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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⑩

1960년대 충무로 女帝 최은희

“인고의 한국여성? 난 그 역할이 너무나 지겨웠다”

  •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1960년대 충무로 女帝 최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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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얘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예전에 한 인터뷰를 찾아보니 부친이 중앙전화국 직원이었고 2남3녀 중 셋째 딸이더군요. 부모님이 많이 예뻐하셨을 텐데 배우를 한다는 말에 반대하지는 않으시던가요.

“반대가 심했죠. 그래서 데뷔가 늦었어요. 학교를 다니는 중에 자꾸 배우가 되겠다고 하니까 완강히 반대하셨거든요. 그러지 않았으면 조금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었겠죠. 다행히 연극에 데뷔하자마자 주연을 맡기도 하고 운이 좋았어요. 해방되지 않았다면 아마 일본에 건너가 배우생활을 했을 거예요. 일본에서 영화를 하자는 권고도 많이 받았지요. 다행히 곧 광복이 돼서 우리나라에서 영화일을 하게 됐죠.”

-어릴 때는 키가 유별나게 크고 남자아이 이상으로 활발해서 ‘오빠’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더군요(웃음).

“무용이나 음악,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공부는 원래 싫어하다 보니 잘하지도 못했고, 주로 그림을 그리든가 책을 보든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죠. 어머니는 늘 ‘차라리 살림을 하라’고 꾸중하셨어요. ‘오빠’라는 별명은 성격이 적극적이어서 붙여진 거였어요. 스크린 속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죠. 학교 다닐 때는 리더가 돼서 아이들을 이끌었거든요.

그러다 데뷔하고 나서 180도 바뀌었어요. 처음 극단에 들어갔는데 선배들이 이름을 물으면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니까요(웃음). 운 좋게도 첫무대부터 비중 있는 조연급 역할이 주어졌죠. 이후에도 죽 그렇게 연기를 했어요. 지금처럼 영화학교나 연극학교가 있던 시절이 아니니까 극단에서 연구생으로 있었죠. 그 때가 열일곱 살이었어요.”



연극은 친정, 영화는 시집

-극단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동창생한테 끌려가다시피 갔어요. 솔직히 나는 연극이나 영화 한 편 제대로 본 적도 없었어요. 우연히 친구 손에 끌려가서 본 영화가 문예봉씨가 주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였는데, 거기 보니 등장인물이 모두 이세상 사람 같지 않고 선녀 같았어요. 그래서 ‘나도 저렇게 돼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그때는 배우를 천시하던 시절이어서 여배우가 무척이나 귀했어요. 강홍식 선생이라고 배우 강효실씨 부친, 그러니까 최민수의 외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유명하셨는데, 그 분이 일부러 분장을 하고 여자 역할을 하셨을 정도니까요.

여러 가지로 어려웠지만 배우가 된다는 일념으로 무대에 올랐어요. 그렇게 연극을 먼저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본 선배들이 영화를 하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했죠. 그래서 처음 했던 영화가 1947년작 ‘새로운 맹서’예요. 해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죠. 그 무렵 ‘토월회’가 재조직되어 스카라극장에서 ‘40년’이라는 연극을 공연했는데 그 작품에 저는 중국 옷을 입은 장님 소녀 역할로 잠깐 출연했어요. 공연이 끝나고 동양극장에서 다른 작품을 하는데 복혜숙 선생이랑 최운봉 선생이 찾아오셨더라고요. ‘이번에 새로 영화 들어가는데 하겠느냐’는 거였죠.

그때만해도 내가 철이 없고 콧대가 높아 ‘무슨 역할인데요?’하고 되물었어요. 가져오신 대본을 봤더니 주연에다 어촌처녀 역할이니까 나에게 딱 맞거든요. 그래서 하겠다고 했죠. 그 작품이 바로 ‘새로운 맹서’로 영화 데뷔작이에요. 그 다음에 ‘밤의 태양’ ‘마음의 고향’으로 이어졌죠.”

-영화판이라는 데가 어떻던가요, 어린 나이에. 20세 전후가 아니었나 싶은데.

“나한테 연극은 친정 같고 영화는 시집 같아요. 연극무대는 앙상블을 위해 전체단원이 한데 모여 집체적으로 생활하잖아요. 연습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러다보니 서로 친해져서 가족 같은 분위기가 되는데,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찍을 때만 잠깐 모였다가 헤어지면 그뿐이고, 그러니 정이 안 갔죠. 영화를 하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친정집 가는 기분으로 연극하러 갔어요. 오죽하면 신 감독이 배우극장이라는 극단을 따로 만들었겠어요.

‘새로운 맹서’를 만든 신경균 감독은 일본에서 공부하신 분이었어요. 나 나름대로는 연극에서 주연도 했으니까 연기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사실 좌절을 많이 했죠(웃음). 연극에서는 동작이나 대사가 커야 감동이 전달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잖아요. 무대에서 하던 대로 하니까 감독님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딱 자르는 거예요.

그때까지 클로즈업이 뭐고 바스트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할말 다했죠. 선배들이 일일이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시커먼 기계가 앞에 딱 들이닥치니까 주눅이 들죠. 제약이 어찌나 많은지 정이 안 붙더라고요. 감독한테 야단을 맞고는 서럽고 속이 상해서 막 울었어요. 연기를 못한다면 오히려 나을 텐데 나름대로 감정을 잡아서 하는 데도 오버액션이라고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무척이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요.”

-데뷔작품은 반응이 좋은 편이었나요.

“그때는 35mm 영화를 찍는 것만으로도 긍지를 갖던 시절이고 영화가 많이 안 나오던 때여서 반응이 좋았죠. 영화계에서는 신인이 하나 나왔다고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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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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