞

    10국 중 가장 강성한 나라는 오(吳)-남당(南唐) 정권이었다. 남당은 사가(史家)들이 붙인 이름으로 스스로 당나라의 후계자라면서 당(唐)을 자처했다. 남당은 수(隋)나라 때 이래 경제 중심지인 장화이를 영토로 삼았기에 경제력은 막강했으나 군사력은 취약했다. 남당은 945년 민, 951년 초를 병합하는 등 한때 강남을 통일하는 기세를 보였으나 955년부터 후주 세종 시영(柴榮)이 자주 남쪽 정벌에 나서 수세에 몰렸다. 시영은 종종 친정(親征·임금이 몸소 나아가 정벌)해 958년에는 양저우까지 진격해왔다. 전쟁에 패한 남당은 창장 이북 14주를 후주에 할양할 수밖에 없었다. 남당의 역대 군주들은 지나치게 문약(文弱)했다. 남당의 마지막 황제 이욱은 아버지 이경과 함께 사(詞)의 명인이었다. 이욱은 975년 송나라군의 포로가 돼 카이펑으로 끌려가 유폐당한 뒤 고국을 그리워하는 우미인(虞美人·YuMeiRen)이라는 제목의 사를 지었다. 우미인은 현재 중국인이 좋아하는 사의 하나다.

    春花秋月何時了 (봄꽃과 가을 달은 언제 끝날까)
    往事知多少 (눈에 삼삼하니 모두 지난 일이던가)
    小樓昨夜又東風 (작은 누각에는 어젯밤에도 동풍이 불었다)
    故國不堪回首月明中 (고국으로 고개를 돌리니 보이는 건 밝은 달뿐)
    雕欄玉砌應猶在 (아름다운 난간과 옥을 깎아 만든 계단은 그대로 있겠지)
    只是朱顔改 (어이 이리 청춘만 가버렸는가)
    問君能有幾多愁 (묻건대 그대 마음속 수심이 얼마더냐)
    恰似一江春水向東流 (동쪽으로 흘러가는 봄 강물과 같아)


    당나라 말기-5대 시대 간쑤(하서회랑) 통치권은 한족 장씨와 조씨가 차례로 장악했다. 당나라 말기 절도사 장의조(張義朝)는 하서회랑을 점령한 토번 세력을 몰아내고 ‘당나라의 신하’를 자처했다. 장씨에 이어 920년 하서회랑을 장악한 조의금은 장액(張掖)의 위구르 공주와 정략 결혼했다. 조의금은 신장(新彊)의 오아시스 국가 호탄(和田)과의 우호를 위해 딸을 시집보내 호탄왕과도 친인척의 연을 맺었다. 조의금을 계승한 조원충 시대에 조씨 정권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조원충 역시 조의금과 마찬가지로 호탄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조씨 정권은 당구트족 서하가 번성하기 시작한 10세기 말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발해-거란 20年 전쟁

    이런 가운데 후주 세종 시영은 중앙군을 강화하고 지방군을 약화시킴으로써 절도사의 자립성을 줄여나가는 정책을 취했다. 그는 “공취(攻取)의 길은 반드시 용이한 것을 먼저 한다”는 왕박(王朴)의 선이후난(先易後難) 전략에 따라 서쪽으로는 후촉(後蜀)이 점거하던 산시(陝西)의 진주, 봉상을 탈취하고 남쪽으로는 남당을 공격해 창장 이북 14개 주를 확보했다.

    중국이 5대 10국의 난세에 접어들기 직전 다링허-랴오허 유역에서 거란(契丹)이 흥기했다. 거란은 4세기 초 모용선비에게 멸망당한 우문선비 세력이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퉁구스계와 돌궐(투르크)계 부족을 통합해 형성된 민족이다. 거란은 조선(고조선을 말함)과 같은 8조 법금(法禁)을 갖고 있었다. 우리에게 해금(奚琴)을 전해준 해족(奚族)은 거란 계열의 종족으로 내몽골 쯔펑(赤峰) 일대에 거주했다.

    시라무렌 강-다링허 유역의 거란족 수장 야율아보기(872~926)는 907년 거란을 건국하고, 해(奚)와 실위(室韋)를 정벌한 다음 랴오둥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발해와 20년 전쟁에 돌입했다. 야율아보기는 몽골고원에서 키르키스족을 축출했으며 926년 발해를 멸망시켰다. 야율아보기는 거란 문자를 창제하는 등 거란족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도 힘썼다.

    거란의 왕비 부족은 위구르 계통 을실씨(乙室氏)와 발리씨(拔里氏)였다. 을실씨와 발리씨는 스스로를 한나라 승상 소하(蕭何) 가문에 비겨 소씨(蕭氏)라 했다. 고려를 침공한 소손녕과 소배압이 왕비족인 소씨 출신이다.

    야율아보기를 계승한 야율덕광은 936년 석경당을 도와 후당(後唐)을 멸망시키고, 후진(後晋)을 세워줬으며, 그 대가로 베이징 부근 연운 16주를 할양받았다. 그는 석경당의 후계자 석중귀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946년 카이펑을 점령하고 후진을 멸망시켰다.
     
    야율덕광 사후(死後) 거란은 내분에 빠졌다. 유목국가로 남을 것인가. 한화(漢化)의 길을 걸을 것인가. 국가 진로와 황제 자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란 중에 세종과 목종이 살해됐다. 국수파(國粹派)는 ‘거란(契丹)’이라는 국호, 한화파(漢化派)는 ‘요(遼)’라는 한족식(漢族式) 국호를 선호했다. 어느 쪽이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국호가 ‘거란’과 ‘요’를 왔다갔다 했다. 훗날 여진족의 금나라가 13세기 초 몽골의 대공세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지자 랴오허 유역 거란족은 그 틈을 타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몽골에 투항하는 것을 반대한 대요수국 일부 세력이 1216년 압록강을 건너왔다가 1219년 현재의 평안남도 강동성에서 고려군, 몽골군, 동진군(東眞軍)에 포위당한 끝에 5만~6만 명이 생포됐으며, 그중 일부가 원주, 제천, 충주 등으로 집단 이주됐다. 충북 제천 박달재 근처에 거란족 집단촌 거란장(契丹場)의 흔적이 남아 있다.



    宋, 천하 통일 완성하다

    당(唐) 중기 탕구트족은 토번에게 밀려나 동북쪽으로 이동해 간쑤와 산시(陝西) 서북부 지역에 정착했다. 부족장 탁발사공은 황소의 난(875~884) 때 장안 탈환을 지원해 당나라의 절도사로 임명됐으며 이씨(李氏)를 하사받았다. 5대 10국 시대를 거치면서 탕구트는 독립했다.

    송나라 초기 서하와 송은 사타돌궐계 북한(北漢), 요(遼), 토번(吐藩) 등과의 관계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서하는 송나라가 북한(北漢) 수도 진양(타이위안)을 공격했을 때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서하는 이계천 시대에 송나라 일변도에서 벗어나 오르도스와 간쑤, 신장 방면으로 세력을 뻗어온 거란과도 관계를 맺었다. 이계천은 요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여 하국왕(夏國王)에 봉해졌다. 이계천은 요의 후원을 배경으로 토번, 송나라와 자주 싸워 영토를 넓혔다.

    요나라가 서하를 지원한 것은 송나라와의 전쟁 때문이었다. 송나라는 서하에 옆구리를 공격당할까봐 불안을 느꼈다. 1004년 요(遼)와 송(宋)이 ‘전연(澶淵)의 맹(盟)’을 체결하자 토번, 송나라와의 전쟁에 지친 서하는 송나라에 접근했다. 이에 앞선 958년 후주 세종은 창장 이남을 정복하기에 앞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내란 상태이던 거란을 향해 북진했다. 후주군은 연운 16주에 속한 와교관, 익진관 등을 돌파하는 등 진격이 순조로웠다. 이때 갑자기 세종이 발병했으며 카이펑으로 회군했다가 959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조광윤(趙匡胤)은 세종이 사망하기 직전 귀덕(歸德) 절도사 겸 총사령관에 임명되는데, 귀덕은 춘추전국시대 송(宋)나라가 있던 지역이다. 세종을 계승한 것은 7세에 불과한 시종훈(柴宗訓)이었다. 조광윤은 군부의 지지를 받아 시종훈을 밀어내고 송나라를 세웠다. 불과 53년 만에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晋)-후한(後漢)-후주(後周) 다섯 왕조가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당시 거란은 내전 상태이던 까닭에 후주-송 교체기를 이용할 수 없었다.

    송태조(宋太祖) 조광윤은 따뜻하면서도 결기(決氣)가 있는 인물이었다. 조광윤은 현대 중국인이 좋아하는 지도자 중 하나다. 외손자 우문천(宇文闡)을 비롯한 우문씨 황족들을 학살한 수문제 양견과는 달리, 조광윤은 시종훈과 그의 친인척을 극진히 대우했다. 송나라의 시씨 보호는 조광윤 당대뿐만 아니라 북송과 남송 300년간 이어졌다. 이러한 까닭인지 시씨의 후손은 남송 최후에 벌어진 원(元)나라 군대와의 마카오 서쪽 애산도(厓山島) 전투에서 송나라 황실과 운명을 같이했다.

    조광윤은 후주 세종 시영이 깔아놓은 천하 통일의 길을 착실히 걸어갔다. 송나라는 “군사력이 약한 남쪽을 먼저 치고, 군사력이 강한 북쪽은 나중에 친다”는 뜻의 선남후북(先南後北) 전략으로 약한 고리부터 차례로 끊어나가면서 중국을 하나로 묶어냈다. 조광윤은 남평(963), 후촉(965), 남한(971), 남당(975)을 차례로 정벌했다. 조광윤을 계승한 동생 조광의(趙匡義)가 통일 대업을 완성했다. 송나라의 중국 통일은 △거란의 내분 △토번의 약화와 토번-서하 전쟁 △고려의 거란 견제 등 국제 정세가 송나라에 유리하게 전개된 것에 힘입은 바가 크다.




    백범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총영사관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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