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前衛에 선 신세대 무협작가들

서술 실험으로 영웅주의 뛰어넘다

  • 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 junaura@snu.ac.kr

    입력2004-06-01 1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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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습과 권위에 맞서 새로운 예술을 개척하는 전위 정신을 무협소설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새로운 서술형식을 도입해 영웅주의에 물든 무협소설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신세대 작가 3인방을 통해 한국 무협소설의 전위정신을 살펴본다.
    前衛에 선 신세대 무협작가들
    지금까지 서효원, 야설록, 용대운, 좌백, 진산 등 5명의 작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국 무협소설 작가를 모두 아우르려면 적어도 풍종호(風從虎), 설봉(雪峰), 장경(長鯨), 백야(白夜) 의 작품세계를 살펴봐야 하지만 이번 호에서 ‘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의 연재를 마무리해야 하므로 이들에 대한 검토는 다른 기회로 미룬다. 이번에는 한국 무협소설의 전위(前衛)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전위를 살펴보는 일은 앞날에 대한 전망을 가능하게 할 것이므로.

    전위란 프랑스어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한자 번역어이다. 아방가르드란 본디 20세기 초에 등장한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문예사조 개념이다. 그러나 그 의미가 확장되어 인습적인 권위와 전통에 반항하고 혁명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예술을 개척하려는 예술정신 일반을 뜻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 말하려는 전위란 바로 후자의 의미에서의 전위이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당장 다음과 같은 반문이 예상된다.

    “전위는 예술에 대한 것인데 무협소설은 예술이 아니니 전위를 무협소설에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아닌가?”

    과연 무협소설은 예술이 아닐까. 나는 무협소설 중에서도 예술과 만나는 예외적 작품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고찰은 나중으로 미루고 전위란 단어가 꼭 예술에 한정돼야 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따져보자.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무협소설에서 전위가 어떻게 가능한지부터 이야기해보자.

    유형 벗어난 새로운 모티프 창출



    고급문학과 대중문학의 차이로 흔히 고급문학이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데 비해 대중문학은 유형화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중국의 비평가 마오스안(毛時安)의 요령 있는 설명을 빌리자면, 대중문학의 유형화는 우선 모티프의 유형화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 모티프의 유형화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만약 유형화가 고정된 것이라면 대중문학은 금세 독자를 잃고 말 것이다). 대중문학에서 유형화된 모티프의 원형은 부단한 재생성(再生性)을 가지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모티프들의 주기적인 전환과 교체, 장르에 따른 모티프 원형의 다양한 변형, 형식의 가변성, 이데올로기의 영향 등이 그 변화의 원인이다.

    그 다음으로 스토리 모델의 일반성을 지적한다. 스토리는 대중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감상 층위인데, 대중문학의 여러 스토리는 하나의 스토리 모델을 공유한다. 이러한 공유는 여러 작가 사이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한 작가의 여러 작품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자기만의 스토리 모델을 만드는 일은 대중문학 작가로서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이는 작가들의 주된 관심사이다.

    반면 고급문학은 모티프의 유형화를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모티프를 창조해내기 위한 개별 작가의 부단한 노력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물론 완벽한 의미에서의 독창성과 개성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독창성과 개성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중요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편 고급문학은 스토리 모델을 중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스토리 모델의 일반성을 벗어나고자 한다. 고급문학이 중시하는 것은 스토리 자체가 아니라 스토리를 서술하는 방식이다. 고급문학 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유일무이한 텍스트가 되고자 한다.

    내가 말하려는 무협소설의 전위는 유형을 벗어난 새로운 모티프 창출과 스토리 서술방식 추구라는 두 가지 계기에서 발견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신무협’은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 계기에 대한 의식적 탐색 위에 생성되었다. 이미 살펴본 좌백과 진산, 그리고 풍종호, 설봉, 장경, 백야가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신무협’이라는 사조가 시간이 흐를수록 확산되자, 여기에도 나름대로의 유형화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예술가적 태도를 지닌 무협작가들은 이 새로운 유형을 극복하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 고민하는 모습을 역력히 드러낸다. 이러한 고민은 새로 글을 쓰기 시작한 신인작가들에게 더욱 크게 나타나거니와 그들 중에는 특히 실험적 색채가 짙은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인들의 실험, 그 중에서도 서술 실험이다. 사례로 택한 작품은 백야의 ‘취생몽사(醉生夢死)’, 문재천(文在天)의 ‘환검미인(幻劍迷人)’, 장상수(張尙洙)의 ‘삼우인기담(三愚人奇談)’세 작품이다.

    백야의 ‘취생몽사’(2000)는 서로 다른 두 무림세력에 속하는 젊은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기둥 줄거리로 삼는다. 이러한 줄거리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래, 아니 그 이전부터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되풀이되어 다루어져온 것이다. ‘취생몽사’의 경우는 작가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홍콩 신파무협소설 작가 량위성(梁羽生)의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취생몽사’의 주인공 진우천은 자하선원의 제자이다. 자하선원이 속한 오대세가(五大世家)와 삼대장원(三大莊園)의 연합세력은 20여년 전 싸움 끝에 수라교를 궤멸시킨 바 있다. 그런데 그동안 숨어서 힘을 기른 수라교가 복수를 하고자 자하선원을 습격해온다. 엿새에 걸친 싸움이 끝나고 진우천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진우천과 사랑에 빠진 여자 여리는 싸움에서 죽은 수라교주의 딸이다. 진우천은 소집 명령을 받고 자하선원으로 가던 중 여리를 만났고, 두 사람은 며칠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결전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우천은 부상당한 사부와 역시 부상당한 여리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 비극적 줄거리가 ‘취생몽사’의 전부는 아니다. 이야기를 둘러싼 액자 구성에 주목해보자.

    소설의 첫 장에서 1인칭 화자(話者)로 등장하는 인물은 상인이다. 이 화자가 예전에 겪었던 일을 회술하는 형태로 작품의 전체적 틀이 구성된다. ‘나’는 10년 전 대상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던 중 한 기이한 무림인을 만난다. 그가 바로 진우천이다. ‘나’는 진우천에게 그의 과거, 자하선원에서의 싸움과 여리와의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두 번째 장에서는 진우천이 여리를 처음 만나는 이야기가 직접화법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세 번째 장부터는 진우천의 과거 이야기가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3인칭 시점 서술은 소설의 끝까지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는 다시 처음의 1인칭 화자에 의한 서술로 회귀한다.

    ‘나’가 이끌던 대상은 도중에 사막의 비적에게 습격을 받게 되는데 이때 동행하던 진우천의 도움으로 비적을 물리친다. 진우천은 사막에 있다는 사탑(沙塔)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여리가 자기가 온 곳이라고 말한 곳이 바로 사탑이다). 진우천은 비적의 두목 천인혈을 만나 “사탑을 아느냐”고 묻는데 천인혈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진우천은 다시 길을 떠난다. 이제 마지막 장이다. 마지막 장의 시간은 현재이고 여기서 1인칭 화자인 상인은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다.

    이러한 액자식 구성은 무엇을 뜻하는것일까. 그저 멋을 부린 장식일까. 그렇지 않다. 이미지 측면으로 접근하자면, 이 작품의 핵심은 사탑과 그곳에 있다는 개미지옥이다. 진우천을 처음 만났을 때 여리가 그에게 말해준 것이 바로 이 사탑과 개미지옥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작품은 이 세계가 바로 개미지옥이고, 이 세계에서의 삶이 바로 개미지옥에 갇힌 개미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천인혈이 얼굴에 극심한 화상을 입고 등에는 기이한 모양의 점이 있다는 것은 그가 바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여리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천인혈은 진우천을 모른 체하고 진우천 역시 천인혈을 모르는 체한다. 이 장면이 ‘취생몽사’의 절정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다시 만났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공유했던 사탑과 개미지옥의 이미지인 것이다. 그리하여 진우천은 다시 사탑과 개미지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이쯤 되면 상당히 열도가 높은 허무주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라교주에게 아들이 있었고 자하선원이 어린 아들을 데려가 제자로 키웠는데 그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어쩌면 진우천이 그일지도 모르며 그렇다면 진우천과 여리는 근친상간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은 개미지옥의 허무주의적 이미지를 더욱 강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의 비극적 사건을 상세하게 서술하면서도 그것을 액자식 구성이라는 재구성된 간접 회술 형식에 밀어넣음으로써 오늘의 허무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혼란스런 도입부가 주제 부각

    문재천의 ‘환검미인’(2000)의 도입부는 독자를 몹시 당혹케 한다. 첫 장면은 설 아저씨가 시원에게 역혼비와 십방경혼진이라는 술법을 베푸는 장면이다. 설 아저씨는 천애의 고아인 시원을 10년 전에 거두어 지금까지 보살펴준 사람이다. 모두(冒頭)의 배경 소개로 독자는 그가 바로 멸문한 환검문의 살아남은 문주(門主) 설진명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설진명은 자신이 다음날 죽을 것이며, 시원은 역혼비와 십방경혼진의 술법의 힘을 빌려 살 수 있으니 환검문을 계승하라고 당부한다. 역혼비는 사람의 기억을 바꾸어놓는 술법이고 십방경혼진은 환각 속에서 일종의 가상훈련을 하게 하는 술법이다.

    그 다음엔 환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서술자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장면이 세 번 되풀이되면서 그 내용이 조금씩 바뀐다. 세 장면은 똑같이 ‘기묘일(己卯日)’이라는 표지로 시작된다. 처음 두 장면은 시원이 죽는 것으로 끝나니 환각이 분명하고 세 번째 장면에선 시원이 죽지 않으니 현실일 것 같지만, 세 장면 모두 설진명이 시원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전부 환각이라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이것은 현실임이 분명하다)에서 시원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적들을 추적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미 시원의 기억이 바뀌어 설진명을 아버지로 여기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세 번째 장면부터가 현실이 될 것이다.

    前衛에 선 신세대 무협작가들

    특이한 서술구조로 전위적 무협소설 세계를 추구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

    이러한 혼란은 작품 말미에 가서야 비로소 정리된다. 추리소설 형식을 몸통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도입부에서 제시된 의문의 내막이 밝혀져가는 과정으로 스토리를 구성한 것이다. 사실은 ‘기묘일’이라는 표지로 시작된 세 번째 장면부터가 현실이다. 그리고 설진명은 실제로 시원의 아버지였다. 오히려 처음 설 아저씨가 등장하는 장면이 조작된 기억이다. 설진명은 시원에게 술법을 베푼 일을 시원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설 아저씨의 기억을 집어넣은 것이며, 다시 그 위에 ‘기묘일’이라는 표지로 시작되는 처음 두 장면의 환각을 겹쳐 쌓은 것이다. 그러니 주인공 시원이 혼란을 겪는 것은 물론, 독자까지도 시원 못지않은 혼란을 느끼며 책을 읽게 된다.

    설진명의 이러한 행동은 무림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는 데 시원 부자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다소 개연성이 부족하여 도입부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설정했다는 느낌을 주지만, 이 작품의 핵심 모티프와는 잘 부합되는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핵심 모티프는 자아의 정체성과 그 안정성에 대한 심문이다.

    만약 기억이 자아 정체성의 근거라고 할 때, 기억이 바뀐다면 이미 같은 자아가 아니지 않겠는가. 시원은 온갖 곡절을 겪은 뒤에 자신이 환검문에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진실의 내막을 다 안 것은 아니다. 진실은 설진명이 죽통 속에 넣어 강물에 띄워보낸 편지를 통해 독자에게만 전달된다.

    그런가 하면 진실의 내막을 다 안다고 해서 자아 정체성의 안정성이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원래 설진명은 무림맹의 맹주 연운경을 죽이고 연운경으로 가장하여 환검문의 복수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자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결국 설진명이 아닌 연운경으로 변해간다. 위지혁의 경우는 더욱 극단적이다. 실종되었다던 천하제일의 고수 위지혁은 법술의 힘을 빌려 젊은 여자로 화신한다. 물론 여자가 된 위지혁의 기억은 온전하다. 그러나 그는 위지혁이기를 포기하고 선우비라는 한 여자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요컨대 이 작품은 기억과 육체, 환각과 현실, 거짓과 진실 등의 갈등 속에서 자아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불확정성의 전망을 제시하는 셈이다. 바로 이것이 작가의 의도라면 도입부의 다소 작위적인 서술은 독자에게 혼란을 체험하게 하는 아주 적절한 방법이라 할 것이다.

    장상수의 ‘삼우인기담’(1997)은 필자가 지금까지 본 무협소설 중 가장 과격한 형식 실험을 한 작품이다. 대뜸 ‘라쇼몽(羅生門)’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일정 기간 동안 벌어진 사건을 관련된 세 인물의 시각을 통해 세 차례 되풀이해 서술한다.

    세 번 반복되는 이야기

    제1권은 ‘흑사회’라는 비밀조직의 하급 살수인 주인공 남자를 1인칭 화자로 하여 서술된다. ‘나’는 처음으로 견습 살행을 나갔다가 한 여자를 범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바로 흑사회주의 딸이다. 그 후로 ‘나’는 영문 모를 사건을 거듭해 겪고, 그러다가 흑사회와 대립관계에 있는 백룡회주의 딸을 범하게 된다. 백룡회주의 딸은 ‘나’의 아내가 되겠다고 결정하고 가출하여 ‘나’와 살림을 차린다. 결국 ‘나’와 두 여자와의 일이 발각되고 ‘나’와 두 여자는 함께 탈출해야 할 상황에 봉착한다.

    제2권은 흑사회주의 딸을 1인칭 화자로 하여 서술된다. ‘나’는 나름대로 일을 해보려다가 약물에 중독되는 바람에 그만 한 하급 살수에게 강간당한다. 그 뒤로 남의 손을 빌려 하급 살수를 죽이려고 온갖 계책을 꾸미지만 거듭 실패할 뿐이다. 그러던 중 자신에게 약물을 쓴 자가 백룡회주의 딸임을 알게 되고 복수를 위해 ‘나’도 그녀에게 약물을 쓰는데, 그 결과 백룡회주의 딸이 하급 살수와 결혼하게 된다. 하급 살수와의 관계로 임신까지 한 ‘나’는 결국 모든 사실이 발각되자 두 사람과 함께 탈출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

    제3권은 백룡회주의 딸을 1인칭 화자로 삼는다. ‘나’는 살수의 침입을 눈치채고 약물을 사용하여 방비한다. 그 바람에 흑사회주의 딸이 하급 살수에게 간음당한 것을 알게 된 ‘나’는 그녀가 그를 죽이려고 꾀하는 계책에 일일이 간섭한다. 그러다 ‘나’는 그만 약물에 중독되어 하급 살수에게 간음당한다. ‘나’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하급 살수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그와 살림을 차린다. 결국 모든 사실이 발각되고 ‘나’는 하급살수와 흑사회주의 딸과 함께 탈출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작가는 세 가지 서술 사이의 관계를 정교하게 조직해 각각의 서술에 나름대로 치밀한 디테일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세 가지 서술을 종합해야만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각각의 서술은 각자 서술한 화자의 주관적 진실만 드러낼 뿐이다. 그런데 작가의 관심은 총체적 진실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주관적 진실과 그것의 한계를 드러내는 데 주된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세 인물은 저마다 자신이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남자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의 인과관계를 전혀 알지 못하니 말할 나위가 없다. 두 여자는 스스로 총명하다고 믿고 실제로도 총명하지만, 그럼에도 현실은 그녀들의 의도와 계산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작품제목 ‘삼우인기담’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들 세 사람 모두는 어리석은 사람, 바보들인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서로에게 상처와 피해를 준다. 물론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이루어진다. 작가는 개별자의 삶의 조건이 바로 이런 의미의 어리석음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작중 인물들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고 대명사나 신분 명칭으로만 불리는 것도 이러한 작가의 의도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우인기담’은 세 권으로 끝나지 않고, 그 후의 이야기를 한 권 분량으로 덧붙이고 있다. 이는 3인칭 서술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특기할 점은 시간 순서에 따르지 않고 완전히 거꾸로 서술한다는 것이다.

    스토리를 재구성해보자. 도망가려는 세 사람 앞에 백룡회주 딸의 조부가 나타나고 그에 의해 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 흑사회와 백룡회는 5년동안 협력하기로 약속하고, 주인공 세 사람은 백룡회로 가서 1부2처(一夫二妻)의 가족을 이룬다. 이곳에서 남자에겐 흑사회와 백룡회 사이의 연락책 역할이 주어진다. 남자는 주어진 일을 잘 해내고, 은연중에 능력도 개발한다(무공이 제법 높아진다). 남자는 두 여자와 두 여자가 낳은 자식들과 함께 나름대로 행복한 가정을 꾸민다.

    이렇게 보자면 일종의 ‘바보 온달’ 이야기에 가까워진 셈인데, 스토리 끝에는 결정적 파탄이 마련되어 있다. 협력을 통해 추진하던 사업이 완수되자 두 집단은 다시 대립관계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걸림돌, 즉 1부2처의 가족을 제거하자는 합의와 함께 말이다. 이것이 ‘바보 온달’ 이야기의 뒤집기라면 시간 순서에 정반대가 되는 서술은 바로 그 뒤집기의 형태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처음은 현재이다. 백룡회 쪽 장인 회갑연에 참석한 남자 가족의 행복한 모습이 그려진다. 그 다음은 그로부터 2개월 전인데 남자가 처가에서 독립하여 표국을 운영하고 있다. 그 다음은 2년 전이다. 모두 출전하고 텅 빈 처가에서 남자가 외적의 침입을 무사하게 물리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 다음은 4년 전이다. 두 집단 사이에서 연락책을 맡아 열심히 일하던 남자가 흑사회의 훈련교관으로 임무를 바꾼다. 그 다음은 5년 전이다. 백룡회에서 남자와 두 여자 사이의 결혼식이 열린다. 그 다음은 탈출 장면이다. 백룡회주 딸의 외조부의 중재로 세 사람이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이 그려진다. 마지막은 한 페이지짜리 에필로그인데, 시간적으로 처음의 현재보다 더 최근이며 다음과 같이 여섯 줄의 대화로 되어 있다.

    “평화는 지루하군.”“반년 남았소.”“앞당기고 싶소.”“지금부터?”“걸림돌이 사라질 때.”“좋소! ”

    세 개의 시각으로 이야기하는 처음 세 권의 서술방식과 비교할 때 제4권의 서술은 아무래도 필연성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제4권의 서술방식이 개별자의 실존에 대한 비관주의적 전망을 드러내기 위한 의욕의 소산임은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문학 일반의 전위에 서는 무협소설

    이상 살펴본 세 편의 작품이 보여주는 실험은 확실히 무협소설 장르 안에서 전위의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 일반의 지평에서 볼 때도 그렇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미 고급문학에서 개척된 것을 단지 원용했을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사실상 대중문학에서의 서술 실험이 낯선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대중문학은 고급문학으로부터 늘 영향을 받아왔고, 고급문학에서 개척되는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나름대로 흡수해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식의 흐름 기법이 예전에는 모더니즘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적지 않은 대중문학 작품에서 상당히 세련되게 사용되고 있다.

    대중문학이 고급문학의 시도와 실험을 원용했다는 점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실험이나 시도가 장식에 그치지 않고 서술내용과의 관계에서 적절성과 필연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고급문학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될 것인가. 그러한 영향은 고급문학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다만 욕심을 내자면 고급문학으로부터의 원용을 통해 무협소설의 전위를 확보하는 단계를 넘어 문학 일반의 지평에서 전위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실험으로까지 나아갈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세 작품만으로는 분명하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본래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은 내릴 수 있겠다. 이 작품들이 반(反)영웅주의 입장에 서 있음은 물론이요, 나아가서는 허무주의와 비관주의를 기조로 하여 삶에 대한 지배 담론의 의미 부여를 예리하게 해체하고 있는 점은 결코 낮추어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은 이번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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