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현정은 현대 회장

“몽헌 회장, ‘삼촌이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괴로워해”

  • 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ans@donga.com

    입력2004-01-28 1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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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퍼할 여유도 없다
    • 정상영 회장, 집요하게 상속 포기 강요
    • 정몽구, “비즈니스 얽혀 있어 내가 직접 못 나서겠다”
    • 경영권 지켜내고 현대건설 되찾겠다
    • 검찰 조사받을 때 잠꼬대하며 괴로워한 정몽헌
    • 남편 죽음 지금도 안 믿겨…옷가지, 골프공 하나 안 치워
    • 사업가 집안서 자라 자연스레 경영수업
    현정은 현대 회장
    “슬퍼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어요.”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겪는 스트레스 가운데 가장 강도가 높고 후유증이 오래 가는 것이 ‘배우자의 죽음’이라고 한다. 더욱이 배우자가 오래 자리보전이라도 해서 웬만큼 죽음을 예상했던 게 아니라 아무런 기색도 없다가 돌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라면 상대 배우자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현정은(玄貞恩·49) 현대 회장은 강해 보였다. 일요일 저녁 밝은 표정으로 가족과 외식을 즐기던 남편(정몽헌 전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월요일 새벽 투신자살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을 때도, 빈소에서 경황없이 조문객을 맞으면서도, 너무도 낯익은 육신을 떠나보낸 장례식에서도, 영혼마저 훌훌 날려보낸 삼우재와 49재에서도 현 회장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 내리기 싫어 이를 앙다물기도 했지만, 향(香) 냄새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면서 그는 독한 슬픔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었다.

    반전 거듭한 경영권 분쟁

    고(故) 정몽헌 회장의 숙부인 정상영(鄭相永·68) KCC그룹 명예회장과 현정은 회장 간에 벌어진 경영권 분쟁의 불씨는 2001년 정몽헌 회장이 금호생명에서 대출받은 290억원이다. 당시 정상영 명예회장은 금호생명에 보증을 서주면서 KCC 주식을 담보로 제공했고, 그에 대한 대(代)담보로 정몽헌 회장의 서울 성북동 자택과 정 회장의 장모인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이 갖고 있던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70만주(전체 지분의 12.5%)를 넘겨받았다.



    그런데 지난해 8월4일 정 회장이 사망하면서 미묘한 상황이 빚어졌다. 정 명예회장이 현 회장에게 “몽헌이의 부채가 재산보다 많으니 상속권을 포기하고 빚잔치를 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현 회장이 상속을 포기하면 채무에서 벗어나는 대신 자택과 김문희 이사장의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은 정 명예회장의 것이 된다. 이 경우 정 명예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으로 현대그룹 경영권을 거머쥘 수 있다.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그룹의 지주회사이기 때문이다.

    이상 기류는 다른 곳에서도 감지됐다.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전혀 갖고 있지 않던 외국인 투자가들이 정 회장 사망 직후 주식을 집중 매입, 순식간에 11.48%의 지분을 확보한 것이다. 이에 정상영 명예회장은 외국인들의 적대적 M&A(인수·합병) 시도에 대비해 현대가(家) 친족들에게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사들이라고 촉구했다. 정 명예회장은 이른바 ‘범(汎) 현대가’ 계열사들을 동원해 16.2%의 지분을 매입했다. 또한 M&A 방어 차원이라며 현 회장으로부터 자사주 50만주(8.6%)를 인수했다. 그 후 정 명예회장은 “정몽헌 회장 사망후 경영권 공백상태에 빠진 현대그룹을 섭정 방식으로 직접 관리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져 현 회장측을 긴장시켰다.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매수세가 급증하면서 주가가 큰 폭으로 뛰어오르자 현 회장은 자력으로 채무 변제가 가능하다고 판단, 상속권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10월2일에는 금호생명 대출금 중 80억원을 상환했다. KCC측은 이때부터 뮤추얼펀드와 신한BNP투신운용의 사모펀드를 이용해 현대엘리베이터 주식과 현대상선 주식을 비공개로 대량 매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현대측은 10월21일 서둘러 임시 이사회를 소집, 현 회장을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에 선임했다.

    하지만 KCC는 그후에도 계속 주식을 사들였고 마침내 11월14일에는 현대그룹 인수를 전격 선언하기에 이른다. KCC는 “정상영 명예회장과 KCC 계열사가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31.25%를 확보했고, 여기에다 정 명예회장의 우호 지분(13.14%) 등 범현대가 지분까지 합치면 50%가 넘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현대측은 초강수로 맞대응했다. 11월18일 “대주주의 전횡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선진 국민기업으로 거듭나겠다”며 국민주 공모방식으로 1000만주의 현대엘리베이터 유상증자를 실시하겠다고 나선 것. 이대로 주식 공모에 성공할 경우 KCC측 지분율은 31.25%에서 11.2%로 크게 떨어지지만, 신규 발행 주식의 20%를 우리사주조합에 배정받는 현대측 지분율은 24.4%에서 21.6%로 소폭 낮아져 1대주주로 올라서게 돼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단 좌절됐다. KCC가 제기한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인 것. 12월12일 법원은 “현대엘리베이터의 신주 발행 계획은 기존 대주주 및 현 이사회의 경영권 방어 목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며 KCC의 손을 들어줬다.

    그렇다고 KCC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처지도 못 된다. KCC가 뮤추얼펀드와 사모펀드를 통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0.63%를 매입한 경위에 대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강도높은 조사를 받고 있기 때문. 금감원은 KCC가 특정기업 지분을 5% 이상 매입할 경우 5일 이내에 공시해야 하는 ‘5%룰’을 지키지 않은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금감원이 KCC의 공시 누락 사유를 단순 업무착오가 아니라 적대적 M&A를 위한 의도적 행위로 판단하고 문제의 지분에 대해 처분명령을 내릴 경우 KCC측 지분율은 9.19%로 떨어져 대주주의 지위를 잃게 된다.

    현정은 현대 회장

    현정은 회장은 지난해 10월21일 현대 회장에 취임, 남편 정몽헌 회장의 ‘후계자’가 됐다.

    1월13일 오후 서울 동숭동 현대엘리베이터 서울사무소에서 현정은 회장을 만났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인터뷰가 성사됐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창부수(夫唱婦隨). 말 없기로 소문났던 정몽헌 회장 못지 않게 현 회장의 입도 인터뷰어를 시종 긴장케 하는 ‘단답형’이었다. 정상영 명예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이 ‘왕자의 난’에 이은 ‘숙질의 난’으로 비쳐지며 비난을 사고 있는 마당에 행여 공연한 설화(舌禍)를 더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듯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르거나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대목에서는 또박또박한 어조로 ‘논술형 답변’을 이어나갔다.

    -정몽헌 회장이 생전에 정상영 명예회장과 각별한 사이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 명예회장은 2000년 ‘왕자의 난’ 때도 몽헌 회장 편을 들어줬을 뿐 아니라 몽헌 회장은 자금사정이 어려울 때면 늘 정 명예회장을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정 명예회장이 몽헌 회장 자택을 담보로 잡은 것도 다른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몽헌 회장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계속하다 마지막 남은 재산인 집마저 날릴까봐 그걸 지켜주기 위한 배려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몽헌 회장이 죽기 1년쯤 전인데, 출장을 다녀온 날이었어요. 집에 들어오자마자 마구 화를 내는 거예요. 좀체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안 해줬지만 ‘정상영 회장은 질이 나쁘다’고 하더군요. 다시 캐물으니까 정상영 회장님이 뭔가를 ‘못하게 해놨다’고만 했어요. 그 얼마 후에 숙부님 댁에 인사를 갔더니 그 댁 큰아드님이 저더러 ‘몽헌이형이 지금 무척 안 좋은 상황인데, 이걸 풀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정 명예회장)뿐이에요. 아마 도와드릴 겁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이게 병 주고 약 주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집을 담보로 가져가신 것도 저희 식구들이 길에 나앉을까봐 도와주느라 그러셨다고 하는데, 금호생명에 KCC 주식을 담보로 내준 대신 제 친정 어머니 주식을 맡으셨으니 정말 도와줄 생각이면 집이야 그냥 20억 담보 풀어서 저희한테 주시면 되잖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얽어매신 걸 보니까 그때 이미 따로 생각하신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몽헌 회장이 죽기 달포 전, 그러니까 작년 6월 말경에-이건 저도 몇일 전에 들은 얘깁니다만-샌프란시스코에서 친구가 다니러 와서 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때 ‘내가 친척들을 위하느라 혼자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정상영 회장이 그것도 몰라주고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래요.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제가 보기엔 (정 명예회장이) 애들 아빠가 죽기 전부터 회사를 가지려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처음부터 자사주를 내놓으라고 하신 걸 봐도 그렇고….”

    -몽헌 회장이 정 명예회장에게 어리광도 피우고 하면서 가깝게 지냈다고 하던데요.

    “아유, 아니에요. 딱 한 번 만났대요. 현대아산 김윤규 사장님이 정상영 회장님과 오래 전부터 친했어요. 김 사장님이 현대건설에 오래 계셨는데, KCC가 현대건설 납품업체였거든요. 정 회장님이 저희 집 담보 가져가시고 할 무렵에 김 사장더러 ‘몽헌이는 왜 안 오는 거야, 가서 오라고 해’ 하셔서 그때 한 번 찾아갔대요.”

    -그 이전에는 사이가 어땠습니까.

    “특별히 가깝거나 하진 않았어요.”

    상속 포기 강요

    -몽헌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정 명예회장이 “빚이 상속받을 돈보다 많으니 빚잔치를 하고 끝내는 게 낫겠다’고 했다면서요.

    “처음부터 줄곧 상속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셨어요. 원래는 상속 포기 여부를 석 달 안에 정해야 하는데, 못 정하면 석 달을 또 연기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도 무조건 한 달 기한을 주시면서 그 안에 포기하라고. 몽헌 회장 삼우재 끝나고 바로 그러셨어요. 애들 아빠가 죽은 날에도 그 댁 큰아드님이 아산병원에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큰일났다’ ‘우리한테 290억원 부채가 있는데…’ 하면서 왔다갔다 하더래요. 그래서 다들 ‘사람이 죽었는데 상가에서 왜 돈 얘기를 하고 돌아다니냐’며 수군거렸답니다.”

    -정 명예회장은 몽헌 회장 사망 직후인 지난해 8월 초순 외국인들이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집중 매입하자 그룹 경영권 방어를 명분으로 엘리베이터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는데요.

    “처음엔 다들 그렇게 믿었죠.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어요. 그때 미국계 GMO펀드가 엘리베이터 주식을 대량 매입해서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니까 그 펀드 관리자가 저희를 찾아와서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자기네들은 M&A가 아니라 투자 목적으로 주식을 샀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주가가 얼마까지 오를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 2년은 갖고 있을 거라고요. 그후 주가가 많이 올라서 2년이 못돼 팔긴 했는데, 팔기 전에 저희한테 와서 주식을 사겠냐고 물었어요. 저희가 돈이 없어서 못 산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처분했죠. 순수한 투자였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현대그룹의 경영권 위기는 없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지난해 8월 KCC는 ‘M&A 방어 차원’이라고 하면서도 유사시 의결권을 가질 수 있는 자사주를 요구했습니다. 현대엘리베이터 사장은 이를 거절했는데 현 회장께선 왜 주식을 내주라고 했습니까.

    “저는 그때 자사주가 뭔지 개념도 확실치 않았고, 장례식과 삼우재를 치르던 무렵이라 정신도 없었어요. 자꾸 자사주를 달라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묻길래 ‘잘은 몰라도 하여튼 정상영 회장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걸 테니 해달라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정말 도와주시는 걸로 생각했어요.”

    -정 명예회장이 현 회장께 “현대엘리베이터를 분리해서 갖고 나가라”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후 양측의 갈등이 고조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아니에요. 그런 얘긴 전혀 없었어요. 처음엔, 저희가 상속을 포기하면 저는 한 달에 한 번 회사 나와서 일 보고, 제 큰아이(장녀 지이씨)는 저의 비서로 올려서 월급 받고 생활하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또 ‘집은 너희 이름으로 돌려주겠지만 그게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당신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드님대쯤 되면 이름이 바뀔 거라고.

    그러셨는데, 이틀인가 지나서는 그것도 아까우셨는지 다시 마음을 바꿔서 ‘네가 상속을 포기하면 월급 받아서 집 문제부터 해결해야 돼. 매달 갚아서 나한테서 집을 사가야 해’ 이러세요. 나중에 우리더러 상속을 포기하라고 했느니 어쨌느니 하는 말이 나오자 욕 먹을까봐 그랬는지 친척들한테 ‘엘리베이터 하나는 떼주겠다고 했는데, 쟤가 왜 말을 안 듣고 나서서 저렇게 욕심을 부리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래요. 그 전까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으셨어요.”

    290억원에 현대그룹 ‘접수’ 가능

    -지난해 10월 초 현 회장께서 금호생명 대출금 일부를 상환한 뒤부터 KCC가 뮤추얼펀드와 사모펀드를 통해 엘리터베이터 주식 매집에 나섰더군요.

    “저희가 10월6일 평양 정주영체육관 준공식에 가기 직전에 290억원 중 80억원을 갚았습니다. 그랬더니 정상영 회장님은 화가 나서 예정됐던 평양 방문을 취소하시고는 다음날인 7일부터 계속 주식을 사셨어요. 평양에 다녀와서-10월13일로 기억하는데-제 큰아이와 신라호텔 라운지에서 정 회장님을 뵈었는데, 저희를 보자 마자 ‘지금이라도 상속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너도, 네 아이들도 앞으로 아무것도 못하게 하겠다’고 소리를 지르셨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제가 남편 빚을 단 1원이라도 갚으면 바로 그 시점부터 상속이 개시된 걸로 본대요. 정 회장님도 그걸 모르셨기에 저희가 80억원을 갚았는데도 상속을 포기하라고 소리를 지르신 거죠.”

    -돈을 갚았다고 화를 낸 겁니까.

    “저희가 빌린 돈의 담보로 엘리베이터 주식을 갖고 계셨으니 저희가 돈을 갚으면 그 주식을 도로 돌려줘야 하니까 화를 내신 거죠. 그 전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저희가 몽헌 회장한테서 상속받을 재산이 용인 마북리 땅과 현대상선 주식인데, 그 땅이 팔려야 되니까 제가 현대차 정몽구 회장님 댁에 찾아가서 땅을 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정상영 회장님께 그 얘기를 했더니 굉장히 언짢아하셔서 의아했어요. 그게 팔려야 저희가 빚을 갚을 수 있는데 왜 저러실까 해서. 뒤에 알았는데, 정 회장님이 제 친정 어머니(김문희 이사장)가 맡긴 엘리베이터 지분에 대해 저희 경영전략팀에다 견질담보 설정을 요청하셨다고 합니다.”

    견질담보가 설정되면 담보를 가진 사람은 채무자가 빚을 못 갚는다든지 해서 문제가 생길 경우 구상권을 행사, 담보를 임의로 처분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 회장이 상속을 포기해 정몽헌 회장의 부채를 갚지 않을 경우 정상영 명예회장은 정몽헌 회장의 빚 290억원만 대신 갚으면 김문희 이사장의 엘리베이터 지분 12.82%를 확보, 현대그룹을 고스란히 ‘접수’할 수 있었다는 게 현대측의 설명이다.

    -그런 사정을 현대가의 다른 친척들은 몰랐습니까.

    “저야 어느 시점부터는 아, 이 분이 회사를 뺏으려고 이러시는구나 하고 짐작했지만, 소위 범현대가라는 데는 일절 안 찾아갔어요. 찾아가기도 싫었고, 가서 뭐라고 얘기하면 숙부님에 대해 아무래도 나쁜 말을 하게 될 것 같아 영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신문에 정 회장님이 저희 주식 사신 얘기가 나오니까 그때들 아신 거예요. KCC가 뮤추얼펀드와 사모펀드에 넣어뒀던 주식을 정 회장님 명의로 공시한 날이니까. 아마 11월21일이죠.”

    -KCC는 지분 매입 과정에서 “현대차 정몽구 회장도 정상영 명예회장과 뜻을 같이 하는 범현대가의 일원”이라고 하는 등 현대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사실입니까.

    “아니에요. 처음에 자사주 매입하고 그럴 때 정 회장님이 아침 7시에 친척들을 모이라고 해서는 ‘현대가 외국인들에게 넘어가게 생겼으니 도와줘야 한다’며 주식을 사라고 했어요.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룹을 방어하기 위한 차원에서 주식을 사라고 해놓고 ‘범현대가의 합의’ 운운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그날 모인 친척 중에 어떤 분들은 저희를 도와줄 생각으로 주식을 사셨고, 또 어떤 분들은 2년쯤 전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온 터라 그런 말을 듣고도 일부러 안 사셨대요. 그게 저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또 현대시멘트 같은 곳은 주식을 샀다가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되자 아주 분개해서 ‘주식을 파는 게 현대를 돕는 일’이라고 하면서 팔았다고 해요. 현대해상화재는 완전 중립 선언을 했고.

    지금은 KCC 집안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분들만 저희 주식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프랜지 김영주 회장님 일가, 현대백화점 정몽근 회장님 일가 정도죠. 김영주 회장댁과 정상영 회장댁은 같은 불교 집안이라 절에도 함께 다니고, 몽근 회장님 부인은 정 회장님 사모님과 친하거든요. 현대중공업이 2.2%를 보유하고 있지만 이건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겁니다.”

    -정몽구 회장은 어떤 입장입니까.

    “전화 통화만 했는데, ‘비즈니스가 얽혀 있어 내가 직접 나서지는 못하겠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뒤에서 듣기로는 정몽구 회장님이 KCC를 퍽 탐탁지 않게 말씀하신대요.”

    ‘비즈니스가 얽혀 있다’는 말은 정상영 명예회장이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정 명예회장은 현대중공업의 2대 주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도 중립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가의 그 누구로부터도 조력을 못 받고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얘깁니까.

    “그렇죠.”

    -정상영 명예회장은 현 회장께서 집안 어른들과 충분히 상의하지도 않고 회장에 취임했다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습니다. 왜 그렇게 서둘러 취임했습니까.

    “10월17일 아침에 정 회장님께 취임하겠다고 말씀 드리러 갔더니 ‘내년 3월 주주총회에서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대표이사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회장에 취임하는 거니까 이사회 결의만 있으면 되는 모양이더라’고 했더니 ‘그래? 참여연대 같은 데서 다 지켜보고 있으니 법에 안 걸리게 해’ 하시대요. 그리고는 10시까지 회사에 가야 한다면서 먼저 나가셨어요.

    그런데 그날 오후에 얘기를 들으니까 정 회장님이 임원들을 모아놓고 ‘내가 현대엘리베이터 이사회 의장을 해야겠다’고 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원래는 좀 더 있다 취임할 생각이었는데 빨리 해버린 거죠. 무슨 취임식을 한 것도 아니고, 회장이라고 이름만 올렸을 뿐입니다.”

    현대건설 반드시 찾아올 터

    -법원이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는데도 국민기업화를 계속 추진할 생각입니까.

    “몽헌 회장이 늘 그랬어요. ‘기업은 어느 정도 규모가 되면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라고. 이는 정주영 명예회장님도 강조하시던 말씀이에요. 국민기업화 선언은 그런 차원에서 출발한 건데, 그 시기가 공교롭게도 경영권 분쟁과 맞물리다 보니 법원도 원래 취지보다는 이쪽에 더 무게를 실은 것 같습니다. 당장은 법적으로 그렇게 제한됐지만, 모든 게 정상화되면 마땅히 계속 추진해야 할 일입니다.”

    -금감위 증권선물위원회에서 KCC가 사모펀드와 뮤추얼펀드로 사들인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20.63%에 대한 제재수위를 낮춰 6개월 의결권 제한조치 정도만 내릴 경우 범현대가 보유 지분까지 포함하면 KCC측 지분은 50%에 육박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한 복안이 있습니까.

    “그거 알려드리면 저희 전략이 노출되는데(웃음)…. 그런 건 기자분들이 더 정보가 빠르지 않나요? 저희는 당국이 문제의 주식에 대해 강제처분 명령을 내릴 것으로 100% 확신합니다. 이 사안은 단순히 개별 기업의 경영권 다툼 차원에서 접근해선 안된다고 봐요. 불법적인 적대적 M&A 시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의 원칙을 세우는 문제입니다.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면 나쁜 선례를 남기게 돼요. 이렇게 되면 지배구조가 취약한 많은 기업들이 적대적 M&A, 특히 외국 자본의 적대적 M&A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됩니다.

    물론 선진 경영에서는 적대적 M&A를 허용해야 하는 측면도 있어요. 하지만 그 방법은 공정해야 합니다. ‘5%룰’이라는 것도 그런 공정한 게임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하지 않았겠어요? 당국이 합당한 조치를 취해줄 것으로 확신하지만, 저희로선 만에 하나 빚어질지 모를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서도 나름의 대비책을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건설, 자동차, 중공업 등 현대그룹을 견인해온 주력기업들이 대부분 분리되거나 채권단 관리 아래 들어갔습니다. 현재 그룹에 남은 회사는 엘리베이터·상선·택배·아산·증권 등 5개사가 전부인데, 향후 사업분야를 다각화할 뜻은 없습니까. 현대엘리베이터가 건설회사에 납품을 많이 하는 만큼 건설 분야 진출도 검토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만.

    “아무래도 현대건설이 현대그룹을 일궈놓은 모체니까 언젠가는 찾아와야 되지 않겠냐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어요. 당장에야 찾아올 여력이 없죠. 우선은 경영권을 방어하고 나서 회사를 잘 키운 다음에 반드시 건설을 찾아오고 싶습니다. 몽헌 회장이 그 어려운 상황에도 건설만은 끝까지 살리려고 자기가 가진 주식이든 뭐든 다 집어넣으면서 무진 애를 쓰는 걸 봤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아쉬워해요.”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대북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대북사업은 현대그룹에 큰 상처를 입힌 게 사실입니다. 언제 수익이 발생할지도 불투명한 데다, 현대아산의 재무구조도 취약합니다. 민간기업이 홀로 감당하기엔 벅찬 사업일 듯한데요.

    “제가 워낙 낙관적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올해부터는 잘 풀리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많이 합니다. 무엇보다 대북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간다는 정부 방침이 확고합니다. 김윤규 사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신년 인사를 드리는 자리에서 그런 말씀을 들었대요. 미국의 움직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밀어주시겠다고. 저도 지난주에 개성공단 사업 때문에 토지개발공사 사장을 뵈었는데, 그쪽에서도 빨리 추진하겠다고 하셨어요. 정주영 회장님과 몽헌 회장이 대북사업을 할 때만 해도 반대 여론이 하도 거세 헤쳐나가기 힘들었지만, 이젠 국민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잖아요.

    또한 남북의 도로가 연결돼 육로관광이 정례화됐고, 개성공단 착공식, 금강산·개성 양대 특구의 하위 규정이 선포되는 등 사업 여건이 크게 호전된 상황입니다. 지난해 몽헌 회장이 타계한 후 추모비를 건립하기 위해 금강산에 갔을 때 송호경 당시 아태위원회 부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하는 글’이라며 “아까운 사람을 보내게 되어 매우 안타깝다. 정 회장의 유지대로 민족이 뜻을 합쳐 남북경협사업을 반드시 성공시키자”고 해서 정주영·몽헌 회장이 그간 북측과 쌓아온 신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부에서 ‘회장님’으로 변신한지 석 달이 넘어갑니다. 그간 현 회장 일상과 성격, 사고방식 등이 많이 변했겠죠?

    “그렇게 크게 변한 건 아니에요.”

    -일단 잠이 많이 줄었겠죠?

    “제가 잠은 원래 조금 잤어요. 그 전에도 하루종일 바빴어요. 사실 요즘은 백수가 더 바쁘답니다. 바쁜 건 마찬가진데, 그 전에는 저를 위해 쓰는 시간이 많았지만 이젠 그렇지가 못하니 하루 길이가 짧아진 것 같아요. 요새는 집에 조용하게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데, 어쩌다 그럴 때가 있으면 아, 집에 혼자 있는 게 이렇게 좋은 거로구나 하고 절감하죠.”

    친가, 외가, 시댁 모두 기업인 집안

    -경영인으로 나선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웬만한 자신감 없이는 엄두를 내기 힘들었을 텐데요.

    “처음엔 나올 생각을 못했죠. 그러다 주위에서 자꾸 ‘나가야 된다’고 하시고, 또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니까 용기를 냈어요. 어려서부터 주변에 사업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낯설지는 않았어요. 더구나 현대는 전문경영인 체제가 어지간히 정착됐기에 제가 나서기에도 덜 부담스러웠습니다. 저희 친정에 딸이 넷인데 부모님은 둘째 딸인 저한테 기대를 가장 많이 하셨어요. 공부도 잘 했으니까. 학교를 일찍 들어간 데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월반을 해서 중학교에 들어가 ‘천재’라고도 했죠(현 회장은 만 17세 때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그래서 집에서도 제가 일을 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렇게 못 했죠. 더구나 결혼을 하고 보니 시댁도 좀 가부장적인 집안이고…. 하지만 언젠가는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아이들 키우고 나면.”

    현정은 회장의 친정과 외가 또한 시댁 못지 않게 유수의 사업가 집안이다. 증조부인 현기봉씨는 광주농공은행과 한국 최초의 보험회사인 조선생명을 설립했고, 조부 현준호씨는 호남은행 설립자다. 해운업체를 운영했던 부친 현영원(현대상선 회장)씨는 현대그룹과 사돈이 된 후 자신이 운영하던 신한해운을 현대상선에 흡수시켰다. 현 회장의 외조부 김용주씨는 전방그룹 창업주이며, 모친 김문희 여사는 용문중·고교를 거느린 용문학원 이사장이다. 전방 회장인 김창성 한국경영자총협회장,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이 현 회장의 외삼촌이다.

    -기업인 집안에서 자라 기업인 집안의 며느리가 되셨는데, 어린 시절 어떤 형태로든 경영수업을 받으셨겠군요.

    “의도적으로 경영수업을 시킨다든가 하는 것은 없었지만 아마 그런 게 저절로 몸에 뱄을 겁니다. 집안 어른들이 모이면 아무래도 사업 얘기를 많이 하시니까요.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얻어듣는 게 많았어요. 제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강의를 나가셔서 외갓댁에서 2년 반 정도 자랐는데, 지금은 재계 원로들이신 분들이 그때 외갓댁에 많이 오셨어요. 외할아버지가 저를 무척 귀여워하셔서 손님이 오시면 늘 저를 옆에 앉혀놓고 많은 말씀을 나누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 아버님은 아무래도 해운업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해운업은 국제적인 환경요인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그런지 늘 ‘국제적인 감각 키우기’를 강조하셨죠.”

    현정은 현대 회장

    정주영 명예회장(앞줄 오른쪽)과 정몽헌 회장(뒤줄 왼쪽) 생전에 찍은 가족사진. 정몽헌 회장 옆이 현정은 회장이고, 가운데 여자아이가 장녀 지이씨다. 정 명예회장 옆은 부인 변중석 여사.

    -기업 경영에 나선 후 정몽헌 회장을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될 때는 언제입니까.

    “중요한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 저는 속으로 기도합니다. 그 사람이 지금 이 순간 바로 제 옆에 와서 저를 돕게 해달라고. 그래서 참 좋은 결정을 하게 해달라고. 실제로 그렇게 해주고 있다고 믿고요.”

    -기도를 하신다면 종교는?

    “종교는 없어요. 결혼할 때까지 종교가 없었으니까 아무거나 믿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는 시아버님이 종교를 정하시면 나도 따라 정해야지 하고 계속 기다렸어요. 그런데 정주영 회장님이 평생 종교를 안 정하고 떠나셨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무교가 돼 버렸어요.”

    -몽헌 회장 세상 뜨신 지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 분 쓰시던 물건들은 다 정리하셨나요.

    “아뇨. 그냥 그대로 다 있어요. 남겨놓고 가신 그대로. 옷가지들도 옷장에 그대로 걸려 있고. 마당엔 그 사람이 굴려보낸 골프공 하나까지 그대로 있어요.”

    -퇴근해서 그런 물건들을 보면 마음이 더 안 좋을 것 아닙니까.

    “이제는 좀 치워야겠죠. 그런데 아이들이 못 치우게 하니까…. 걔네들도 아직 아빠를 영영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는 것 같아요. 행여 제가 치울까봐 되게들 예민해 합니다. 딸아이는 미국에 가면서도 아빠 물건 절대로 치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요.”

    -몽헌 회장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고, 진통 끝에 경영을 맡게 되느라 오래 슬퍼할 겨를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사별의 슬픔에서 일찍 벗어나 힘을 얻으실 수도 있었을 듯합니다.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계속 바쁘게 지내니까 슬퍼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고 할까. 시간도 빨리 흘러가고….”

    -당사자는 잘 극복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오히려 너무 민감하게 대하는 건 아닌가요.

    “그런 면도 좀 있어요. 어제도 어떤 모임에 나갔는데, 처음 나오신 분들 몇몇이 갑자기 막 제 손을 부여잡고는 위로를 하시더군요.”

    -실제로 좀 차가운 성격 아닌가요. 몽헌 회장 타계 후 TV나 활자매체에서 현 회장께서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간 사진기자들이 장례식으로, 삼우재로 망원렌즈를 들고 쫓아다녔지만 ‘눈물짓는 현회장’을 찍는 데 실패했다고 하더군요. 원래 강한 겁니까,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겁니까.

    “저는 남 있는 데서 잘 못 울어요. 혼자 있을 때 울면 울까.”

    -그게 마음대로 컨트롤이 됩니까.

    “아이가 셋인데 내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뭐 그런 경각심도 생겨서 마음을 강하게 먹은 것 같아요.”

    잠꼬대로 화내며 뒤척이던 MH

    -다시 떠올리기 싫겠지만, 몽헌 회장 가시던 날 얘기를 좀 해주세요. 새벽에 난데없는 전화를 받으셨을 텐데.

    “운전기사가 전화를 했는데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고…. 위에서 떨어졌다는데도 안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사더러 ‘살아계시냐’고 했더니 ‘그게…저, 12층에서 떨어지셔서요…’ 하면서 말을 못 잇더군요. 아무 생각도 없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갔습니다.”

    -전날 같이 외식도 하셨는데….

    “저희와 밥 먹을 때는 너무 명랑했기 때문에…저는 지금도 믿기지가 않아요. 왜 그랬는지….”

    -아무런 조짐도 없었습니까.

    “네. 그날은 정말 몰랐어요. 특검 끝나고 검찰로 넘어가 조사받을 때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긴 했어요.”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검찰 조사 받고 오면 표정도 안 좋았고, ‘집도 뒤질지 모른다’며 불안해했고…많이 안 좋았죠. 그 전에는 일요일이면 골프도 치러 가고 그랬는데 그 무렵엔 그 좋아하는 골프에도 관심이 없었어요. 검찰에서 조사받은 것에 대해서는 일절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안으로만 쌓아두거든요. 마음이 여리고 내성적인데 자존심은 되게 센 사람이에요. 세상 뜨기 전날 미국에서 온 친구(고교동창 박기수씨)가 애들 아빠랑 술을 마시다 시차 때문에 한 20분쯤 졸았다나 봐요. 그리고는 얼핏 정신이 들었는데, 애들 아빠가 말 한 마디 없이 앉아서 시가만 피우고 있더래요.”

    -아무리 내성적이고 과묵하다 해도 배우자에겐 최소한의 암시라도 주지 않았을까요.

    “집에서 시시콜콜한 얘기는 잘 안하는데, 대충 보면 알긴 알죠. 검찰 조사 받느라 스트레스 받는 것. 애들 아빠에게 잠꼬대하는 버릇이 있어요. 본인은 꿈을 전혀 안 꾼다고 하는데, 잠꼬대를 많이 해서 제가 줏어들었다가 다음날 물어보면 ‘그래, 맞다’고 할 때가 많았어요.”

    -돌아가시던 무렵엔 어떤 잠꼬대를 하던가요.

    “잠꼬대로 마구 화를 냈어요. 남한테 내놓고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닌데, 잠꼬대로 화를 내더라니까요. 그렇듯 답답한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니 더 힘들었겠죠.”

    장녀, 현대상선 입사

    -몇일 전에 따님 지이씨(26)가 현대상선에 입사해 벌써 경영수업에 들어간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적성에 맞고 자질도 있다면 본격적으로 경영수업을 시킬 생각이 있습니까.

    “저는 애들에 대해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강요해본 적이 없어요. 니가 하고 싶으면 해라, 그거거든요. 걔한테도 제가 ‘꼭 이 길로 나가야 된다’고 한 건 없어요. 해보다가 안 맞으면 바꿀 수도 있는 것이고.”

    -지금까지 보기엔 어떻습니까. 경영쪽으로 자질이 있는 것 같습니까.

    “걔는 회사 일 잘할 것 같아요. 성격도 유순하고 대인관계도 좋아서 별 어려움 없이 잘할 것 같아요.”

    -지이씨가 대학(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후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을 나왔기에 홍보파트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현 회장께서 재정부 근무를 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대학원에 진학할 때 경영대학원 원서와 언론홍보대학원 원서를 들고 와서는 ‘엄마, 어디에 낼까’ 하길래 ‘네가 알아서 내’ 했더니 언론홍보대학원으로 갔어요. 나중에 애들 아빠가 저렇게 될 줄 알았으면 경영대학원엘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재정부에 들여보낸 건, 일을 배우려면 여러 부를 다 해봐야 하는데 아무래도 자금 업무 같은 것 보는 게 제일 재미없을 것 같아서예요. 재미없는 걸 먼저 하는 게 낫잖아요. 요즘은 기업에서 홍보가 중요하니까 홍보부터 시켜볼까 생각도 했는데 회사 분들이 반대하셨어요. 요즘 KCC와 이러고 있으니까 예민한 부분도 있고 해서 거기 앉혀놓는 건 안 좋겠다고들 하대요.”

    -요즘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최근엔 못 읽었죠. KCC하고 한참 싸울 때 막내아들 친구 학부형이 ‘이걸 꼭 읽어야 한다’면서 책을 건네주셨는데 ‘손자병법’이었어요. 몇번 읽어보려 시도했다가 포기했어요.”

    -왜 읽으라고 하던가요.

    “읽어두면 좋을 거라고.”

    -회사 경영하는 데요?

    “경영이 아니라 경영권 방어하는 데요. 병법(兵法)이니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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