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에서는 고구려사로 인해 한·중간에만 이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국영토 내 주민, 역사는 모두 자국에 귀속한다는 중국의 주장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영토가 맞닿은 러시아, 티베트, 일본 등도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사를 둘러싼 한·중간 역사귀속 논쟁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 역사교과서의 동북지방과 국경문제》
현재 중국의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인민교육출판사 간(刊) ‘중국역사’(7년급 하, 2002년 12월 발행)에는 요나라에 대한 설명이 간단하다.
당나라 말기 중원의 사람들이 전란을 피해 거란지구로 가면서 야철, 집짓기, 농경이 전래되었고, 야율아보기에 의해 거란(遼)이 건국된 후 남쪽으로 발전하여 연운16주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기술한다. 거란이 어떻게 세력을 규합해 건국되고, 또한 발해를 멸망시키는가에 대한 언급 없이 이주해간 한인에 의해 생활과 문화가 발전된 듯이 기술하고 있다.
정통과 비정통의 구분
이어서 황하유역에 당나라에 이어 오대(五代)가 들어서고, 960년 조광윤(趙匡胤)에 의해 북송(北宋)이 건국된 이후는 송나라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가령 송나라와 요나라·서북지구 당항(탕구트)족이 세운 서하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송 진종 때, 요군이 대거 송을 공격하여 황하 연변의 단주성 아래에 이르러 동경을 위협하였다. (중략) 송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요군을 물리쳤다. 요송은 의화(議和)하여 요조는 철병하고, 송조는 요에 세폐(歲幣)를 주니, 역사는 이를 단연의 맹이라 칭한다. 이후 매우 오랜 기간, 요송간에는 평화국면이 유지되었다.그때 서북지구의 당항족(黨項族) 세력이 일어났다. 11세기 전기, 당항 수령 원호(元昊)는 대하국(大夏國) 황제라 칭하고, 도성을 흥경에 두니, 역사에서 서하(西夏)라 칭한다. 원호는 칭제 후 매년 송과 교전하고, 쌍방의 손실이 매우 컸다. 그후 쌍방은 화의하고, 원호는 송에 대해 칭신(稱臣)하고 송은 서하에 세폐를 주었다. 화의 후 송하의 변계무역(邊界貿易)이 흥성했다. 서하는 태학을 설치하고, 한문서를 번역하는 등 적극적으로 중원문화를 흡수하였다.(47쪽)
이 교과서는 요나라의 침입을 받은 송나라가 강화를 맺은 후 요에 해마다 막대한 물품의 세폐를 주어 평화국면이 유지되었다고 했다. 또 당항족의 서하에도 송이 세폐를 주었으나, 대신 서하는 태학, 한문서를 비롯한 중원문화를 흡수했다고 기술한다.
여기서 중원은 바로 송을 가리킨다. 요, 서하와 북송의 관계는 결국 중원(북송)이 동북지방(요)과 서북지구(서하)의 국가(민족)에 군사상 패배하고 굴욕적인 대우를 감수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요나라로 대표되는 동북지방은 결코 중원, 즉 중화의 세계가 아니다.
이어 요나라 치하의 동북지방에서는 12세기초 여진족의 아골타(阿骨打)가 병사를 일으켜 국호를 금(金)이라 하니, 그가 바로 태조(太祖)다. 중국 교과서에서는 북송에 이어 건국된 남송과 금의 대치과정에서 남송의 악비(岳飛)가 금나라에 맞서 용감히 싸운 것을 두드러지게 서술하고 있다.
남송 초년, 금군이 몇 차 남하하여, 남송 항전파는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금에 대항한 명장 악비는 금군으로부터 건강(建康)을 수복하였다. 그후 금군이 또 대거 남송을 진공하였다. 악비는 금군을 대패시키고, 허다하게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였다.송 고종과 권신 진회는 금의 역량이 장대한 것에 대항하는 것을 무서워하여, 그들의 통치를 위협하자, 금에 화(和)를 청하고, 악비 등에게 군사를 돌리도록 하고, 그들의 병권을 해제하였다. 진회는 계속 이른바 ‘모반’죄로서 악비를 살해하였다. (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