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웅씨는 올해 여든된 할머니다. 안동의 광산김씨 유일재(惟一齋) 종가의 종부다. 남편은 6·25 때 월북했다. 슬하에 혈육 한 점 없다. 아니 없지는 않았는데 어려서 홍역에 잃었다. 평생 혼자 살아왔다. 그는 자신을 위해 새옷 한 벌 스스로 산 적 없고 더운 음식 한번 스스로 입에 넣어본 적이 없다. 서른이 좀 넘으면서부터 ‘죽으면 썩을 몸’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는 무상이나 허망을 말하지 않는다. ‘어느덧 백발’은커녕 ‘세월이 어찌 이리 더디 가냐?’고 탄식한다. “왜 살아도 살아도 끝이 안나노?” 할 때가 있고 “내가 아직 칠십밖에 안됐단 말이라? 한 구십 년은 산 것 같은데”라고 천지신명의 계산 착오를 항의하고 싶어할 때도 있다. 김후웅 할머니는 바로 필자의 고모다.
사돈의 팔촌까지는 남이 아니라는 생각, 죽으면 썩을 몸이라는 생각, 그건 유일재(惟一齋) 종부 김후웅씨의 도저한 인생철학이다. 그에게는 유희도 없고 오락도 없었다. 휴식이나 재충전의 시간 같은 건 더구나 필요치 않았다. 그저 눈만 뜨면 일을 했다. 잠자는 시간을 따로 여퉈놓지도 않았다. 한밤에도 새벽에도 무언가 일거리를 끊임없이 찾아냈다. 바느질을 하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정 할게 없으면 콩바가지에서 썩은 콩이라도 골라내야 직성이 풀린다. 그의 일에는 목적이 없다. 돈을 벌기 위함도 성취감을 노린 것도 아니다. 다만 죽으면 썩을 몸을 재우거나 놀려두는 것이 너무도 아깝고 안타깝기 때문이다.
죽으면 썩을 몸
김후웅씨의 철학에 ‘죽으면 썩을 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반대되는 사상이 또 하나 있다(하긴 그는 사상이란 말이 딱 질색이다. 남편이 사상이란 괴물 때문에 북으로 넘어가버렸다고 여기니 그럴 만하다). 그건 신외무물(身外無物)이라는 이데올로기다.
추운날 옷을 얇게 입은 사람을 만나면 그는 펄쩍 뛰면서 목에 건 수건을 벗겨서 걸어준다 “날 추운데 몸을 얼려놓으면 그 냉기가 3년을 가니더, 신외무물인데 왜 요량없이…” 하며 혀를 차고 누가 행여 끼니때를 놓쳤다고 말하면 “그라면 창주(창자)가 말라버리니더. 신외무물이지 딴 게 뭐가 중하다고…”하면서 팩 우유라도 하나 사와서 먹이지 못해 안달한다.
그러나 그 신외무물은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언제나 타인에게만 해당되는 원칙이다. 스스로의 몸은 ‘죽으면 썩을 몸’이고 다른 사람의 몸만 ‘신외무물’이다. 김후웅씨는 일생 ‘죽으면 썩을’ 자신의 몸을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서 ‘신외무물’인 다른 사람의 몸을 돌보며 살아왔다.
상반된 그 두 가치가 충돌을 일으킨 적은 한번도 없다. 갈등 또한 없었다. 자신의 몸을 남의 몸과 저만치 분리하는 태도를 뭐라고 이름붙여야 할까. 희생이라기엔 너무 자발적이고 겸손이란 말은 너무 여리고 자학은 영 개운치가 않고 사랑이라기엔 쓸쓸하고 허무라고 불러봐도 적절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그에게 지난해 경천동지할 변화가 생겼다. 50년이 넘게 ‘죽으면 썩을 몸’을 각성하고 살아온 그가 여든 다된 나이에 갑자기 인생에 애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는 전화가 왔다. “야야, 통일이 되기는 될라?” “언제 돼도 되기야 되겠지요.” “내가 통일될 때까지 살아낼라?”
통일. 그 애매모호한 추상, 그러나 그것이 이제 그의 인생의 구체적인 목표가 되었다. 김후웅씨가 새삼 통일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 것은 전쟁 전에 헤어진 남편이 평양에 살아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확인한 건 한참 전이다. 남북공동성명, 이산가족 상봉, 적십자회담, 북한 방문단… 그런 뉴스가 있을 때마다 하도 속아 기대조차 않도록 길이 들었다. 그랬는데 작년 2월 드디어 그 남편을 금강산에 가서 만나고 돌아왔다. 실로 54년 만의 만남이었다.
만남의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내복 사고, 상비약 사고, 비누 치약 사고, 달러를 바꾸고, ‘거기 같이 사는 안노인’에게 줄 반지도 하나 샀다. 김후웅씨는 금강산 상봉 현장에서 울지 않았다. 사연 절절한 사람들을 따라가며 비추는 텔레비전 카메라도 이 부부를 오래 주목하지는 않았다. 감격을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으니.
54년 만에 금강산에서 상봉한 김용진·김후웅 부부.
“까짓거 둘이 있으면 머하노? 할말이 머 있노?… 남들은 울고불고 하지마는 나는 울지 말자고 작정을 하고 갔디라…눈물도 안나드라…울믄 머하노?…세월을 누가 돌레주나?…옷이 추워서 벌벌 떨어쌓는데…내복도 안입고 외투도 얄팍하고…빼빼 말라서는…본데 식성도 안좋았는데…기침도 해쌓고…말씨는 똑같드라…맹(역시) 안동말 하드라….”
이산가족 상봉 몇 달 후 일본을 경유한 편지 한통이 그에게 배달되었다. 서두가 ‘사랑하는 나의 안해 김후웅에게’라고 쓰인 편지였다. 소문을 듣고 그 편지 내용을 궁금해하는 내게 김후웅씨는 간지럼 타는 소녀들이나 낼 듯한 웃음 소리를 냈다. 전에 한번도 들어본 적 없던 웃음이었다.
“세상에 남사시러워라…이 영감 하는 수작 좀 봐라. 남사시러워라…” “한 귀절만 읽어 주세요.” “…보자…에 또…여보, 아이고 여보란다…여보는 무슨….” “계속 읽어보세요.” “꿈같이 헤어져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는지, 귀한 몸 건강히 지나는지…귀한 몸이란다. 세상에, 아이고, 날더러 귀한 몸이란다…귀한 몸은 내가 무슨….”
그날 금강산 상봉현장에서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던 김후웅씨는 55년 만에 받은 남편의 편지, 그 첫머리에 쓰인 ‘귀한 몸’이라는 말에 억누른 울음이 터졌다. 그러나 곧 그 울음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체통에 어긋나는 일로 여겼다.
보이진 않아도 그의 볼은 새색시처럼 붉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탄력있는 김후웅씨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평양에서 온 편지는 애절했다. 그는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남들만 쓰는 단어인 줄 알았던 안해, 남편, 여보, 당신 같은 감미롭고 간지러운 말들, 자신을 향해 발음되는 그 말들의 경이로움, 그걸 매번 새롭고 낯설게 음미하면서 후웅씨는 점점 웃음이 많아졌다. 별일 아닌 일에도 전에 없이 까르륵 웃는다.
“나는 당신과 작별하고 집에 도라와 밤이나 낮이나 항상 당신이 그리워 이마음 것잡을 수 없어- 세월은 흘러 흘러 어언 54년 만에 맛나니 반갑고 기쁨보다 젊은 당신이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으니- 너무나 억장이 막혀 속눈물 얼마나 흘렀는지. 내가 말주변이 없다보니 당신이 만족할 수 있는 위로의 말도 시원히 하지 못했소…당신이 걸어온 인생행로를 생각하면 그저 불쌍한 생각뿐. 붕건이 지배하는 가문이라 재가라도 했다면 내 이다지 마음이 쓰리고 아프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또 흘러 이 순간에도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어요. 종가집 맞며느리로서 시부모 모시고 궂은 일 마른 일 풍산고초 다 겪으며 살려니 내라도 옆에 함께 있으면 속푸리라도 하고 부부생활 땃뜻하고 다정한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련만. 지금도 그 넓은 집에 혼자서 고독하게 지내는 당신이 식사나 제대로 하시는지. 알치나 앉는지…자기 몸은 자기가 돌보아야 하오. 우리 7천만 겨레가 통일을 바라고 우리 장군님께서 통일의 잎길을 여러 나가시기에 조국통일은 먼 날이 아니라 가까운 앞날에 반드시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는 락관을 갖이고 통일을 앞당기는 투쟁을 힘있게 펼쳐나갑시다….”
장군님, 투쟁, 락관 같은 말이 낯설긴 했지만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편지는 신기했다. 이게 자신을 향한 말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 짧은 상봉의 시간에도 이 못난 남편을 위해 무엇이라도 먹이고 싶고 더 주고 싶어하는 당신의 그 아름답고 고마운 마음 내 어찌 모르겠소. 그리고 당신도 감정을 갖인 사람인데 왜 맞나는 순간과 작별하는 순간 눈물이 나오지 않았겠소. 나는 알고 있어요. 내가 눈물을 흘리면 내 남편이 도라가서 항상 그 관경이 삼삼히 떠올라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참고 눈물을 흘리지 안었지. 정말 당신이 나를 생각하는 그 고마은 심정 무슨 말로 언제면 보답할까… 여보. 내가 준 백두산 호랑이를 액틀을 짜서 집에 걸어놓고 보시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다니 고마웠다. 북에 있건 만나지 못하건 역시 남편이 살아 있으니 죽기 전에 이런 말도 한번 들어보는구나 싶었다. 살아있어줘서 고마웠다. 평생 외로움과 고통이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준 사람이 그동안 세상천지에 어디 있던가. “그래도 영감이라고…날 이 고생을 시켜놓고는 그래도 영감이라고….” 그는 요즘 편지에서 시키는 대로 호랑이 그림을 액자에 넣어 머리맡에 걸어놓고 산다. 호랑이는 수예품이다. 남편이 북에서 낳은 딸이 남쪽의 ‘후웅어머니’를 위해 명주실로 수를 놓았다 한다.
열여덟 칸 기와집 ‘종녀’
그는 임하(안동군 임하면)의 벽계에서 태어났다.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 마을 앞을 휘돌아 내려가는 마을, 10대를 봉사하는 열여덟 칸 기와집에서 종가의 딸이라 하여 ‘종녀’라 불리며 자랐다. 의성 김씨 청계공 김진의 15대손인 아버지 김영도는 성정이 불같았으나 문장과 글씨가 인근에서 제일 가는 선비였고, 임동면 박실에서 시집 온 어머니 전주 류씨 류윤희는 얼굴에 살짝 마마자국이 났으나 국량 너른 여장부셨다. 당호는 벽계라고 썼다.
300석 이상 추수하지 말 것, 3품 이상 벼슬하지 말 것, 근동 3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이 할 것. 청계공의 유언은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점점 유명무실해졌다. 그만한 재물과 벼슬은 꿈도 꿔볼 수 없었다. 당숙, 재종, 삼종 해서 숟가락을 드는 식구만 열여덟. 대식구가 겨우 밥을 굶지 않을 정도의 살림 규모였다. 집터만은 수려해서 올려다보면 덩실하고 다가와보면 아늑했다. 사랑채 덧문 앞에는 6대조의 호를 따서 괴와구려(愧窩舊廬)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는 혼인한 지 여섯해 만에 본 첫 자식이었다. 증조부의 사랑이 한몸에 쏟아졌다. 아들이 아닌 게 섭섭해서 다음엔 꼭 아들을 낳으라고 이름은 후웅(後雄)이라고 붙여졌다. 증조부는 사랑에서 곧잘 웅아, 불러내곤 하셨다. 고자에 이응하면 공, 가자에 기역하면 각, 하면서 증조부 무릎 아래서 글자를 배웠다. 신식교육은 언감생심이었다.
후웅이란 이름 덕분인지 아래로 남동생이 셋이나 태어났다. 그 동생들을 등에다 달고 살아 등짝은 늘 젖어 있었다. “어매가 젖이 없어 갑이(동생) 개구리 뒷다리도 참 숱하게 구워 먹였니라.” 어린 시절은 다 잊었으나 집에 불이 나던 것만은 생생하다. “화재는 계유년에 났어. 기왓장이 툭툭 튀고 다락에 서숙(조)단지가 다 깨지고.” 증조부 삼년상을 치르고 나자 부친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암만해도 집 새로 짓고 초상 치르고 하느라고 골병이 드셨든 모양이래.”
김후웅씨는 처녀시절을 상주(喪主) 노릇으로 보냈다. 아무리 미성(혼인 전)이라도 고운 옷은 몸에 걸칠 새가 없었다. 일제 말기, 상중 아니라도 세상은 메마르고 어두웠다. 끼니를 굶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 만큼 온 동네가 가난에 허덕였다. “가마솥에 좁쌀을 둬되 넣고 조당수를 쑤다가 저기 아래 사람이 하나 오면 물 한 바가지 더 붓고 하나 더 보이면 한 바가지 더 붓고…” 그렇게 서른 명, 마흔 명이 한솥밥을 먹으며 근근히 견뎌낸 시절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 열여섯, 혼인할 나이가 꽉 찼지만 상중이니 혼인은 미뤄졌다. 3년상을 마치자 열아홉이 되었다. 요즘 치면 노처녀였다. 혼인이 급했다. “할배, 아부지 다 돌아가시고 사랑이 텅 비어뿌렀어. 저기 영양 청기면에서 면장질 하시던 큰아배(조부)가 사랑을 지킨다고 나오셨제. 그 어른이 중풍이 들레서 자리보전하고 누워 계셨는데 만날 ‘내가 손서(손자사위)는 광산 김씨 ‘유일재’서 보고 손부는 전주 류씨 ‘함벽당’서 봐오면 병이 나아서 벌떡 일어날따’고 하셨제. 결국 큰아배 말씀대로 다 되기는 했잔나. 병이 나아 벌떡 일어나시지야 안했어요….”
임하에서 오십리 떨어진 도산서원 가는 길에 영남의 명문사림인 광산 김씨들이 터잡고 사는 와룡면이 있다. 친정인 의성 김씨가 그렇듯 광산 김씨들도 조선 500년 동안 관직에 나서기보다는 글읽는 선비이기를 택해 살림은 가난하고 범절만 추상같았다. 불천위를 모시는 유일재 종가, 덩그런 사당에 놓인 신주가 앞들 논밭보다 훨씬 소중한 서른여덟 칸 기와집이 김후웅씨의 시가가 되었다(지금 이 집은 특이한 건축양식과 오래된 연대 때문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새신부의 나날은 달콤하지도 우아하지도 않았다. 일구덩이였다. 얌냠한 시조모에 카랑카랑한 시어머니가 층층시하로 버티고 있었다. 신랑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랑에서 사랑어른하고 한 방을 쓰니 얼굴을 볼 새가 없지. 나는 안에서 시조모하고 한 방 쓰고…어른들이 한 달에 한 번이나 합방하라 카시는 날만 동대청방에서 만내고….”
나머지는 모조리 일이었다. 불천위는 가문의 명예이긴 했지만 제사 차리는 안주인에게는 사납고 버거운 일거리였다.
유일재는 일년에 제사를 열여덟 번 지내는 집이었다. 기제사 열세 번에 불천위 세 위에 명절 차사 두 번. 때마다 떡쌀을 디딜방아로 찧어 시루에 쪄내야했다. 식구 열여섯 말고도 사랑에 묵는 손님과 과객이 늘 예닐곱이었다.
“시집이라고 오니 또 상중이데. 시조부가 신행 전에 돌아가셨거등. 오나가나 상주질만 했제. 아이고 무서라…그래도 좋은 거는 사랑에 훤칠한 어른분들이 그득하게 앉아 계시는 거드라….”
새신부는 많은 식구 먹을 곡식을 날마다 디딜방아로 찧어야 했다. 밥할 물, 설거지할 물을 우물에서 길어와야 했고 사랑어른들 의복에 검은 때가 보여서는 안 됐다.
한복은 한번 빨래를 할 때마다 옷을 다 뜯어 새로 바느질해야 한다. 다듬이질해서 윤을 올리고 여름이면 칼칼하게 풀을 하고. 잠잘 틈은 잠시도 낼 수 없었다.
삼시 세끼 말고도 어른들을 위한 군입거리로 묵과 두부와 감주와 떡과 조과를 끊지 말아야 했다. 그 솜씨 하나하나로 친정집 범절과 견문을 평가했으니 한 호흡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가끔 만났지만 신랑은 다정했다. 북에서 보낸 편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자상하고 온화한 성격이었다. 신부에게 한번도 화난 낯빛을 보이지 않았다. 성정 강한 조부와 부친을 봐오다 신랑의 보드레한 기질을 겪게 되니 꽁꽁 언 마음에 따스한 물 한 줄기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어려서 생모를 잃어 그런가 싶어 애틋하기도 했다.
“암만 밤잠을 안 자도 어른들 옷 바느질 하다보면 신랑 옷 할 시간이 안나. 속에는 덜 꿰메고 대강 해줘도 까탈 안 부리고 입어. 전에는 이런 구멍이 없었는데 하믄서 웃기나 하지.”
그게 그렇게 고마웠다. 혼인 이듬해 해방이 됐다. 해방이 뭔 줄도 몰랐다. 추수 전에 조이삭을 세어쌓고 누룩 담글까봐 집안을 가제처럼 뒤지던 일본놈들이 물러간다니 그거 하나는 좋았지만. 어지러운 일렁임이 시골마을 안까지 번져왔다. 신랑이 자꾸 밖으로 사라졌다. 그 성정에 설마 무서운 ‘사상 가진’ 사람이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해방이야 되든 말든, 좌우 대립이야 첨예해지든 말든 새종부 김후웅은 아침저녁으로 나락 한 바가지, 서숙(좁쌀) 두바가지, 콩 한 바가지를 디딜방아에 찧어야 했다.
“콩은 왜요?”“아 그래야 콩가루 무쳐 국을 끓이제…방아 찧는게 고마 제일 큰일이따…그게 큰일 아이고 뭐로? 방아를 안찧으믄 안, 사랑, 작은 사랑, 상방, 동대청에 그득 앉았는 스물도 넘는 입에 넣을 밥이 안 나오는데?”
바쁜 중에 배가 불러왔다. 입덧이니 하는 사치를 겉으로 드러낼 형편이 못됐다. 안방에는 젊은 안어른(시어머니)이 낳은 아이가 넷이나 자라고 있었다.
“사흘을 혼자 몸부레기를 쳤어. 그래도 큰소리도 안 질렀어. 임하 가서 어매 앞에서 낳고 싶었지마는 한들고모가 친정와서 해산하다가 죽는 바람에…우리 집은 친정 와서는 아를 못낳게 하잖나. 시조모 곁에서 몸부레기를 쳐도 그 어른은 명(무명)만 잣지 암것도 몰래…낳고 보니 어린 것이 탯줄을 목에 감고 있드라.”
아들이었다. 문중에서는 새종손이 태어났다고 덜렁했다. 아이는 이마전이 번듯하고 울음이 우렁찼다.
“문중에서 쌀 한 말, 미역 스무 오리, 명태 한 떼, 말린 대구포 한 마리를 보냈드라.”
그 아이 낳고 누운 며칠이 김후웅씨 일생 중 가장 찬란한 날이 아니었을까. 남들처럼 아들과 남편이 곁에 있고 넘치는 축하 속에 일을 몸에서 떼어내고 편안히 누워볼 수 있었으니.
그 아이, 순중은 두 돌을 넘기고 ‘없애버렸다’. 동네에 홍역이 돌았다. 안방의 시누이, 시동생들에게 먼저 온 병이었다. 거기 대해 김후웅씨는 입을 꽉 다문다. 안타까워서 자꾸 다그쳤다. “의사를 보에 봤니껴?” “의사는 무슨…” “약은 했니껴?” “약은 무슨…방아 찧는 게 급해 아 한번 안아보도 못했는데.”
아이 이야기가 아무래도 김후웅씨 인생의 핵일 텐데 그는 손을 저으며 이야기를 자꾸 피한다. 아이는 이 년 남짓 왔다가 갔다. 일이 많고 시어른들 눈이 무서워 실컷 안아보지도 못했다. 어린 시누이가 “새형, 순중이 젖줘” 하고 불러야만 제 아이를 안아 젖을 물릴 수 있는 게 당시의 법도였다. 스물두 살 어린 어미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으랴. 병원은 멀고 범절은 지엄했다.
“이월 열하룻날이 두 돌인데 스무엿새날 없애부렀다. 에미 볼라고 그꾸(극구) 문앞에 붙어서 있었는 걸…벌겋게 발반(發斑)이 됐다가 그게 그만 입복이 돼서…말을 못해…그러다가 나을 줄 알았제…누가 아주 없앨 줄 알았나…물 이고 밥하는 게 급하제 아 안는 게 머가 급하노…그래서 아가 몸이 불덩거리라도 안아보지도 못햇다…안아라도 봤으먼사….” “어디다 묻었는지 아니껴?” “그걸 내가 어예 아노? 누가 갈체 주나. 묻으러 가는 날도 방아꺼리가 급해 방아만 찧었는 걸. 내가 등신이지 어데 온전한 인간이라? 아는 또 낳으믄 되는 줄 알았다. 할 일이 산더미라 울 줄도 모르고. 지금 내 앞에 그것만 있었으면….” 어리석고 무지하기 짝없는 시절. 눈 번히 뜨고 기막히게도 뻔한 병으로 자식을 놓쳐버렸다.
서울 비누공장, 왕십리 검둥다리
그럴 때 남편 용진씨는 집에 없었다. 좌익활동자로 지목되어 와룡지서에 붙들려 간 후였다. 안동형무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는 중이었다.
“뭔 일을 했길래?” “내가 그걸 아나? 어른이 (좌익)사상자이께네 그저 어른 심부름이나 했제 뭐. 방구에 삐라나 붙이고 뭐…”
용진씨가 잡혀가던 날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많은 것이 잊혀졌지만 그날 일만은 또렷하다. “여름이었는데 텃밭 울타리에 애호박이 주렁주렁 열렸어. 부엌에 쓱 들오더니 ‘저기 호박 많드라. 오늘 저녁에는 돈적(동그랗게 부치는 호박전) 좀 구워먹자…그라고 나는 오늘 상방 마루에 잘란다.’ 그래. 지금 생각하면 자기도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그랬든 모양이제. 7월이라 모깃불을 수북하게 피워놨는데 돈적을 굽기도 전에 누가 용진이, 용진이 불러서 나가고는 고만 오지를 안해.”
전봇대에 묶여 피투성이가 되게 두들겨 맞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먹고 싶다는 돈적을 한 점만 먹이고 싶었다. 시삼촌에게 부탁했다. 면회를 하긴 했으나 입술이 터져 입에 뭘 넣을 수 없는 지경이더라 했다. 그날 한 점도 축나지 않고 돌아온 돈적 보따리, 그것도 김후웅씨 마음속에 평생 따라다니는 짐이었다.
남편 용진씨는 8개월 만에 출옥했지만 후웅씨 곁에 올 수 없었다. 어른들이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은 내외합방을 해서는 안 된다고 금했기 때문이다. 낮에 퍼뜩 얼굴을 볼 뿐 이야기를 나눠볼 시간도 없었다. 그러다 곧장 서울로 피해 버렸다.
“말로는 용산에 진성이씨가 하는 비누공장에 간다 그캤어. 그 공장 사장이 좌익이었던 모양이래.” 주변에선 신랑 따라 서울로 올라가는 게 옳다고들 했다. 친정어머니가 명베를 짜서 돈을 얼마간 마련 해줬다. “명주 바지 저구리를 한 벌 짓고 속 뜨스라고 엿 한 말을 고고 해서 서울로 올라갔어. 친정 가서 칠첩 반상기도 얻고. 인제 방만 얻으면 살림을 채릴 판이었제….”
서울 비누공장은 문이 닫혀 있었다. 왕십리 검둥다리, 잊히지도 않는 곳, 거기 나서서 날마다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봤다. 그때 용진씨는 이미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어찌어찌 소문을 듣고 면회를 갔다. “머리를 홀딱 깎고 햇빛을 못봐 얼굴은 백옥같고 사람이 꼭 부처같드라.” 면회는 한 번 더 했다. 두 번째 갔을 때 용진씨는 지난 번에 넣어준 명주 바지 저고리를 푸근하게 입고 나왔다. 그게 그렇게나 흡족했다. “그걸 보이 마음이 하도 좋아서 자꾸 집에 내려가라 그카고 해서 내려왔제 뭐. 그게 마지막이제. 그라고는 이번에 첨 봤으니 보자…정축, 무인, 기묘…몇년 만이로?”
돌아오지 않는 유일재 종손
면회할 때가 1949년, 이산가족 상봉은 2003년이었다. 그 반세기는 20대의 두 젊은이를 70대 노인으로 바꿔놓았다. 김후웅씨는 순중을 없앨 때도 남편이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아이는 다시 낳으면 되려는 했다. 홍역하다 아이를 없애는 게 드물지 않을 때였으니. 물론 남편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길 기회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전쟁이 터졌다. 용진씨는 서대문형무소에서 6·25를 맞았다. 인민군이 내려와 형무소 문을 열 때 밖으로 나와 인민군에 합류했다가 북으로 함께 올라갔다는 말을 이번에 들었다. 상봉때 받은 편지에서였다.
“…나는 서울해방과 함께 서대문형무소를 출옥하여 의용군에 입대하여 정치 일꾼으로 마산까지 나갔다가 전투중 부상을 입고 신의주까지 후송되었소. 치료받다가 제대되어 평북 행정간부학교를 졸업하고 내각량정국과 과장으로 사업하다가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52년 8월 또다시 인민군대에 입대하였소. 그러나 당신을 만나러 가지 못하고 정전후 제대하였소.”
그가 한 좌익활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던지 김후웅씨는 모른다. “활동을 하기는 뭘해. 그저 사상이 그랬던 거제. 큰소리 한번 안 지른 사람인 걸.”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모른다. 기질 곱고 인정 많은 유일재 14대 종손, 그 사람이 평생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평양에 살고 있어야 하는 이유, 그 아내 김후웅씨가 평생 과부 아닌 과부로 살아야 하는 이유, 그게 뭔지 대답해 줄 사람이 지금 아무도 없다. 모질면서 어처구니없고 두려우면서 우스운 시절이었다.
전쟁은 김후웅씨에게 더 혹독했다. 인민군이 동네에 들어왔다. 어린 시누이 시동생들만 피란을 보내고 사랑어른이 편찮으셔서 그는 피란을 가지 못했다. 집에 머물러 있었던 게 죄가 됐다. 인민군들은 집집마다 식량을 얻으러 다녔다. 안주고는 못배겼다.
“배고파 죽겠으니 콩을 좀 볶아달라고 해. 그래서 가마솥에 불을 때서 콩을 볶아줬지. 군복 주머니에 불록하게 담아가데. 그거 뿐인데. 그게 무슨 사상이로? 안줄 수가 없으이 준 거 뿐인데.”
인민군이 물러가자 국군 선발대가 들이닥쳤다. 너른 집에 혼자 있는 젊은 새댁을 그들은 무참하게 두들겨 팼다. 전신에 피떡이 엉겨붙었다. 말리는 시어른은 마당에 내팽개쳐졌다. 그래도 다행히 총을 들이대지는 않았다.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나갈 때였는 데도. 주변에 인심을 잃지 않은 덕택이라고들 했다.
국군이 무서워서 선발대가 들어온 후 뒤늦게 피란을 갔다. 이번에는 피란을 간 게 화근이었다. 한실이라는 산골짜기 깊숙이 들어갔는데 거기까지 국군이 찾아왔다.
“총 끝에 칼을 꽂고 아무데나 푹푹 찌르면서 댕겨. 거기가 시종숙모집이었는데 외인을 붙인 걸 알면 집에 불을 놔부거든. 그 집 사람들 얼굴 쳐다볼 수가 없어 산으로 피했제. 아카시 단을 세 개 모아놓고 그 새에 들어갔제. 꺼먼 이불보를 덮어 쓰고 꼼짝 안하고 엎드려 있었어. 맞은 상처에 물이 들어가서 곪느라고 쑤시고 아픈 거는 말로 어예하노? 한번은 군홧소리가 저벅저벅 나더니 내 치매에 칼이 푹 꽂히는데. 한 번만 더 쑤셨으면 죽었을 껜데 그냥 지나가 버리데. 사흘을 그렇게 엎드려 있었어. 아이고, 목숨도 참 모질기도 모질제.”
구십대 시부, 칠십대 며느리
전쟁은 지나갔고 삶은 계속되었다. 가족들은 생사를 알길 없는 사람을 막연히 기다렸다. 전쟁통에 행방불명된 시동생이 하나 더 있었고 없어진 시사촌도 서넛 되었으니.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났다. 그리고 4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났다. 시대가 자꾸 달라져 갔다. 찾아오는 손은 줄었으나 제사는 줄어들 리 없고 종가를 도와주는 일손들은 차츰 떠났다. 여럿이던 시동생, 시누이들도 장성해서 집을 떠나갔다.
그러나 김후웅씨에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일거리는 여전히 산더미였고 챙겨야할 대소사가 즐비했다. 나날이 잇새가 무추름해지고 주름이 깊어지고 뼈마디가 아파오는 것 말고는. 늘어나는 재산이 있을 턱도 없고 커가면서 재롱을 부릴 아랫대도 없었다. 계절이 어김없이 윤회하듯 정확하게 절기 맞춰 찾아오는 제사만이 있었다. 제사는 그의 삶이었다. 그건 사랑을 지키고 계시는 시어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 어쩌다 유일재에 내려가보면 커다랗고 휘휘한 집안에 안채에 한 분, 사랑채에 한 분, 두 노인만 살고 있다. 말없이 조용조용, 운명을 밟듯 조심스럽게, 사랑채엔 구십대의 시부가, 안채엔 칠십대의 며느리가. 소나무로 지은 칸살 너른 집은 고요하고 아름답다. 쓰지 않아 비워둔 디딜 방앗간도 언제 한번 바빠본 적이 있더냐는 듯 호젓하기만 하다.
사랑엔 흰 무명옷을 학처럼 차려입은 시어른이 허리도 꼿꼿하게 앉아 계셨다. 무릎 앞 연상엔 단정하게 바둑책을 펼쳐두신 채. 끼니때가 되면 며느리는 외상에다 도토리 깍지만한 뚜껑을 덮은 반찬그릇을 가지런히 차려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는 마루에 놓고 큼큼 음성을 가다듬었다. “아벰요. 점심 차레왔니더.” “오냐.” 대답이 들리면 그제서야 문을 열고 ‘밥상을 들오대 눈썹에 마초이다’는 여사서의 가르침대로 상을 높이 들어올려 사랑어른 앞에 소리없이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뒷걸음질쳐서 물러나왔다. 저녁 때도 다시 그런 의식이 반복되었다. 저녁이면 일찍 불이 꺼졌다. 세월은 그 위로 사행천이 흘러가듯 천천히, 느릿느릿 흘러갔다.
2001년 4월7일 안동 유일재에서 길사(佶祀) 봉행 후 후손들이 모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가운데 족두리 쓴 이가 김후웅 할머니.
김후웅씨에게는 시어른이야말로 삶의 지주였다. 사랑 어른이 돌아가신 후 김후웅씨는 가장 애통하게 곡을 했다. 이젠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흰 휘장 친 빈소를 모셔두고 아침저녁 극진히 상식상을 그 앞에 올렸다. 그리고 3년이 지나자 비로소 무색옷을 몸에 걸쳤다.
기다리는 평양 소식
생각하면 김후웅씨의 ‘죽으면 썩을 몸’과 ‘신외무물’의 철학은 그의 가련한 처세술인지도 모른다. 그의 앞에 펼쳐진 삶이 그에게 은연중 그걸 강요했던 것일 게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남편, 큰종가의 종손 없는 종부노릇, 받들어 모셔야할 시어른, 세상의 재빠른 가치변화, 가슴에 넘쳐나는 특유의 정감, 오로지 자신이 죄인이란 자책, 거기에 덜미를 잡는 가난. 그는 요즘도 여전히 따뜻한 밥엔 선뜻 손을 대지 못한다. 새옷을 보면 천리만리 도망친다. 밥이 좀 식어야, 남이 달게 먹을 수 없을 만해져야, 비로소 죄송스럽다는 듯 숟가락을 든다. ‘죽으면 썩을 몸’이 음식을 탐해서 뭘하냐는 거다.
최근 그는 좀 시무룩해졌다. 세 번의 편지 이후 평양에서 더 이상 소식이 오지 않는 것이다. 급기야 일본에 사는 용진씨의 친구(중간에서 편지 배달을 맡아주신 분)에게 전화를 넣었다. 생전 안해보던 국제전화를 걸어놓고 그는 올겨울 내내 조마조마하다. “…죽었겠지? 날이 이래 추운데 겨울을 제대로 넘겠을라? 두터운 세타라도 보내볼껄. 기침을 자꾸 하던데 꿀이라도 한 병 가주고 갈 껄.”
그는 올겨울도 유일재 너른 안채를 혼자 지켰다. 문화재로 지정된 후 대대적인 보수를 해서 한결 단정해지긴 했지만 집은 여전히 적막하다. 그는 이제 허리가 구십도로 굽었지만 잠시도 일손을 놓지 않는다. 평양에서 다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덧붙임: 중년의 김후웅씨는 학교 다니는 시동생들 뒷바라지하러 십여년간 도시로 나가 살았다. 친정의 질녀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수발하기도 했다. 그게 바로 필자다. 덕분에 필자는 오랜 세월 김후웅씨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나의 아명은 후웅을 거꾸로 쓴 웅후(雄後)였다. 우리 집안엔 고모 이름을 거꾸로 쓰면 잘산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래서 동네마다 ‘후웅’과 ‘웅후’가 숱했고, 그 이름에 담은 염원대로 어김없이 남동생이 태어나곤 했다.
도시에 사는 동안 그가 맞닥뜨린 잡다한 직종, 산업사회의 밑바닥에 몸을 던진 경험(구멍가게에 만화방, 삯바느질에 화장품 행상, 공장노동까지)을 그는 큰 종가의 종부가 지녀야 할 품위를 먹칠하는 흠집이라고 여긴다. 내 생각은 좀 다르지만 그의 뜻을 좇아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