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북한 핵 관계자, 베이징서 충격발언 “對조선 적대정책 폐기하면 평화적 핵 활동도 포기 가능”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4-05-27 1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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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핵 관계자, 베이징서 충격발언 “對조선 적대정책 폐기하면 평화적 핵 활동도 포기 가능”

    북한의 외교행보가 숨가쁘다. 지난 4월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회담을 가진 김정일 국방위원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로버트 F. 케네디 당시 미 법무장관의 회고록 ‘13일(Thirteen Days)’에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군부 강경파에 의해 ‘언로가 막힌’ 흐루시초프 소련 서기장이 ABC 방송국 기자를 통해 백악관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서기장이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자신의 옛 동료에게 타협안을 전하라고 지시하자 이 동료는 ABC 기자를 만나고, ABC 기자는 이를 국무장관에게, 국무장관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백악관 참모들은 이 메시지가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지, 혹시 또다른 함정은 아닌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위기가 심화될 때, 공식 채널로는 한계를 느낀 한쪽이 제3의 경로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은 외교무대에서는 비일비재하다. 정식 발표와는 달리 무위로 돌아가도 뒷감당을 할 필요가 없이 새 타협안에 대한 상대의 생각을 미리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와 6자회담을 둘러싸고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는 2004년의 한반도 주변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에 매우 적합한 배경이다. 평양이 지난 4월 이후 다양한 신호를 보내고 있음은 여러 경로를 통해 감지된다. 4월 하순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訪中) 기간에 흘러나온 발언 내용들, 비슷한 시기 북한을 방문한 한반도 전문가 셀리그 해리슨에게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백남순 외무상 등이 했다는 이야기, 4월 말 뉴욕에서 용천(龍川) 참사 지원문제 협의를 위해 비밀리에 열린 북미 당국자 접촉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 베이징에서는 핵 문제를 다루는 일군의 북한 관계자들이 국제적인 군축·평화회의기구인 ‘퍼그워시회의(Pugwash Conference)’가 개최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4월13일부터 16일까지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열린 워크숍의 주제는 ‘새로운 동북아 안보틀의 전망’. 중국 현지 기자들에게도 일절 내용이 공개되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비공개로 진행된 이 워크숍에는 한국, 미국, 중국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한국 참석자 가운데 일부는 청와대 자문역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고, 북한전문가로 구성된 미국측 참석자들 또한 전직 국무부 고위관리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관계자 등 미 행정부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퍼그워시 사무국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북한측 참석자는 김일봉 조선반핵평화위원회 서기장과 김진범 부위원장, 유경일 비서, 김삼종 군축및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등이다. 이 가운데 눈여겨볼 사람은 김일봉 서기장과 김삼종 연구원. 김 서기장은 2001년 워싱턴에서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과 만나 북미대화의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며, 주유엔 대표부 참사관을 지낸 김 연구원은 국제회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외교관료다.



    조선반핵평화위원회는 핵 관련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공식논평을 발표하는 조직으로, 대외적으로는 조선노동당 외곽의 사회단체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을 제네바합의 위반혐의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고발하는 등 정부기구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외무성 산하의 싱크탱크로 우리의 외교안보연구원에 해당하는 군축및평화연구소는 2003년 커트 웰던 미 하원의원 등이 참석한 ‘미국-조선 포럼’을 주도하는 등 북핵 문제에 있어 비공식 대화채널의 하나로 활용되고 있다.

    관심이 집중된 것은 세미나 둘째 날인 4월14일 오후에 열린 북핵 위기 관련 세션이었다. 당초 김삼종 연구원이 서면으로 제출한 발제문은 ‘북핵 문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접근방식은 해결방식이 될 수 없으며, 미국이 북한의 정권 교체(Regime Change)를 추구하는 한 평화는 요원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북한의 기존 입장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신동아’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발제가 끝나고 자유토론에 들어가자 북한 관계자들은 발제문과는 사뭇 다른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겼다. 참석자들을 통해 교차 확인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대 메시지” vs “우발적인 발언”

    “평양은 결코 파국을 원치 않는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협력이다. 남조선과의 관계는 지금도 잘되고 있지 않은가. 부시 행정부가 대(對)조선 적대정책을 포기한다면 미국과의 관계도 잘 풀릴 수 있다. 그 경우 우리는 CVID(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 sible Dismantling·‘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의 핵 폐기’. 부시 행정부의 공식적인 북핵 문제 해결원칙)도 수용할 수 있다.”

    한 참석자는 북한측 참석자들이 사석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고 전했다. “CVID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평화적 핵 활동도 포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꼭 불가침조약이 아니라 적대정책 포기를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시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같은 개념은 당연히 김정일 위원장의 잠정적 승인을 거친 내용이다.”

    언뜻 당연해 보이는 이 발언은 그 맥락을 따지고 들어가면 매우 놀랄 만한 것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북한이 그동안 핵 문제 해결의 원칙으로 견지해온 ‘동결 대 보상’을 폐기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과 미국측이 제시해온 해결방식에 훨씬 근접한 뉘앙스를 풍긴다. 공식, 비공식을 통틀어 평양측에서 이런 수위의 발언이 나온 적은 아직까지 없었다.

    특히 북미간에 가장 견해차가 큰 부분인 ‘평화적 핵사용’까지 포기할 수 있다는 대목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단순히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폐연료봉이나 이미 보유하고 있는 - 혹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 핵무기뿐만 아니라 영변 핵단지의 연구용 원자로 등 일체의 시설을 포기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발언에 담긴 의도에 대해 각국 참석자에 따라 부분적으로 견해가 갈린다는 사실. 일부 참석자는 “북한 최고지도부가 이미 내부적으로 CVID 수용을 검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핵 문제를 털고 갈 의사가 있음을 한국과 미국에 간접적으로 전달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 이후 쏟아진 긍정적인 전망보다 한층 더 강한 이러한 관측은,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을 위해서는 한·미·일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온건파의 주장을 김 위원장이 수용한 것 같다는 매우 낙관적인 기대를 담고 있다. 북한 내부적으로는 이미 어떤 결론이 내려졌고, 이를 비공식적으로 ‘뿌리는’ 사전정지작업이 진행중이라는 견해다.

    이와는 달리 한 미국측 참석자는 “김 위원장의 최종 승인이 이뤄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김심(金心)을 얻기 위해 군부와 경쟁하고 있는 일부 온건파 세력의 계산된 애드벌룬 띄우기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히려 그동안 진행된 CVID에 관한 검토를 바탕으로 강경파를 우회적으로 압박하려는 ‘대내용 카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에는 베이징 워크숍에 참석한 북한측 인사들이 주로 외무성 출신의 ‘온건파’에 해당한다는 배경이 깔려 있다.

    반면 “크게 의미를 둘 만한 발언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하는 참석자도 있다. 우선 북한측 참석자들이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나 김계관 부상급의 북한내 핵심인사가 아닌 데다, 발언 자체도 문서화된 기조발제가 아니라 패널들과의 자유토론 도중에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므로 깊은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해석이다. 그러면서 이 참석자는 “이들이 형식적인 멘트를 읽는 대신 열린 자세로 의견을 개진한 것은 사실”이라며 “이전의 회의에서 볼 수 없던 긍정적인 징후”라고 덧붙였다.

    온건파와 강경파

    이러한 해석차이는 각국 참석자들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첫 번째와 두 번째 해석의 사이에는 북한의 주요 외교정책 결정과정에 대한 시각차가 깔려 있다. 북한에도 과연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이나 갈등이 있는지, 있다면 김정일 위원장 등 최고지도부를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격렬한지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는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랫 전부터 계속되어온 논란이다.

    4월20일부터 닷새간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반도문제 전문가 셀리그 해리슨은 “북한 군부 강경파가 2002년 북일 정상회담 당시 김 위원장이 고이즈미 일본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해 사과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는 말을 북한 당국자로부터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 당국자가 일본인 납치문제를 둘러싼 정권 내부의 불만을 외부 인사에게 밝힌 것은 처음이었다.

    ‘베이징워크숍 발언’을 의도된 사전 정지작업으로 보는 참석자들은, 이러한 분위기가 사실이라면 김 위원장이 ‘CVID 수용가능’과 같은 의사를 전격적으로 공개하기는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내부 반발을 우회해 한국과 미국에 ‘조용한 메시지’를 보낼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반면 평양의 강경·온건파는 김 위원장을 비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단지 김 위원장이 자신들의 견해와 가깝게 결정을 내리도록 ‘경쟁’하는 관계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이는 상당수 전직 북한 관료가 지지하는 견해. 베이징워크숍 발언이 ‘온건파의 애드벌룬성 발언’이라는 해석은 이러한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 즉 ‘CVID 수용가능’ 발언은 온건파 일부의 희망사항이 흘러나온 것 뿐이며, 여기에는 주도권 다툼을 염두에 둔 온건파 상층부의 계산이 깔려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바라보는 한 가지 공통점은 ‘북한이 이전과는 무언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 베이징워크숍 참석자들만 해도 “북한측 참석자들이 예전과는 달리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했고, 발언에 대한 부담감도 작은 듯 보였다”고 전한다. 개혁·개방이나 외부 경제지원에 대한 의지가 워낙 강해서 이를 기준점으로 핵 문제 해결에 접근하고 있음이 뚜렷했다는 관찰기다. 이러한 관찰은 최근 들어 곳곳에서 울리고 있는 ‘평양발 신호음’이 우연이 아니라 일관된 내부방침에 따른 것 아니냐는 관측으로 이어진다.

    베이징워크숍에서의 발언 내용은 참석자들을 통해 한국과 미국 정부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참석자는 “회의 사실과 발언 내용 등을 개략적으로 관계기관에 전달했고, 청와대에 보고되었다는 회신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미 국무부 관계자들에게 북한측 인사들의 관련발언을 정리해서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이러한 발언 내용을 우리 정부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질문에 청와대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최근 들어 곳곳에서 여러 가지 신호음이 울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두고 깊이 고민하고 있다. 뉘앙스가 극에서 극을 달리고는 있지만 이전보다 긍정적인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정부가 5월12일부터 열린 실무그룹회의나 6월의 3차 6자회담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전망을 갖는 것에는 이러한 분석이 영향을 미친다.”

    김 위원장의 전격적인 중국방문을 계기로 북한은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전방위 외교를 펼치고 있다. 이른바 ‘제2차 북핵위기’ 직전인 2002년 여름의 상황을 연상케 할 정도. 우선 일본인 납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5월 22일 평양을 재방문할 예정이고, 7월로 예정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의에는 백남순 외무상이 참석할 예정이다. 백 외무상은 2002년 브루나이 ARF 때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개별접촉을 가진 이후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분주한 서울과 평양

    물론 긍정적인 신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은 5월10일 외교소식통을 인용해 “김 위원장이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핵 완전폐기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방중 자체가 ‘핵 문제 해결에 있어 진전된 결정이 있었음을 암시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인 데다, 김 위원장이 후진타오 주석에게 “미국의 태도에 따라서는 6자회담에서 핵무기 제조 중단을 선언하고, 미국의 검증을 통해 이를 입증할 수 있다”고 전했다는 한국정부 관계자의 발언도 보도된 바 있다.

    결국 3차 6자회담을 앞두고 북한 내부에서 일정 수준의 ‘결심’이 이뤄졌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북한이 계속되는 미국의 압박에 대응해, 2002년 여름 수준의 ‘긍정적인 상황’을 복원하길 원한다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워크숍 발언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북한 최고위층의 메시지’라고 분석한 한 참석자는 “이러한 일련의 신호음은 6자회담까지 계속될 것이며, 특히 베이징 워크숍과 유사한 ‘비공식 채널’을 주의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5월18일부터 영국의 국제전략연구소(IISS)가 런던에서 개최하는 세미나라는 지적이었다.

    당초 이 세미나에는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참석한다는 설이 있었지만, IISS측은 ‘신동아’의 질의에 대해 “궁석웅 외무성 부상이 이끄는 대표단이 참석하기로 확정됐다”고 밝혔다. 6자회담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북한 외교당국의 고위급 인사가 북핵 문제와 관련해 발제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한 일. 그의 발언 내용을 통해 3차 6자회담의 전망이 보다 분명해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서두에서 설명한 쿠바 미사일 위기 얘기로 돌아가보자. 당시 백악관 참모들은 결국 문제의 ‘비공식 메신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흐루시초프와 같은 탱크부대에 근무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그를 신뢰하기로 결정하게 되고, 결국 이 대화채널은 위기를 무사히 넘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004년 봄, 한반도 주변에서 울리고 있는 신호음들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언제, 누구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야 할지 고민하는 평양과, 넘쳐나는 사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는 서울. 한반도의 외교 당국자들은 지금 몹시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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