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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환의 문화오디세이 ⑦

1920년대 자살 급증, 오늘날과 닮은꼴

분에 못이겨 목매고, 가난이 고달파 동반자살

  • 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eutekom@hanmir.com

1920년대 자살 급증, 오늘날과 닮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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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자살 급증, 오늘날과 닮은꼴

구한말 망국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이준, 민영환, 박승환, 황현 열사(왼쪽부터).

이 시기 ‘독립신문’의 자살 보도기사를 보면 특징적 표현이 눈에 띈다. 신문은 자살 동기를 설명하면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라는 문장을 관용구처럼 사용한다. 1896년 8월 남편이 송사 끝에 감옥에 갇히자 부인이 소송 상대방에게 소를 중단해줄 것을 하소연했다가 모욕을 당하자 ‘분함을 못 이겨’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띄골 김성삼의 아내가 부부싸움 끝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우물에 빠져 죽었고, 1897년 2월에는 마포 공덕리에 살던 부부가 싸움을 한 후 남편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불을 질러 자살을 기도했다. ‘독립신문’에서 자살은 곧 ‘분사(憤死)’였다.

실제로 1890년대의 조선에선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많았다. 조선 후기, 혹은 근대 초기 한국인은 그만큼 개인의 명예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반증이다. 명예를 회복하거나 분노를 표현하는 다른 길이 없을 때 택하는 방법이 자살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살은 스스로 계획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힘에 떠밀린 수동적인 형태의 자살이다.

독립신문 기사에선 자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드러난다. 실제로 자살자들이 ‘분을 못 이겨’ 자살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신문은 관용적으로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라고 썼다. 당시 한국인들은 자살을 ‘분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로 정의내리고 있었다.

한일합방 직후 27명 자결

지금은 ‘분사’라는 말 자체가 잘 쓰이지 않지만, 분사는 사실 정치적인 의미를 진하게 담고 있는 용어다. 한국사에서 정치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자살 사건은 모두 분사의 일종이었다. 특히 1905~10년에 이르는 동안, 애국애족 차원의 자살, 즉 분사한 ‘지사(志士)’들이 많았다. 이준, 민영환, 박승환, 황현 같은 사회 지도자급 인사들이 조선과 함께 분사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민족적 각성과 연결시키려 했고 실제로 일정 정도의 반향을 얻었다.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通史)’에 의하면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비는 전국적으로 27~28명에 이르고 있다.

1907년 6월30일에 발생한 정재홍의 자살사건은 당시 분사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외국에 갔다가 귀국한 금릉위(영혜옹주의 남편) 박영효를 환영하기 위해 전직 고관대작 부부가 모인 공개석상에서 정재홍이라는 청년이 육혈포, 즉 권총으로 자신의 배를 쏘았다. 다행히 즉사하지 않아 정재홍은 곧 병원에 옮겨졌다. 박영효가 보낸 위문 사자 앞에서 그는 ‘내 평생 나라 근심하던 뜻과 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사오니 원하건대 대감께서는 나라 일을 더욱 담착하야 신명을 아끼지 마시고 국권을 회복하며 창생을 구제하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고 절명했다.

사람들은 정씨의 시신을 남소동(지금의 장충단공원 근처) 그의 자택으로 옮겨갔다. 당시 신문은 “정씨 모친이 슬피 울며 말하기를 ‘이 자식이 살아서 능히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우지 못하고 졸지에 나를 버리고 죽었으니 그 시체를 볼기 치는 것이 가하다’ 하였더라”고 보도했다.

1970~80년대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서 나타난 자살도 분사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태일을 비롯해 김상진·김경숙·김세진·이재호·조성만 등의 젊은이들은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며 목숨을 버렸고, 1990년대 이후에도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분신 자살을 택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국의 자살자는 주로 우물에 뛰어들거나 서까래나 집 근처의 나무에 목을 매는 방식으로 자살했다. 특이한 사실은 양귀비 열매로 만드는 마약의 일종인 아편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다.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1909년 6월에 자살한 김씨와 박씨는 각각 아편을 과다복용하여 죽었다. 같은 해 6월26일 ‘대한매일신보’는 “근래 한국인이 아편을 먹고 자폐하는 자가 종종 많은지라 인명의 손해가 적지 아니하므로 아편 매매를 엄금할 차로 청나라 당국자와 교섭한다더라”고 보도했다.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아편은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져 극약으로도 이용되었던 것이다.

1920년대에도 ‘한강 투신’ 유행

한국인의 자살에서 사실 가장 주목해야할 유형은 생계형 자살이다. ‘생계형 자살’은 자살이되 자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생의 막바지에 내몰린 사회 시스템의 낙오자, 부적응자들이 선택하는 극한의 행위다. 그래서 ‘생계형 자살’은 사회적 타살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7년에 가난한 늙은 가죽신장이가 관에서 부과한 벌금을 갚지 못해 고민하다가 홰나무에 목매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빚 고민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가는 힘을 가진 모양이다.

자본주의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했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한국 땅에 도입되던 1920년대에도, 또 전쟁으로 피폐해진 땅에 건설과 개발 붐이 일던 1960년대에도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의 발전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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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eutekom@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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