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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 길을 묻다

역사의 평가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흥망성쇠를 비추는 거울 ‘사감(史鑒)’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역사의 평가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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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은 황제에 오른 직후 정권의 안정을 다지기 위해 국가를 안정시키는 정책을 잇달아 제정하고 시행했다. 그 첫걸음이 인재를 널리 구해 기용하는 ‘광초현재(廣招賢才)’다. 이를 위해 그는 종래의 틀을 과감하게 깨고 새로운 인재 등용제도를 수립했다.

먼저 전시(殿試)라는 시험제도를 도입했다. 재초 원년인 690년 2월 14일, 그는 수도 장안(長安)에서 처음으로 전례가 없는 대규모 전시를 거행했다. 전국에서 올라온 인재들이 시험장을 가득 메웠고, 그가 직접 나서서 시험을 주관했다. 스스로를 추천하는 ‘자거(自擧)’ 제도도 처음 만들었다. 이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출신을 불문하고 모두 능력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추천했고, 합격하면 바로 채용됐다.

유능한 무관을 선발하기 위한 ‘무거(武擧)’ 제도와 관리를 뽑는 ‘시관(試官)’ 제도를 맨 처음 시작한 것도 무측천이다. 이 밖에도 하층민 중에서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고, 제과(制科)를 개설해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뽑았다. 관원들에게는 유능한 인물 추천을 장려했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무측천의 이러한 인재 등용제는 집권하는 동안 조정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원동력이 됐다. 새로운 얼굴이 쉴 새 없이 조정에 공급됨으로써 재상 적인걸(狄仁杰) 같은 걸출한 문무 대신이 출현할 수 있었다.

“재상의 과실이로다!”



무측천이 인재 등용만큼 중요하게 여긴 것은 언로 개방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로부터 의견을 듣고 자신의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좋은 의견은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광개언로(廣開言路)’ 정책이다. 그의 그릇 크기를 엿볼 수 있는 사례들이 있다.

이경업(李敬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다. 무측천은 자신을 공격하는 격문을 보고 속으로는 열불이 났지만,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구냐고 태연하게 물었다. 임해승(臨海丞)으로 좌천된 원래 장안의 주부(主簿) 낙빈왕(駱賓王)이라고 누군가가 보고하자 그는 아쉽다는 듯 “이는 재상의 과실이로다! 어찌하여 이렇듯 걸출한 인재가 묻혀 있단 말인가”라며 혀를 찼다.

간관 주경칙(周敬則)은 무측천에게 글을 올려 가혹한 법보다는 은혜와 덕을 베풀어 천하 인민이 걱정 없이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라고 충고했다. 심기를 건드리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무측천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한편 숱한 죄를 지은 혹리 주흥(周興)과 내준신(來俊臣) 등은 과감히 처형함으로써 조야의 박수를 받았다. 또한 주경칙을 재상으로 발탁해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무측천은 과학과 농업기술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나라 때는 농업이 국민경제를 떠받치는 유일한 경제적 토대였다. 당 태종 이세민은 성인 남자에게 일정한 땅을 나눠주고 일정 기간 경작하게 하는 균전제를 통해 농업 발전을 추진했다. 그런데 무측천이 집권할 무렵엔 균전제의 폐해가 극에 달했다. 토호나 사족들의 토지 겸병과 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농민은 땅을 잃고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즉위한 무측천은 즉각 토지 매매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해 호족의 토지 겸병을 막았다. 아울러 새로 토지를 나눠주고 세금을 줄이는 등 각종 정책을 통해 도망간 농민을 생산 현장으로 복귀시켰다. 각급 관원에게는 농업을 특별히 중시하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농업에 방해되는 모든 활동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한편, 경작지 증감과 농작물 수확량 등을 상벌의 근거로 삼았다. 덕분에 농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무측천은 국토를 온전히 보전하고 국경을 편하게 하는 데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를 위해 그는 등극 2년째 되던 해 서주도독이자 명장으로 이름난 당휴경(唐休璟)으로 하여금 토번(吐藩)에 20년 넘게 침범당한 ‘안서(安西)의 4개 진’을 수복해 서부 변경에 대한 근심을 해소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토번의 침입을 물리치는 한편 정주(지금의 칭하이)에 도호부를 두고 안서도호부와 함께 천산 남북을 나눠 관할했다.

역사의 평가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중국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 무측천(왼쪽). 무측천 시대의 걸출한 인물 적인걸은 무측천이 직접 발탁한 인재다.

‘황후’로 돌아간 ‘황제’

군사 방면에서 무측천은 자영 농민으로 병사를 충당하는 이른바 부병제를 계승하는 한편 이를 더 발전시켰다. 그는 군사력 비축에 중점을 뒀으며, 장수 등 군사에 필요한 인재를 기르는 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덕분에 외족을 물리치고 강토를 보전한 걸출한 장수가 여럿 나왔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유명한 적인걸, 정무정, 당휴경, 왕효걸, 곽원진, 흑치상지(백제 출신), 배행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705년 무측천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였다. 일대를 풍미한 통 크고 남다른 책략을 소유한 풍운의 여걸은 죽음을 앞두고 놀라운 결단을 내렸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황제 칭호를 떼내고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부르게 하라고 선포했다. 지고무상한 황제로서가 아닌 황후의 신분으로 돌아간 것이다. 황제로 남을 경우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가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이다.

무측천이 죽기 전날 대신들은 뒷일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는데, 무엇보다 비문을 놓고 한바탕 공방이 벌어졌다. 그에 대한 평가가 쟁점이었다. 칭송하자는 신하들, 공과(功過)를 동시에 기록해야 한다는 신하들, 찬탈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신하들 사이에서 논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무측천의 심경은 착잡했다. 죽음의 그림자를 붙들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그는 “비석은 세우되 내용은 기록하지 말라”고 했다. 후대에 평가를 맡기자는 뜻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비석은 ‘무자비(無字碑)’로 남게 됐다. 죽는 순간까지 참으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 사람이었다. 역사상 수많은 제왕과 장상이 죽기 전 자신의 공덕을 잊지 못해 비석에다 자기 일생과 공을 새기도록 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글자가 없는 무자비를 세우라고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참으로 비범한 정치가임을 잘 보여주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미룬 그 담대함이란!

철완의 여황제로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통치력을 발휘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그이지만 후대의 역사적 평가만큼은 두려웠던 것이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아무리 어리석은 통치자라도 역사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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