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환은 신세대가 좋아하는 음악과 굳이 ‘코드’를 맞추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음악에 충실하다. 그래도 공연만 했다 하면 관객들로 북적거린다. 공연부문에서는 보기 드문 성공사례여서 일각에서는 윤도현밴드, 크라잉넛과 함께 ‘라이브 빅3’로 거론하기도 한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안치환을 이해하는 젊은 세대가 의외로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근래 들어 음반판매의 위축으로 주류가수들이 맥을 못 추는 반면, 그들처럼 오래 전부터 공연에 주력해온 가수들이 오히려 ‘불경기를 덜 탄다’는 말을 듣는다. TV에도 나오지 않고 앨범판매량이 두드러진 것도 아닌 그의 ‘주머니 형편’이 나쁘지 않은 것은 라이브 가수로 위상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대중음악 전반에서 라이브가 진가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안치환씨의 성공도 라이브 이미지와 관련 있다고 봅니다. 활동 초기부터 라이브를 의식한 것인가요?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무대가 라이브라면 그것은 가수에게 기본이자 철칙이지요. 의식이고 뭐고 상관없이 당연히 이를 기준으로 삼아왔습니다. 대학 노래패 때나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때나 따지고 보면 다 라이브였죠. 그 이후 10년에 걸쳐 1년에 세 차례는 단독공연을 해왔습니다. 제게 라이브 공연은 일상입니다.”
‘우리’로부터 비판받는 고통
-이제 안치환이라는 이름에는 개인 못지않게 백업 밴드인 ‘자유’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팬들의 뇌리에도 ‘안치환과 자유’라는 풀 네임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요. 밴드 구성은 안치환씨 음악경력에 아주 중요한 지점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솔로 가수가 밴드를 구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떤 연유로 ‘자유’를 만들게 된 거죠?
“전에는 전문적인 세션맨들이 연주를 해줬는데 성에 차질 않았어요. 제가 음악적인 고집도 세고 맘에 들지 않으면 독하게 다그치는 스타일이다 보니, 저보다 나이나 경력이 많은 전문 세션맨 선배들로부터는 입맛에 맞는 음악적 만족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996년부터 밴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듬해 ‘자유’를 만들어 함께 호흡을 맞추니까 기분이 짜릿짜릿했어요. 밴드를 하는 맛이 이거다 싶었지요. 지금까지 결정해온 일 가운데 가장 잘한 것 중 하나가 밴드 ‘자유’를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밴드를 통한 라이브 가수로, 또 인기가수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은 그러나 안치환에게 ‘영광스러운 일’만은 아니었다. 대중전선을 취하는 한편 진중한 주제의식을 갖고 힘겹게 노래투쟁을 벌인다는 그의 ‘노선’에 대해 음악적 고향이라 할 민중음악계의 시선은 때로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노래운동 투사’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민중음악계는, 그가 ‘인기가수’가 되자 ‘변절했다’는 섭섭한 감정을 지우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음악은 1980년대 운동진영이 배격했던 서구의 록이었다. 이어서 그가 최고 히트작이 된 ‘내가 만일’로 완전히 스타덤에 오르고 심지어 인터넷 벤처기업의 TV광고에까지 출연하자 비난은 절정에 달했다.
주류에서 활동한 10년 동안 안치환은 격려 이상으로 배신에 대한 냉랭한 눈초리에 시달려왔다. 아마 그처럼 팬들의 ‘사랑’과 ‘안티’가 극명하게 갈린 가수도 없을 것이다.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극복해왔는가. 안치환 본인에게 가장 민감한 사항인 이 부분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격랑을 헤치고 안정을 얻은 사람마냥 얼굴이 편해 보이는 것은, 민중음악계 일각의 부정적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입장정리가 끝난 겁니까?
“이제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상당히 날카로워졌는데 지금은 들어도 내색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라고 생각했던 진영에서 오히려 물고 늘어지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술자리에서 많이도 싸웠지요. 이제는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욕먹을 소지도 분명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그 사람들이 날 이해해줄 것이라고 봐요. 그때는 의사소통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직접 만나 생각을 나누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안치환의 영역, 안치환의 한계
-안치환씨에 대한 노래운동 진영의 비판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한마디로 하자면 달라졌다는 거겠죠. 노찾사를 나올 때부터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아직도 노동진영에서는 절 차갑게 봅니다. 한때는 심지어 ‘노동자의 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제가 인터뷰에서 ‘노동자의 정서를 믿지 않는다’고 한 말이 확대된 것이었죠. 그 말에서 정서는 다름 아닌 음악적 정서를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전 ‘음악적으로’ 노동자 정서는 싸워나가야 할 대상이라고 보거든요. 노동가요가 갖고 있는 음악적 수준은 신뢰하지 않는다는 거죠. 왜 제가 노동자를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제 자신을 노래하는 노동자, 단지 돈 많이 버는 노동자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1990년 대중가수로 활동을 시작하던 시점에 한 인터뷰에서 약간은 민중가요의 유산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기사를 읽기로는 안치환씨도 민중가요진영의 신경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생각할 여지도 있었겠지요. 톤도 강했을 때였고. 하지만 전 그때 오로지 ‘이제 나의 노래를 가지고 대중 앞에 서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공정한 게임’을 하고 싶었습니다. 민중가요의 프리미엄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딛고 나아가고자 했어요. 시대상황이 변화하면서 민중가요의 힘이 약해져가는 데도 거기 안주해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