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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갈등 지도(5)|코소보

‘인종청소’ 비극 품은 발칸의 핏빛 휴화산

  • 글: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인종청소’ 비극 품은 발칸의 핏빛 휴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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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만명이 희생된 비극의 땅 코소보. 밀로셰비치는 왜 온나라를 피로 물들이면서까지 코소보를 움켜쥐려 했을까.
  • 또한 미국은 어떤 동기에서 코소보 사태에 개입했을까.
  • 20세기 발칸반도의 ‘마지막 화약고’ 코소보의 내일은 어떻게 밝아올 것인가.
‘인종청소’ 비극 품은  발칸의 핏빛 휴화산
1999년, 발칸반도의 좁은 공간 코소보에서 조직적인 ‘인종 청소’와 집단 강간 사태가 벌어졌다. 그에 뒤이은 보복은 ‘피가 피를 부른다’는 말 그대로였다. 코소보 전쟁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벌어졌지만, 무려 1만명에 이르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가해자는 세르비아 세력. 보안군, 경찰, 준(準)군사조직인 세르비아 민병대가 합세해 저지른 행위는 추악한 전쟁범죄 그 자체였다. 그들은 ‘위대한 세르비아’를 내걸고 코소보 사태를 주도한 전 유고연방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현재 유엔국제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의 ‘행동대원’들이었다.

“유고연방의 위기는 코소보에서 비롯됐고, 코소보로 끝날 것이다.”

코소보 전쟁이 터지기 1년 전 영국의 역사학자인 노엘 말콤은 코소보 연구서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는 자신의 저서 ‘코소보 略史(Kosovo, A Short History·1998)’에 이렇게 썼다.

코소보에 대한 밀로셰비치의 강경책은 결과적으로 유고연방 내의 다른 공화국들로부터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1990년대 들어 구(舊)소련 해체 바람을 타고 슬로베니아가 평화적으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는 전쟁을 거쳐 유고에서 떨어져나갔다.

특히 보스니아는 밀로셰비치 정권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코소보와 마찬가지로 혹독한 내전(1992∼95)을 치러야 했다. 그 와중에 2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2000년 10월 보스니아를 취재하면서 내전의 상흔을 곳곳에서 접할 수 있었다. 수도 사라예보는 1984년 동계올림픽을 치렀던 도시답지 않게 파괴된 건물과 거리들로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밀로셰비치, 세르비아계 선동

발칸반도는 ‘세계의 화약고’란 달갑잖은 별칭이 말해주듯 20세기 들어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오죽했으면 영어에 ‘balkanize(분열하다)’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겠는가.

비단 20세기뿐만이 아니다. 그 전부터도 발칸반도는 언어와 종교가 다른 세르비아계, 알바니아계, 크로아티아계, 슬로베니아계 등의 종족들이 섞여 살면서 유혈 투쟁을 되풀이해왔다. 세르비아는 그리스 정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카톨릭이 주류고, 보스니아에는 회교도와 그리스 정교도들이 섞여 산다. 종족과 종교가 다르니 문화와 정서도 다르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보면 발칸반도는 역사적으로 열강(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만 튀르크의 이슬람 세력, 러시아)들이 저마다 세력을 펴려는 각축장이었다. 그 와중에 세르비아에서 점화된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세르비아 청년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가 유럽 전체로 번져갔는가 하면, 특히나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여러 내전(크로아티아 내전-보스니아 내전-코소보 전쟁)을 겪으며 숱한 인명이 희생됐다.

밀로셰비치는 발칸반도에서 잇달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면서도 유고연방의 해체를 막지 못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전쟁범죄자란 낙인과 세르비아 영토 안으로 밀려든 70만명의 세르비아 난민뿐이다.

코소보 전쟁은 20세기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마지막 전쟁으로 기록된다. 밀로셰비치가 1980년대 후반에 극단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로 대중을 선동했고 코소보의 자치권을 유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를 권좌로 이끈 것이 바로 코소보였다.

밀로셰비치는 코소보를 두 차례 방문한 바 있다. 1987년 첫 방문 때는 최고 권좌에 오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야심에 가득찬 밀로셰비치는 코소보의 세르비아 주민들에게 “아무도 당신들을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는 선동적인 연설로 일약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그해 세르비아 사회주의당 당권을 장악했고, 2년 뒤 세르비아 대통령에 오른 후 코소보를 방문해 또다시 세르비아인들의 민족감정을 부추겼다. 1989년 6월 코소보 폴예에서 열린 코소보 전쟁(세르비아와 오스만 튀르크의 전쟁) 600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코소보의 영웅주의여 영원하라! 세르비아여 영원하라!”고 외쳤다.

그 무렵 그는 이미 코소보의 자치권을 사실상 빼앗은 상태였다. 석 달 전인 1989년 3월 세르비아 의회는 코소보의 자치적 사법권과 경찰권을 박탈했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자 세르비아 경찰이 발포, 20여 명이 죽었다. 밀로셰비치의 강압정책에 반발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은 코소보 해방군(KLA)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벌였고, 이것이 결국 코소보 위기로 증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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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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