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의문사위의 비전향장기수 민주화운동 인정의 문제점

악법철폐 기여했다고 ‘민주화 월계관’ 씌워줄 수는 없다

  • 글: 김종철 연세대 법대 교수·헌법학 jkim386@yonsei.ac.kr

    입력2004-07-28 1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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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신독재시절 국가권력이 행한 고문으로 사망한 5명의 비전향장기수. 그들의 죽음은 사상전향제도 폐지와 보안감호제도 개선 등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에 기여한 면이 있다. 반체제인사인 그들이 죽임을 당했던 유신독재시절,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은 반체제운동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민주화운동을 한 것으로 봐야 할까.
    의문사위의 비전향장기수 민주화운동 인정의 문제점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민주화운동 인정으로 논란에 휩싸인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이마빌딩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

    국가기관이 비전향장기수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해 논란이 일고 있다. 발단은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가 6월24일과 30일 양일간 사상전향을 거부하다 고문으로 숨진 비전향자 세 사람에 대해 민주화운동 관련 의문사로 인정하는 결정을 내린 데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선 찬반논쟁이 뜨겁고 일부 단체는 항의시위를 벌이며 심지어 위원들에 대한 테러위협까지 운운하고 있다.

    논란의 와중에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이하 민주화보상위)가 7월6일 제1기 의문사위에서 2002년 10월 요청한 또 다른 비전향자 2인에 대한 보상심의에서 ‘비전향자의 악법개폐운동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논란은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 오랜 권위주의와 독재체제의 아픔을 딛고 힘겹게 쟁취한 민주주의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설치된 두 국가기관이 동일한 사안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보이면서 나타난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이 예사롭지 않다.

    최근 우리 사회는 중요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합리적 논의보다는 감정적 대립으로 치달았다. 이번 사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이전보다 더욱 심각해지는 듯하다. 우리 사회 내부의 갈등을 뛰어넘어 대북관계에 대한 이념적 논쟁으로 비화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간 교류가 증진하고 있으나 북핵문제로 인해 한반도의 긴장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사실의 전말을 분명히 하고 법과 상식에 따라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의문사위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의문의 죽임을 당한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함으로써 국민화합과 민주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2000년 10월17일 제정된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이하 의문사규명법)에 의거해 출범한 대통령소속 국가기관이다. 당초 의문사위는 2년간 한시적으로 설치된 기관이었으나 1기 위원회의 존속기한이 만료된 후인 2002년 12월5일, 의문사규명법이 개정돼 미진한 조사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끔 허용함으로써 제2기 위원회가 출범했다.

    의문사위 활동의 전제가 되는 의문사란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의문의 죽음으로서 그 사인이 밝혀지지 아니하고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는 죽음(의문사법 제2조 제1호)’이다. 즉 의문사란 첫째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있어야 하며, 둘째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경우, 셋째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에 인하여 사망한 경우이다.



    이번 사태는 바로 이 조항이 문제가 됐다. 의문사규명법상 민주화운동이란 삼선개헌으로 박정희 장기 독재의 길을 연 1969년 8월7일 이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한 활동(의문사규명법 제2조 제2호에서 준용하는 민주화보상법 제2조 제1호)’을 의미한다.

    제2기 의문사위는 문제의 결정을 내린 6월30일자로 법에 의한 기본적 진상규명활동을 마감했고 ‘제2기 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보고서’를 마무리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임무만 남겨둔 상태다.

    반면 민주화보상위는 1999년 12월28일 의결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이하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희생된 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 국가가 명예회복 및 보상을 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도모하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국민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2000년 8월 설치된 국무총리소속 국가기관이다.

    의문사위가 진상규명을 목적으로 하는 조사기관 또는 ‘진실위원회(truth commission)’의 성격을 가지는 기관이라면, 민주화보상위는 관계자의 진정이나 의문사위의 요청에 따라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심의하고 결정 하는 기관이다. 의문사위가 민주화운동 관련 의문사로 인정하더라도 명예회복과 보상으로 구제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로, 사안에 따라 의문사위에서 인정된 민주화관련 의문사라 할지라도 민주화보상위에서 명예회복과 보상을 허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와 같은 차이를 들어 일부에선 의문사위의 이번 결정이 민주화운동의 인정과는 별개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의문사는 모든 공권력에 의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문사위가 이번에 비전향장기수의 죽음을 의문사라고 인정한 것은 명예회복이나 보상의 인정 여부와는 관계 없이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가기관의 유권적 결정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제1기 의문사위가 비전향장기수 김용성, 변형만, 손윤규, 최석기, 박융서 등 5명의 의문사에 대해 조사를 개시한 것은 2001년 2월이었다.

    의문사위에 따르면, 이들 중 김용성과 변형만은 남파간첩으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형을 마쳤으나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안감호 중 좌익사범을 담당하던 중앙정보부의 전향공작에 저항하다 강제급식과정에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손윤규는 국방경비법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던 중 계속된 전향공작과 고문에 저항하다 1976년 4월1일 강제급식과정에 사망했다. 나머지 최석기와 박융서는 국가보안법위반으로 복역중 전향공작에 저항하다 폭행으로 사망하거나 자살한 것으로 인정됐다. 제1기 의문사위는 2002년 9월 이들 가운데 김용성, 변형만을 의문사로 인정하고 나머지 3인에 대해서는 진정을 기각했다.

    그런데 제2기 의문사위는 2003년 8월 진정인의 추가조사신청을 접수해 10월23일 제1기 의문사위에서 기각된 나머지 비전향자 3인에 대한 조사재개결정을 내렸다. 제2기 의문사위는 총 8개월여의 조사 끝에 2004년 6월24일 제30차 회의에서 손윤규를 의문사한 것으로 인정했으나 최석기와 박융서에 대하여는 진상규명불능결정을 내렸다. 최석기와 박융서의 경우에도 3인의 위원이 인정을 주장하였으나 소수의견에 그쳤다. 하지만 6월28일 제31차 회의에서 최석기, 박융서의 건을 재심의하기로 의결하고 그 이틀 뒤인 6월30일 제32차 회의에서 의문사인정결정을 내려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5인의 비전향장기수는 사상전향공작의 희생자라는 점에서 동일한 지위에 있다. 그러나 제1기 의문사위에서 의문사로 인정한 김용성, 변형만의 경우는 형의 만기복역 후 보안처분대상자의 지위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 반면 이번에 제2기 의문사위에 의해 ‘의문사당한 자’로 인정된 손윤규, 최석기, 박융서 3인은 형 복역중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한 이들이다. 형량을 복역했는지 여부에 차이가 있는 것.

    이러한 차이는 제1기 의문사위의 결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김용성 등 보안처분의 근거가 됐던 사회안전법은 유신체제가 맹위를 떨치던 1975년 7월 반체제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제정된 법으로, 양심의 자유, 무죄추정의 원칙, 적법절차의 원칙을 위반한 위헌성이 문제가 돼 1989년 보안관찰법으로 대체됐다.

    한편 민주화보상위는 의문사위의 결정으로 사회적 논란이 증폭된 2004년 7월6일, 김용성과 변형만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신청을 ‘비전향자의 악법개폐운동은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제2기 의문사위의 이번 인정결정이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간첩이나 빨치산 전력자가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됐다는 식의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냉전이 종식되고 남북간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는 하지만 ‘레드 콤플렉스’에 바탕을 둔 색깔논쟁이 여전히 정치사회적 위력을 발휘하는 우리 현실에서 그러한 오해가 합리적 논의를 방해한 점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의문사위는 간첩이나 빨치산 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바 없다는 사실이다. 이번 의문사위의 결정은 간첩이나 빨치산 활동을 이유로 수감된 ‘비전향장기수의 악법개폐운동’이 민주화운동과 관련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의문사위 vs 민주화보상위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실마리는 의문사위가 결정의 근거로 삼은 ‘특별법이 정한 민주화운동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관련법은 민주화운동의 개념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해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한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제2기 의문사위는 이 규정을 문리적(文理的)으로 해석했다. 즉 비전향장기수가 사상전향공작이나 보안감호제도라는 권위주의 통치에 항거하다 고문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사망함으로써 사상전향제도를 폐지하거나 보안감호제도를 개선하는 계기를 마련해 일반 국민의 양심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 등을 회복 신장시켰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견해는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해서는 안 되며 권위주의 체제의 부당한 과거를 청산하는 정신에 맞게 민주화운동 주도자뿐만 아니라 그 ‘희생자’까지 포함해 넓게 해석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따라서 행위자의 사상이나 전력은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반사회사범이던 삼청교육대원이나 사상범이던 비전향자는 민주화 ‘운동가’일 수는 없지만 그 ‘관련자’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민주화보상위는 관련 법규정을 목적론적으로 해석해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엄격하게 해석하려 한다. 이는 권위주의체제에 의해 억압을 당하고 그에 단순히 저항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즉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그 전제가 되기 때문에 비전향자가 수감중에 반민주악법의 폐지를 주장했다는 사실만으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제1기 의문사위도 손윤규, 최석기, 박융서 사건의 경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가하려는 뜻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제1기 의문사위가 모든 비전향장기수의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다. 즉 김용성과 변형만 사건의 경우에는 민주화보상위와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 이미 형기를 마쳐 국법위반에 대한 죄과를 치렀는 데도 행정처분에 의해 보안관찰 대상자가 된 사실을 고려한 것. 때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가하려는 뜻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위헌적요소가 강한 사회안전법의 철폐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민주화 관련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결국 비전향장기수의 민주화운동 관련성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자유민주헌정의 회복과 신장에 기여하는 저항활동이 있다면 사상적 경향이나 전력은 불문하고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태도로서 제2기 의문사위의 견해이다. 둘째는 저항활동만으로는 부족하며 저항활동이 추구하는 목적이 대한민국의 정통성 및 존재를 부인하거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행위와 무관하여야 한다는 태도이다. 김용성과 변형만 사건이 그 요건을 충족하는지에 관해서는 사실판단에 차이가 있지만 별개요건의 인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민주화보상위와 제1기 의문사위의 견해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판단할 때 ‘자유민주헌정에 대한 존중’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필요할까? 원론적으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필요하다’일 수밖에 없다. 민주화운동이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를 지향하는 적극적 의미가 내포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국가공동체 형성의 근간으로 삼고 있으며 이 질서를 위협하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제재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화는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개별적 활동만으로 판단할 수 없으며 자유민주주의라는 특정 가치의 실현과 연계된 총체적인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의문사위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해할 의도가 명백한 데도 특정 행위가 자유민주헌정의 회복과 신장에 ‘결과적으로’ 기여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했다면 그것은 ‘민주화’라는 개념에 내포된 총체적 가치지향성을 무시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적에게 민주화운동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자가당착적’ 결과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의문사위의 궁색한 논리

    자유민주헌정의 회복은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모든 항거의 결과이겠지만 그에 대한 국가적 ‘승인(endorsement)’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한 항거에 선별적으로 인정돼야 한다. 즉 항거는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부정하는 전체주의체제로 전환하려는 전략적 고려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원론적 요건을 회피하기 위해 의문사규명법에서 요구하는 의문사의 판정요건이 ‘민주화운동일 것’이 아니고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것’임을 강변하는 의문사위의 태도는 그 취지를 백분 이해한다 해도 지나치게 형식논리적이고 궁색하다. 국가기관이 특정행위를 민주화라는 가치지향적 개념과 연관된 것으로 ‘승인’하는 것은 민주화의 내용상 반민주적 의도를 가진 자들의 활동을 관용적으로 사실상 ‘허용(permission)’하는 것과는 엄연히 구별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배경이 된 유신체제에서의 민주화운동은 통치권력의 반민주적·반자유적 성격으로 인해 반체제운동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반유신체제운동도 자유민주헌정의 회복을 위한 반체제운동과 전체주의 실현 과정의 반체제운동으로 구별될 수 있지만 후자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지금 보수적인 단체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도 이번 의문사위의 결정에 혼란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가치충돌현상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상징성과 본질은 단순히 법률적 자구 해석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번 의문사위의 결정에 대한 비판여론을 단순히 ‘색깔론의 재탕’이라며 감정적으로 치부하는 것은 경솔한 태도이다. 그보다는 민주화운동의 개념에 대한 헌법적 의미를 분명히 하면서 의문사위와 민주화보상위의 활동목적을 명확히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원론적 결론에 지나친 기대를 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의문사 진상규명의 본질은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체제의 부당한 공권력 남용이 국민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했던 과거에 대한 자기반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문사위가 민주화운동을 폭넓게 해석하려는 것도, 일부 극우주의자가 단정하듯이 자유민주헌정에 대한 존중이라는 원론적 의미를 부정해서라기보다는 이런 원론적 요건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 불합리와 한계가 있음을 의식한 것으로 새길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의사라는 것은 매우 모호한 개념이다. 이러한 모호함은 국가권력이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국민의 활동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위험성이 크다. 한 사람의 반체제자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무고한 열 사람의 민주운동가에게 씌워질 민주화운동의 월계관을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자유민주헌정에 대한 존중이라는 요건은 속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현실에서 구체적이고 객관적이며 자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다. 더구나 그러한 확인행위가 행위자의 양심의 자유와 충돌함으로써 자유민주헌정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다시금 거론된 사상전향제도는 자유민주헌정의 핵심적인 요소인 ‘양심유지의 자유’ 내지 ‘침묵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이 지극히 크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민주화과정에 우선 폐지됐던 것이다.

    우리 민주화는 아직 ‘저발전단계’

    우리가 경험한 과거 권위주의체제는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해 국가권력을 남용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갖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무자비하게 침해하던 체제다.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민주화운동 관련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은 이러한 권력남용의 뼈저린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항구적으로 보장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런 점에서 애초에 의문사위의 조사대상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제한한 것은 과거 청산의 기본목적에 비추어 부적절했으며 의문사위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족쇄가 되어 이번 사태처럼 본질이 전도된 이념논쟁의 중심에 의문사위를 몰아넣었다.

    애당초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자유대한민국의 존립 근거인 국민의 생명이 유린당한 모든 사건이 대상이 됐어야 했다. 일각에서는 간첩이나 빨치산은 국민으로서 자유와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으며 과거 청산의 과정을 통해서도 명예회복이나 보상을 해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민주화보상위가 만기출소 후 보안감호 되던 김용성과 변형만 사건의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부인한 것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전가의 보도로 허용할 수 없는 반자유민주적 발상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런 전체주의적 발상이 횡행하는 것은 우리의 민주화가 아직도 저발전단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나라 자유민주헌법은 모든 국민이 특정 사상을 보유 했다는 사실만으로 자유와 권리의 본질을 침해할 수 없으며 국가는 그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정을 부인하고 전복하기 위해 구체적 행동에 돌입한 자는 방어적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국법대로 처벌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반하는 고문이 당연시되거나 상응한 처벌과 무관한 인권의 주장을 원천적으로 부인당하지는 않는다.



    결국 이번 사태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실정법의 한계를 법률의 해석으로 극복하려는 시도가 엉뚱하게 사상논쟁으로 비화된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운동의 헌법적 의미를 가볍게 처리한 의문사위도 그 과오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의문사의 본질에 무감했던 우리 자신도 그토록 수호하려는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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