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짧은 상봉의 시간에도 이 못난 남편을 위해 무엇이라도 먹이고 싶고 더 주고 싶어하는 당신의 그 아름답고 고마운 마음 내 어찌 모르겠소. 그리고 당신도 감정을 갖인 사람인데 왜 맞나는 순간과 작별하는 순간 눈물이 나오지 않았겠소. 나는 알고 있어요. 내가 눈물을 흘리면 내 남편이 도라가서 항상 그 관경이 삼삼히 떠올라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참고 눈물을 흘리지 안었지. 정말 당신이 나를 생각하는 그 고마은 심정 무슨 말로 언제면 보답할까… 여보. 내가 준 백두산 호랑이를 액틀을 짜서 집에 걸어놓고 보시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다니 고마웠다. 북에 있건 만나지 못하건 역시 남편이 살아 있으니 죽기 전에 이런 말도 한번 들어보는구나 싶었다. 살아있어줘서 고마웠다. 평생 외로움과 고통이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준 사람이 그동안 세상천지에 어디 있던가. “그래도 영감이라고…날 이 고생을 시켜놓고는 그래도 영감이라고….” 그는 요즘 편지에서 시키는 대로 호랑이 그림을 액자에 넣어 머리맡에 걸어놓고 산다. 호랑이는 수예품이다. 남편이 북에서 낳은 딸이 남쪽의 ‘후웅어머니’를 위해 명주실로 수를 놓았다 한다.
열여덟 칸 기와집 ‘종녀’
그는 임하(안동군 임하면)의 벽계에서 태어났다.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 마을 앞을 휘돌아 내려가는 마을, 10대를 봉사하는 열여덟 칸 기와집에서 종가의 딸이라 하여 ‘종녀’라 불리며 자랐다. 의성 김씨 청계공 김진의 15대손인 아버지 김영도는 성정이 불같았으나 문장과 글씨가 인근에서 제일 가는 선비였고, 임동면 박실에서 시집 온 어머니 전주 류씨 류윤희는 얼굴에 살짝 마마자국이 났으나 국량 너른 여장부셨다. 당호는 벽계라고 썼다.
300석 이상 추수하지 말 것, 3품 이상 벼슬하지 말 것, 근동 3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이 할 것. 청계공의 유언은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점점 유명무실해졌다. 그만한 재물과 벼슬은 꿈도 꿔볼 수 없었다. 당숙, 재종, 삼종 해서 숟가락을 드는 식구만 열여덟. 대식구가 겨우 밥을 굶지 않을 정도의 살림 규모였다. 집터만은 수려해서 올려다보면 덩실하고 다가와보면 아늑했다. 사랑채 덧문 앞에는 6대조의 호를 따서 괴와구려(愧窩舊廬)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는 혼인한 지 여섯해 만에 본 첫 자식이었다. 증조부의 사랑이 한몸에 쏟아졌다. 아들이 아닌 게 섭섭해서 다음엔 꼭 아들을 낳으라고 이름은 후웅(後雄)이라고 붙여졌다. 증조부는 사랑에서 곧잘 웅아, 불러내곤 하셨다. 고자에 이응하면 공, 가자에 기역하면 각, 하면서 증조부 무릎 아래서 글자를 배웠다. 신식교육은 언감생심이었다.
후웅이란 이름 덕분인지 아래로 남동생이 셋이나 태어났다. 그 동생들을 등에다 달고 살아 등짝은 늘 젖어 있었다. “어매가 젖이 없어 갑이(동생) 개구리 뒷다리도 참 숱하게 구워 먹였니라.” 어린 시절은 다 잊었으나 집에 불이 나던 것만은 생생하다. “화재는 계유년에 났어. 기왓장이 툭툭 튀고 다락에 서숙(조)단지가 다 깨지고.” 증조부 삼년상을 치르고 나자 부친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암만해도 집 새로 짓고 초상 치르고 하느라고 골병이 드셨든 모양이래.”
김후웅씨는 처녀시절을 상주(喪主) 노릇으로 보냈다. 아무리 미성(혼인 전)이라도 고운 옷은 몸에 걸칠 새가 없었다. 일제 말기, 상중 아니라도 세상은 메마르고 어두웠다. 끼니를 굶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 만큼 온 동네가 가난에 허덕였다. “가마솥에 좁쌀을 둬되 넣고 조당수를 쑤다가 저기 아래 사람이 하나 오면 물 한 바가지 더 붓고 하나 더 보이면 한 바가지 더 붓고…” 그렇게 서른 명, 마흔 명이 한솥밥을 먹으며 근근히 견뎌낸 시절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 열여섯, 혼인할 나이가 꽉 찼지만 상중이니 혼인은 미뤄졌다. 3년상을 마치자 열아홉이 되었다. 요즘 치면 노처녀였다. 혼인이 급했다. “할배, 아부지 다 돌아가시고 사랑이 텅 비어뿌렀어. 저기 영양 청기면에서 면장질 하시던 큰아배(조부)가 사랑을 지킨다고 나오셨제. 그 어른이 중풍이 들레서 자리보전하고 누워 계셨는데 만날 ‘내가 손서(손자사위)는 광산 김씨 ‘유일재’서 보고 손부는 전주 류씨 ‘함벽당’서 봐오면 병이 나아서 벌떡 일어날따’고 하셨제. 결국 큰아배 말씀대로 다 되기는 했잔나. 병이 나아 벌떡 일어나시지야 안했어요….”
임하에서 오십리 떨어진 도산서원 가는 길에 영남의 명문사림인 광산 김씨들이 터잡고 사는 와룡면이 있다. 친정인 의성 김씨가 그렇듯 광산 김씨들도 조선 500년 동안 관직에 나서기보다는 글읽는 선비이기를 택해 살림은 가난하고 범절만 추상같았다. 불천위를 모시는 유일재 종가, 덩그런 사당에 놓인 신주가 앞들 논밭보다 훨씬 소중한 서른여덟 칸 기와집이 김후웅씨의 시가가 되었다(지금 이 집은 특이한 건축양식과 오래된 연대 때문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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