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면 봉지면과 큰사발면, 컵라면의 포장 디자인은 1986년 첫 출시 이래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은 더는 설명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다. 2011년까지 신라면의 누적 판매량은 총 210억 봉지. 신라면 길이는 약 20cm인데, 이 210억 봉지를 일렬로 세우면 지구를 아흔여섯 바퀴 돌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 한국인이 먹는 라면 네 봉지 중 한 봉지는 신라면이다(국내시장 점유율 24.5%). 가까운 중국, 일본에서부터 멀게는 사우디아라비아, 나이지리아 등 중동 및 아프리카까지 80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해발 4000m가 넘는 ‘유럽의 지붕’ 스위스 융프라우요흐 전망대 매점에서도 신라면 컵을 판다.
한국에서 출시된 첫 라면은 1963년 9월 삼양식품이 선보인 삼양라면이다. 식량 부족, 특히 쌀 부족이 심각해 혼·분식 장려운동이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1965년 농심(당시 사명은 롯데공업주식회사)도 라면사업에 첫발을 내딛고 다양한 제품을 출시했다. ‘롯데라면’(1965)을 거쳐 코미디언 구봉서와 곽규석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던 광고의 인기에 힘입어 ‘농심라면’(1975)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1978년 사명도 아예 ‘농심’으로 바꿨다.
이후 농심은 ‘사발면’(1981), ‘너구리’(1982), ‘안성탕면’(1983), ‘짜파게티’(1984) 등 매년 히트작을 내놓으면서 국내 라면시장의 성장을 견인해갔다. 그리고 1985년 3월 농심은 삼양식품을 꺾고 점유율 1위 라면업체로 올라섰다.
농심의 신념 중 하나는 ‘라면 맛은 스프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 식문화의 기저에는 탕, 국물이 있다. 라면도 한국인이 즐기는 음식이기에 국물 맛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면은 대부분 밀가루로 만들기 때문에 라면 전체의 맛에 특별한 작용을 하지 않는다. 결국 국물 맛은 스프가 좌우한다.
매운맛 찾아 삼만리
하루 총 380만 봉지의 라면을 생산하는 농심의 구미공장. 국내 생산 신라면의 70%가 이 공장에서 나온다.
농심의 목표는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인 매운 맛’을 찾는 것이었다. 윤성학 농심 홍보팀 차장은 “언뜻 모순돼 보이지만 특별하다는 것은 기존 제품에는 없는 매운맛 라면을 최초로 개발하자는, 보편적이라는 것은 한국인에게 친숙한 매운맛을 구현하자는 뜻이었다”고 설명했다.
개발팀은 전국에서 재배되는 거의 모든 품종의 고추를 사들여 매운맛을 실험했다. ‘얼큰한 소고기장국맛’을 기본으로 삼았기에 고추, 소고기, 마늘 등등을 넣고 끓인 국물을 하루에도 스무 가지씩 만들어 맛을 봤다. 단순히 고춧가루에서 비롯되는 매운맛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하던 때, 개발팀에서 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다대기로 맛을 내보면 어떨까?”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의 농심 본사.
라면 맛이 스프에 있다면 라면의 식감은 면발에 달렸다. ‘안성탕면보다 굵고 너구리보다는 가늘면서 넉넉한 식감과 쫄깃한 질감’을 목표로 실험용 면발을 200여 종류나 만들었다. “하루 평균 세 봉지에 해당하는 양의 라면을 먹어가며 초시계로 시간을 재고 비커와 온도계로 물의 양과 온도를 측정하며 맛을 감별했다.” 신라면 개발에 참여한 한 연구원의 회고다.
총 2년의 시간이 소요된 끝에 1986년 ‘깊은 맛과 매운맛이 조화를 이룬, 얼큰한 감칠맛’을 가진 신라면이 완성됐다. 붉은 고추와 쇠고기가 잘 조화돼 매콤하고 개운한 국물, 당시 경쟁 라면들보다 회분(灰分) 함량이 높은 밀가루를 사용해 쫄깃하고 매끄러운 면발, 표고버섯 건파 마늘 등으로 만든 별첨스프가 독특한 향미를 내는 라면. 당시 농심은 “성공을 장담할 순 없지만 어디에 내놓아도 자신 있는 제품”이라고 자체 평가했다고 한다.
매울 辛자에 얽힌 사연
“매운 라면이니까 辛라면으로 합시다.”
농심의 창업주인 신춘호 당시 사장(현 회장)이 이렇게 말했을 때 경영진은 반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제품 대부분이 ‘농심라면’ ‘김치라면’ 등과 같이 회사 이름이나 재료에서 비롯된 네이밍을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또 한자를 상품명으로 쓴 전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장의 성(姓)인 신(辛)과 辛라면이 음과 한자가 모두 같아 종친회나 소비자에게 비난받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춘호 사장은 단호했다.
“내 성을 팔자는 게 아니라 좋은 제품을 소비자가 잘 알아보도록 하자는 거요. 사소한 일에 연연해 큰일을 그르치지 맙시다.”
신라면의 포장 디자인은 첫 출시됐을 때나 현재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매운 라면’이라는 제품의 속성이 가감 없이 전달되도록 한 점, 매장에 진열됐을 때의 주목 효과를 고려해 매울 ‘辛’자를 붓글씨로 강조해 명확히 노출되도록 한 점, 포장에 옥편을 드러내 한자 브랜드에서 오는 거부감을 최소화한 점 등이 25년이 지난 현재까지 유지돼 브랜드 정체성(identity)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이 모든 게 라면업계에서 처음 시도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면은 상표등록 과정에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식품위생법은 “식품의 상품명 표시는 한글로 하여야 하고 외국어를 병기하고자 할 때는 한글 표시보다 크게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에 농심은 수천 년 동안 한자 문화권에 속해온 우리나라에서 과연 한자를 외국어로 분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한지, 그리고 즉각적인 의미 전달과 이미지 부각을 생명으로 하는 상품명에 한자를 크게 쓸 수 없다는 규정이 합리적인지 등의 반론을 제기했다. 결국 정부에서 농심의 건의를 받아들여 1988년 10월 법 조항을 개정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친 신라면은 1986년 10월 출시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소비자들은 ‘얼큰한 국물맛도 좋고 면도 다른 라면보다 낫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라면은 출시 첫해 석 달 동안 30억 원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렸다. 당시 개당 가격이 200원이니 1500만 개가 팔린 셈이다. 이듬해인 1987년, 매출액이 180억 원을 상회하면서 신라면은 국내 라면시장의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라면이든 과자든 농심의 제품광고는 소박하다. 무슨 상을 받았다거나, 어려운 수출길을 뚫었다거나 하는 자랑거리를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우지 않는다. 이대진 제품마케팅부문장 상무는 “창업 이후 ‘광고가 제품을 앞서서는 안 된다’라는 광고철학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광고 전략이 제품이나 기업 이미지를 소탈하고 친근감 있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농심라면의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가 뿌리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신라면 광고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농심은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이란 카피를 제품을 출시한 지 25년이 지난 현재까지 고수하고 있다. 신라면의 핵심인 매운맛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이 짧고 강렬한 카피는 일관된 메시지가 되었다. 소비자는 신라면 하면 자연스럽게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을 떠올린다. ‘신라면=매운맛’이란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공고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중국 사나이’울리는 신라면
중국의 신라면 광고. 마오쩌둥의 말을 패러디해 ‘매운 것을 먹지 못하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라는 카피를 사용한다.
광고 마지막에 나오는 ‘농심 신~라면’이란 징글(jingle) 역시 25년째 변한 적이 없다. 강부자, 구봉서가 부르던 CM송을 박지성, 이용대가 부를 뿐이다. 농심은 이런 광고전략을 통해 ‘세월은 변하지만 신라면의 맛과 인기는 변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소비자에게 전하고자 한다.
지난해 말 개그맨 이경규가 개발에 참여한 팔도 ‘앵그리꼬꼬면’이 화제가 되면서 하얀국물 라면시장은 전체 라면시장의 17%를 차지할 정도로 그 비중이 급상승했다. 하지만 곧 인기가 시들해져 지난 7월 하얀국물 라면의 점유율은 3.3%로 추락하고 만다.
이 하얀국물 라면의 급습에도 신라면은 건재했다. 국내 라면시장 규모는 대략 1조9600억 원인데 이 중 신라면이 차지하는 게 24.5%, 4800억 원에 달한다. 하얀국물 라면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도 신라면은 점유율을 2%p가량 잃었을 뿐, 타격은 주로 하위 브랜드들이 입었다. 그만큼 국내 라면시장에서 신라면의 위상은 요지부동이다.
농심 구미공장은 현재 농심 라면 생산의 심장으로 자동화·고속화된 생상공정을 통해 하루 총 380만 봉지의 라면을 생산하고 있다. 신라면의 국내 생산량 중 70%가 구미공장에서 만들어지고 나머지가 안양, 안성, 부산공장 등에서 생산된다. 이 중 부산공장에서 만든 신라면은 일본, 동남아 등지로 수출된다. 해외공장이 있는 중국과 미국은 현지에서 신라면을 생산한다.
신라면은 전 세계 80여 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미국 월마트(Wal Mart), 캐나다 세이프웨이(Safeway), 영국 아스다(ASDA), 프랑스 파리스토어(Paris Store), 일본 세븐일레븐(7-Eleven), 호주 콜스(Coles) 등 신라면은 각 나라의 주요 마트에 진입해 있어 쉽게 구할 수 있다. 이렇게 해외시장에서 판매되는 신라면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2000억 원에 달한다(2011년 기준).
해외수출이 많다보니 농심은 2009년 ‘신라면지수’를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다. 신라면지수란 맥도날드 ‘빅맥지수’나 스타벅스 ‘라테지수’처럼 각국의 판매가격을 동일 화폐로 환산해 각국의 구매력을 비교 평가(PPP·Purchasing Power Parity)하는 지수다. 신라면지수는 신라면이 판매되는 주요 10개 지역의 신라면 한 봉지 가격을 미국 달러로 환산해 산출한다. 농심은 2009년과 지난 3월, 두 차례 신라면지수를 발표했다.
해외에서 신라면을 맛본 한국인들 중 일부는 “외국에서 사 먹는 신라면은 덜 맵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최성진 R· BD부문 스프개발팀 상무는 “기본적으로 신라면 제조법은 전 세계가 동일하다. 하지만 중국이나 미국에서 생산하는 신라면은 해당 국가의 물, 채소, 육류, 고추의 특성에 따라 매운맛 정도가 아주 조금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동일한 ‘매운맛’이란 뜻이다.
즉, 신라면은 해외시장에 진출할 때도 본연의 매운맛을 그대로 유지한다. 매운맛을 선호하지 않는 국가라면 전략상 그 맛에 변화를 줄 법한 데도 농심은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의 정체성에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요, 맵지 않다면 더 이상 신라면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계무대서도 매운맛으로 승부
중국은 101억 달러(약 11조4000억 원)의 시장규모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라면 소비국이다. 농심으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인 것. 그런데 쓰촨성을 제외한 지역에서 중국인들은 매운맛을 즐기지 않는다. 또 중국인들은 라면을 ‘물을 부어 간단히 먹는 요리’로 여긴다. ‘매운 봉지면’인 신라면 입장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 둘인 셈이다.
그럼에도 농심은 중국시장에서도 ‘신라면 고유의 맛으로 승부를 건다’는 전략을 수정하지 않았다. 대신 앞서 소개한 광고카피 ‘매운 것을 먹지 못하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와 함께 주말마다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시식행사를 벌여 ‘끓여 먹는 신라면의 맛’에 대해 홍보했다. 조인현 농심 중국법인 본부장은 “그 결과 현재 중국 북방지역 소비자 중 60%가 라면을 끓여먹는 것으로 조사됐고, 신라면 판매도 큰 폭으로 신장됐다”고 밝혔다. 또 농심은 신라면보다 덜 매운 ‘우롱면’, 해산물을 가미한 ‘상해탕면’ 등 중국인의 입맛에 맞춘 제품도 함께 선보여 전략을 보완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이슬람 국가에도 신라면이 수출되기 시작했으니 이제 신라면을 맛볼 수 없는 나라는 드물다. 2011년 농심은 무슬림도 먹을 수 있는 ‘할랄 신라면’을 출시, 그동안 수출실적이 없던 파키스탄, 요르단, 카타르 등 이슬람 국가 진출에 성공했다. 할랄(Halal)이란 아랍어로 ‘허용된’이란 뜻으로, 농심은 이슬람법이 허용하는 식재료만으로 신라면을 생산하는 할랄생산라인을 부산공장에 갖춰 신라면 봉지와 컵면 등 총 8종의 할랄 인증을 취득했다. 세계 전체인구의 25%가 무슬림이란 점을 감안하면 ‘할랄 신라면’ 출시는 농심에 큰 기회를 가져다줄 것으로 전망된다.
브랜드 가치 평가전문기관인 브랜드스탁에 따르면 2011년 신라면은 대한민국 100대 브랜드 가운데 8위를 차지했다. 물론 식품 브랜드 중에서는 단연 1위다. 2004년 일본 공중파인 도쿄TV는 신라면을 포스트잇, 칭다오맥주 등과 함께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로 소개하기도 했다. 최근 아시아를 중심으로 대중문화 한류가 ‘먹거리’ 한류로 확대되는 추세인데, 신라면 역시 그 가운데 있다. 코카콜라나 맥도날드 빅맥처럼 신라면도 사나이 울리는 매운맛으로 또 하나의 세계표준이 될 수 있을까. “변치 않는 것이 신라면의 매력”이라는 농심의 고집은 오늘도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