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일본 정치인 친미 일변도·우경화 우려할 만한 수준”

  • 박권상 언론인·경원대 석좌교수 정리·이홍천/일본 게이오대 정책미디어대학원 박사과정

    입력2004-07-29 1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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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관계, 한국은 할 일 했지만 일본은 안 했다
    • 청산하지 못한 ‘부(負)’의 유산
    • 총리 야스쿠니 참배 이해할 수 없어
    • 고이즈미 총리, 우경화에 둔감해 불안
    • 일본은 대미관계에만 관심
    • 헌법, 개정하지 않아도 불편할 것 없다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일본 정치인 친미 일변도·우경화 우려할 만한 수준”
    2003년 11월19일. 일본의 하원인 중의원은 36년간 의사당에서 잔뼈가 굵은 13선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67) 의원을 새 의장으로 뽑았다. 재적의원 480명 중 477명이 그에게 표를 던졌으니 사실상 만장일치였다. 그는 집권당인 자유민주당 소속이었지만, 정치노선이 전혀 다른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에게서 초당파적 지지를 얻었다. 의회주의 국가에서 입법부의 수장으로 선출된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대단한 성취이자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노 의장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가 중의원 의장으로 선출된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고노 의장은 10년 전 원내 제1당인 자민당 총재로서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 등 3당 연합정권의 부총리 겸 외무상을 지냈고, 일본 정치를 주도해온 보수진영에서 비둘기파, 평화주의파, 진보적 보수파를 이끌어온 지도자다. 따라서 좌파(일본에서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공산당, 사회민주당 등은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거의 괴멸됐지만)를 포함한 초당적 호응을 받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기적’이라는 것은 그의 건강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02년 봄, 그는 간경변증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의 담당의사는 이렇게 선언했다.

    “C형 간염, 간경변, 문맥압항진증(門脈壓亢進症)입니다. 이제 내과 치료로는 치병이 불가능합니다. 내과 치료를 계속하면 간부전이나 문맥압항진증에 동반되는 소화관 출혈로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할 위험이 높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간 이식이 유일한 치료법입니다.”

    ‘30년 환자’의 기적



    고노 의장의 정치경력과 간장질환은 거의 궤를 같이한다. 그가 국회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30세인 1967년이고, 간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36세인 1973년 여름이었다. 그는 워낙 튼튼한 체질이라 맹장수술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진 것말고는 아파 누워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간장은 ‘침묵의 장기’라고 하지 않는가. 다소 이상이 있어도 뚜렷한 자각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간질환의 특징이다. 인근 소아과 의사가 아이들을 돌보러 왕진 왔을 때 우연히 진찰을 받아보고 간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매일 정기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일렀다.

    하지만 불철주야 동분서주하는 의원생활에 새삼 몸을 살필 겨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혈기왕성한 기질인데다 부패정치 척결에 앞장선 신진 개혁의 기수였다. 한가로이 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1976년 일본 정계를 뒤흔든 록히드 부정사건이 터지자 그는 마침내 큰일을 내고 만다. 자민당 요인들이 미국 록히드사에게서 거액의 뇌물을 받은 것이 미 의회에서 폭로된 이 사건으로 다나카 전 총리 등이 구속되고 미키 내각이 붕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때 진상 규명에 미온적인 자민당 지도부에 항의하면서 탈당을 결행한 것이 고노 의원 중심의 소장파 ‘신자유클럽’이다. 정치적으로 금성탕지(金城湯池)나 다름없는 자민당을 떠난다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의 모험에 동참한 의원은 다섯 명에 불과했다.

    당시는 간기능에 이상이 생긴 지 3년이 지난 때로 이미 황달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단계였다. 2개월 정도는 입원가료해야 된다는 의사의 권유에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해 6월 의원 6명으로 신당 신자유클럽을 결성, 12월 총선거를 향해 뛰고 있던 고노 의원은 “내가 당의 얼굴인데 몇 달씩 입원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고집을 피웠다.

    무모하게만 보이던 그의 ‘정치도박’은 국민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신자유클럽은 12월 총선에서 17석을 얻어 국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진보적 보수세력인 신자유클럽은 공명당, 민주사회당 등 군소정파와 제휴하면서 부침을 거듭하다 10년 후 자민당에 복귀한다. 보수개혁이라는 원대한 뜻은 결국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C형 간염은 지방간으로 발전했고, 의사들은 머지 않아 간경변으로 악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전문의의 감시하에 네오미노파겐C 주사를 맞아가면서도 정치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정치는 아편 같다는 말이 그에게 꼭 들어맞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9년엔 그의 아내가 자궁암에 걸렸고 6년 후 세상을 떠나는 가혹한 시련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병마와 싸우면서도 고노 씨는 정치적으로는 꾸준히 전진했다. 1985년 나카소네 내각에 들어가 과학기술청 장관을 맡았고, 1992년에는 미야자와 내각에서 관방장관에 올랐다. 일본에서 관방장관은 총리 다음가는 자리로 내각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관방장관은 내각을 대신해서 하루 세 차례 이상 기자들을 만난다. 오전과 오후에 기자회견이 있고, 밤에는 간담회 형식으로 기자들을 상대한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도록 기자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니 정신없이 바쁜 요직이다. 그런데도 만성 C형 간염 환자인 그는 그 일을 거뜬히 해낸 것이다.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일본 정치인 친미 일변도·우경화 우려할 만한 수준”

    河野洋平<br>●1937년 가나가와(神奈川)현 헤이쓰카 출생 ●와세다대 정경학부 경제학과 졸업 ●1967년 중의원 당선 이래 13선, 자민당 총재 ●과기청 장관, 관방장관, 부총리 겸 외무장관 ●중의원 의장(2003년 11월∼ ) ●저서 : ‘자민당개조안’ ‘박수는 없다’ ‘결단’ 등

    1993년 일본 정치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와 공산권의 몰락은 그때껏 국제 공산주의와 정면대결해오던 자민당의 분열을 야기했다. 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등 일각이 떨어져 나갔고, 역시 새 시대 개혁을 내세운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대표로 하는 비(非)자민 8개 정파 연립정권이 들어섰다.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일본 정치인 친미 일변도·우경화 우려할 만한 수준”

    朴 權 相<br>●1929년 전북 부안 출생 ●서울대 영문학과·미국 노스웨스턴대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 논설위원·편집국장·영국특파원·논설주간·고문 ●시사저널 편집인 겸 주필, KBS 사장 ●경원대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 일본 세이케이대 객원연구원 ●저서 : ‘자유언론의 명제’ ‘영국을 생각한다’ ‘미국을 생각한다’ 등

    자민당은 엄연히 제1당이었으나 하룻밤 사이에 야당 신세가 됐다. 그리고 연말 의원총회에서 고노 의원은 자민당 총재로 추대된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줄곧 여당에만 몸담았던 다수의 자민당 의원이 한 10년간 야당 노릇을 해본 고노 의원을 야당 지도자로 모셔 권토중래를 꾀하려 했던 것이다.

    사상 최강의 야당 앞에 좌파와 우파를 망라한 오합지졸 연합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턱이 없었다. 1년 남짓 혼란을 겪은 끝에 사회당이 떨어져 나가면서 연립정권이 무너지자,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제1당 자민당과 제2당 사회당이 연립하고 거기에 군소 중간파인 사키가케가 참여하는 대연정(大聯政)이다. 묘한 일이었다. 더욱 묘한 것은, 총리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위원장이 맡고 부총리 겸 외무상은 고노 자민당 총재가 맡은 것. 총리직만 내줬을 뿐 각료의 과반수를 차지함으로써 자민당은 사실상 정권을 탈환한 셈이다.

    고노 씨는 병세가 호전된 것도 아닌데 당총재, 부총리, 그리고 외무상이라는 격무를 2년 가까히 해냈다. 더구나 당시 70세가 넘은 고령의 무라야마 총리는 각료직을 맡아본 적이 없는 인물. 고노 부총리로선 ‘아마추어 총리’를 모시게 된 것이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한반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1994년 7월, 그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에 총리를 대신해 참석해야 했다. 그와 그의 아들 고노 타로(河野太郞·41) 의원은 함께 펴낸 ‘결단’이라는 책에서 당시를 “불과 반 달 동안에 7~8개국을 순방하고 갖가지 국제회의에 출석하는 과밀한 스케줄이 당연한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995년 7월13일 아내의 죽음이었다. 자궁암 제거에 성공해 잠시나마 희망이 보였기에 그해 3월 헝가리 공식 방문에 동행하기로 했는데, 출발 직전 암이 재발해 부부가 동시에 입원 치료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래 살아야 1년”

    그렇다고 정치활동을 멈출 수도 없는 처지였다. 뜨거운 7월, 당총재인 그는 참의원 선거유세로 전국을 누비고 있었다. 13일 시코쿠섬의 다카시마 거리에서 연설하던 중 비서에게서 메모지를 건네받았다. ‘사모님께서 숨을 거두셨습니다’라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연설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그의 순회 가두연설 시간표가 미리 알려져 유권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정을 마친 뒤에야 마지막 비행기로 도쿄의 병원으로 돌아가 아내 다카코의 싸늘한 시신과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규슈의 구마모토로 다시 날아갔다. 그는 세 자녀 앞에서 “구마모토에서 유세가 있다.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밤을 새울 수 없다. 장례 때까지는 돌아오마” 하고 약속했고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다들 “알았습니다”라는 반응이었다. 선거가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이 정도로 가혹한 것일까. 그는 ‘다카코도 정치가의 아내다. 선거가 전쟁임을 잘 알 것이고, 이렇듯 황망하게 헤어지는 것도 용서해줄 것이다’고 믿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자민·사회당 연정은 다음해 정월까지 계속됐으나, 그해 9월의 자민당 총재선거 출마를 포기했다. 간염은 악화일로였고 아내를 잃은 충격도 컸다. 일본 속담대로 ‘활 떨어지고 칼 부러진 격’이었다. 그는 이때 총재직을 그만둠으로써 자민당 총재로서는 유일하게 총리가 되지 못하는 기록을 남겼다.

    요직을 떠난 후 그는 미국으로 가서 간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간경변 일보 직전이라는 놀라운 검사결과가 나왔다. 간암으로 악화될 수도 있고 정맥에 혹덩어리가 생겨 파열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최후의 방법으로 인터페론을 투여했다. 그의 나이 예순이었다. 그의 부친 고노 이치로(河野一郞)씨도 30년 전 총리에 오르기 직전 정맥류 파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고노 씨는 그 후 아버지의 선거구를 이어받아 내리 30년간 정계를 누볐으나 공교롭게 아버지와 똑같은 말로를 걷게 되었다.

    치료 후 그는 1999년 오부치 내각에 다시 외무상으로 입각한다. 총리를 지낸 미야자와 기이치가 대장상으로, 자민당 총재 출신의 그가 외무상으로 들어가 ‘거물내각’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그에게 재입각은 자살행위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2001년 봄까지 2년 가까이 업무를 수행했다.

    2002년 2월, 그는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는다. 우려하던 대로 식도 정맥에 혹이 생겼고 정신이 갑자기 몽롱해지는 간성뇌증도 찾아왔다. 의사는 길어야 1년 남짓 살 수 있다고 했다. 간이식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이때 기적 아닌 기적이 일어난다. 1996년부터 중의원으로 뛰고 있는 장남 타로가 자신의 간 일부를 아버지에 이식하겠다고 나섰고 나머지 아들과 딸도 서로 간 이식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자식들에게 “너희 마음은 고맙지만 인간에게는 수명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간을 못 쓰게 되어 죽는다면 그것으로 내 수명은 다한 것이다. 나는 건강한 자식의 배를 가르면서까지 목숨을 연장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일본 정치인 친미 일변도·우경화 우려할 만한 수준”

    2000년 7월14일 고노 요헤이 일본 외무장관이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하지만 자녀들의 끈질긴 설득에 그는 결국 손들고 말았다. 그해 4월16일, 15시간의 대수술 끝에 장남 타로의 간 3분의 1이 아버지 요헤이의 제거된 간 자리를 메웠다. 그 후 1년간의 조심스런 회복단계를 거쳐 정상적인 삶을 되찾았다.

    그러나 정치에 복귀할 것인지를 놓고 부자간에 의견이 엇갈렸다. 건강을 겨우 회복한 아버지가 정치에서 손떼고 유유자적하며 회고록을 써 후세에 남겼으면 하는 것이 아들의 충정이었고, 고노 씨는 새롭게 태어난 이상 생명을 다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에게 정치는 곧 삶이다. 마침내 그는 2003년 11월 13번째로 선거에 나서 압승하고 중의원 의장에 올랐다.

    일본 지도층과 일반 여론은 크게 매파와 비둘기파로 양분되고, 이는 외교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국력을 배경으로 현실적으로 나가자는 노선이 전자이고, 조심스럽게 대화를 통해 평화를 추구하자는 것이 후자에 속한다. 그래서 이라크 파병 문제, 헌법개정 및 재무장 문제, 북한 핵 문제 등을 놓고도 의견이 대립된다.

    고노 요헤이 의장은 36년 정치생활 내내 비둘기파에 속했다. 지난호에서 만난 나카소네 전 총리와는 대조적이다. 나카소네 전 총리를 면담한 지 1주일 후인 6월8일 그를 만나기 위해 중의원 의장공관을 찾았다.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문답에 들어갔다.

    DJ 용단에 경의

    -동아시아 관계를 어떻게 전망합니까. 당장은 막연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한국·일본·중국이 의견 차이를 최소한으로 좁히고 공통점은 넓혀가려는 공동의 노력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나 EU(유럽연합)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텐데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동남아시아엔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이 있지 않습니까. 아세안이 만들어지기까지 대단한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력, 종교 등에 차이가 많은데도 아세안 10개국이 이런 지역공동체를 만들어낸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해요. 이들 사이에는 정상급, 외무장관급, 무역장관급, 국장급, 과장급 등 다양한 레벨에서 1년에 300회 정도 모인다고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차원의 교류를 오래 지속하다 보니 친분이 두터워져 외무장관들끼리도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비록 의견 차이도 있겠지만, 그런 차이를 별 거부감 없이 교환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했기에 아세안이라는 연합체가 탄생할 수 있었겠죠.

    ‘아세안 플러스 스리(ASEAN+3)’라고 해서 아세안 국가들과 일본·한국·중국이 참가하는 회의도 열리는데, 이것도 매우 중요한 모임입니다. 장차 북한도 여기에 참가해 동북아시아의 지역공동체 관계를 구축, 동북아시아 국가와 아세안 국가들이 긴밀한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혹자는 이 지역 국가간에 국력, 경제력, 종교 등의 차이가 크고 역사문제와 같은 난제도 산적해 우호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력하면 안 될 게 없지요.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겠죠.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만 너무 서두르다 보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형식만 갖출 우려도 있거든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면서 지역 합의체로 나아가야겠죠. 이를 위해 일본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공동선언을 통해 21세기의 새로운 파트너십을 천명한 것은 새 시대를 여는 큰 용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일관계를 발전시키려 한 결단에 경의를 표합니다. 김 대통령께서 일본 국회에서 행한 연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재임 5년 동안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김종필씨와 함께 정권을 이끌면서도 일본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일본어에 ‘물에 흘려버린다’고 하는 표현이 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김 대통령이 한일관계를 극적으로 반전시키기 위해 어려운 결심을 한 데 비해 일본은 그에 상응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부끄럽습니다. 지금은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별로 없고, 일본이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봅니다.”

    -가령 어떤 일입니까.

    “부(負)의 유산이죠. 한국은 이 문제에 대해 더 언급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일본 전체로 보면 어느 정도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므로 ‘우리’라고 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김 대통령이 그런 결단을 내렸다면 일본도 그에 보답을 했어야 합니다. 예컨대 재일 한국인에 대한 선거권을 부여하는 게 바람직했습니다. 당시 오부치 총리가 이 문제를 언급하긴 했으나 실현되진 못했거든요. 이렇듯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한 일이 적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만둘 결심으로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다 보니 지금껏 풀리지 않은 거죠.”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일본이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일본도 경제문제 등에서는 해야 할 일을 더러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 문제와 같은 부의 유산과 관련해서는 노력해야 할 일이 아직 많습니다. 이것은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한국 및 중국과 정치 경제 문화 학술 분야 등에서는 관계가 진전되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정치적 과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한관계나 일중관계가 잘 돼간다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가 빠진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인은 포퓰리즘에 어느 정도 영합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현재 한일관계는 1년에 300만명 이상이 왕래할 만큼 발전했고, 한국에 대한 일본 국민의 태도도 이전보다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는 만큼 정치인들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 종군위안부 문제 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지금도 할머니들이 집회를 열고 있죠. 정치인들이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일인데, 아무도 용기를 내서 말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의장 같은 분이 총리가 되는 것일 텐데요.

    “그건 쉬운 일이 아니죠.”

    -대(對)북한 문제도 해결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아직도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나라가 있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일본과 러시아는 영토문제가 남아 있지만, 공동선언으로 국교를 회복했습니다. 1956년 하토야마 내각 때의 일이죠. 당시 하토야마 총리는 반신불수의 몸으로 일소교섭을 타결한 후 정계를 떠났습니다.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모스크바까지 날아갔어요.

    하토야마 총리가 지팡이를 짚고 하네다 공항을 출발할 때 도쿄의 정치판에선 소선거구제를 둘러싸고 여야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또 필리핀과는 배상문제로 시끄러웠죠. 외무대신이 일-필리핀 문제에 매달리느라 총리가 모스크바로 날아가 공동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하토야마 총리의 용단이었다고 봐요. 정치가로서 말이죠. 하토야마 총리는 러시아와 조인을 마치고 귀국한 후 곧바로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습니다.”

    ‘착지점’은 분명한데…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나 일본의 우파는 북한이라는 ‘불량국가’를 은근히 고맙게 여기는 면도 있는 듯합니다. 북일관계를 어떻게 전망합니까. 북한은 북일교섭 과정에 핵이 좋은 카드가 되리라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북한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핵으로 안전보장이나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해요. 핵이 없으면 세계가 북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북한이 핵 보유 선언을 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겠죠.

    그런가 하면 일본은 북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후의 무기라 할 경제력을 갖고 있습니다. 핵, 일본인 납치, 그리고 경제문제는 일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할 것인지는 분명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제게 여러 번 말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길은 명확합니다. 즉 미국은 김정일 체제를 인정하고, 북한은 핵을 폐기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것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분명한 ‘착지점’까지 어떻게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양자간의 불신이 워낙 뿌리깊거든요. 서로 계속 의심한다면 착지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대북문제를 풀어가는 데 당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현재 진행중인 6개국 협의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6개국 협의의 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도 그 틀을 계속 남긴다는 생각으로 협의해야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미 30여 년 전의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지금의 6개국 협의와 흡사한 구상을 밝혔습니다. 이른바 ‘2(남북한) 플러스 4국 보장’이라는 공식인데, 현재는 그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겠죠.

    “미국의 클린턴 정권 시절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하고 서울에 왔을 때 저도 서울로 가서 얘기를 나눴는데, 올브라이트 장관은 북미관계를 진전시키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도 북미관계가 개선되리라 예상했어요.

    그런데 그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패배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고어 후보가 당선됐다면 사정이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고어 후보가 당선됐다면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성사됐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공화당이 이기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한 겁니다.

    더구나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11 테러사태를 계기로 ‘힘의 정치’로 외교노선을 바꿨습니다. 그 후 세계는 일극주의(一極主義)로 돌입했고, 그때껏 진전되던 것들이 후퇴하기에 이르렀죠. 힘에 의한 미국 일극주의는 김정일에게도 압박을 가했다고 봅니다.”

    -중국, 북한 등과 손잡고 경제통합을 시도하고 평화공동체도 지향해야 할 테지만 궁극적인 문제는 체제입니다. EU는 경제적으로 시장경제, 정치적으로 자유체제이기에 25개국 4억5000만명의 공동체 실현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중국을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라고 말하지만, 사회주의와 시장은 상반된 개념 아닙니까. 근본적으로 정치체제가 유사해지지 않는 한 동북아 지역공동체 출범이 가능할지 의심스럽습니다. 덩샤오핑은 생전에 “50년 후에는 중국이 홍콩에 근접할지, 홍콩이 중국에 근접할지 모를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간다면야 중국도 서서히 변하겠지만요. 향후 중국은 어떤 길을 걸으리라 봅니까.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10억이 넘는 국민에게 투표권을 줘 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을 만드는 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고…. 언젠가 워런 크리스토퍼 전 미 국무장관에게 ‘나는 중국이 미국과 같은 의회민주주의 국가가 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크리스토퍼 전 장관은 ‘나도 동감이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라. 인도는 하고 있지 않은가’라더군요.”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군요.

    “저도 그 말을 납득은 했지만, 제대로 될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또 하나의 의문은 중국 IT(정보통신기술)의 미래입니다. 정보통신기술이 중국의 대중에게 어떻게 파고들어 어떤 기능을 할지 궁금해요. IT 보급에 힘입어 매우 빠른 속도로 사정이 좋아질 수도 있지만, 자칫 통치불능 상태로 빠져들 위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일 것 같습니까.

    “현재로서는 예측 불능입니다. 다만 이전의 10년, 20년과 장차 10년, 20년이 전혀 다르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5, 6년 전 중국의 고위 외교관에게서도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그는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이었는데, 거친 일도 많이 했다고 해요. 대자보도 많이 붙였는데, 문화혁명이 끝난 후에는 대자보 붙이는 일을 법률로 금지했다고 해요. 대자보를 허용하면 여러 직장, 단체 할 것 없이 무책임한 소리를 마구 쏟아낼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교사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요. 이런 식으로 거듭해서 비방하다 보면 사실이 아닌 것도 진실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학교, 그런 사회, 그런 국가는 사분오열되고 만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겁니다. 최근 중국 당국이 인터넷 때문에 머리를 싸맨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상당히 걱정스러울 거예요.”

    고이즈미, 우경화에 저항감 없어

    -요즘 고이즈미 총리가 용기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보는 여론이 많은 것 같습니다. 비판론도 만만치 않지만요.

    “고이즈미 총리를 둘러싼 오늘의 정치환경은 우경 성향이 강합니다. 국민여론에서도 헌법개정 논의가 일상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을 지지하는 비율도 꽤 높습니다. 여론을 유도하는 언론의 힘도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하지만 헌법개정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어쨌든 60%를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이상할 정도예요.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도 5년 전이라면 성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본 정치인들의 역학관계, 균형관계에서는 옛 사회당(현 사민당)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자민당 안에도 비둘기파와 매파가 있습니다. 양쪽을 비율로 따진다면 4 대 6 혹은 3 대 7로 매파가 우세합니다. 그렇지만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사회당도 자민당 비둘기파를 지원하기에 국회에서도 5 대 5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사민당이 소수당으로 전락, 재기하기 힘든 형편이 됐습니다. 옛 사회당을 대신할 정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인데, 민주당에는 자민당 우파 출신 인사가 많습니다.”

    -오자와 이치로 씨 같은 분 말입니까.

    “오자와 씨를 비롯해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민주당에서 발언권이 커지고 있습니다. 자민당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우경화되어 균형을 잡기 어려워졌어요. 이처럼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우경화 경향이 눈에 띄고 국회도 오른쪽으로 쏠리면서 균형이 깨지고 있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이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경에 대한 아무런 저항감 없이 정권을 운영하고 있다고 봐요. 그런 분이 북한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기에 일이 끝까지 잘 될 수 있을지 불안합니다. 일본의 외교정책, 아니 일본 정치 전체가 미국과의 관계만을 중시하는 듯합니다.”

    -미국은 ‘하드 파워’에선 승리하는지 몰라도 ‘소프트 파워’에서는 진다고들 합니다. 군사력을 중심으로 한 일극주의로 하드 파워를 구사하고 있으나 신보수주의자는 경제와 문화 같은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듯해요. 그런 의미에서 지난 50여 년간 소프트 파워만 행사해온 일본은 현명했다고 봅니다. 이라크인들도 일본에 대해서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잖아요. 일본에 부정적인 경계심을 품는 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일본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나라, 평화국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지금이 하나의 전환점이 될 듯합니다.

    “제가 외무대신일 때 유엔총회에서 ‘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될 용의가 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물론 ‘유엔 회원국들이 원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일본 외무대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상임이사국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죠.

    그런데 요즘 들어선 그렇게 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안보리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은 일본이 유일한 핵 피해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모두 핵 보유국이죠. 그러니 핵을 보유하지 않고 핵 피해 경험이 있는 일본이 거기에 들어간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은 50년 이상 자제력을 발휘해오지 않았습니까. 국제정치에서도 ‘파워 폴리틱스’는 하지 않는다는 자제심을 유지해 오늘에 이르렀으니까요. 그리고 국제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경제력도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게 의미 있다고 판단한 것인데, 지금에 와서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핵 보유를 논의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파 중의 우파인 모양이죠.

    “그런 사람들은 잠깐 그렇게 의견을 비치고는 곧 입을 다물어버리죠. 미국 추종파라고 할 수 있는 그룹 안에서도 지나치게 친미 일변도인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또 ‘일본이 국제사회에 많은 돈을 대고 있기 때문에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라면 상임이사국에 차라리 안 들어가는 게 낫습니다.”

    내가 총리라면 야스쿠니 안 가

    -1986년 나카소네 당시 총리가 야스쿠니 참배를 중단한 것은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런데 현 고이즈미 총리가 참배를 재개해 한국과 중국의 항의를 받았습니다. 이 문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야스쿠니에 참배하는 것이 그리도 중요한 것인가요. 천황도 가지 않는데 왜 총리가 굳이 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고이즈미 총리의 공식 참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 부분이 무척 애매합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그것을 공식 참배라고도 하고, 공식 참배가 아니라고도 해요.”

    -어느 경우이든 간에 한국과 중국의 감정을 건드리면서 야스쿠니에 가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일본 국민의 찬성 여론이 있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저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의장께서 총리가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역대 일본 총리들은 총리대신이 되기 전까지는 모두 ‘야스쿠니에 가는 회(會)’의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하지만 총리가 되고 나서는 회장을 사임하고 가지 않는다고들 하더군요. ‘그 전까지는 야스쿠니에 갔지만, 일본국을 대표하는 총리대신이 된 후에는 가지 않겠다’고만 해도 좋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헌법개정 문제는 어떻게 봅니까. 일부 개정론자는 “헌법 제9조 2항이 육·해·공군을 보유하지 못하게 해놨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얼마든지 확대해서 유권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애매한 현실을 헌법으로 분명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메이지 헌법도 군 통수권의 소재를 애매하게 해뒀기에 군부가 중심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까지는 가능하고, 여기부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정해야 한다는 주장인데요.

    “저는 그런 주장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현재도 이 정도까지 가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여기까지는 가능하도록 하자’고 한다면 더 나아가려 할 것입니다. 현재로서도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한국은 반미, 일본은 친미

    -개정론자 사이에선 미국의 처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그 점이 더 이상해요. 자민당 창당 무렵에도 헌법개정 논의가 있었지만 당시엔 ‘이 헌법은 미국이 강제한 것이므로 자주적인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논의는 헌법을 바꿔서 미국과 보조를 맞추자는 것 아닙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저희도 관심이 큽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에선 미국 지상군이 차차 철수합니다. 미군, 한국군, 일본군을 한 깃발 아래 묶으려는 게 미국의 의도인 듯합니다. 한국의 급진파는 반미, 반일을 거세게 외치고 있습니다. 일본 정계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이상하게도 일본의 젊은 정치인들은 거의 다 친미주의자입니다. 한국과는 대조적이죠. 일본의 젊은 의원 중에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거나 미국을 잘 아는 이가 많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미국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매우 친미적인 성향을 띱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모릅니다. 미국과 치른 전쟁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그 전쟁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을 때가 어떠했는지도 몰라요. 직접 겪지 않았어도 책을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인데. 그들은 그런 것보다는 자기들이 미국의 대학에서 얼마나 즐겁게 생활했는지, 미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뭐 이런 것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미국에 대한 감정은 젊은 층일수록 좋습니다.”

    -한국은 한국전쟁이나 경제건설 과정에 미국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젊은 정치인들도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어요. 배고픔을 알지 못하는 세대죠. 그렇지만 그들은 군사독재 시절 반독재 운동을 용기있게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반미, 반일 경향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화제를 바꿔볼까요? 지난 6월1일 참의원 후생노동위원회에서 국민연금법안을 강행처리하는 광경을 TV에서 봤는데 몸싸움이 난무하더군요. 한국이나 대만 국회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의회민주주의 절차가 아주 중시됩니다. 법과 질서가 잘 유지되죠. 한국, 일본, 대만도 자유선거로 정권을 교체하는 등 어느 수준의 민주주의 정치에 도달했는데, 왜 이성적인 토론과 합의, 타협으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을까요.

    “유감스럽지만 그런 것은 뭐라고 할까요, 역시 문화적 배경에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의회민주주의 제도의 매너나 규칙은 일부러 가르치기 이전에 문화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중학교에서부터 토론수업을 하지만, 일본에서는 토론이라는 수업이 없습니다.

    6월1일 소동 끝에 후생노동위원장 불신임안은 부결됐습니다. 그렇게 신임된 위원장이 오늘은 위원회에 출석해서 보고를 했는데, 민주당의 젊은 의원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가’ ‘사퇴하라’며 야유하더군요. 이것도 규칙위반이죠. 위원장 불신임안이 다수결로 부결됐다면 그 위원장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임을 받은 사람더러 또 물러나라고 하다니요.”

    후배 의원 가르치는 전통 사라져

    -1970년대 영국 노동당의 거물 크로스맨의 일기를 읽어보면 그가 1930년대에 처음 의회에 등원했을 때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가 진심으로 존경하던 노동당의 한 선배 정치인이 그를 부르더니 “자네가 오늘 행한 일은 자네 개인, 당, 의회, 국가 아무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진보적인 사안이라도 신중하고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크로스맨은 이 얘기를 듣고 크게 뉘우쳐 그 후로는 모범적인 자세로 의정활동을 했다고 해요. 일본 의회에서도 이처럼 시니어 멤버가 젊은 정치인을 가르치는 풍토가 있습니까.

    “과거에는 일본에서도 선배가 후배를 꽤 가르쳤습니다.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가 젊은 시절 위원회에서 질의하다가 뒤를 돌아보면 선배 의원이 질의 내용을 귀담아 들으려고 와 있었다고 합니다. 위원회가 끝난 후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 또 다른 선배가 다가와서 ‘오늘 질의는 참 좋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질의할 때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조언했대요. 질의에 대해 칭찬해준 것도 기쁘지만 대선배가 신참의 질문을 들으러 와준 것은 더 기뻤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즘엔 그런 전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비둘기파의 겨울’

    이렇게 해서 한 시간 남짓 계속된 인터뷰를 마쳤다.

    고노 의장에게서 불과 2년 전만 해도 간경변으로 생사의 기로를 헤매던 사람이라는 인상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대단한 사람이다.

    그의 말마따나 인간에겐 하늘이 정해준 수명이라는 것이 있다. 30년 앓던 간염이 간경변으로 악화됐으면 그의 수명은 다한 게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인력으로 수명을 ‘수정’했다. 천운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는 총리라는 ‘정상’에는 끝내 오르지 못한 비운의 정치가다. 자유주의 성향의 일본 지식인들은 이 점을 무척 아쉬워한다.

    ‘아사히신문’의 와카미야 논설주간은 지난 2월29일 게재된 칼럼에서 ‘만일 총리였으면’ 하는 말로 고노 의장의 딱한 사정을 전했다.

    일본 중의원은 1월31일 새벽 자위대 이라크 파견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야당은 퇴장하고 자민당 등 여당만 남아 단독으로 통과시켰는데, 그때 사회봉을 두드린 사람이 바로 고노 의장이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비둘기파의 수장이었지만, 다수 의견에는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의회정치의 룰인 것이다. 그랬기에 ‘고노씨가 의장이 아니라 총리였으면…’ 하는 아쉬움을 표현한 것이다. ‘비둘기파의 겨울’이라는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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