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스타 경영인’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의 나라 걱정

“외국 학생은 기술에 관심, 한국 학생은 취업에 관심”

  •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sky3203@donga.com

    입력2004-07-29 14: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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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에 ‘반도체 신성장 이론’ 내놓겠다
    • 휴대전화로 건강검진 하고, 반도체칩으로 내시경 찍고
    • LCD도 BT도 중요하지만 ‘반도체 1위’부터
    • 지켜보라, ‘황의 법칙’은 계속될 것
    • 장관, 국회의원 관심없다. 기술인으로 남을 것
    ‘스타 경영인’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의 나라 걱정
    국제적인 명성과 경영능력, 대중 친화력과 미래 시장에 대한 비전. 이런 것을 두루 갖춘 경영자를 ‘스타 경영인’이라고 부른다면 한국에도 ‘스타 경영인’이 있을까. 얼핏 삼성 이건희 회장이나 국민은행 김정태 행장을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스타 경영인이라고 하기에는 대중과의 접점이 너무 좁다. ‘뉴스위크’조차 그를 ‘은둔의 제왕(Hermit King)’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김정태 행장 역시 금융산업의 특성상 소비자와 활발하게 교류하는 업종이 아니다 보니 대중 친화력 면에서는 ‘스타 경영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이런 생각 끝에 떠오른 사람이 삼성전자 황창규(50) 반도체 총괄사장이다. 일단 그는 젊다. 삼성전자 총괄사장 4명 중에서도 최연소다. 게다가 10~20대가 열광하는 카메라폰, 디지털카메라, MP3 등 모바일 기기에 주로 들어가는 플래시 메모리를 만들어 파는 사람이니 젊은이들과 교류가 잦을 수밖에 없다.

    황창규 사장은 최근 들어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 강연도 자주 갖고 있다. 전경련이 주최한 연세대 강연에는 1000명이 넘는 학생이 몰려들어 그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그러나 황창규 사장이 가진 가장 큰 ‘브랜드’는 뭐니뭐니해도 ‘메모리 신성장론’이다. 인텔 창업자인 고든 무어는 1965년에 ‘무어의 법칙’을 내놓았다. 반도체의 집적도는 1년6개월에 2배씩 증가하며 이를 주도하는 것은 PC 위주의 정보산업이라는 것이다.

    ‘황의 법칙’

    그러나 디지털 컨버전스(융·복합화)의 확산으로 모바일 기기에 저장매체가 필요해지면서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황창규 사장이 2002년 세계 3대 반도체학회 중 하나인 ISSCC(International Solidstate Circuit Conference)에서 ‘메모리 신성장론’을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황 사장은 ‘메모리 신성장론’을 통해 “반도체 집적도는 (1년6개월이 아닌) 1년에 2배씩 증가하며 이를 주도하는 것은 모바일 기기와 디지털 가전 등 이른바 ‘Non-PC’ 분야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를 ‘황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황 사장의 예견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1999년 256M 데이터저장(NAND)형 플래시 메모리 개발을 시작으로 2000년 512M, 2001년 1GB, 2002년 2GB, 2003년 4GB로 4년 연속 ‘1년에 2배’라는 황 사장의 예견을 실제로 증명했다.

    황창규 사장의 반도체 인생을 되돌아 보기 위해 ‘신동아’는 지난 7월8일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에서 그와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황 사장은 ‘뉴스거리’를 하나 내놓았다. 오는 9월경 현재의 ‘메모리 신성장 이론’에 비(非)메모리 분야의 시스템 LSI까지 접목해 새로운 ‘반도체 신성장 이론’을 발표하겠다는 것이다. ‘황의 법칙’ 속편을 예고한 것이다. 오는 9월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이런 자신의 구상을 구체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이상의 속내는 보여주지 않았다. 물론 2시간 넘는 인터뷰 내내 황창규 사장에게 반도체는 여전히 한국 경제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반도체를 선택한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전기공학과 전자공학의 커리큘럼이 별로 차이나는 것은 아니지만 전기는 전자보다 조금 범위가 넓죠. 좀더 폭넓은 공부를 해보고 싶어서 전기과를 갔는데 인텔 창업자인 앤디 글로브가 지은 ‘반도체의 물리와 기술(Physics and Technology of Semiconductor Device)’이라는 책을 접한 것이 반도체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습니다. 앤디 글로브의 저서는 반도체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본을 구할 수 없으니까 광화문에 나가서 복사본을 구해다가 읽고 또 읽던 시절이었죠.”

    -반도체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던가요.

    “사람이 어디 홀리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하잖아요? 그때는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참 재미있었어요. 반도체 안에는 적당한 전기회로가 필요하고 수학과 화학이 필요하거든요. 또 반도체를 공부하려면 전기전자만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응용물리학과 화학 등을 두루 알아야 하고요. 말하자면 다른 과(科)에 가서 보고 들어야 할 것이 반도체 안에 다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반대로 물리를 공부해야 하고 화학책을 들여다봐야 하니까 반도체를 하지 않겠다는 것 아니에요? ‘원제로 원제로’ 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훨씬 쉬우니까 그것만 하겠다는 거죠.”

    -그 당시 국내에 반도체 산업이라는 것이 존재했습니까?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딱 하나 있었어요. 워치칩, 그러니까 시계에 들어가는 칩을 만드는 곳이었어요. 거기서 웨이퍼도 구해오고 도움을 많이 받았죠. 그걸 빼놓고는 없었어요.”

    -다른 학생들에 비해 호기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원래 저는 호기심이 많은 데다 ‘얼리 어댑터(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이를 사용해보는 마니아형 인간)’입니다. 플래시 메모리와 관련된 기기가 나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써봅니다. 2003년 카메라폰이 나오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예요. 일본의 한 카메라 업체 사장이 찾아와서는 ‘모든 휴대폰에 카메라가 들어가면 중저가 디지털카메라 시장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더라구요. 그러나 ‘내 생각에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설득해 되돌려 보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카메라폰에서 ‘주인’은 휴대전화고 카메라는 ‘손님’ 같은 거예요. 카메라에 부착된 손톱만한 공간에 디지털카메라가 갖고 있는 고도의 기능을 다 포함시킬 수는 없거든요. 결국 세계적으로 5억의 휴대전화 소비자들에게 디지털카메라 기능을 선전해주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이야기죠. 그 일본인 사장에게 ‘시간이 지나면 휴대전화를 통해 카메라의 기능을 알게 된 소비자들이 결국 더욱 전문적인 카메라 기능을 찾을 것’이라고 설득했죠. 1년 후쯤 일본에 갔더니 그 회사에 태극기가 걸려 있습디다.”

    -인텔에 들어간 것은 앤디 글로브의 영향도 있었겠군요.

    “앤디 글로브와는 인텔에서 근무할 때 식사도 자주 했습니다. 앤디 글로브말고 제 반도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또 한 명 있어요. 바로 1953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샤클리입니다. 스탠퍼드대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명예교수인 샤클리가 바로 앞방을 사용했습니다.”

    -인텔의 자문역이라면 명성으로 보나 조건으로 보나 매우 안정된 자리였을 텐데 왜 삼성을 택했나요?

    “스탠퍼드에 몸담고 있던 1988년, 일본측 초청으로 열흘 동안 일본 반도체 업체와 도쿄대에서 강의한 적이 있었어요. 인텔이 세계 반도체업계에서 1등을 하기 전엔 일본의 NEC가 1등이었거든요. 일본의 반도체산업을 둘러보고 일본을 뛰어넘는 데 내 인생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가전 같은 완제품 분야에서는 아무래도 일본을 따라잡기 힘들지만 반도체는 기술만 있으면 되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삼성전자에 합류할 당시 삼성에서 임원직을 제의했지만 이를 마다하고 부장부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물론 당시 삼성에서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임원자리를 제안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 임무는 ‘관리’가 아니라 ‘미래기술 개발’이었어요. 연구 개발을 위해서는 실험실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석부장으로 입사했고 그 후로 임원이 되는 데 꼬박 3년이 걸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삼성측에서 임원 자리를 제안하면서 내건 여러 가지 혜택을 우습게 안 것이 신기하죠. 당시 부장 월급이 정말 형편없었거든요. 결과적으로 시간이 더 걸리기는 했지만 잘된 일이었어요. 당시 계약직 임원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중간에 그만두고 다른 길을 걷고 있으니까요.”

    “임원 자리 싫소, 부장을 주시오”

    -삼성전자에 입사해 가장 먼저 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이곳 기흥 골짜기에 앉아서 세계 반도체 기술 동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겠어요? 그렇다고 반도체만 20년 동안 해온 NEC니 도시바니 하는 업체와 기술교류에 나설 수도 없는 형편이었어요. 대등하게 교류할 만한 걸 갖고 있어야 기술교류를 하죠. 그래서 스탠퍼드에 몸담고 있던 시절 인연을 맺은 지인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우선 기술 간담회를 갖자고 했죠. 그러고 나서는 우리 직원 중에서 정예팀만을 짜서 우선 부딪치게 했습니다.”

    -일본 업체들이 잘 협조해주던가요?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죠. 게다가 내가 먼저 스케줄을 다 짜서 들이대고 ‘이대로 하자’고 하니 그 사람들이 보면 웃기는 거죠. 여하튼 그런 과정을 거쳐 우리 엔지니어들이 개안(開眼)하기 시작한 거예요. 만날 여기서 기술 개발한다고 파묻혀 있다가 세계 시장에 나가보니까 놀란 거죠.”

    황창규 사장은 연구원들에게 늘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연구 논문을 많이 써서 학회에 발표할 것을 강조한다. 당장 매출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일보다 연구 논문 쓰는 일에 매달리라는 주문은 최고경영자로서는 조심스러운 일일 텐데도….

    ‘스타 경영인’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의 나라 걱정

    임원 제의를 마다하고 부장으로 삼성에 입사한 황창규 사장은 회의에서도 늘 실무진의 의견을 중시한다고 한다.

    -연구진들에게 학회 활동을 유독 강조한다면서요.

    “삼성에 와 보니 연구진들이 현업에 바쁘다는 이유로 논문을 쓰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우선 반도체 분야의 3대 학회라고 할 수 있는 ISSCC와 IEDM, VLSI 등에 논문을 내게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논문이 학회지에 실리기 위해서는 심사위원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심사위원회라는 것이 일본 심사위원과 미국 심사위원만 각각 15명씩 참여하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 회장을 만나서 나를 심사위원에 넣어달라고 했어요. 마침 그 회장이 스탠퍼드 시절 잘 알던 친구였거든요. 그래서 심사위원이 됐죠. 그런데 심사를 할 때 1차 심사 결과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와서 통역을 앉혀놓고 일본말로 회의를 진행하는 거예요. 역시 안 되겠다 싶어서 또 나서서 심사위원회에서는 영어만 쓰게끔 바꿔버렸습니다. 그것만 한 것이 아니에요. 심사위원회에 400개의 논문이 들어오면 그걸 우리 엔지니어들에게 싹 나누어주고 연구하게 했어요. 이게 바로 우리가 미래의 반도체 원천 기술을 갖게 된 계기입니다.”

    -직원들의 불만은 없었습니까?

    “대신 나는 삼성전자에 와서 토의문화부터 바꿔나갔습니다. 내가 회의를 주재할 때는 임원들이 보고하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것은 실무 분야의 부장과 과장들입니다. 그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에게 실권을 줘야 합니다. 그래야 의사결정이 빠르죠.”

    경술국치일에 일본을 꺾다

    황창규 사장이 삼성전자에 입사한 것은 36세인 1988년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256M D램 개발팀장을 맡아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초로 256M D램을 개발한 뒤부터이다. 1994년의 일이다. 황 사장은 이때의 일을 엊그제 이야기하듯이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256M D램 개발의 암호명은 ‘TX’였어요. ‘테크놀러지 엑셀런트(Techno- logy Excellent)’의 약자였죠. 70여명의 연구진이 2년 동안 매달린 끝에 1994년 여름, 드디어 10장의 웨이퍼를 투입해 칩의 동작을 최종 점검하는 날이 왔습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숨죽여 8장의 웨이퍼를 검사했지만 셀이 100% 동작하는 제품이 도무지 나오질 않았어요. 실망한 연구원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2억 7000만개의 셀이 완벽하게 움직이는 제품이 나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 한 번의 공정으로 100% 동작률을 보이는 칩이 나온 사례가 없었거든요. 검사장비가 고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10번도 넘게 검사를 반복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연구원들이 얼싸안고 환호하는 거예요. 드디어 우리 반도체 기술이 일본을 꺾은 거죠. 공교롭게도 그날은 경술국치일인 8월29일이었습니다.”

    이보다 2년 앞선 1992년에도 삼성이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지만 당시 선두업체이던 일본은 삼성의 기술력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황 사장은 256M D램 제품의 개발과정에 확보한 새로운 기술을 국제학회에 미리 발표하게 했다. 그러자 비로소 일본 업체들도 삼성의 기술력을 인정하게 됐다.

    그러고 나서 황창규 사장이 자신의 ‘브랜드’나 다름없는 ‘메모리 신성장 이론’을 발표한 것은 이보다 8년 뒤인 2002년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2000년부터 신성장 이론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성장 이론을 생각한 것은 플래시 메모리를 생각한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2001년 IT 경기가 불황으로 곤두박질칠 때 새로운 시장에 특성화된 제품, 그리고 우리만 만들 수 있는 제품을 구상했던 것이 바로 플래시라는 말이죠. 2002년 ISSCC 기조연설에서 신성장 이론을 발표하기 전 이미 2000~2001년에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세계적 반도체 학회인 ISSCC에서 한국인이 기조연설을 한 것은 황 사장이 처음이었다. 아시아권에서 보더라도 일본의 NTT 도코모 회장이 완성품 업체 대표로서 학회에서 발표한 적은 있지만 부품소재 쪽에서는 황 사장이 처음이었다.

    “4000명 정도 모였는데 그 사람들은 대부분 ‘삼성’이라고 하면 PC에 들어가는 메모리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로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70장의 차트 중 PC용 메모리를 설명하는 차트는 딱 한 장 보여주고 나머지 69장에서는 하나같이 게임기 DTV 네트워크 시스템 PDA 등의 사진을 보여주었어요.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IT 제품에 반도체가 들어간다는 걸 보여준 거죠. 그러고 나서 모바일 기기 위주로 1년에 2배씩 집적도가 높아진다는 ‘메모리 신성장 이론’을 발표한 겁니다.”

    -그 이후 ‘황의 법칙’대로 1년 단위로 집적도를 높이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지켜만 보십시오.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사장님이 만들어놓은 가이드라인에 연구진들이 그 속도를 맞춰가는 건 아닐까요?

    “(웃음) 그런 점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에요. 연구진들의 시야가 자연스럽게 넓어지는 거죠.”

    삼성전자가 ‘황의 법칙’을 실현하고 있는 것은 NAND형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플래시 메모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대표적 메모리 반도체인 D램이 전원을 끄면 저장된 정보를 모두 잃는 반면, 플래시 메모리는 전원을 끊더라도 저장된 정보가 없어지지 않고 유지되는 기억장치다. 그래서 휴대전화나 디지털카메라, MP3 플레이어 등 휴대용 모바일 기기에는 플래시 메모리가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

    “휴대전화 가격 절반은 플래시에 달려”

    또 플래시 메모리는 크게 NAND(데이터저장)형 제품과 NOR(코드저장)형 제품으로 구분된다. NOR형은 쓰기와 지우기는 느리지만 읽기가 빠른 특성을 갖고 있다. 빠른 메뉴 이동이 필요한 기기에는 NOR형이 적합하다. 하지만 대용량 데이터를 저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반면 NAND형은 읽기는 느리지만 쓰기와 지우기가 빠르다. 또 대용량 저장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NOR형은 시장이 일찍 형성됐지만 발전 속도는 NAND형이 훨씬 빠르다.

    바로 이 NAND형 플래시 메모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65%나 된다. 게다가 삼성전자는 NAND형 플래시 메모리 가격을 40% 가량 낮추겠다고 밝혀 세계 반도체 시장에 충격을 던진 바 있다. 시장수요는 넓히고 후발주자는 따돌리겠다는 것이다. 황 사장은 이 대목에서 특히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수요가 폭증할 것이 예상되는 만큼 가격을 내릴 필요는 없을 텐데요.

    “비용 경쟁력과 다양한 제품군으로 시장 지배력을 갖춘 회사는 견딜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회사는 어쩔 수 없는 거죠. 플래시 메모리는 D램보다는 진입 장벽이 높다고 할 수 있어요. 또 발전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기술 개발이 어렵죠. D램이라는 것은 B2B 비즈니스지만 플래시는 거의 B2C 비즈니스거든요. 휴대전화 가격의 50%는 플래시 메모리가 결정합니다. MP3 플레이어의 가격도 60%는 플래시 메모리가 결정하고요.”

    -지금의 디카 열풍이나 카메라폰 바람이 끝없이 이어지지는 않을 텐데요. 플래시 메모리 열풍을 이어나가려면 그 이후 제품에 대한 구상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현재 가장 큰 시장이 휴대전화시장이죠. 하지만 앞으로도 카메라폰에서 캠코더폰으로, MP3폰에서 디지털TV폰으로, 그리고 건강을 진단할 수 있는 센서와 저장장치가 부착된 웰빙폰 등 수요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플래시 카드를 쓰는 휴대폰도 있잖아요? 고통스럽게 내시경 촬영을 하는 것보다 조그만 캡슐에 1GB 정도의 플래시 메모리를 집어넣고 꿀떡 삼키면 뱃속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요. 그만큼 플래시 메모리의 용처는 무궁무진하다는 겁니다. 플래시 메모리를 근간으로 한 제품 개발이나 응용은 앞으로도 5~10년은 계속될 겁니다.”

    황 사장은 2002년 반도체학회인 ISSCC에서 기조연설을 할 때 ‘1GB와 함께 떠나는 출장(Dr. Hwang’s Busi-ness Trip with 1GB)’이라는 만화차트를 보여주며 청중의 관심을 끈 바 있다. 이 만화에는 황 사장이 PDA, 디지털카메라, MP3 등 수많은 디지털 기기를 챙겨들고 비행기를 타는 장면이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 4월 MIT에서 학생을 상대로 강의할 때 이 만화의 제목은 ‘10GB와 함께 떠나는 출장’으로 바뀌었다. 1년6개월 만에 용량이 10배나 늘어난 것이다.

    ‘황 박사의 10기가 여행’

    사실 그의 삶은 반도체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각종 정부 발표나 언론에서도 ‘반도체’라는 말의 출현 빈도가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먹고 살 만하니까 가난한 시절 밥벌이를 도맡아 오던 큰아들을 나몰라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반도체보다 수익성이 훨씬 높은 고부가가치 산업에 밀려 ‘반도체 시대’가 역사의 뒤꼍으로 밀려나는 것일까.

    -정부에서 내놓는 신성장 동력론이나 차세대 미래형 산업에서는 반도체보다 디스플레이 산업이나 바이오 테크놀러지 같은 생명산업이 각광받는 듯합니다.

    “물론 LCD나 PDP 같은 산업도 성장산업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인프라를 가동하게 해주는 반도체 핵심기술입니다. 전자제품에서 반도체 기여도가 그 동안 10%였다면 이제는 50%로 늘어났습니다. TFT-LCD나 디지털 TV에는 그 안에 메모리만 20개를 씁니다. 새로운 기능을 집어넣거나 그래픽을 좀더 화려하게 하려면 결국 그 기능은 반도체가 맡는 겁니다. 반도체를 진정한 1위로 끌어올리려는 투자와 노력은 하지 않고 대학생들조차 반도체가 조금 어렵다고 기피하는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반도체에서 이제 벌 만큼 벌지 않았느냐는 시각도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이건희 회장도 아산 탕정 LCD단지를 ‘크리스털 밸리’로 키우겠다고 선언한 걸 보면 삼성의 투자 우선순위도 반도체에서 LCD 등 디스플레이 쪽으로 옮겨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있고요. 아산 탕정 LCD단지는 이재용 상무를 위한 ‘작품’이라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반도체는 작년 4GB 개발 이후 회장님을 모시고 전략회의도 했고 화성에서 12인치 웨이퍼 라인도 이미 돌아보셨습니다. 순서대로 가는 것이지요.”

    -평소에 이공계 학생에 대해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강연해보면 그 나라 학생과 우리나라 이공계 학생이 어떻게 다르던가요.

    “서울대에서는 매년 강의를 하죠. 2년 전에는 케임브리지대에서, 작년에는 스탠퍼드대에서 강연했고, 올해는 MIT에서 강연했습니다. 외국에서 강연을 해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이 나옵니다. 외국 학생들의 그런 반응이 저를 고무시키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슬픈 생각도 들어요. 외국 학생들의 질문에는 뭐랄까…, 기술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 같은 것이 깔려 있어요. 그런데 우리 학생들은 장래에 대한 보장, 졸업 후 진로, 보수 같은 현실적인 데만 관심을 갖다 보니까 안타까워요. 때로는 ‘끼’도 있고 ‘깡’도 있어야 하는데….”

    -최근 수출 호조에 따른 이른바 ‘반도체 착시현상’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도체 수출구조에 문제는 없습니까?

    “지난해 국내 반도체 총수출은 196억달러 규모입니다. 전체 수출의 10%가 넘죠. 게다가 12년째 수출 1위를 유지하는 품목입니다. 품목별로 살펴보면 메모리가 전체의 약 55%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수입 쪽을 살펴보면 정반대입니다. 반도체 수입은 215억 달러로 수출보다 많은 데다 그 중 93%가 비메모리 제품입니다. 메모리는 수출하고 비메모리는 수입하고 있는 거죠. 메모리가 많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비메모리 분야의 경쟁력이 취약하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반도체 착시현상이야 통계적으로 보면 당연한 것이고요.”

    -최근 들어 남궁석 전 장관이나 진대제 장관 등 삼성 출신의 경영인이 정계나 관계로 진출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분들은 민간기업의 경영 방식을 관료조직에 접목하는 데에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황 사장님도 이제 스타 경영인이 된 것 같습니다. 경영인 이외의 길을 생각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처음부터 삼성에 임원으로 올 수 있었는데 부장으로 온 것도 초지일관 기술로 승부하겠다는 가치관 때문이었습니다. 기술인이자 경영인으로 성공한 새로운 장르를 만드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기에 그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 사장은 지난, 세계적인 명성의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지에 발표한 6페이지짜리 논문에 정성스레 사인해서 기자에게 건넸다. 솔직히 기자는 각종 회로도와 난해한 그래프가 가득한 그 논문을 읽을 만한 안목과 능력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기자에게 “꼭 읽어보라”고 했다. 난감했지만 대단히 학구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구적인 사람은 친화력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황 사장은 그렇지 않았다. 그를 ‘스타 경영인’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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