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근대사 발굴자료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

  • 이종각│전 동아일보 기자 · 일본 주오대학 겸임강사│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1/2
  • ● 우범선, “사체를 깨끗이 치우고 잔해가 있으면 못 속에 던져라”
  • ● 고영근, 우범선 죽이고 자수한 뒤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
  • ● 명성황후 총애 받던 상민 출신 시중꾼
  • ● 고종, 이토 히로부미에 고영근 선처 부탁
  • ● 고종과 명성황후의 발밑에 뼈 묻은 자객 고영근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조선왕실 촉탁 사진사 무라카미 덴신이 찍은 명성황후의 사진. 사진의 주인공이 궁녀라는 주장도 있다.

우범선, 많은 사람이 그가 누군지 모른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라고 설명하면 “그러냐?”며 놀라는 정도다. 그러나 그는 근현대사에서 절대 잊혀선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우범선은,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당시 일본이 경복궁에 데리고 들어갔던 조선훈련대의 제2대대장이었다.

1857년생인 우범선은 을미사변 직후인 1896년 1월 서울에 처자를 남겨둔 채 일본으로 망명해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우범선은 망명 7년째 되던 1903년 11월24일,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한국에서 온 자객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다.

우범선을 살해한 자객은 고영근이었다. 그는 우범선을 살해한 직후 일본 경찰에 자수했고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살해 이유를 밝혔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아직 배후와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범선 살해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한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상세한 내용은 필자의 저서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참조, 동아일보사, 2009년)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우범선과 일본인 처 사카이 나카. 가운데는 이들의 장남 우장춘. 촬영 일자는 미상이나 장소는 우범선 일가가 살았던 히로시마현 구레시로 추정된다.

‘여우사냥’

을미사변 당시 국내외 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기세가 충천했지만 곧바로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얻어낸 랴오둥(遼東)반도를 청에 다시 돌려주라고 압력)이란 암초에 부딪혔다. 러시아와 전쟁을 할 형편이 못됐던 일본은 굴복했다.

일본의 세력이 약화되자 조선 왕실은 내각에서 친일파를 면직시키고 민씨 일파와 친러파 등을 대거 기용했다. 정세가 불리해지자 일본 정부는 주한공사에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를 임명했고 이때부터 명성황후 시해 공작(작전명 ‘여우사냥’)을 준비했다. 미우라는 조선에서 일한 지 7년째인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에게 이 일을 맡겼다.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던 우범선은 을미사변 11일 전인 9월27일, 일본군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에게 훈련대 해산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줬다. ‘훈련대 해산’ 소식은 당시 일본엔 중요한 정보였다.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미우라 공사가 그 일에 우범선이 이끄는 제2대대를 앞장세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거사 이전에 훈련대가 해산돼버리면 미우라가 계획한 훈련대 동원은 수포로 돌아가고 ‘여우사냥’은 결정적인 차질을 빚을 수 있었다. 미우라는 당초 계획(10월10일)을 앞당기기로 결심했다.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고종능비사건을 일으켰을 당시 ‘동아일보’(1922년 12월 13일자)에 게재된 고영근의 얼굴 사진.

미우라 공사는 10월1일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휘하 낭인들을 ‘여우사냥’의 전위대로 동원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낭인들 보수로 6000엔을 제시했다.

우범선의 결정적 제보

이런 일본 측 흉계를 눈치 채지 못한 왕실은 훈련대 해산을 서둘렀다. 훈련대 해산을 결정한 10월7일 오전 9시, 군부대신 안경수는 일본 공사관을 방문해 10월8일 무장해제를 정식으로 통고했다. 이때 우범선은 공사관으로 찾아와 미우라 공사와 ‘긴밀한 얘기’를 나누면서 ‘거사’ 동참을 흔쾌히 약속했다.

미우라는 오후 4시경부터 거사에 가담할 일본 경찰과 주요 민간인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동원 태세를 최종 점검, 8일 미명 대원군을 앞세워 입궐한다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날 밤 우범선은 훈련대연대장 홍계훈에겐 보고하지 않은 채 야간훈련을 한다며 병사들에게 실탄까지 휴대시켜 출동했다.

10월8일 새벽, 일본의 군인, 경찰, 공사관원에다 낭인들, 조선군 훈련대로 구성된 기괴한 다국적 혼성부대는 현재의 서대문경찰서 앞에 집합해 정동을 거쳐 광화문으로 향했다.

대원군이 탄 가마를 한가운데 두고 아다치가 지휘하는 낭인 50여 명이 일본 경찰 10여 명과 함께 선두에 서고, 그 뒤를 일본군 수비대가, 수비대 뒤를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군 훈련대가 따르고, 대원군 가마 좌우는 낭인별동대가 호위했다. 대원군 가마 바로 뒤에는 다시 일본군 수비대 1개 대대가 따랐다. 맨 뒤에는 이두황이 인솔하는 훈련대 제1대대가 배치되었다.

이보다 앞서 선발대로 뽑힌 일본 경찰이 긴 사다리를 광화문 옆 담벼락에 걸어 담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광화문을 경비하던 조선 순검과 병사들은 아무런 대항조차 하지 않은 채 놀라 도망쳤다. 경복궁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이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진입했다. 오전 5시50분경이었다.

그렇다면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 당일 과연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일본의 우익단체 ‘흑룡회(黑龍會)’가 1933년에 편찬한 ‘동아선각지사기전’엔 우범선이 명성황후의 사체를 버리라고 지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일본 사노시향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스기무라 군일기’에도 우범선이 명성황후 사체를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범선이 곤녕전에 도착하니 명성황후는 이미 칼에 베여 마루에 쓰러진 채로 후후 숨을 쉬고 있었다. 장사들은 사진을 보며 왕비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왕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금 있다가 절명했다. 우범선은 구연수와 하사관에게 명해 왕비의 사체를 이불 위에 얹고 그 위에 다시 이불을 덮어 새끼줄로 묶어 옆 창고에 넣었다. 곧 사체를 동산 기슭으로 옮겨 석유를 끼얹어 태웠다. 타다 남은 뼈는 하사관이 못에 갖다 버렸다.”

그 노트가 쓰이기 약 30년 전인 1903년 11월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이 자수할 때 소지했던 ‘한국 정부 앞으로 보내는 서한’에도 우범선에 대해 ‘시국모소체지극역대악(弑國母燒體之極逆大惡, 국모를 시해하고 그 몸을 소각한 극역 대악)’이라고 되어 있어 우범선이 사체를 소각했다는 사실은 당시 일반인에게도 널리 펴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1/2
이종각│전 동아일보 기자 · 일본 주오대학 겸임강사│
목록 닫기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댓글 창 닫기

2018/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