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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 ⑥

前衛에 선 신세대 무협작가들

서술 실험으로 영웅주의 뛰어넘다

  • 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 junaura@snu.ac.kr

前衛에 선 신세대 무협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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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취생몽사’(2000)는 서로 다른 두 무림세력에 속하는 젊은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기둥 줄거리로 삼는다. 이러한 줄거리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래, 아니 그 이전부터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되풀이되어 다루어져온 것이다. ‘취생몽사’의 경우는 작가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홍콩 신파무협소설 작가 량위성(梁羽生)의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취생몽사’의 주인공 진우천은 자하선원의 제자이다. 자하선원이 속한 오대세가(五大世家)와 삼대장원(三大莊園)의 연합세력은 20여년 전 싸움 끝에 수라교를 궤멸시킨 바 있다. 그런데 그동안 숨어서 힘을 기른 수라교가 복수를 하고자 자하선원을 습격해온다. 엿새에 걸친 싸움이 끝나고 진우천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진우천과 사랑에 빠진 여자 여리는 싸움에서 죽은 수라교주의 딸이다. 진우천은 소집 명령을 받고 자하선원으로 가던 중 여리를 만났고, 두 사람은 며칠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결전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우천은 부상당한 사부와 역시 부상당한 여리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 비극적 줄거리가 ‘취생몽사’의 전부는 아니다. 이야기를 둘러싼 액자 구성에 주목해보자.

소설의 첫 장에서 1인칭 화자(話者)로 등장하는 인물은 상인이다. 이 화자가 예전에 겪었던 일을 회술하는 형태로 작품의 전체적 틀이 구성된다. ‘나’는 10년 전 대상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던 중 한 기이한 무림인을 만난다. 그가 바로 진우천이다. ‘나’는 진우천에게 그의 과거, 자하선원에서의 싸움과 여리와의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두 번째 장에서는 진우천이 여리를 처음 만나는 이야기가 직접화법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세 번째 장부터는 진우천의 과거 이야기가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3인칭 시점 서술은 소설의 끝까지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는 다시 처음의 1인칭 화자에 의한 서술로 회귀한다.

‘나’가 이끌던 대상은 도중에 사막의 비적에게 습격을 받게 되는데 이때 동행하던 진우천의 도움으로 비적을 물리친다. 진우천은 사막에 있다는 사탑(沙塔)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여리가 자기가 온 곳이라고 말한 곳이 바로 사탑이다). 진우천은 비적의 두목 천인혈을 만나 “사탑을 아느냐”고 묻는데 천인혈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진우천은 다시 길을 떠난다. 이제 마지막 장이다. 마지막 장의 시간은 현재이고 여기서 1인칭 화자인 상인은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다.

이러한 액자식 구성은 무엇을 뜻하는것일까. 그저 멋을 부린 장식일까. 그렇지 않다. 이미지 측면으로 접근하자면, 이 작품의 핵심은 사탑과 그곳에 있다는 개미지옥이다. 진우천을 처음 만났을 때 여리가 그에게 말해준 것이 바로 이 사탑과 개미지옥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작품은 이 세계가 바로 개미지옥이고, 이 세계에서의 삶이 바로 개미지옥에 갇힌 개미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천인혈이 얼굴에 극심한 화상을 입고 등에는 기이한 모양의 점이 있다는 것은 그가 바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여리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천인혈은 진우천을 모른 체하고 진우천 역시 천인혈을 모르는 체한다. 이 장면이 ‘취생몽사’의 절정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다시 만났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공유했던 사탑과 개미지옥의 이미지인 것이다. 그리하여 진우천은 다시 사탑과 개미지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이쯤 되면 상당히 열도가 높은 허무주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라교주에게 아들이 있었고 자하선원이 어린 아들을 데려가 제자로 키웠는데 그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어쩌면 진우천이 그일지도 모르며 그렇다면 진우천과 여리는 근친상간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은 개미지옥의 허무주의적 이미지를 더욱 강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의 비극적 사건을 상세하게 서술하면서도 그것을 액자식 구성이라는 재구성된 간접 회술 형식에 밀어넣음으로써 오늘의 허무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혼란스런 도입부가 주제 부각

문재천의 ‘환검미인’(2000)의 도입부는 독자를 몹시 당혹케 한다. 첫 장면은 설 아저씨가 시원에게 역혼비와 십방경혼진이라는 술법을 베푸는 장면이다. 설 아저씨는 천애의 고아인 시원을 10년 전에 거두어 지금까지 보살펴준 사람이다. 모두(冒頭)의 배경 소개로 독자는 그가 바로 멸문한 환검문의 살아남은 문주(門主) 설진명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설진명은 자신이 다음날 죽을 것이며, 시원은 역혼비와 십방경혼진의 술법의 힘을 빌려 살 수 있으니 환검문을 계승하라고 당부한다. 역혼비는 사람의 기억을 바꾸어놓는 술법이고 십방경혼진은 환각 속에서 일종의 가상훈련을 하게 하는 술법이다.

그 다음엔 환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서술자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장면이 세 번 되풀이되면서 그 내용이 조금씩 바뀐다. 세 장면은 똑같이 ‘기묘일(己卯日)’이라는 표지로 시작된다. 처음 두 장면은 시원이 죽는 것으로 끝나니 환각이 분명하고 세 번째 장면에선 시원이 죽지 않으니 현실일 것 같지만, 세 장면 모두 설진명이 시원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전부 환각이라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이것은 현실임이 분명하다)에서 시원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적들을 추적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미 시원의 기억이 바뀌어 설진명을 아버지로 여기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세 번째 장면부터가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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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 junau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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