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호

유엔 안보리는 왜 실패했나

막오른 ‘힘의 정치’, 무너진 주권평등 원리

  • 번역·정리: 이남희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3-05-26 13: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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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라크전쟁의 패자는 둘이다. 하나는 지금도 생사가 불분명한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며, 또 하나는 바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다. 전쟁의 합법성 여부를 심판해온 세계유일 기구인 유엔 안보리는 지금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이는 세계 질서의 일대 재편을 예고하는 일이다.
    • 유엔 안보리의 변화는 북핵 문제로 들끓고 있는 한반도에도 심대한 파장을 미치는 사안이다. 미국 터프스대학 마이클 J 글레논 교수(국제정치학)가 미 외교협의회에서 발간되는 격월간지 ‘Foreign Affairs’ 5·6월호에 기고한 유엔 안보리 관련 논문의 주요 내용을 긴급 발췌해 싣는다.
    • 글레논 교수의 논문은 유엔 안보리에 대한 미국의 시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의 유엔 안보리 상황과 국제정세를 냉정하게 분석했다는 평이다(편집자).
    유엔 안보리는 왜 실패했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장 크리스티안 수상은 “야전 텐트가 완전히 쓰러졌다”고 말하며 국제연맹의 설립을 선언했다. ‘인류의 위대한 수레’가 다시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나고, 국제법 체계를 향한 큰 흐름이 진행되는 듯 보였다. 1945년 국제연맹은 더욱 강한 ‘국제연합(유엔)’ 체제로 대체됐다.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코델 헐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유엔을 “인류의 고귀한 열망을 충족시켜 줄 열쇠”라며 환호했다. 세계는 다시 한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2003년 초 인류의 수레는 제동이 걸리며 멈춰서고 말았다.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결렬되고, 유엔은 더 이상 자신의 법률로 무력 사용을 통제할 수 없게 됐다. 사실 수년동안 이 수레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무력 사용에 관한 규정은 유엔헌장에 명시돼 있고, 안전보장이사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 규정이 버텨내기엔 힘의 논리가 너무 강했다. 2003년까지 무력 사용에 관여한 국가들은 ‘무력사용이 적법한 것이냐’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대신 ‘무력사용이 우리에게 유리한 것인가’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국제 안보시스템의 종말은 일찌감치 찾아왔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2002년 9월12일 유엔 총회에서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바그다드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과 함께 일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유엔이 동조하지 않을 경우 혼자서라도 행동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주 후인 10월25일,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전쟁을 선포할 것임을 천명했다. 부시는 다시 한번 “유엔 안보리가 전쟁 참여를 거절해도 미국은 단념하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다. 그는 “안보리가 사담 후세인을 무장해제시킬 의지가 없다면, 또 후세인이 스스로 무장해제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직접 나서 후세인을 무장 해제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안보리는 ‘결의안 1441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하면서 부시의 주장에 대응했다. 이 결의안은 이전 결의안들을 위반한 이라크를 위한 것이었다. 안보리는 새로운 공식 감찰체제를 수립하고 이라크가 무장해제하지 않을 경우 초래될 ‘심각한 결과’에 대해 한 번 더 경고했지만 이 결의안은 무력사용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워싱턴 행정부는 안보리로 돌아올 것임을 약속했다.

    결의안 1441호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개인적 승리였다. 그는 미 정부가 거대 정치자금을 유엔에 투입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국제적인 후원을 얻으려 힘겹게 외교적인 싸움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감찰시스템의 효과와 이라크의 협조 정도에 대한 의심은 커졌다. 2003년 1월21일 파월은 스스로 “사찰이 먹혀들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는 2월5일 유엔으로 돌아가 이라크가 여전히 대량살상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에대해 프랑스와 독일은 더 많은 압력을 가하며 대응했다. 동맹들 사이의 긴장은 고조됐고, 18개의 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증서에 서명하면서 분열은 심화됐다.



    2003년 2월, 유엔의 분열 시작

    2월14일 사찰단은 11주간 이라크를 살펴본 후 안전보장이사회로 돌아와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말이다. 열흘 후인 2월24일 미국, 영국, 스페인은 유엔헌장 7장(평화에 대한 위협을 다루는 부분)에 근거해 안보리의 결정을 공포했다. 이라크가 결의안 1441호를 지킬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 독일과 러시아는 이라크에 더 많은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백악관은 크게 당황했다. 2월28일 아리 플레셔 공보장관은 “미국의 목적은 단순히 이라크를 무장해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발표 후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집중적 로비를 벌였다. 3월5일 프랑스와 러시아는 후세인에 대항하는 무력 사용을 용인하는 일련의 결정을 막을 것이라고 공표했다. 다음 날 중국도 같은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영국은 타협을 권고했으나, 5개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서로 일치할 수 없었다. 국제 평화와 안정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서 안보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라크 문제 해결에 실패함으로써 결국 유엔은 비효율적 논쟁공동체로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안보리의 존재는 오랜 기간 숨겨져 왔다. 문제는 ‘제2의 걸프전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아니라 ‘유엔이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형상으로 세계의 역학 구조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단순히 이라크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국 중심의 단일 체제가 부상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무력사용에 있어 문화적인 충돌과 국가간 상이한 태도는 안보리의 신뢰성을 갉아먹는 결과를 가져왔다. 안보리는 평화로운 시대엔 불완전하나마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압박이 존재하는 현재 안보리는 무능한 기구로 판명됐다. 그 원인은 어떤 한 국가에 있는 게 아니다. 유엔의 실패는 거대하고 냉혹한 진보의 결말이자 국제 시스템의 진화이기 때문이다.

    힘의 정치에서 첫 번째 변화를 생각해 보자. 미국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며 나타날 현상은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먼저 미국에 대응하는 경쟁국들의 연합이 출현했다. 냉전 종식 이후 프랑스인, 중국인, 러시아인들은 세계가 더욱 균형적인 시스템으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프랑스의 전 외무장관 후버트 베드린은 “정치적으로 단일화된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단극 체제를 깨뜨리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싸워왔다. 1990년대 초반 시라크 대통령의 외교정책 자문이던 피에르 렐로쉬에 따르면, 시라크는 “유럽이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힘에 대응할 수 있는 다극 체제를 원했다”고 한다. 시라크는 “유일한 지배 권력이 존재하는 한 그 어떤 공동체도 위험하며, 그 곳에는 반작용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최근 러시아와 중국도 같은 문제로 골몰하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두 국가가 2001년 7월 ‘다극 체제’를 약속하며 체결한 조약에서 공식적으로 드러났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단극 체제’를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고,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도 똑같이 말했다. 독일은 뒤늦게 참가했지만, 최근 미국의 헤게모니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하는 파트너로 떠올랐다. 독일의 피셔 외무장관은 2000년 “1945년 이후 유럽의 주된 관심사는 여전히 개별 국가가 헤게모니에 대한 야망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헬무트 전 수상은 “독일과 프랑스가 강력한 동맹인 미국의 헤게모니에 편입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데 주된 관심을 공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반대에 직면한 가운데, 워싱턴 행정부는 미국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어떤 행위라도 실행할 의도가 있음을 명백히 했다. 부시 행정부는 2002년 국가안보전략을 담은 백서를 배포하면서 어떤 국가도 군사력에서 미국의 라이벌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현재 이 악명 높은 서류에 선제 공격에 대한 미국의 독트린이 명시됐다는 점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유엔헌장의 조문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유엔헌장 51조는 ‘자위(自衛)를 위해서’ 동시에 ‘유엔의 구성원에 대해 무력 공격이 있을 때’만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은 “우리의 적이 먼저 공격하도록 방치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적들의 악의에 찬 공격을 막기 위해 미국은 가능한 한 먼저 공격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두 번째 원인은 유엔에서 미국과 다른 국가들이 서로 갈렸다는 점이다. 이 간극은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무력간섭이 적절한가’와 같은 기본적인 이슈들에 있어 문화의 차이는 북서 지방 국가들과 남동 지방 국가들을 갈라서게 했다. 1999년 9월20일,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거대하고 조직적인 인권 유린이 결코 용인돼선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국가들간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연설했다.

    이 연설은 몇 주 동안 유엔 회원국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이끌어냈다. 공개적인 발언을 한 국가들 중에서 3분의 1은(이라크 국민들에 대한) 인권이 침해되는 환경에 인도주의적 무력 개입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3분의 1은 그 의견에 반대했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 주목할 것은 상당수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무력 개입을 지지했다는 점이다. 반대자들은 대부분 남미, 아프리카와 아랍 국가들이었다.

    이러한 의견의 불일치는 단순히 인도적 무력 개입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올해 2월22일 비(非) 유엔회원국의 외무 장관들은 콸라룸푸르에서 회담을 갖고 이라크에 대한 무력 사용에 반대하는 선언에 서명했다. 114개 개발도상국이 모인 이 단체는 지구상 인구의 55%를 차지하며 유엔 회원국들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유엔의 법규는 ‘언제 무력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란 문제를 놓고 단일한 세계관과 보편적 법을 추구하지만, 유엔 회원국들은 이에 대해 명백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무력사용에 대한 문화적 입장은 단순히 서구 사회와 나머지 국가로 분리할 수 없다. 미국과 나머지 서양 국가로 분리가 된다. 특히 핵심적 키는, 미국과 유럽의 입장차가 나날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던지는 화두는 국제 관계에서 법의 역할이다. 태도의 불일치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규정을 만드는 최초 단체가 국가인가 아니면 초국가적 단체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은 초국가주의를 거부한다. 미국의 입장에선 예산을 제한하고 통화를 통제하거나 군대가 게이들의 분쟁을 해결하는 데에 국제체제가 관여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유럽 국가들에선 EU(유럽연합)와 같은 초국가적 기구에 의해 정기적으로 결정된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자신의 저서에 “미국은 국가 자체보다 우위에 있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썼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민주적 적법성을 국제 공동체의 의지에서 비롯된 흐름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유럽인들은 미국이 ‘저주’라고 여기는 주권 간섭을 편안하게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무력사용을 제한하는 안보리의 결정은 단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유엔의 위상을 실추시킨 의견 불일치의 또 다른 원인은 국제적 규정이 만들어져야 할 시점과 관련이 있다. 미국인들은 교정적 법을 선호한다. 그들은 가능한 한 열린 경쟁의 장을 좋아하며 자유 시장이 실패했을 때만 규제를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반대로 유럽인들은 시장의 실패가 닥치기 전에 예방할 수 있는 규제를 선호하는 편이다. 유럽인들은 궁극적인 목표를 확인하기 좋아하며 미래의 어려움을 예상해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막으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특성은 유럽인이 안정성과 예측성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미국인들은 상대적으로 개혁과 순간적인 혼란을 편안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도의 기술과 통신 산업이 발달한 이 시기에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드러나는 두 대륙의 판이한 반응은 그들의 정신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무력사용에 대한 뚜렷한 차이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엔의 시스템을 무력하게 만든 것은 ‘무력사용에 있어 유엔의 규정을 따를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각 국가의 태도 차이였다. 1945년 이후 꽤 많은 국가들이 결정적 순간에 유엔헌장을 위반하며 무력을 사용해 왔다. ‘국가가 법규를 지킬 것인가’를 의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북한이 미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계속 이행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할 것이다. 이 규정은 유엔헌장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그러나 아무도 평양을 달랠 수 있다고 확신하진 않는다.

    유엔헌장은 켈로그 브라이언드 조약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1928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주요 국가들이 전쟁을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 삼지 말자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외교 역사가 토마스 베일리는 이 조약이 “환상에 빠진 기념물이며 기만적일 뿐 아니라 위험하고 대중을 거짓된 안보 의식에 빠지게 했다”고 말한다. 한편 요즘은 어떤 이성적 국가도 “유엔헌장이 안보를 지켜줄 것”이라고 혹세무민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명백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부 국제 변호사들은 이라크 위기에 직면해 유엔의 지위에 공포를 가질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러시아, 중국이 미국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며칠 전인 3월2일, 앤 마리 슬로터(미국 국제법학회 대표)는 “오늘날 일어나는 일들은 유엔 설립자들이 정확히 관찰했던 것이다”라고 썼다. 다른 전문가들은 유엔 헌장의 법규들이 여전히 의무사항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각국이 ‘유엔 헌장에 명시된 무력 사용 규정이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의 실천 자체는 ‘국가가 유엔 헌장을 구속력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가 된다. 사실, 어떤 국가도 오래된 규칙이 사멸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법규의 변화를 받아들이진 않았다. 국가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불필요한 대립을 피한다. 국가들은 켈로그 브라이언드 조약이 더 이상 좋은 법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적이 없다. 동시에 어떤 국가도 그것을 좋은 조약이라 말하지 않았다.

    유엔 안보리는 왜 실패했나

    2003년 4월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푸틴 러시아 대통령, 슈뢰더 독일 총리(왼쪽부터). 프랑스·독일·러시아는 최근까지 미국을 견제해왔다.

    한편에서 다른 분석가들은 여전히 “유엔 헌장의 무력사용 규정이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국제법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며 걱정한다. 여론의 향배에 따라 부시 대통령이 의회와 유엔에 서는 걸 보면 국제법은 여전히 힘의 정치를 형성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명목상의 법률과 실제로 작동하는 법률을 구분하는 것은 법의 존재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다. 법에 의거해 무력을 사용하도록 했던 노력이 21세기 국제사회에서 기념비적 실험일 지라도, 실험이 실패했다는 건 사실이다. 실패를 부인한다면 인류는 미래에 있을 또 다른 실험에 대한 전망을 갖지 못할 것이다.

    미국은 2002년 9월 “무력사용을 통제하는 유엔 헌장의 규정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겠다”는 내용의 안보 문서를 발표했다. 유엔 헌장의 규정은 완전히 붕괴됐다. “합법적” 혹은 “비합법적”이란 용어는 무력 사용에 있어 더 이상 의미 있는 말이 아니다. 파월 국무장관은 10월20일 “코소보에서 그랬듯이, 미국의 대통령은 (이라크를 간섭할) 권위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나토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무력을 행사했을 때도 안보리가 권한을 부여하는 절차는 없었다. 이 전투는 ‘방어전 이외에는 무력개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유엔 헌장의 내용을 크게 위반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할만한 권위를 실제로 가졌다”는 파월의 말은 맞아떨어졌다. 안보리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승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막을 만한 국제적 법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합법적으로 행동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유엔 안보리를 무너뜨린 주요한 힘이다. 나토를 포함한 다른 국제기구들은 세계 지형 변화의 질풍 속에 주저앉고 말았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는 안보리가 터키의 경계선을 방어하려던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프랑스 외무부의 자문역을 했던 프랑스와즈는 “대서양 동맹들의 종말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슈퍼파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다른 정부에 대해 별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믿는 편이다. 2003년 2월10일 독일의 슈뢰더 총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진실은 국가들이 힘으로 안보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서투르게 안보를 추구하는 법률주의자들의 국제기구는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원칙의 필연적 결과는 “국가들이 권력을 추구할 때 국제기구를 자신에게 유리한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러시아, 중국에게 유용한 도구 중의 하나가 바로 안보리와 그들에게 부여된 거부권이다. 세 국가가 미국을 침묵시키고, 세계를 ‘다극 체제’로 변화시키기 위해 거부권을 사용하리라는 건 예측 가능한 것이다.

    이라크 문제를 상정한 안보리의 논쟁에서 프랑스는 자국의 목적을 주저하지 않고 드러냈다. 그들의 목표는 이라크를 무장해제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유엔 대사의 말에 따르면 “협상을 통해 프랑스가 노리는 것은 바로 안보리의 역할과 권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관심은 미국의 힘을 약화시켜 프랑스와의 외교에서 미국이 굴복하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때론 안보리를 이용하고 때론 아예 무시한다. 부시 대통령은 2003년 국정연설에서 “미국의 행로는 다른 이들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유엔 회원국들은 (국제 문제에) 안보리가 명쾌하게 결정하기를 기대한다. 위협에 직면해 자신의 임무를 피하는 것은 ‘법’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2월24일의 결의안은, 외교적 유용성이 무엇이던 간에, 안보리를 국제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게 했다. 안보리의 모호한 표현은 최대한 많은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고안됐지만, 지루한 법적 설명을 필요로 했다. 결의안의 광의적 표현은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모든 의미를 포함하는 법적 기구는 결국 어떤 의미도 담아내지 못한다. 사적이고 부차적인 이해가 안보리의 공허한 말들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세계를 다각화 구조로 돌려놓는 데 열중하고 있는 국가들과 해설가들은 안보리의 쇠퇴에 대응할 전략을 고안해왔다. 프랑스를 비롯 일부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행동을 초국가적으로 억제함으로써 안보리가 힘의 불균형과 문화·안보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더 정확히 말해서, 프랑스인들은 미국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안보리’라는 공격수단을 사용하려했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프랑스의 전략은 초국가주의를 통해 세계를 다극 체제로 되돌려놓는 데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피할 수 없는 딜레마를 갖고 있다. 과연 무엇으로 성공하겠다는 건가.

    프랑스인들은 미국의 이라크 프로젝트를 반대해왔다. 그러나 그 반대는 실패로 돌아갔다. 프랑스와 미국을 포함하는 유일한 국제기구의 연결 고리가 파괴되면서 미국의 노골적 의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딜레마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프랑스의 무력함은 결과적으로 자국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은 카메라가 돌아갈 때 미 국무장관의 면전에서 손가락질을 하거나 다른 안건이 상정된 회의에서 이라크 문제로 주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 국무장관을 어려움에 빠뜨렸다. 프랑스는 떠들썩하게 전쟁을 반대했으나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약점만 노출시키고 말았다.

    반면, 해설가들은 미국이 국제법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구두(口頭) 전략을 세우고 있다. 국가는 자신의 해석과 이익에 따라 결정을 내릴 것이 아니라 공통의 관심사 속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 이같은 발상은 공산주의 이념과 일치한다. 슬로터는 “다른 국가들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포럼을 열기 원하므로 미국은 유엔에 속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뉴요커’에 실린 칼럼에서 핸드릭 헤르츠버그는 “통제받지 않는 힘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의심은 어디로 갔는가” 또한 “제약받는 정부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신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는 “이런 현실을 보면 보수주의자 버크와 매디슨 전 대통령이 무덤 속에서 돌아누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헤르츠버그는 “미국이 다른 국가들과 힘의 균형을 이루는 ‘다극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자신의 헤게모니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도 견제와 균형의 유용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자의적 힘의 사용을 억제한다.

    야망을 상대로 야망을 펴는 것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전략가의 공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을 국제적 활동무대에 적용하려면 미국은 경쟁자들이 힘을 키울 수 있도록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

    헤르츠버그는 중국이나 러시아가 미국을 견제하길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결국 중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그 어떤 국가도 스스로 미국만큼의 힘을 갖지 못한다면 미국의 독점적 권력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미국을 감시하는 나라는 누가 감시하나

    프랑스가 자국과 미국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그러나 프랑스 역시 자국보다 힘이 약한 국가들과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 더욱이 여태껏 시도된 적 없는 새로운 힘의 중심(다원주의)이 미국의 헤게모니보다 더욱 신뢰할 만하다고 믿을 이유는 거의 없다.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불투명한 감시자에게 지구의 운명을 맡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누가 감시자를 감시할 것인가”란 오랜 질문을 망각한 듯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매디슨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이 채 깨닫지 못한 핵심을 짚었다. 미국 헌법을 들여다보면, 매디슨과 다른 창시자들이 오늘날 세계가 직면해 있는 것과 비슷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왜 권력자들이 법을 따르려 하냐는 점이다. 연방신문에서 매디슨은 그 답을 제시한다. 그는 “권력자들은 그들이 언젠가 약자가 된다는 걸, 또 법의 보호를 필요로 할 때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 오늘날의 강자들도 법에 신속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미래가 확실하다면, 권력자가 자신의 입지를 확신한다면, 미래가 지속적인 권력을 보장한다면, 권력자는 더 이상 법에 순응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헤게모니는 평등의 원리와 긴장 관계에 서있다. 헤게모니를 쥔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을 법적 제한에 속박시키는 걸 거부한다. 대영제국의 물결이 바다를 지배할 때, 화이트홀(영국 런던 중심에 있는 옛 궁전)은 자국의 해군 봉쇄를 겨냥한, 무력 사용을 제한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 시기, 미국과 약소국들은 무력 사용 제한을 격렬하게 지지했다. ‘슈퍼파워’의 지배를 받는 한 어떤 시스템도 본연의 법규 그대로를 지켜가기는 매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국제사회에 닥친 ‘매디슨 딜레마’다. 바로 이 딜레마가 올해 초 안보리에서 극적 충돌을 일으키며 첨예하게 드러났다.

    유엔 헌장에 명시된 안보리의 고결한 의무는 국제 평화와 안보의 유지에 있다. 헌장은 안보리의 후원을 받으며 이 고결한 임무를 수행하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유엔 설립자들은 여러 층의 고딕 양식 건물을 건설했고, 여기에 거대한 현관과 육중한 지지물, 높은 나선형 계단도 설치했다. 악령을 쫓기 위해 무섭게 생긴 괴물 모양의 홈통 주둥이도 달았다.

    유엔 안보리는 왜 실패했나

    후세인과 UN은 이라크전쟁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UN은 UN헌장이 미국에 의해 부정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2003년 겨울, ‘유엔 안보리’란 건물이 무너졌다. 사람들은 어설픈 설계도와 건축가가 건물 붕괴의 원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안보리가 붕괴한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움직이는 지반 위에 ‘안보리’가 건축된 것이다. 사원이 서 있는 땅에 틈이 벌어졌다. 그 터전은 인류의 고결한 법률 사원을 지탱할 수 없었다. 힘의 차이, 문화적 차이, 무력사용에 대한 견해 차이가 ‘유엔 안보리’란 사원을 전복시키고 말았다.

    법은 보통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그것이 바로 법의 목적이다. 그러나 국제 안보와 관련해 법률주의자들이 만든 국제기구, 체제, 법규들은 그저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행동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결정인자가 아니다. 행동을 형성하는 더 큰 힘의 결과일 뿐이다.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관계가 출현하고, 새로운 사회적 전이가 일어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각 국가는 힘을 강화시킬 새로운 기회를 갖고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이 과정은 심지어 국제 안보를 유지하는 최고의 법칙이 됐다. 법칙이 지정학적 역동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동성을 고려하지 않고 고안된 최악의 법규들의 경우, 아주 짧은 기간 지속되거나 법규에 대한 순응이 필요한 시기가 되자마자 역설적으로 바로 버려진다. 다른 경우 타당성은 유엔의 쇠퇴에서 볼 수 있듯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유엔의 군사위원회는 이미 소멸했다. 한편 유엔 헌장에 명시된 무력 사용에 관한 제재는 수년에 거쳐 점차 약화됐다. 안보리는 냉전 기간동안 제 구실을 못하다가 1990년대 잠시 소생해 코소보와 이라크에서 그 역할을 다했다.

    새로운 국제법 질서 마련해야

    언젠가 입법자는 최초의 ‘도면’으로 돌아갈 것이다. 안보리 붕괴의 첫 번째 교훈은 국제기구 운영의 첫 번째 원리가 돼야 한다. 새로운 국제법 질서가 효과적으로 작동할지라도, 이것은 힘과 문화, 안보의 근본적인 역동성을 반영해야만 한다. 법이 역동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규범이 국가가 실제로 행동하는 방식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국가 공동체’는 단지 명목상의 규칙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유엔 시스템의 기능장애는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정학적인 문제이다. 약화된 사법 기능은 그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슬로터는 “유엔은 진실이 정치를 초월한다는 전제 하에 설립됐다”고 주장한다. 문제를 정확히 짚어낸 말이다. 명목상의 법률보다 실제로 작동하는 법률을 원한다면, 법률주의자들이 만든 국제기구는 이상이 아니라 정치적 약속을 전제로 했어야 했다.

    두 번째 교훈은 ‘국가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라는 현실의 문제에서 법률이 탄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엔의 실패와 연관이 깊다. 올리버 웬들 홈스(1809~94 미국의 의학자·문필가)는 “건전한 법체의 첫 번째 요건은 법이 옳건 그르건 간에 그 집단의 실제 감정과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자연법을 신봉하는 이들에겐 저주처럼 느껴질 것이다.

    자연법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원리가 국가를 통제해야 하는지를 머리로만 아는 샌님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국가가 이 원리를 적용하고 있는지 아닌지엔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이러한 이상주의자들은 국제법 시스템이 지극히 자발적이란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좋건 나쁘건 간에 국제법 시스템은 국가의 만족에 기초한다. 국가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다. 법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지금 우리에겐 여전히 베스트팔렌 체제가 존재한다. 이것이 이상주의자들의 주관적인 도덕개념에서 비롯됐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작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 질서의 건설자는 정치를 초월하는 ‘상상적 진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상상적 진실이란 ‘전쟁 이론’이나 ‘국가의 주권 평등 이론’ 같은 것을 말한다. 이들과 다른 부패한 교리들은 보편적인 진실, 정의, 도덕성과 같은 낡은 개념에 의존한다. 자연법과 천부인권론 같은 중세의 사상은 ‘계몽사회’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기여했을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세계가 과도기로 넘어가면서 낡은 도덕주의자들의 어휘는 깨끗이 사라졌다. 의사결정자들은 실용적으로 ‘무엇이 위태로운가’에 초점을 맞췄다. 국제적 평화와 안보를 성취하기 위한 그들의 질문은 명확했다. ‘무엇이 우리의 목적인가. 우리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 수단은 작동하는가. 대안들과 경쟁하는 데 드는 비용과 이익은 또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법률가들의 고루한 학문체계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위대한 이론이 필요한 것도 독선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홈스는 법의 일생이 ‘논리가 아닌 경험’이라고 말했다. 인류는 선과 악에 대해 궁극적으로 일치하는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 일은 이론적인 게 아니라 경험적일 뿐이다. 추상개념을 버리면서, 옳고 그르다는 논쟁적 수사학에서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 또 불필요한 것을 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좋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정책 입안자들은 아직 이 질문들에 답변할 수가 없다. 안보리의 입지를 떨어뜨린 힘은 조지 케넌이 지적한 것처럼 “국제적 불안정성의 더 깊은 원인”으로 작용하며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정책입안자들은 이 질문들이 옳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자연법에서 특히 치명적 부산물은 바로 모든 국가가 동등한 주권을 가진다는 생각이다. 케넌이 지적하듯이, 주권 평등의 개념은 신화에 불과하다. 현재 국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은 ‘주권 평등’ 개념을 비웃고 있다. ‘모든 국가가 평등하다’는 전제는 오늘날 모든 국가가 힘, 부, 국제 질서나 인권의 준수 측면에서 결코 평등하지 않은 현실과 대조를 이룬다.

    주권 평등 이론은 폐기 처분 돼야

    그러나 주권 평등의 원리는 유엔의 전체 구조를 움직이고 있다. 때때로 주권 평등 개념은 대량살상무기 문제와 같은 심각한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모든 국가는 평등하다’는 생각은 때로 ‘모든 개인은 평등하다’는 원리를 방해하기도 한다. 만약 유고슬라비아가 다른 국가들과 똑같이 무력 개입을 받지 않을 권리를 강조했다면, 유고슬라비아인들은 다른 국가에 사는 사람들과 똑같이 누려야 할 인권을 보호받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의 인권은 무력 개입을 통해야만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를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비이성적 발상은 올해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안보리의 의지는 앙골라, 기니, 카메룬과 같은 나라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 국가들은 스페인, 파키스탄, 독일과 동등한 권한을 가졌다. 국가 평등 원리는 비상임이사국들이 ‘사실상 거부권(de facto veto)’을 던질 수 있게 한다.

    5개의 상임이사국에게 ‘법률상 거부권(de jure veto)’을 승인한 것도 물론 평등주의가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한 유엔 헌장의 의도였다. 그러나 거부권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법률상 거부권’은 사안에 따라 균형을 잃었다. 미국을 프랑스 수준으로 내려놓거나 프랑스를 인도 위에 두기도 했다. 인도는 이라크 논쟁 당시 비상임이사국의 위치에도 있지 않았다. ‘법률상 거부권’은 비상임이사국들의 ‘사실상 거부권’을 약화시키는 데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안보리는 실제 세계의 역학 구조를 왜곡시켰다.

    약소국, 안보위험 가중

    여기서 지난 겨울의 세 번째 교훈이 나온다. 국제기구의 구조적 왜곡을 고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유엔 안보리가 안보 관련 이슈에 제동을 걸며 곧 부활될 거라고 믿을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 이라크에 순조롭게 새로운 국가가 수립된다면 안보리를 되살리자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결국 유엔 안보리는 국제 연맹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될 것이다. 미국의 의사 결정자들은 코소보 사태 때 나토에 대해 그랬듯, 유엔 안보리에도 같은 방식으로 반응할 것이다.

    전쟁이 “항상 최악의 해결책”은 아니다. 무력은 밀로셰비치나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을 다룰 때 외교보다 유효한 수단이다. 유감스럽게도 무력사용은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무력 사용은 경제제재 조치보다 오히려 더 인간적이다. 경제제재는 군인들뿐 아니라 무고한 아이들을 기아 상태로 몰고 간다.

    법을 신봉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류의 위대한 수레가 다시 행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무질서의 중심에 대항하며 움직일 때, 미국은 세계 평화와 안보를 목표로 국제적 메커니즘을 창조할 수 있다. 또 힘을 분배하면서 이익을 취할 수 있다.

    미국의 헤게모니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할 것이다. 신중한 사람들은 특별히 무력이 필요하지 않을 때조차 미국에게 현실적인 국제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고 증진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제기구들은 미국의 독점적 권한을 강화하고 잠재적으로 ‘단극 체제’의 기간을 연장할 것이다.

    그러나 법률가들은 초라해진 안보리를 대체할 새로운 기구를 만들 생각도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안보리를 무력화시킨 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의기양양할 것도 기죽을 것도 없는 미국은 새로운 맥락 속에서 왕성한 의욕을 갖고 구식의 강제에 순응할 것이다. 반면 미국의 경쟁국들은 이런 강제를 피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가는 더 큰 힘에 의한 안보를 추구할 것이다. 각국은 계속해서 무력사용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다. 인류가 보편적인 법률을 만들고자 한다면 ‘현실을 깨닫는 것’이 그 첫째 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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