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전두환, 정권 승인 대가로 美에 핵포기, 전투기 구매 약속

  • 글: 이흥환 美 KISON 연구원 leescorner@hotmail.com

    입력2004-07-29 17: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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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정권 승인 대가로 美에 핵포기, 전투기 구매 약속
    1981년 1월20일, 민주당의 카터 대통령을 밀어내고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된 공화당 정권의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한국에 다섯 줄짜리 편지 한 통을 발송한다. 5개월 전인 9월1일 역시 한국의 신임 대통령이 된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내는 초청 서한이었다.

    《전두환 대통령께1981년 2월1~3일에 귀하가 워싱턴을 방문하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귀하를 맞아 한·미 양국 관계의 현 상황은 물론 지역 문제에 대한 상호 관심사를 재점검하게 된 것을 본인은 기쁘게 생각합니다.경의를 표하며,로널드 레이건》

    이 짧은 서한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볼 때 국가원수간에 오가는 공식 대통령 서한 양식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수신자 이름에 붙이게 마련인 존칭(Excellency)마저 생략된 채 ‘To President Chun’으로 시작되는 이 서한은 공식 초대 서한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대통령 메시지 형식이었다.

    한 장짜리라고도 말하기 힘든 불과 다섯 줄짜리 편지 하나로 전두환 대통령은 12·12 이후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어 온 워싱턴과의 불편한 관계를 말끔히 씻어내게 된다. 이틀 후인 1월22일, 초청에 대한 감사 편지 형식으로 백악관에 발송된 전두환의 답장엔 의례적인 초청 수락 이상의 감사를 표하는 문구가 곳곳에 들어 있다.

    《‘저와 제 아내가 워싱턴을 방문할 수 있게 초청해주신 1월20일자 서한에 감사드립니다. 초청에 응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국제 상황은 물론 여러 가지 양자 간 현안을 상의하기 위한 회동을 가졌으면 합니다.’》



    레이건·전두환의 전격 회동

    레이건은 불과 11일의 여유를 두고 전두환을 초청했고, 전두환은 이틀 만에 초청에 대한 감사의 답장을 보냈으며, 오라 했으니 가겠다는 답장을 보낸 지 열흘 만에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전두환-레이건의 워싱턴 회동은 이렇게 전격적으로 성사되었다. 파격적인 성사 과정이야 어떠했든 한·미 양국의 신임 대통령들이 만나는 자리인 만큼 형식은 ‘공식 방문(Official Visit)’이었다.

    인사말 빼면 5분간 대화

    다음은 1월27일 미 국무부가 작성해 백악관에 제출한 전두환의 2박3일짜리 워싱턴 방문 일정표 가운데 주요 부분이다.

    《한국 전두환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 예상 일정

    2월1일, 일요일전 대통령과 일행은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개인 자격으로 방문한 후, 오후 4시 대한항공 편으로 앤드루 공군기지에 도착.(군악대 연주나 도착 성명 없는) 비공식 도착이지만,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과 글라이스틴 주한 대사, 의전실장 대행 및 국무부 고위 관료들이 전 대통령을 영접함.

    2월2일, 월요일, 백악관 회동오전 10:40 레이건 대통령 내외가 전두환 대통령 내외를 맞아 백악관 발코니로 안내함(군악대 연주나 성명 없음). 두 대통령 내외, 발코니 사진 촬영 후 백악관 청실로 이동. 군 경호 요원들이 두 대통령을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집무실에서의 두 대통령 회동은 간단하게 끝낼 것을 권함. 총 회동시간은 10분 미만. 헤이그 국무장관과 노신영 외무장관이 통역으로 배석.

    12:00-오후 1:30, 백악관 오찬오찬 참석 예정자 50~60명 명단 추후 제출(부인 대동).주최측 미국이 주도하는 사교모임 형식으로 진행. 식사 끝나는 시간에 건배.

    오후 2:00 기타 회동오찬 후 한국 관리들이 미국측 상대 관리들과 회동.국무장관이 전 대통령 및 노신영 외무장관과 회동.

    저녁 : 한국측 만찬주미 한국 대사(김용식 : 옮긴이)가 월요일 만찬 주최 예정. 미 국무장관 참석. 부통령 참석 권함.

    2월3일, 화요일오전 10:30 스미스소니언 학회 행사스미스소니언 학회의 새 아시아관 건립과 관련, 학회가 아시아 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바, 전 대통령이 한국 국민들을 대신해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에 100만달러를 기부할 예정. 이 행사는 새 미술관에 대한 획기적인 재정 지원일 뿐 아니라 미국-아시아 관계의 상징적인 행사이므로, 레이건 대통령 내외 또는 부시 부통령 내외가 행사장에 잠시 모습을 나타낼 것을 권함.참고 : 선물 관련한국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 내외에게 줄 선물을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음. 양국 대통령 회동 전에 숙소인 블래어 하우스에서 의전실장 주재로 선물 교환할 것을 권함.》

    전두환은 워싱턴을 뒤흔들었던 코리아게이트 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한국 대통령이었으며, 레이건이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맞이한 두 번째 외빈이자 첫 번째 국빈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의 방미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정상회담 자리에는 공식 통역관도 없이 한국의 외무장관이 통역으로 배석하고, 그나마 두 정상이 마주앉을 시간은 단 10분이었다. 양측의 통역 시간과 회동 앞뒤의 의례적인 인사말을 빼고 나면 길어야 5분. 서로 마주앉았다가 금방 일어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대통령이 직접 선물을 주고받는 시간마저 배정되어 있지 않았다.

    1시간30분 동안 진행될 백악관 오찬은 국무부 문서의 표현대로 ‘주최측의 사교모임’이었고, 2박3일 워싱턴 체류 기간에 마련된 두 번의 저녁식사는 모두 김용식 주미 한국대사가 마련한 것이었다. 도착 둘째날인 월요일 오찬 후의 ‘기타 회동’ 일정은 백악관 회동에 참석하지 못한 한·미 양국 고위관리들이 서로의 상대역과 실무회담을 하는 자리였다. 이 일정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노신영 외무장관의 상대역은 알렉산더 헤이그 미 국무장관이었다.

    한국 국민을 대표했던 전두환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서럽기 짝이 없는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푸대접이라기보다는 무대접에 가까웠다. 국무부 문서는 이를 ‘신임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정상적인 예우’라고 표현했다. 이런 대접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냈어야 할 ‘한국의 국익’을 전두환 대통령 자신은 무엇이라고 보았던 것일까?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야만 했던 ‘국익’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핵확산방지정책에 계속 협조해달라”

    대통령 전두환을 미국에 보낸 서울의 분위기는 워싱턴의 이런 실제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안보에 대한 공통된 인식… 두 정상 의기투합’ ‘한·미 새 동반시대’ ‘철군 불안에 깨끗한 종지부’ ‘솔직하고 확신에 찬 연설… 분위기 휘어잡아’ ‘위트로 이끈 오찬장 화기의 폭소’ 등이 한국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한 전두환 방미 기사의 제목이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 언론의 이런 제목들이 모두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전두환은 방미를 계기로 한·미간의 서먹서먹했던 관계를 깨끗이 청산했다. 12·12도 덮어졌고, 광주도 잊혀졌다. 한·미간에 12·12나 광주는 더 이상 현안이 아니었다. ‘한·미 새 동반시대’ 개막이라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전두환이나 레이건 모두 서로 만남으로써 잃을 것은 없었고 얻을 것은 많았다. 미국이 얻은 것은 국익이었다. 그러나 한국이 얻은 것도 국익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미국의 ‘승인’을 받아냄으로써 전두환 정권이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 최대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 컸다.

    다음에 소개하는 대화록은 전두환의 워싱턴 방문 직후인 2월5일, 국무부가 작성해 백악관과 주한 미 대사관에 동시에 발송한 1급 비밀(Top Secret)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양국 외무장관 사이의 실무 대화록이다. 세 장짜리로 약간 긴 글이긴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이 워싱턴 방문을 통해 얻고자 했던 ‘한국의 국익’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단서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대로 옮긴다.

    《제목 : 한국 전두환 대통령 방미 관련, 국무장관의 블래어 하우스 회동

    1. 1급 비밀 - 전체 내용

    2. 2월1일 일요일 오후 헤이그 국무장관은 전두환 대통령과 앤드루 공군기지에서 블래어 하우스로 이동하는 동안 차 안에서 비공식적인 대화를 나누었으며, 이어 블래어 하우스에서 노신영 외무장관과 잠시 만났음. 이 자리에는 공로명 외무차관과 허화평 대통령보좌관이 배석했으며, 글라이스틴 주한대사도 참석했음.

    노신영 : 2월1일자로 되어 있는 공동선언문 초안에 우리 정부도 이의가 없다. 우리가 마련한 공동선언문 초안에는 한국의 정치 안정을 위해 전두환 대통령이 취한 여러 가지 조치들을 인정해주는(endorsing) ‘정치적’인 문구가 들어가 있었으나 2월1일자 초안에는 빠져 있다.

    헤이그 :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빠졌다. 하나는 전두환 대통령을 초청한 행위 자체가 여러 말을 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한국 내정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레이건 행정부의 희망사항이기 때문이다.

    노신영 : 이해한다.

    (뒤이어 김대중 건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 교환 부분이 있으나 비밀문서에서는 삭제되어 있음. 다음에 보이는 헤이그의 말은 앞뒤 문맥으로 미루어보아 ‘김대중 건에 대해 미국이 압력을 넣지 않았으면 한다’는 노신영의 의견 피력에 대한 반응인 것으로 판단됨 : 옮긴이)》

    “취임식에 최고위급 인사 보내달라”

    《헤이그 : 미국이 그런 압력은 가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 한국이 김대중 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또는 내정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해 레이건 행정부가 공개적으로 조언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해줄 조언이 있다면 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전달될 것이며, 한국의 대외관계에 영향을 미칠 만한 현안에만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고,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전달될 것이다.

    공항에서 같이 차를 타고 오면서 전두환 대통령께 한국이 이제는 국무부뿐만 아니라 백악관에도 친구를 두게 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렸다. 전두환 대통령께도 이미 설명했듯이, 한국이 우리의 핵확산방지 정책에 계속 협조해주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한국에 배치해놓은 핵무기는 그대로 둘 것이다.

    전두환, 정권 승인 대가로 美에 핵포기, 전투기 구매 약속

    취임 직후인 1981년 1월 첫 외국 국빈으로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을 초청해 환담하고 있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한국이 현재 경제적으로 어려운데도 미국의 대외군사 판매와 F-16을 포함한 무기 공급에 협조해줘서 감사드린다. 우리가 중국과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에 대해 한국이 불편해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러시아와 관계를 진척시킬 때에도 한국의 입장을 반영하겠다.

    노신영 :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다. 한·미 관계가 순항할 것으로 본다. 3월3일 서울에서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다. 미국이 최고위급 저명인사를 취임식에 파견해줄 수 있겠는가? 일본, 유럽 및 다른 나라들에도 미국이 최고위급 인사를 한국 대통령 취임식에 파견한다는 걸 널리 알려주었으면 한다.

    헤이그 : 레이건 대통령께 상의드려보겠다. 고위급 인사를 대표로 파견하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

    형식적인 워싱턴 일정

    노신영과 헤이그의 이 대화는 양국 외교의 실무 수장 두 사람이 비공식적인 자리를 빌려 서로 속에 품고 있던 말을 주고받았다는 점에서 ‘허심탄회’하다 못해 노골적인 것이었다. 공식 회담에서는 거론하기 불편한 문제들을 까발려놓았던 것이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전두환의 정치일정표에 대한 ‘공개승인’을 받고 싶어했고, 내친김에 대통령 취임식을 기회로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한다는 ‘철인’까지 찍어줬으면 했다. 두 가지는 모두 불발이 되었다. 헤이그의 말대로 레이건 행정부는 전두환을 초청함으로써 ‘말’ 대신 ‘행동’으로 전두환 정권을 이미 ‘승인’했으며,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에는 주한 미 대사만 참석했다. 백악관의 결정이었다.

    노신영-헤이그의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이 원했던 것은 이 두 가지 외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반면, 미국은 전두환 정권에 핵무기 개발 포기와 미국산 무기 구입이라는 두 가지 카드를 내밀었고 모두 받아들여졌다.

    도착 첫날, 노신영과 헤이그는 이 비공식 회동에서 서로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았다. 이후 전두환 일행의 워싱턴 일정은 거의 형식에 불과했다. 이튿날, 백악관에서의 레이건 ‘10분 면담’과 ‘사교 오찬’이 있은 뒤 오후에 국무부에서 전두환과 헤이그가 만난다. 한·미간 현안의 실제적인 토의는 한국 대통령과 미 국무장관 사이에서 이날 이루어진 셈이다.

    美 학회에 100만달러 기부

    전두환-헤이그 회동의 주요 내용은 미·중, 미·소, 미·북 관계 및 한국 경제 문제였다. 미국의 대(對)중, 대소 문제와 관련, 한국이 우려하는 점을 미국이 설득시키는 내용이었고, 통보하는 형식이었다. 이 자리에서도 헤이그는 또 한번 한국의 핵무기 개발 포기를 종용한다.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지 말라는 미국의 요구는 ‘핵 비확산 정책을 충실히 지켰으면 한다’는 표현으로 완곡하게 전달되고 있다.

    좀더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헤이그의 두 번째 한국 핵 프로그램 발언은 2월6일자 미 국무부의 2급 비밀문서에 적혀 있으며, 하와이 호놀룰루의 미 태평양 사령부와 도쿄 및 베이징의 미 대사관에도 발송되었다는 점이 다른 문서와 다르다.

    《헤이그 국무장관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한국은 원자력 발전에 필요한 핵연료 공급물과 기술을 미국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이 현명하게 핵 비확산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점에 대해 감사드린다는 점을 분명히 했음.》

    전력생산용 원자로 가동에 필요한 핵물질은 미국이 대줄 테니 별도로 핵물질을 가질 생각은 안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헤이그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전두환이 어떤 대응을 했는지는 이 문서에 언급돼 있지 않다.

    전두환 정권에서 핵문제가 처음 거론된 시점은 방미가 확정되었던 1월22일이며, 이 문제를 처음 거론한 사람은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다. 1월22일자 ‘레이건-전두환 회담을 위한 협의사항 제안’이라는 제목의 2급 비밀문서에 글라이스틴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고, 워싱턴은 글라이스틴의 이 제안을 그대로 반영했다.

    《핵 비확산 : 한·미 양국 모두 신행정부가 출범했으므로, 포드와 카터 행정부에서 채택된 핵 비확산의 입장을 다시 거론하는 것이 중요하며, 사적인 회동자리에서 언급하는 것이 최선일 듯함. 헤이그 국무장관과 전두환 대통령의 회동자리에서 언급될 수도 있음.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이 박정희 대통령과 합의한 대로 우리의 확고한 입장을 누그러뜨려서는 안 될 것임.》

    전두환의 방미 대가는 컸다. 스미스소니언 학회에 주기로 한 기부금 100만 달러도 헤이그가 공식회담 자리에서 직접 감사를 표할 만큼 파격적인 거금이었다. 방미 후 미국이 추진한 대한국 후속조치들을 보면 전두환이 워싱턴에 풀어놓은 ‘보따리’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다음은 2월6일 국무부 동아시아담당 부차관보 마이클 아마코스트가 헤이그 국무장관에게 제출한 조치 각서(2급 비밀) 가운데 주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와 관련, 몇 가지 취할 조치들은 다음과 같음.

    -F-16 전투기 판매 : 한국이 F-16 구입을 희망한 것과 관련, 주한 미 대사관에 이를 확인할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작성해 발송하는 작업을 국방부와 협의중임.

    -개량형 호크 미사일 대대 : 합참의장 베시 장군은 미 육군이 한국의 개량형 호크 미사일 병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결정했음. 우선 필요한 미사일 대대병력 관련 사항을 존 위컴 미 8군 사령관과 상의하고 있으며, 병력이 사실상 철수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의회에 통보할 필요는 없음.

    -쌀 : 한국 정부는 전두환 대통령이 워싱턴에 도착하기 전날 밤, 미국산 쌀을 추가 구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음. 이 쌀 추가 구입이 성사될 경우 지난해 가을 한국이 약속했던 미국산 쌀 구매 이상의 효과를 낳게 됨.》

    美의 신군부 혐오감과 전두환 길들이기

    전두환은 워싱턴을 다녀온 후 3월3일 12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1988년 2월 퇴임했다. 1980년 9월1일 11대 대통령 취임 때부터 따지면 재임기간은 7년5개월이다. 전두환에게 ‘백악관 친구’를 두게 해준 레이건의 재임 시기도 비슷하다. 레이건은 영면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고향 도서관에 ‘영웅’의 이름으로 묻혔고, 정치인으로서 미 정치사와 세계사에 굵직한 한 획을 그었다. 비록 획의 모양새 평가에는 이론이 있을지라도.

    한국 언론의 표현대로 서로 ‘의기투합’했다던 레이건이 전두환을 ‘청와대 친구’로 끝까지 기억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퇴임 후 산사에 유폐되다시피 했고,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섰으며, 가재도구를 경매해 법정 추징 미납금을 마련해야 했던 한국의 이 전직 대통령과 레이건의 퇴임 후 행적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한국의 1980년대 현대사는 전두환 정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미 국무부의 한 문서는 ‘전두환의 집권 야망은 집요했고, 권력에 이르는 길은 짧았다’고 표현했다. 전두환의 집권과정을 보면 크게 두 갈래의 투쟁이 있었다. 하나는 국내의 반대파였고, 또 하나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눈에 비친 전두환의 싸움은 ‘신사적인 게임’이 아니었다. 미국은 이에 대해 곤혹스러워했고, 때로는 황당해했으며, 신군부에 대한 혐오감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가 곧 미국이었고 전두환이 곧 신군부였다. 당연히 신군부와 미국의 샅바싸움은 전두환과 글라이스틴의 신경전으로 나타났다. 글라이스틴도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의 이름으로 함구하고 있다. 글라이스틴은 비망록이라도 남겼으나, 전두환 전직 대통령이 입을 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전두환과 글라이스틴의 신경전은 광주사태 이후 최고조에 달한다. 어쩌면 전두환이 무대접을 감수하면서까지 레이건이라는 ‘백악관 친구’를 두고 싶어했던 것은 박정희 시해사건 이후 12·12와 광주를 거치면서 미국으로부터 큰 정치적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광주 이후 전두환이 ‘장군’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본다. 이는 정치인 전두환이 겪었던 ‘90일간의 미국 수난사’이며, 워싱턴의 ‘전두환 길들이기 약사’이기도 하다.

    1980년 6월에도 광주사태의 여진은 가라앉지 않았다. 미국의 고민도 계속되었다. 특히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로서는 ‘광주 이후’가 더 걱정거리였다. 광주 이후의 미국은 신군부를 도와 광주 유혈사태에 개입한 ‘방조자’이거나, 최소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모른 척한 ‘방관자’로 비쳐졌다. 심지어 사태를 부추긴 ‘선동자’라는 눈총까지 받고 있었다. 광주 지역의 일부 미국인들도 그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비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글라이스틴은 신군부의 일방통행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으면서, 반미 감정을 가라앉히고, 한국 국민에게 미국의 명확한 입장을 전달해야 하는 삼중의 부담을 안고 있었다. 전두환은 글라이스틴의 이런 고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전에 치밀하게 짠 각본에 따라 자신에 차서 거침없이 움직였다.

    5월31일,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간판을 걸고 전두환이 국보위 위원장이 되었다. 이제 신군부는 최규하 정부의 막후 조종자에 그치지 않고 전면에 나선 것이다. 같은 날, 계엄사령부는 광주사태 사망자 수가 170명이며, 1740명을 검거해 730명을 조사중이라고 발표했다.

    “전두환이 불쾌해할수록 더 좋다”

    이날 글라이스틴 대사는 59행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전문을 자신이 직접 작성해 워싱턴의 미 국무부에 타전했다. 여기에는 ‘한국 관련, 미 입장 직접 공개표명 위해 계속 싸우기(Fighting to Keep the U.S. Public Record Straight in Korea)’라는 이례적인 제목이 붙어 있다. 12·12나 광주사태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도 워싱턴에 보내는 전문 제목에 ‘fighting’ 같은 자극적인 단어는 잘 쓰지 않았을 뿐더러 단어 하나도 신중하게 골라 쓰는 편이었던 글라이스틴 대사가 ‘(신군부를 상대로) 계속 싸워야 한다’는 강한 표현을 쓴 것만 봐도 당시 그의 고민의 강도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77년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국무부의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를 맡아왔던 리처드 홀부르크, 같은 동아태국의 마이클 아마코스트, 한국과의 로버트 리치 등 세 사람 앞으로 보낸 이 전문에서 글라이스틴은 먼저 광주 이후의 한국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너무 많은 한국인들과 (광주)지역의 미국인들은, 미국이 광주에서 보여준 한국 정부의 거친 행동을 너그럽게 봐줬으며 심지어 부추겼다고 믿고 있음. 이런 오해는 광주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병력 이동을 우리가 묵인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증폭되었음.》

    글라이스틴은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방책으로 워싱턴에 두 가지 제안을 한다.

    《이런 상황은 본인이 한국에 부임한 이후 처음 겪는 일로, 한국 국민들과 실제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음. 그러나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음.

    하나는 카터 대통령과 머스키 장관, 국무부 대변인이 최근 발표한 공식 성명서들을 한데 묶어 (서울에서) 한국어와 영어로 언론에 배포하는 것임. 실제로 전달이 될지는 의문이지만 가능한 한 많은 한국 국민에게 그 성명서들을 배포할 것임. 또한 주한 미 대사관 명의의 표지를 붙여 지방의 미국인들에게도 발송할 것이며, 홍보효과를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주한미군 방송(AFKN)을 통해서도 성명서를 발표할 것임. 전두환 장군이 불쾌해하긴 하겠지만, 불쾌해하면 할수록 더 좋음.

    또 하나는 의회를 활용하는 것으로, 이 전문 수신인 3인 가운데 한 사람이 처음으로 상·하원 동아태 소위에 출석해 증언하는 것을 워싱턴이 고려해볼 것을 제안하는 바임. 의회 출석 증언은 우리의 공식 입장을 제도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적어도 광주사태와 우리의 관계를 우리 국민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수단이 될 것임. 의회 증언이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적극 고려해 볼 것을 요망함.》

    국무부는 글라이스틴의 의회 출석 증언 제안을 받아들였고 의회를 상대로 소위원회 개최문제를 협의했다. 국무부의 마이클 아마코스트가 미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 소위원회에 출석해 증언한 것은 글라이스틴의 제안 전문을 받고 25일째 되던 6월25일이었다. 현지 공관인 주한 미 대사관과 국무부, 미 의회가 미 국익 보호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결과였다.

    위 전문은 미국의 ‘광주 이후 고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광주와 관련해 ‘왜곡’되어 있는 미국의 입장을 바로잡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 신군부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전두환의 집권 야망을 꺾으려는 의도는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12·12 이후 워싱턴의 일관된 태도이기도 했다. 적어도 신군부가 미 국익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집단은 아니라는 판단이 서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개발은행 이사회 불참 통보

    전두환에 대한 워싱턴의 기본적인 시각은 불쾌감이었다. 신군부 등장 이후 워싱턴과 서울 사이를 오간 수많은 전문에서 한반도 안보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문서가 거의 없을 정도로 안보는 한·미간 현안이긴 했지만, 워싱턴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정작 한국의 불투명한 정치상황이었다. 신군부가 워싱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고삐’가 필요했다.

    크리스토퍼 국무차관이 글라이스틴 대사 앞으로 발송한 6월20일자 전문은 워싱턴이 가지고 있었던 신군부 견제 수단들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제목 : 아시아개발은행의 대한국 차관 토의 이사회에 미국 불참

    1. 전체 전문

    2. 재무부 장관이 별도의 전문을 통해, 한국 인천항 제2 부두 개발 차관금 5400만달러 제공 건을 토의할 6월24일의 아시아개발은행(ADB) 이사회에 불참할 것을 아시아개발은행 미국측 디렉터에게 지시할 것임. 미국의 불참 의미를 한국 정부가 확실히 인지하도록 하기 위해 아시아개발은행 회의 개최 이전에 한국 고위급 인사에게 미 대표 불참 사실을 설명해야 할 것임. 따라서 주한 미 대사는 아래 사항을 전달받을 적절한 한국측 고위급 인사와의 회동 약속을 사전에 해야 할 것임.

    3. 최근 한국에서 전개된 정치상황, 특히 계엄령 전국 확대와 정치지도자 구속, 정치 자유화 개입 및 민간 정부에 대한 군부의 통제 확대 등에 비추어볼 때, 미국은 6월24일에 열릴 아시아개발은행 이사회 회의에 불참할 것임. 이런 조치는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우리의 실망감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돼야 함.

    이곳 주미 일본 대사관에도 이미 통보를 했으며, 한국 정부에 통보하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공표하지 말 것을 일본측에 요청했음.》

    아시아개발은행 이사회 건을 한국 정부보다 먼저 일본 정부에 통보한 것은 아시아개발은행에 대한 일본의 막대한 영향력을 감안한 것으로 보이며, 이 전문 수신 참조란에는 주일 미 대사관에 우선 타전되었다는 것과, 아시아개발은행 본부가 있는 마닐라의 주 필리핀 미 대사관으로도 발송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봐 주한 미 대사관에 앞서 주일 미 대사관에 이사회 불참 건을 먼저 타전했음을 알 수 있다.

    전두환, 정권 승인 대가로 美에 핵포기, 전투기 구매 약속

    전두환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대가로 F-16 구입을 약속했다.

    ADB 차관 건은 워싱턴이 신군부를 견제할 수 있는 여러 고삐 가운데 하나였다. 국무부 동아태국 한국과의 로버트 리치가 매주 작성해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 홀부르크에게 보고한 ‘주간 상황 보고서-한국’ 문서 6월28일자만 봐도 국무부 한국과 담당자들이 작성한 10여건의 한·미간 현안이 간단한 배경 설명과 함께 명시되어 있다.

    ‘미 에너지부의 한국 프로그램 무산 위기, 한국 정치인 추가구속 및 김종필 공화당 총재 사임, 북한 괴선박 서해안에서 침몰, 한국 종교계 및 재야인사 접촉, 남북 대화채널 유지, 한·미간 미사일 개발협력, 전투기 판매(FX)여부 검토, 유엔의 한국 문제’ 등이 그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미간 외교 현안들이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워싱턴이 유리한 입장에서 신군부를 견제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신군부 존립근거 뒤흔드는 모험은 안해

    다음은 이 현안들 가운데 한·미간 미사일 개발 협력과 한국의 FX 사업권 참여 여부 검토 항목을 옮긴 것이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해 미국과 거래를 해야 하는 신군부의 입장이나 신군부를 입맛에 맞게 견제해야 하는 워싱턴 입장에서 볼 때 이 군비 증강 문제야말로 굵직한 현안이 아닐 수 없었다.

    《한·미간 미사일 개발 협조 :

    국방부는 한국과의 지대지 미사일 개발 협력 건 추진을 위한 부처간 연석회의를 다음주에 소집했음. 이 회의에서 토의될 내용은 다음 세 가지임. (1)어니스트 존(HJ)과 나이키 허큘리스(NH) 미사일의 대한국 직접 판매 (2)한·미간 미사일 연구에서 확인된 연성 목표물에 대한 효율성 제고를 위해 어니스트 존 및 나이키 허큘리스의 분열 탄두 및 근접 도화선 공동 개발 (3)한국 정부가 추진중인 한국형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의 초기 20기 제작과 관련된 협력. (2)(3)번 항목의 두 프로그램은 무기 이전 정책(ATP, Arms Transfer Policy)에 위배되는 것으로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야 하는 것임. (1)번 항목은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 없으나 한국 정부가 큰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음. 현 단계에서 우리의 입장은 (1)(2)의 프로그램 추진을 지지하는 것이며 (3)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는 것임. 자세한 자문을 얻은 후 확고한 권고안을 선택할 것임.

    전투기 판매(FX)

    크리스토퍼 국무차관은 전투기 구입 경매 20개국 명단에 한국을 포함시킬지 여부를 결정하는 부처간 연석회의를 연기했음. 국무부의 군비통제 및 군축국(ACDA)은 역설적으로 군비 통제 차원이 아닌 정치적 고려 차원에서 한국이 포함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음. 동아태국은 한국 시장이 포함되는 것을 선호하므로, 다음 2주 동안에 한국이 포함되는 쪽으로 결정이 나기를 기대하고 있음.》

    전투기 판매 건과 관련, 한국은 7월초 판매국 명단에 포함된다. 크리스토퍼 차관이 부처간 연석회의에서 이 문제를 재론하도록 니메츠 차관보에게 지시했고, 7월3일 니메츠 차관보는 미국의 전투기 생산업체가 한국과 상담을 할 수 있도록 승인한 것이다.

    워싱턴은 신군부의 존립 근거를 뒤흔드는 모험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신군부 리더인 전두환의 집권 야망을 꺾어 보려는 노력도 물론 하지 않았다. 한국 국내 상황에 관한 한 미국의 입장은 지켜본다는 것이었다. 즉 미국이 설정해놓은 큰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한국 일은 한국인의 손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굴러가는지 지켜보겠다’는 미국의 이런 입장은 ‘우려한다’ ‘기대한다’ ‘희망한다’ ‘좋은 결과가 나오기 바란다’와 같은 완곡한 외교 수사로 포장되었으나, 정작 미국과 신군부는 동원 가능한 모든 인맥을 통해 직간접으로 서로의 의중을 탐색하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광주사태 이후 신군부와 새로운 게임에 돌입한 1980년 5월 말에서부터 전두환이 한국의 11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들어간 8월27일까지 3개월 동안 서울에서 워싱턴으로 타전된 주한 미 대사관 전문의 대부분이 ‘배포금지(NODIS, No Distribution)’라는 기밀 등급으로 분류되어 있었던 것만 봐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던 한국 국내 상황 전개에 미국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배포금지’라는 기밀 등급에 속하는 문서는 정치 참사관 등 주한 미 대사관 소속 외교 관리가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글라이스틴 대사 본인이 직접 작성해 국무부로 보내는 문서이며, 국무부 행정 차관(Executive Secretary)의 허락 없이는 복사본을 만들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워싱턴 휴가를 끝내고 서울로 복귀한 글라이스틴 대사가 7월2일에 작성 보고한 NODIS 문서는 위컴 장군이 마련한 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육참총장, 문형태 국회 국방위원장 등과 나눈 얘기를 담고 있다. 미국과 신군부의 신경전이 펼쳐진 현장 보고서다. 다음은 문서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대화록이다.

    《6월30일 저녁, 위컴 장군이 마련한 식사 자리에서 한국 상황에 대한 머스키 국무장관의 입장을 전하자 주영복 국방장관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음. 이희성 육군참모총장과 문형태 국회 국방위원장, 마이어 장군과 위컴 장군이 나중에 우리 대화 자리에 합석했음. 머스키 장관은 만약 한국의 새 정권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경우 한·미 관계가 위태로워질 것으로 보고 있으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내 정치 일정을 신뢰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말을 전했음.

    주영복 : 미국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글라이스틴 :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합당한 정치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직 한국 국민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영복 : 미국은 한국이 어떤 쪽으로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드렸다.

    글라이스틴 : 한국 국민들은 장기적으로 새 정부가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정부인지, 지금보다 정치적으로 더 융통성이 있는 정부인지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주영복 : 최규하 대통령이 약속한 정치 일정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글라이스틴 : 정치일정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헌법이 채택될 것인지, 어떤 조건에서 그 헌법을 통과시킬 것인지, 그 헌법하에서 어떤 형태의 정부가 출범할 것인지 등에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계엄령하에서 국민투표를 진행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워싱턴의 입장을 신군부측에 충실히 전달해야 할 뿐 아니라 신군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워싱턴에 정확하게 보고해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머스키 국무장관이 7월2일자 NODIS 문서를 통해 전두환 장군을 만나 분명히 전하라면서 명시한 두 가지 지시사항을 이행할 사람도 글라이스틴 대사였고, 7월3일 박동진 외무장관의 개인면담 요청에 따라 사석에서 단둘이 나눈 대화내용을 워싱턴에 타전할 사람도 글라이스틴 대사였다.

    그러나 글라이스틴의 전두환 견제도 8월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전두환의 집권은 기정사실화되었고, 그 첫 신호는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였다.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기 이틀 전인 8월14일 미 대사관이 워싱턴에 타전한 NODIS 문서에는 ‘한국 대통령직 교체(Korea Focus: Change in the Presidency)’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이 문서에는 지금까지 미 국무부가 모든 문서에서 ‘전두환’ 또는 ‘전 장군’으로 표현해왔던 인물에 대한 예우 문제를 언급한 부분이 들어 있다. 전두환은 13일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한국의 11대 대통령에 당선될 사람이었다.

    전(전두환)은 ‘합법적’으로 선출될 것이므로 우리는 그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최소한의 정상적인 예우를 해야 할 것임(treat him with at least the minimum normal courtes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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