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SK ‘재벌개혁 실험’ 1년 현주소

날개 단 사외이사, 발품 파는 회장님, 직원들은 관망중

  • 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ans@donga.com

    입력2004-07-29 14:5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강요된 투명화’의 급발진. 2003년 6월, SK그룹이 개혁을 선언했다. 구조조정본부 해체, 투명경영, 독립경영을 내걸었다. 분식회계, 총수 구속, 소버린의 경영권 위협 등 거센 폭풍우에 벼랑 끝까지 내몰리다 힘겹게 붙잡은 끈이었다.
    • 그후 1년. 한국 재벌개혁의 시금석이 될 SK는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
    SK ‘재벌개혁 실험’ 1년 현주소
    지난해 6월, 재계 3위의 SK그룹은 구조조정본부 해체와 계열사들의 독립·투명경영을 뼈대로 한 ‘기업구조 개혁방안’을 내놓았다. 계열사별로 이사회 중심의 독립경영을 유도해 그룹을 ‘SK 브랜드와 기업문화를 공유하는 독립기업들의 네트워크’로 변신시킨다는 것.

    또한 회계 정보의 투명성을 높이고 내부 감사 기능과 사외이사의 내부 거래 감시제도를 강화해 투명경영체제를 정착시키며, 이사회 내 윤리위원회 설치 등을 통해 윤리경영의 토대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지천명(知天命)에 홍역을 앓은 SK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SK는 창립 50주년인 지난해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과 SK해운 등의 대규모 분식회계가 드러나고 그룹 오너인 최태원 SK(주) 회장이 구속되는 이른바 ‘SK사태’ 와중에 외국계 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이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SK(주) 주식을 집중 매입, 일약 2대 주주로 올라서면서 경영권을 위협받는 지경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SK사태의 원인으로 지적된 옛 재벌 시스템으로는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사실상 그룹경영체제의 해체를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울러 소버린과 시민단체들이 SK 경영진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문제삼으며 압박해옴에 따라 생존 차원에서라도 투명경영을 표방해야 했다. ‘투명해야 살아남는다’는 절박한 현실을 온몸으로 깨친 것이다.

    비록 외부의 자극으로 ‘강요된 개혁’이긴 해도 SK가 내건 약속은 주목할 만하다. 그대로 실천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형태의 선진적인 기업 지배구조 모델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SK가 약속한 개혁, 그리고 SK에게 요구되고 있는 개혁이 워낙 폭도 넓고 강도도 높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SK 개혁을 한국 재벌개혁의 시금석으로 보는 이도 적지 않다.



    개혁을 선언한 지 꼭 1년이 지난 오늘, SK의 ‘주소’는 어디일까.

    이사회 사상 첫 부결

    “사외이사로서의 존재 이유를 실감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SK(주)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이화여대 서윤석 경영대학장의 말이다.

    “여러 기업에서 사외이사를 해봤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기업 정관에는 대부분의 안건을 이사의 과반수 혹은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통과시키게 돼 있는데, SK(주)는 이사 10명 중 7명이 사외이사라 사외이사들이 사실상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더욱이 이사회에서 의장인 최태원 회장은 거의 발언하지 않고 사외이사들의 얘기를 듣기만 하는 편이다. 몇일 전에는 회사에서 올린 안건 하나를 부결시키면서 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더니 최 회장을 포함한 사내이사들이 이의를 제기하기는커녕 ‘우리가 놓친 것까지 챙겨줘서 고맙다’고 했다. 솔직히 우리도 그런 반응에 놀랐다.”

    SK(주) 이사회가 안건을 부결시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2001년 38회, 2002년 26회, 2003년 34회의 이사회를 열었지만 지금껏 안건이 부결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 회부된 안건은 부채규모 축소를 목적으로 한 모종의 거래였는데, 사외이사들은 회계자료 등을 꼼꼼하게 검토한 끝에 ‘거래조건이 명확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부결시켰다. 실무 차원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을 사외이사들이 회계, 법률 분야 등의 전문성을 발휘해 짚어낸 것. 서윤석 교수는 이 과정에서 몇 가지 ‘건강한 신호’를 발견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사회가 더 이상 ‘거수기’가 아니라 브레이크를 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실무 임직원들에겐 안건을 대충 만들어 올렸다간 낭패를 보게 된다는 경각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또한 사외이사들이 기업에 대한 감시·견제 기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컨설팅 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다는 것도 입증했다. 사외이사제가 뿌리내린 미국에선 사외이사들이 단지 사내이사들과 대결구도를 갖추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이 장기 전략을 수립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독립·투명경영을 위한 핵심장치라 할 이사회의 운영 의지와 방향에 있어서는 일단 합격점을 받은 셈이다.

    지난 1월말 SK(주)는 사외이사 비중을 올해는 과반수로, 2006년부터는 70%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지배구조 개선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2월22일 열린 이사회에서 최태원 회장이 “어차피 할 거라면 2006년까지 미룰 것 없이 당장 올해부터 실시해보자”고 제안, 2년 앞당겨 시행하게 됐다. 코 앞으로 다가온 3월 주주총회에서 소버린과 표 대결을 벌일 것에 대비한 포석이었다.

    마침내 주총 표 대결에서 승리한 SK측이 일반 주주 등의 추천과 사외이사 후보 추천자문단의 검증을 거쳐 선임한 사외이사는 조순 전 부총리, 박호서 전 유공 이사, 남대우 전 광업진흥공사 이사, 한영석 변호사, 오세종 전 장기신용은행장, 김태유 서울대 공대 교수, 서윤석 이화여대 경영대학장 등 7명. 남대우 사외이사는 주총에서 SK와 소버린이 함께 추천한 인물이다.

    대표이사가 겸임하던 이사회 의장은 이사회에서 선임하도록 해 경영과 감시의 ‘역할분담’을 기했다.

    SK ‘재벌개혁 실험’ 1년 현주소

    SK(주)는 사외이사들에게 개인 집무실을 제공했다. 집무실 개소식 광경(5월4일).

    SK(주) 이사회에서 특히 눈여겨볼 만한 점은 이사회를 보좌하기 위해 사무국을 신설하고, 이사회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산하 소위원회 격인 전문위원회를 둔 것. 국회로 말하면 각각 사무처와 상임위원회에 해당하는 기구인데, 이는 다른 기업에는 유례가 없는 것이다.

    이사회 직속기구인 사무국에선 사장실, 투자회사관리실, 법무팀 등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대규모 투자나 사업계획과 관련된 각종 경영정보를 사외이사들에게 제공하고 관련부서와 이사회 안건을 조율하는 등 이사회와 집행부의 연결고리 기능을 담당한다. 사내 조직이면서 사외이사를 보좌하는 애매한 성격 때문에 아직은 입지가 확고하지 못한 상태지만, 사무국장에 대한 인사고과를 이사회에 일임하는 등의 장치로 독립성을 확보해주려 하고 있다.

    이사회 사무국장은 사장실 직속 CR(Corporate Relations)전략실장인 황규호 전무. CR전략실은 SK사태를 겪으면서 정보수집 및 분석, 인맥관리, 법무지원, 홍보 분야에서 취약성을 절감한 SK가 IR팀, 홍보팀, 법무팀 등을 한데 모아 만든 조직이다. 실장이 이사회 사무국장을 겸하고 있는 만큼 사무국을 측면 지원하는 것도 주요 임무다.

    이사회에는 법적으로 요구되는 감사위원회와 인사위원회 외에도 투명경영위원회, 제도개선위원회, 전략위원회 등의 전문위원회를 둬 인사, 재무, 관계사간 거래 등의 회사 상황을 보고받고 심의하게 했다. 사외이사들은 대개 1인당 2개의 전문위원회에 소속돼 있고, 각 위원회 위원장은 사외이사가 맡는다.

    그중에서도 감사위원회는 전원(3명) 사외이사로, 투명경영위원회는 3분의 2를 사외이사로 구성했다. 투명경영위원회는 경영 전반에 대한 감시와 견제 기능을 수행하되 특히 이사회 의결을 거치도록 규정된 관계사간 거래를 감시하는 데 역점을 둬 제2의 SK사태가 불거지지 않도록 했다.

    SK(주)의 새 이사회도 이전의 이사회와 마찬가지로 좀처럼 반대의견을 내놓지 않는다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 사외이사들은 “웬만한 안건은 전문위원회를 거치며 충분히 다듬어진 후에 이사회에 회부되므로 가결률이 높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사회에서 얼마나 많이 반대하느냐가 사외이사의 중립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돼선 안 된다는 것. 이사회에서 부결될 만한 안건은 전문위원회 선에서 퇴짜를 놓게 마련이라는 얘기다. 최근 부결된 안건은 전문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올라온 것이었다.

    SK(주) 이사회는 매달 한 차례씩 정기 이사회를 갖는다. 여기에다 전문위원회 회의, 이사회를 앞두고 안건을 올린 부서에서 마련하는 사전설명회 등을 포함하면 평균 1주일에 한 번 꼴로 회의가 열린다. 어지간한 대기업 이사회가 두어 달에 한 번 형식적인 모임을 갖는 것과 비교하면 ‘상근’에 가깝다.

    게다가 SK는 서울 서린동 본사에 사외이사들의 개인 집무실까지 마련해줘 사외이사들은 이래저래 회사에 자주 들러 보고도 받고 자료도 뒤적이게 돼 있다.

    미국보다 강한 회계기준

    SK(주) 사외이사들은 분식회계와 부당 내부거래 감시에 관한 한 직을 걸다시피 한 상황이다. 한 사외이사의 말이다.

    “앞으로는 분식회계가 드러나면 사외이사들의 개인적인 평판과 커리어도 치명상을 입게 된다. 특히 SK(주) 사외이사들에겐 날카로운 감시의 눈길이 쏠려 있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사기업이 아니라 중요 국가기관에 파견돼 공직을 수행하고 있는 기분이다. 더구나 내년부터는 분식회계를 못 막으면 사외이사들도 집단소송 대상이 된다. 그 규모가 수천억원대에 이르는 만큼 소송에 대비해서라도 회계자료 등을 충실하게 관리했다는 흔적을 남겨놓아야 한다.”

    이에 따라 SK(주) 이사회는 한국과 미국의 회계관련법을 검토, 양쪽에서 더 엄격한 기준을 취해 내부 감사규정을 만들 계획이다. 현재 검토중인 미국의 사베인-옥슬리법은 에너지 그룹 엔론이 분식회계로 무너진 것이 계기가 되어 입안·시행됐는데, 1930년대 이래 가장 강력한 회계부정 방지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사회는 이렇게 만들어진 엄격한 감사규정을 시행하려면 기업 정관을 개정해 감사위원회의 위상을 크게 강화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대부분의 국내 기업에선 감사위원회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이사회 내에 형식은 갖춰놓고 있지만 대개 내부 감사팀이 업무를 대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내부 감사팀은 일반 주주가 아니라 CEO를 위해 일하고 CEO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사내 조직이기 때문에 독립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외부 감사기관인 회계법인도 피감사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고 일을 해주는 처지라 100% 독립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또한 회계법인은 피감사 기업의 주식을 보유할 수 없도록 돼 있어 오히려 주주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적인 측면이 있다.

    따라서 내부 감사팀과 외부 감사기관을 다 가동해도 ‘주주의 입장에서 CEO를 감시’하는 기능에는 구조적으로 구멍이 뚫릴 수 있다. 이 구멍을 메꿔줄 수 있는 것이 독립적인 사외이사들로 구성된 감사위원회다. 사외이사는 스톡옵션 보유가 가능하므로 주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면서도 경영진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SK ‘재벌개혁 실험’ 1년 현주소

    내년 3월 주총에서 소버린과 또 한번 격전을 치를지도 모를 SK는 다각도의 방어전략을 펴고 있다.

    SK(주)와 함께 SK그룹의 양대 축을 이루는 SK텔레콤은 SK(주)보다 한 발 앞서 독립적인 이사회를 궤도에 올렸다. SK(주)가 이사회를 주축으로 벌이고 있는 ‘독립·투명경영 실험’은 SK텔레콤을 벤치마킹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위원회도 SK텔레콤 모델을 원용한 것인데, 가령 SK텔레콤 내부거래위원회는 관계사간 거래에 대해서는 사외이사들이 직접 거부권을 행사, 사실상 사전승인을 받게 하고 있다. 또한 연간 투자계획 등은 투자심의위원회, CEO 등 임원들에 대한 보상은 보상심의위원회를 거쳐 결정한다.

    이사회가 안건을 부결한 사례도 여러 차례다. 지난해에는 SK(주) 이사회가 사전협의 없이 SK텔레콤의 SK글로벌 지원을 전제로 하는 안건을 통과시키려 시도하자 SK텔레콤 이사회가 단칼에 이를 부결시켰다.

    SK텔레콤 이사회가 이 정도의 독립성을 확보하기까지 사내이사와 사외이사들 간에는 숱한 갈등이 빚어졌다고 한다. 이사회를 이끄는 조정남 부회장과 사외이사들이 걸핏하면 얼굴을 붉히고 말다툼을 벌이거나 아예 외면하고 돌아앉기도 했다.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진 편이다.

    참여연대 추천으로 SK텔레콤 사외이사에 선임된 고려대 남상구 교수(경영학)는 “손길승이라는 거물로부터 최태원이라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젊은 총수로 대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SK는 그룹 전체가 격변기를 맞고 있다”며 “최 회장이 과거 경영방식에서 탈피하려는 의지를 가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오랜 기간 누적되어온 문제를 풀어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방향은 옳게 잡은 듯하다. 그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철저히 견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방위 방어 전략 전개

    SK가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은 경영권 방어다. 비록 지난 주총에선 승리했지만, 소버린은 여전히 SK(주) 지분 14.99%를 보유한 2대 주주로 남아 있다. 언제 적대적 M&A를 시도할지 모르는 위협적인 존재다. 당장 내년 3월 주총에서 또 한번 격전을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이를 염두에 둔 SK는 전방위적인 방어 전략을 펴고 있다.

    그런 전략 가운데 하나가 증권거래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다. SK는 소버린이 지난 주총을 앞두고 이른바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의 깃발을 내걸며 대세몰이를 하는 바람에 혼쭐이 났다.

    소버린은 분식회계와 총수 구속 등을 빌미로 SK(주) 경영진을 주주 자본주의에 반하는 집단으로 몰아붙이며 외국계 투자자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였다. 이 바람에 하마터면 “정체도 알 수 없는 외국계 펀드가 2000억원도 안 되는 돈으로 43조원 매출 규모의 SK그룹을 통째로 빼앗을 뻔”(SK측의 표현)한 것이다.

    이에 SK는 소버린에게도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의 엄격한 룰을 적용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느슨한 국내 증권거래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SK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 증시에서는 특정 펀드가 특정 기업 지분의 5% 이상을 취득하면 펀드의 실체와 구체적인 투자목적, 지분변동 사유 등을 담은 상세한 리포트를 제출하게끔 의무화하고 있다. 질문지만 A4 용지로 10여장에 달해 답까지 상술한 리포트는 100장이 넘는다.

    나중에 단 한 문항에 대해서라도 허위 공시한 사실이 밝혀지면 그 시점에 피해를 본 모든 투자자에게 배상하도록 돼 있어 펀드의 실체를 낱낱이 공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펀드 관련자의 인적사항이나 보유목적 정도만 간략하게 기재하면 그만이다. 당국은 이를 상술하게 규제하면 외국인 투자를 위축시키는 진입장벽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으나 오히려 이렇게 해야 선의의 투자자를 보호할 수 있다.

    소버린은 지난해 3∼4월 약 보름 만에 지분율을 0%에서 14.99%(15%가 되면 공정거래위원회 기업결합심사 대상)로 늘렸는데 당시 보유목적을 ‘수익창출’이라고 신고했다. 12월에는 주총에서 의결권을 최대한으로 확보하기 위해 특수관계인에게 지분을 분산시키면서 그 목적을 ‘리스크 관리’라고 신고했다. 그러나 정기 주총에 이사 후보를 추천하는 등 경영 참가 목적이 분명했으므로 금융감독원 규정에 따라 보유목적을 ‘경영 참가’라고 적시해야 했다. 또한 소버린의 신분이 주가와 경영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만큼 비록 지분율이 15%에 못미쳐도 스스로 신분을 공개하는 것이 공시 취지에 맞다.”

    SK는 증권거래법에 관련 조항 신설을 요구하며 9월 정기국회에서 입법이 추진될 수 있도록 금융당국 등을 설득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권 방어를 위한 SK의 또다른 전략은 적극적인 해외투자 유치다. SK로선 소버린이 보유지분을 처분해도 고민이다. 14.99%나 되는 물량을 한꺼번에 처분하면 시장에 큰 충격을 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이만한 물량을 받아줄 만한 ‘백기사’도 없다.

    이 때문에 SK는 해외 IR(투자설명회)에 심혈을 기울일 방침. 최태원 회장이 해외 IR에 직접 참가하며, 사외이사들까지 동행해 전문분야별로 홍보전을 펼 계획이다. 새로운 해외 투자자를 우호세력으로 확보해 내년 주총에 대비하고 아울러 소버린 지분의 흡수장치로도 활용할 심산인 것이다.

    그러나 증권거래법이 SK의 의도대로 개정될지는 미지수다. 개정안이 9월 정기국회에 상정돼 연말쯤 개정된다 해도 경과규정 때문에 당장 내년 3월 주총에선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여기에다 해외 투자자 유치 성과도 미흡할 경우 소버린과 주총에서 또 한번 진검승부를 벌이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선 누가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느냐가 승부의 관건이 된다. SK는 소버린과의 표 대결에선 이겼어도 여론전에선 이기지 못했다. 분식회계 등으로 인해 기업의 도덕성에 흠집이 난 탓이다. 막판에 “정체 불명의 외국 자본에게 알토란 같은 토종 기업을 내줄 순 없다”고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아군을 늘렸지만, 이들은 언제 발길을 돌릴지 모른다.

    최태원 회장이 사외이사의 역량을 강화하는 등 독립·투명경영을 적극 표방하고 나선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소버린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의 투명하고 공정한 경영을 하지 않으면 여론의 지지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본 것. ‘강요된 투명화’는 급발진했고,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작년 9월 보석으로 석방된 뒤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던 최 회장이 5월 이후 대외활동을 부쩍 늘린 것도 여론전을 의식한 태도 변화로 보인다.

    SK(주)는 공장이 있는 울산에 1000억원을 들여 울산대공원을 조성키로 했는데, 5월15일 기공식에 최 회장이 직접 참석해 사회공헌활동 강화를 다짐했다. SK(주)는 부서별로 매주 복지시설 등에서 사회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SK텔레콤도 사회봉사단을 출범시킨 바 있다.

    최 회장은 이어 25일 청와대의 재계 총수 회동에 참석, ‘투자와 고용창출’을 약속하며 노무현 대통령과 ‘코드’를 맞췄고, 이어 31일에는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을 만나 지속적인 지배구조 개선 의지를 밝혔다. 8월에는 미국 주요 도시를 돌며 갖는 IR에 참가할 예정이다.

    최태원 회장이 내세운 3대 구조개혁, 즉 ▲지배구조 개혁 ▲사업구조 개혁 ▲재무구조 개혁은 일단 ‘시험주행’에서는 합격점에 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도 “사외이사 비중을 확대하고 투명경영위원회를 설치해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제도적 틀을 마련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SK(주), SK텔레콤, SK네트웍스의 선전에 힘입어 12월 결산 상장 6개사의 지난 1/4분기 매출이 11조원을 넘어서면서 처음으로 순이익 1조원을 돌파했다.

    SK 기업문화실 권오용 전무는 “현재 워크아웃 중인 SK네트웍스에 대해 은행권이 여신분류를 ‘고정’에서 ‘요주의’로 상향 조정, 은행별로 수백억 원 규모의 충당금 환입이 이뤄질 전망”이라며 “창립 50주년인 지난해에는 시련이 컸지만, ‘넥스트(Next) 50년’의 첫해인 올해는 전 계열사가 흑자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순환출자의 그늘

    그러나 여전히 과제는 남아 있다. SK는 무엇보다 재벌식 순환출자구조를 해소하지 못했다. 비상장 계열사인 SK C&C 지분 44%를 가진 최태원 회장이 SK C&C→SK(주)→SK네트웍스→SK생명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를 통해 59개 계열사를 지배하는 현실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대주주의 지분이 워낙 낮고 추가로 지분을 확보할 자금도 없기 때문”이라는 게 SK측의 해명.



    좋은기업지배연구소 김선웅 소장(변호사)은 “적은 지분으로 큰 영향력(경영권)을 갖는 것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지만, SK의 경우처럼 회사 자금을 주주의 의견도 묻지 않고 인위적인 순환출자와 계열사 지원에 활용, 계열사의 희생을 초래하는 구조는 손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SK네트웍스는 무리하게 SK텔레콤 지분을 취득하고 계열사를 지원하는 바람에 부실이 가중됐으며, SK(주)도 부실화한 SK네트웍스, SK해운 등을 지원하다 기업가치가 하락했다는 지적이다.

    “SK네트웍스 채권단은 SK C&C 등 최태원 회장의 개인 주식을 담보로 잡고 있다. SK C&C 주식은 그룹 지배권과 직결되므로 만일 채권단이 SK네트웍스를 부도처리하고 담보권을 실행하면 최 회장은 그룹 지배권을 잃게 된다. 그러니 최 회장으로선 SK네트웍스 회생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물론 채권단도 SK네트웍스가 살아나야 손실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최 회장과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따라서 SK(주)나 SK텔레콤 자금이 SK네트웍스의 사업능력과 상관없이 이 회사의 지급보증이나 신규 투자를 위해 지원될 우려가 있다. SK(주)가 투명경영위원회를 통해 내부 거래를 통제하겠다고는 했으나 사외이사들이 아무리 주의깊게 감시한다 해도 비상근인 데다 정보 접근성에도 한계가 있어 완벽한 안전장치는 못 된다.”

    SK측은 “SK네트웍스의 지난 1/4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17% 줄었으나 순이익은 무려 340%나 증가해 수익구조가 크게 개선됐음을 입증했다”고 밝혔지만, 이 같은 결과는 경영혁신이나 신사업으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한 덕분이라기보다는 채무 면제에 힘입은 바 크다.

    SK네트웍스는 SK(주)의 유류제품을 판매하는 주유소사업, SK텔레콤에 대한 전용회선 임대사업 및 이동전화 단말기 유통사업 등 SK(주)와 SK텔레콤에 크게 의존하는 사업구조를 갖고 있어 과도한 내부거래 가능성이 상존한다.

    SK텔레콤 관계자는 “경찰관 10명이 도둑 하나를 못 잡듯, 이사회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경영진이 나쁜 마음을 먹고 나서면 막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사외이사들의 어깨에 더욱 무게가 실리는 대목이다.

    내부 거래와 관련해 귀추가 주목되는 것은 SK해운에 대한 참여연대의 이중 대표소송이다. 이중 대표소송이란 모회사 소액주주들이 자회사 임원의 행위로 피해를 당할 경우 제기하는 소송.

    참여연대는 “손길승 전 회장이 대표였던 SK해운이 분식회계를 통해 계열사인 (주)아상에 2492억원을 부당지원했다”며 SK해운의 대주주인 SK(주)에 손 전 회장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라고 요구했다. 참여연대는 SK(주) 이사회가 이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자 직접 SK(주) 주주(6개월 이상 보유한 주주 1% 이상)를 모집해 이중 대표소송을 추진하고 있다.

    SK(주)는 “손 전 회장에 대한 판결이 확정된 후에 논의하자”며 시간을 벌고 있지만, 적이 곤혹스럽다. SK(주)가 손 전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면 이는 최태원 회장이 자신의 ‘경영 사부(師父)’인 손 전 회장에게 책임을 묻는 형국이 되기 때문.

    그러나 참여연대 등은 “SK(주)의 새 이사회가 손 전 회장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는 데 주저하거나 면책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이사회의 독립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어서 여론의 풍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SK로선 고민이 크다.

    더욱이 참여연대는 지난해 삼성그룹 경영진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 발행과 관련해 제기한 헌법소원이 기각된 데 이어 지난 6월에는 삼성의 사모전환사채(CB) 발행무효확인 청구소송에서도 패소했기 때문에 SK에 대해 집중공세를 펼 공산이 크다.

    최태원 회장이 여론의 지지를 얻으려면 우선 SK 직원들의 지지부터 얻어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 회장은 1998년 9월 SK(주)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한 후 ‘굴뚝산업은 사양산업’이라는 속내를 자주 드러내면서 SK(주)가 번 돈을 IT 분야의 벤처기업에 많이 투자했다. 그 가운데는 좋은 아이템도 더러 있었지만, 성과는 대체로 미진했고 지금은 없어진 기업도 적지 않다. 이런 전력 때문에 최 회장은 SK(주) 직원들로부터 최근까지도 두터운 심정적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손길승 전 회장의 그림자도 짙다.

    업종이 전혀 다른 SK텔레콤 직원들은 최 회장에 대한 로열티가 더 낮다고 한다. 심지어 지난 주총을 앞두고는 “소버린이 이기면 SK텔레콤이 분리 독립된다”며 내심 소버린의 승리를 기대한 부류도 있었다는 것. 소버린이 SK(주) 경영권을 장악하면 SK(주)가 보유한 SK텔레콤 지분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 연말 개정된 전기통신사업법은 기간통신사업자에 대한 외국인 지분의 경영권 행사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최 회장이 전국의 사업장과 임직원 연수현장을 부지런히 방문하고 말단 직원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는 등 이른바 ‘스킨십 경영’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도 이렇듯 뜨악한 분위기를 추스르기 위한 시도로 읽힌다. 발품의 가치를 새삼스레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내년 3월까지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