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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책 이야기

‘아래로부터의 저항’ 이끈 진보적 자유주의 출발점

  • 김학순 | 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교수·북칼럼니스트 soon3417@naver.com

‘아래로부터의 저항’ 이끈 진보적 자유주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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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부터의 저항’ 이끈 진보적 자유주의 출발점

통치론
존 로크 지음, 강정인 · 문지영 옮김, 까치

영국 법정에서는 지금도 하얀 가발을 착용한 법관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2008년부터 민사·가정재판에서 가발 착용을 금지했으나 형사재판에서만은 예외로 했기 때문이다. 흰 가발은 법정의 존엄을 상징한다.

재판 내용이나 판결에 앙심을 품고 보복하는 것을 우려해 판·검사나 변호사 신변보호 수단으로 익명성이 높은 가발을 쓴다는 설도 전해온다. 천장이 높은 영국 법정이 추웠기 때문에 방한용으로 가발이 등장했다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기능성만으로 300년 넘게 전통이 이어지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영국 판사와 변호사 대다수가 여전히 법정에서 가발 착용을 원하는 반면 국민은 시대착오적인 관습으로 여긴다는 조사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천부인권’ 사상에 바탕을 둔 시대정신에 비춰보면 당초 착용 동기와 상관없이 법정의 가발은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 상징물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는 견해도 있다. 누구나 하늘이 내린 인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연법 아래서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 것은 하늘 밖에 없는 셈이다. 이에 따라 ‘하늘의 대리자’ 역할을 가발 쓴 판사가 한다는 개념이 그것이다.

천부인권의 동의어에 가까운 자연법 사상으로 영국 민주주의의 이론적 틀을 만든 인물이 17세기 정치철학자 존 로크다. 로크는 인간이 원래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천부인권 개념을 정립하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 사상에 이르기까지 근대 민주주의 정치철학의 근간을 세웠다. 이 같은 정치사상을 압축한 저작이 ‘통치론’(원제 Two Treatises of Government)이다.

이 책은 근대 민주국가의 형성과 통치 원리를 최초로 개념화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 책은 자연법, 사회계약설, 권력분립론 같은 거대담론을 주창한다. ‘통치론’은 당연히 천부인권부터 설파해나간다. 들머리에서 ‘모든 인간은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작품이며, 각자가 자기를 위한 재판관이고 집행자인 상태’라고 전제한다.

홉스가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가정한 반면,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며 평화롭다고 전제한다. 이 책에서는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견해를 여러 차례 강조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자연법이 지배한다. 자연법은 신에게서 나온 것이어서 모든 사람이 이를 따라야 한다.

美 독립, 佛 대혁명 추동

로크의 자연법은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다. 이 권리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사유재산권이다. 자연물은 원래 공공의 것이지만 노동이 개입되면 개인적인 소유가 된다는 게 로크의 생각이다. 이 소유권은 국가가 박탈할 수 없으며, 누구도 이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재산권은 근대 시민사회 성립에 중요한 이론적 기초가 됐다. 사적 소유를 정당화한 그의 사상은 훗날 시장 자본주의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자연 상태는 자유롭고 평화스럽지만, 이 상태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이 재판관’이기 때문에 언제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나기 쉽다. 이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사회계약’을 통해 평화와 자기 보존을 목적으로 권리를 국가기구에 양도한다.

“인간은 본래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며 독립된 존재이므로, 어떤 인간도 자신의 동의 없이 이러한 상태를 떠나서 다른 사람의 정치권력에 복종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연적 자유를 포기하고 시민사회의 구속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도는 재산을 안전하게 향유하고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좀 더 많은 안전을 확보하면서, 상호간에 편안하고 안전하며 평화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결성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정치사회 결성의 목적이 재산 보호에 있다’는 그의 주장은 정치적 자유주의 이론의 핵심 요소에 속한다.

이렇게 탄생한 정치체라고 해서 무한한 권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정치권력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사형 등 모든 처벌을 할 수 있는 법을 정하는 권리다. 정치권력은 그러한 법을 집행하고 외세 침략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한 공동체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다. 정치권력은 오로지 공공선을 위해서만 행해져야 한다.”

‘통치론’의 핵심 중 하나는 ‘권력분립론’이다. 로크는 전제적 국가권력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권력을 상이한 기관에 속하게 하는 권력 분립을 주장한다. 이는 오랫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왕권의 해체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입법부가 권력의 중심이다. 행정부는 입법부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는 집행기관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입법부라도 법을 만들고 집행까지 할 경우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돼 결과적으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게 로크의 착안이다. 권력분립론은 훗날 ‘법의 정신’을 쓴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에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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